본문 바로가기

2010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시네토크

“이상한 마력이 있는 영화이다”

오승욱 감독이 추천한 <트로츠키의 암살> 시네토크

오승욱 감독의 추천작 <트로츠키의 암살> 상영 후 시네토크가 진행되었던 지난 1월 29일, 시네마테크를 지키기 위한 관객 스스로의 후원운동도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오승욱 감독은 시네마테크의 이름이 아닌, 지금까지 이어져온 어떤 정신과 친구가 되었다 생각한다며, 관객들 스스로 그 정신을 지켜가기 위해 움직여가는 모습에 감사와 지지를 보냈다. 시네마테크, 그리고 오승욱 감독이 전하는 이상하고 매혹적인 영화 <트로츠키의 암살>에 대해 나눈 관객과의 대화 일부를 옮겨본다.


 

오승욱(영화감독): 영화에 대해서 얘기하기 이전에 시네마테크의 이 상황에 대해 오승욱 개인으로서 한마디 하고 싶다. 공모제를 한다는 것이, 지금의 상황에서 더 좋게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지 진정 모르겠다. 문제의 본질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겠다. 시네마테크라는 것은 어떤 정신, 생각들이라고 본다. 제가 ‘시네마테크의 친구 된 것은 이곳을 운영하고 프로그램을 만들고 관객들과 같이 볼 영화를 고민해왔던, 시네마테크 사람들의 정신과 친구가 된 것이다. 그런데 이곳의 껍데기만 남고, 다른 무엇으로 바뀌거나 대체된다는 것은 굉장히 불쾌하게 생각한다. 저는 시네마테크의 이름, 단순히 어떤 건물과 친구가 된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곳이 운영되어 온 정신과 친구가 된 것이라 생각하고, 그것이 훼손된 것에 대해 굉장히 불쾌해했지만, 감독으로서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었다. 그런데 오늘 보니 희망이 보인다. 방법이 생겼구나 싶다. 관객들 스스로의 의지로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할 것인가에 대한 돌파구를 만들어주셨으니 말이다. 그런 점에서 관객 분들께 정말 감사드린다. 이것이 하나의 돌파구가 되어 자본에 의해서 정신이 훼손되거나 좌지우지 되지 않을 어떤 기회를 만들어 준 것 같아 감사하다. 시네마테크가 지녀왔던 정신, 생각들을 의연히 지켜나가고, 관객 분들과 소통할 수 있도록 관객 여러분들만큼 저도 노력하겠다. 이게 제가 드리고 싶은 이야기이었습니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 저희들이 굴복당하지 않게끔 나셔주셨으면 합니다. 한번 무너지면 그 다음에 할 이유가 없는 게 맞는 것 같다. 어느 나라나 한 번은 나서야 될 때가 있다. 영화를 아시는 분이라면 아실 것 같다. 굴종을 참으라고 얘기하도록 말하는 상황을 만들어주시지 않았으면 좋겠다. 푸코가 말했듯, 지금은 사회가 방어를 해야 할 상황입니다.

 

시네마테크의 이름이 아니라 사람들, 정신과 친구가 된 것


 

김성욱: 이제 영화 얘기로 들어가서 오승욱 감독님께서 이 영화를 추천해주셨는데, 처음에 이 영화를 보셨을 때랑 지금 다시 본 느낌이 어떠신지 궁금하다.

오승욱: 이 영화를 처음 알게 된 건 옛날 일본의 『스크린』에서 영화 포스터 특집기사에 실린 포스터를 통해서였다. 알랭 들롱 주연의 포스터들을 소개되었는데, 그 중 하나가 눈에 띄었다. <암살자의 멜로디>라는 제목이었다. 세 인물의 얼굴이 담긴 포스터였는데, 제목부터도 호기심이 생겼다. 한국에서 개봉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 나서 90년대에 NHK 방송을 통해 이 영화를 처음 봤다. 암살자를 다루는 보통의 영화들과는 내용이 좀 다르다. 감정 이입을 인물이 없고, 킬러의 내면이나 살인의 동기들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 영화를 다 보고 나서 계속 뇌리에 남는 건, 로미 슈나이더, 알랭 들롱, 그리고 리처드 버튼이 연기한 트로츠키의 이상한 감정들이었다. 그리고 나서 십년 후에 DVD로 이 영화를 다시 봤는데, 제일 재밌게 봤던 건 로미 슈나이더와 알랭들롱의 관계였다. 예전엔 제 기억에 로미 슈나이더가 알랭 들롱을 때리는 장면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그런 장면은 없었다.(웃음) 둘이 함께 있는 장면에서의 감정이나 관계가 격렬하면서도 이상하게 그려진다. 이 영화가 조셉 로지의 걸작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재밌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남성들이 굉장히 히스테리컬하다. 트로츠키가 하는 행동이나 말들도 그렇다. 계속 자신의 이야기를 녹음기에 대고 하면서, 링컨같이 되고 싶다고 하는 말이나, 자신의 말은 앞문으로 빠져나가 전 세계를 돌아 뒷문으로 들어온다고 말하는 것처럼 이상한 과대망상도 보인다. 알랭 들롱의 캐릭터도 분명히 잡히지 않는다. 그가 보이는 강박적이면서 히스테리에 휩싸인 모습들이 이 시대의 뭔가 히스테리컬한 남성의 모습을 보여준다. 반면에 로미 슈나이더는 그 히스테리컬한 남성들에게 이용당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녀는 격렬해 보이긴 해도 다른 남성들에 비하면 비교적 제정신인 것 같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영화를 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영화를 보다보면 자꾸 조셉 로지란 사람이 생각나게 된다. 조셉 로지는 사실 매카시 광풍에 의해 미국에서 쫓겨나 유럽에서 살면서, 네 개의 이름을 가지게 된 사람이었다. 이 영화에서 알랭 들롱은 자신이 벨기에인이라고도 했다가 캐나다인이라고도 한다. 그의 모습을 보면서 조셉 로지의 처지가 자꾸 떠오르게 된다. 그리고 영화를 보면서 작년에 우리나라에서 있었던 일들, 그리고 김구의 암살과 같은 역사적 사건들이 연결되기도 한다. 알랭 들롱은 어떤 신념을 가진 사람이 아니다. 그가 붙잡히면서 어머니 얘기를 꺼내는 장면에서는, 비겁하고 소심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마지막에 ‘나는 트로츠키를 죽였다’고 말하기도 한다. 종잡을 수 없는 인물이다. 결국 아무것도 아닌 인간이다. 아무것도 아닌 인간들이 뭔가 시나리오를 만들고 일을 꾸미고 작당을 하면 꼭 어떤 일들이 벌어진다. 사실 이 영화가 썩 재밌는 영화가 아니다. 누구의 이야기를 따라가야 할지 감정선을 제시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알 수 없지만 흥미 있게 느껴지는 부분들이 있다. 영화 초반부에 멕시코 화가, 시케이로스를 굉장히 많이 보여준다. 실제 역사적으로도 그는 트로츠키의 암살에 연관이 되어있는 사람이다. 그가 조직을 해서 암살을 공모하는 장면이 있는데, 굉장히 미숙하고 허술한 모습으로 그린다. 알랭 들롱도 마찬가지로 굉장히 허술한 사람이다. 그렇게 허술하고 상당히 보잘것없는 그런 사람들이 일을 꾸민다는 것, 그들의 이상한 허세와 강박들이 인상적이다. 정확하게 어떤 해석을 내리기는 어려운 영화 같다. 조셉 로지는 평소에, 어떤 사건들과 이야기의 결들이 따로따로 놀다가 어느 한 지점에 합쳐질 때 느껴지는 힘들을 즐긴다고 했었는데, 이 영화에서도 그런 점이 느껴진다.

 

김성욱: 이 영화는 수수께끼 같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에 벽화가 많이 등장하는데, 종종 벽화의 특정 장면들이 클로즈업되어 보여 진다. 그리고 영화에서 어느 순간 갑자기 정지해, 스틸사진처럼 보여주는 장면들이 있는데, 마치 벽화의 배경을 이루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현실의 어떤 사건이 멕시코의 뒷 배경을 이루고 있었던 어떤 벽화처럼 그려지는 것 같다. 도끼로 트로츠키를 내리치는 순간 장면이 정지되는데, 그 뒤를 이어 트로츠키나 알랭 들롱이 굉장히 고함을 치고 소리 지른다. 정지된 사진 혹은 벽화 같은 것은 소리가 없는 이미지인데, 왜 정지된 스틸 사진과 같은 장면들을 구성했을까 싶기도 하고, 그리고 그것과 대비되는 고함소리가 묘한 효과를 주는 것 같다. 또 영화는 잭과 트로츠키, 두 인물을 중심으로 설정되면서, 인물의 문제로 받아들이게 되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트로츠키는 누구인가’라는 질문, 다른 한편으로는 ‘암살자는 누구인가’하는 질문이 생긴다. 그것이 최종적 순간에 합의를 보게 되는 건 결국 ‘그는 트로츠키를 죽인 사람이다’이다. ‘그’를 정의하는 것은 ‘트로츠키를 죽였다’는 사실이다. 이런 방식으로 인물의 정체성을 만드는 것이 영화 중간중간에 등장하는 과도한 거울 장면의 사용 등을 통해서도 드러나는 듯하다.

오승욱: 이 영화는 역사적 사건 그 자체를 다룬다기보다, 굉장히 얄팍한 사건과 얄팍한 인물들을 그린다. 개인적으로 암살자와 관련된 이야기에 흥미를 느끼고 그런 이야기로 영화를 만들어보고 싶기도 해서, 자료들을 찾아보곤 했다. 공통적으로 암살되는 대상들은 허세일 수도 있는, 굉장히 얄팍한 어떤 모습을 갖고 있다. 그런 점들이 이 영화에서 얘기하려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김성욱: 이 영화의 제목이 일본에서 <암살자의 멜로디>라는 제목으로 소개되었던 것은, 아마도 <순응자>의 번역 제목이 <암살자의 숲>이어서 그렇게 이어지는 것 같다. 두 영화에는 연결 지점, 비교 가능한 지점들이 있다.

 

올 여름 시네바캉스에서는 알드리치의 <피닉스>를 함께 보고 싶다!



 

관객1: 이 영화는 우리나라에서 개봉된 적이 없다. 트로츠키의 암살이라는 역사적 사건에 관심이 있어 이 영화를 보게 되었는데, 비장한 분위기일 거라는 예상과는 영화가 많이 다른 것 같다. 시네마테크가 사라진다면, <트로츠키의 암살>같은 영화를 앞으로 볼 수 있을까. 우리도 힘을 모아서 움직여야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관객2: 오승욱 감독님이 추천하셔서, 인과관계가 탄탄한 영화를 상상했는데, 아니었다. (웃음) 영화적 형식이 인상 깊다. 말씀하신 것처럼 <순응자>가 떠오를 정도로, 촬영과 편집, 미장센이 특이하다. 투우하는 모습과 알랭 들롱의 모습을 연결시키는 방식, 트로츠키의 요새를 표현하는 방식, 노이즈에 가까운 과잉된 음악사용, 갑자기 정지되는 화면 등이 눈에 띈다.

오승욱: 조셉 로지의 연출에 대해 김영진 씨가 말한 것이 있다. ‘이상하지만 매혹적인 알레고리를 갖고 있는데, 영화를 보고 난 뒤에도 쉽게 잊혀지지 않는 끈적끈적한 알레고리의 그물을 갖고 있다’고 한 부분에 동의한다. 이 영화만 봐도 굉장히 건조하게 찍힌 영화 같지만, 굉장히 뭔가 촉감적으로 이상한 부분이 있고, 끈적끈적한 것들이 있다. 형식적인 면에 있어서 이 영화는 어떤 부부에서는 과잉되고, 촌스럽다고 느끼는 부분이 있으면서도, 투우장면 처럼 강렬하게 인상적인 장면들도 있다. 쇼트와 쇼트를 붙이는 과정이 굉장히 울퉁불퉁하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투우장면과 알랭 들롱을 연결시켜 파워풀한 힘을 발생시키기도 하고, 저처럼 영화에 없는 장면까지 기억할 정도로 영화를 확장시켜 생각하게 할 정도로, 어떤 매력을 갖고 있다. 조셉 로지는 에이젠슈테인에게 영화를 배웠고, 브레히트의 영향을 받긴 했어도, <하인>만 해도 이 영화와는 느낌이 좀 다르지 않나. 이 영화는 아주 작정하고 울퉁불퉁하게 만들어졌고 굉장히 불친절하다. 그런데 굉장히 매혹적이고 이상한 마력을 갖고 있는 것이다. 작년 친구들 영화제에서 제가 선택한 <들판을 달리는 토끼>에 이어 이번 <트로츠키의 암살>이 두 번째 이상한 영화가 된 것 같다. (웃음) 이상한 영화적 경험을 주는 영화라고 생각된다. 이번 친구들 영화제에서 정말 보고 싶었던 영화중에 하나가 로버트 알드리치의 <피닉스>였다. 사막에서 비행기를 타고 멋지게 날아올라 탈출하는 영화이다. 우리가 시네마테크를 지켜내서 여름의 시네바캉스에서 알드리치의 <피닉스>를 함께 꼭 보고 싶다! (정리: 장지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