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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시네토크

아이의 영화, 도피하지 않고 그 안에서 견뎌내는 것

시네마테크의 선택, 찰스 로튼의 <사냥꾼의 밤> 시네토크

1월 26일 저녁, 서울아트시네마에서는 시네마테크의 선택작인 찰스 로튼의 <사냥꾼의 밤>이 시네마테크의 필름 라이브러리로 직접 구매한 뉴 프린트로 선을 보였고, 이어 김성욱 프로그래머와 관객과의 대화가 마련되었다. 김성욱 프로그래머는 “영화의 마지막에 아이들이 자기가 할 수 있는 한계 내에서 무언가를 만들어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는 것처럼, 시네마테크 역시 있는 것 가운데서 조금 포장해 놓은 선물처럼 시네마테크의 선택이라고 내놓았다. 어찌 보면 민망할 수도 있다. 뭐, 저런 게 선택이야 싶지만 크고 대단한 것만이 선물이 아니라 있는 것 중에서 마음으로 전달하는 것이 릴리언 기시의 말대로 최고의 선물일 수 있다 생각한다”고 밝혔다. 현 시네마테크의 상황을 느낄 수 있는, 비장한 심정이 흐르던 김성욱 프로그래머의 시네토크를 현장을 전한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아이들에 대한 것입니다. 사실 이 영화는 아이들을 위한 영화이고, 크리스마스 때 틀면 적합하겠다 싶다. 하지만 다른 측면도 있습니다. 여기서 아이란 예술의 아이들, 즉 예술의 유년성에 대한 것이기도 합니다. 영화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는데, 아이의 영화와 어른의 영화가 있습니다. 아주 초기의 영화는 유년기의 예술이자 아이의 영화와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무언가 새로운 것이 만들어졌던 것입니다. 나중에 영화를 접한 우리들의 경우는 그것이 어른의 예술이라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50년대나 60년대 누벨바그리언들이 시네마테크에서 발견한 영화는 어른의 예술이었습니다. 하워드 혹스나 알프레드 히치콕과 같은. 하지만 어른의 예술 안에서도 예술의 유년성, 유년기를 발견하게 됩니다. 세르주 다네가 시네필에 대해 언급했던 이야기가 생각이 납니다. 그는 아이들이 등장했던 영화들 몇 편을 거론하면서-프리츠 랑의 <문플리트>, 베르히만의 <파니와 알렉산더>- 자신의 어린 시절을 이야기합니다. 어린 시절을 회상해 보면, 언제나 학교에는 이런 애들이 있었습니다. 활발하지도 않고, 두세 명 혹은 혼자 노는 애들말입니다. 그런 애들 중의 대부분이 나중에 시네필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 아이들은 어딘가 도피할 생각도 하지 않았던 아이들입니다. 저 또한 그러한데, 별로 문제를 저지르는 학생은 아니었지만, 혼자 조용히 동네 재개봉관에 가서 영화를 보러 가곤 했습니다. 어디로 도피할 자신도 없었고, 도망갈 생각을 할 만큼 상상력이 풍부하지도 않았고, 그런 가운데 들어갈 법한 곳이 극장이었던 것입니다. 적은 돈으로 오랜 시간을 보낼 수 있던 곳. 그래서 어딘가 도망갈 순 없었던 사람들이 그 안에서 거주하게 되는데, 그 안에서 다른 세상을 발견하게 되고, 그래서 동시에 두 세계에 존재하는 경험을 하게 됐던 것입니다.

 

이 영화에서 아이들은 도피할 것인가의 문제에 처합니다. 릴리언 기시가 예수의 탄생과 아이들을 죽이려고 했던 해롯왕 이야기를 들려줄 때는 도망가야만 했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이 영화의 아이들은 도망갔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보호를 받았습니다. 오히려 도망가듯이 자꾸 빠져나가는 아이는 루비입니다. 다네가 지적한 것도 아마도 그런 부분일 것입니다. 어딘가 도피하지도 못하고, 혹은 더 나이가 든 루비처럼 어른들의 꼬드김에 현혹되기 전 단계의 아이들, 그리고 그 아이들의 감성 안에서 시작되고 형성된 것이 시네필이라는 사람들이 지닌 일종의 모럴리티인 것입니다. 도피하지 않으면서 대신 그 안에서 견뎌나가는 것, 그리고 동시에 두 세계에 거주하는 것. 그것이 시네필의 모럴리티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것이 이 영화에서 어린아이들의 세계와도 연결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기서 아이들을 지키는 어머니역은 릴리언 기시로 그리피스 무성영화에 나왔던 불멸의 스타였던 배우입니다. 이 영화를 하나의 ‘영화에 대한 우화’로서 가정 했을 때, 아이들, 그리고 어른들의 세계, 그리고 루비로 표현되는 청소년기, 즉 무언가에 현혹되어 조금씩 바깥으로 빠져나가려는 그러한 시기의 인물들이 있습니다. 릴리언 기시는 “여자들은 다 저래. 다 속아 넘어가고 그리고 그렇게 해서 낳은 아이들을 내가 데리고 있을 수밖에 없어”라고 자조적이며 단호하게 말합니다. 그런 방식으로 어른에 현혹되어 빠져나가려는 루비가 동네에서 산 것은 '현대 영화'라는 잡지로, 이는 마치 당대의 현대영화 혹은 어른들의 영화라고 포장되어 미숙한 이들을 현혹하고 있었던 세계처럼 보입니다. 그런 어들들의 세계와 대항해나가며 존재하는 사람이 릴리언 기쉬로, 영화의 기원성에 존재했던 여배우입니다. 이 영화에서 매우 독특하다고 느꼈던 것은, 로버트 미첨이 “기대라. 기대라”하는 성가를 부를 때, 릴리언 기시가 총을 들고 지키면서 그 노래를 따라 부르는 순간입니다. 이 장면과 관련해서 마그리트 뒤라스가 언급했던 것처럼 로버트 미첨의 노래 소리는 세이렌의 노래 같은 것으로 사람들을 유혹합니다. 반대로 릴리언 기시는 그 동일한 노래를 부르지만, 그것은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는 공간 내의 아이들을 보호해내는 노래입니다.

 

제가 이 영화를 선택하면서 떠올렸던 것은, 시네필의 모럴리티입니다. 그것은 도피가 아니라는 것. 환상적인 세계로 빠져 돌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또 다른 세계를 꿈꾸는 것입니다. 영화를 보면서, 때가 때인만큼 문득 시네마테크에 대한 생각을 했습니다. 달콤한 목소리로 들어오는 로버트 미첨과 같은 존재가 있고, 그로 인해 떠돌아다니는 아이들처럼 8살 먹은 서울아트시네마는 표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표류하고 있는 것이지, 도망가는 것도 도망갈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아이들은 어른들보다 잘 견뎌내고 참아낸다”라고 이 영화에서 릴리언 기시는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영화에서 보면, 미첨을 때려죽이려고 하고, 교수형에 처하려는 어른들이 있는데, 그런 가운데 굳건히 릴리언 기시가 지켜나가려는 것은 그들과는 다른 모럴리티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아이들을 보호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올해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는 가장 힘들었던 시기에 가장 돈 없이 시작이 되었지만, 우리 안에서 할 수 있는 하나의 선물들을 만들어나가려 했고, 즐겁게 받아들여 주는 관객들의 모습에 기쁨을 느끼기도 합니다. 이게 하나의 선물이었으면 합니다. 

관객1: 로버트 미첨을 보면, 노골적으로 늑대 연기를 하고 있는데, 그게 굉장히 재밌기도 하면서 너무 노골적이라는 생각도 든다. 미첨의 연기에 대해 어찌 생각하시는지.

김성욱: 과장되어 있다는 것은 다들 느낄 것 같다. 그것이 이상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전체가 하나의 동화 같은 이야기 구조를 갖고 있고, 잔혹동화 같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 정도의 과장성은 통용될 수 있고 재미도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영화의 개봉 당시엔 대중들과 비평가들에게 철저하게 외면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화가 너무 한심하고, 톤이 맞지도 않고, 어디서는 다큐멘터리 같고 어디서는 세트에서 너무 과잉적으로 찍었기에 50년대에 만들었을법하지 않다는 거다. 그래서 컬트가 된 영화이기도 하다.

 

관객2: 영화를 보니 <엑소시스트>가 생각났다. 아이가 창문에서 가로등 밑에 서 있는 목사님 같은 장면이나, 아버지가 없는 집에 목사가 찾아오는 것이라는 점에서 유사하다. 또 하나는 영화에 동물들이 많이 나오는데, 동화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동물과 어린 아이들의 유사성을 감독이 영상으로 재현한 것은 아닌가 생각했다.

김성욱: 우화적, 우의적인 장면이 많다. 자연적 요소들을 어떻게 볼 건가와 관련해 이 영화가 어떤 시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지를 생각하게 된다. 이 영화의 전체적 시간 구조는 ‘옛날 옛적에’라는 동화적 시간인데, 그건 또 한편으로 보면 굉장히 고대적이거나 태원적, 시원적인 세계의 시간이다. 거기에 동물이나 자연적인 풍경이 어울리게 표현되어있다. 영화를 보는 자는 성인의 시간 안에 살고 있는데, 동시에 우리 안에 내재되어있는 아이의 시간으로 되돌아가는 것이기도 하다. 직설적인 표현이지만 잃어버린 시간 혹은 되찾은 시간의 느낌이 강하다. 찰스 로튼이 그리피스나 초기 미국 무성영화의 전통을 차용하려 했고, 그중 하나가 릴리언 기시의 등장인데, 그런 방식으로 좀 더 근원적인 시간 안으로 들어간다는 점이 자연적인 세트의 장면들에서 많이 나타나는 것 같다. 많은 영화들에 대한 이 영화의 영향력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대단한 걸작보다도 오히려 이상한 컬트영화라는 점에서 테마와 특정 장면의 순간에 대한 모방이 매우 많았다고 생각된다.

 

관객3: 영화를 보면서, 종교나 기독교를 가지고 양쪽의 상반되는 것들, 반전, 극과 극의 이미지를 처음부터 끝까지 보여준다는 생각을 했다. 릴리언 기시가 총을 들고 흔들의자에 앉아 로버트 미첨과 똑같은 노래를 부를 때. 한쪽이 암전이면 한쪽이 불이 켜지는 등 동일한 것의 양면성이 드러나는 것 같다. 50년대 작품이니까 미국의 매카시 광풍과도 동떨어지지 않은 것 같다.

김성욱: 말씀하신 것은 시대의 흔적인 것 같다. 특히 미첨을 둘러싼 후반부의 에피소드에는 그런 것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릴리언 기시가 노래 부르는 장면은 유명하기도 하고 개인적으로도 흥미롭다. 여기서 어둠이 있어야 바깥에 존재하는 무언가를 응시할 수 있는 구조가 발생된다. 어두움의 조건이라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 다가온 것이 무언지를 볼 수 있는 시선들을 제공하는 거다. 너무 들떠 있는 밝음이라는 것은 자기 주변의 어둠을 제대로 볼 수 없게 하는 현상을 만든다. 영화의 도처에 이런 표현성이 존재하는 것 같다. 영화에는 시대를 은유하는 것이 많이 느껴진다. 동시에 이 영화가 놀랍게도 지금의 시대를 은유하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현명한 게 어떤 건가. 보호 받지 못하는 이 세상 안에서 보호라는 게 도대체 뭔지. 보호받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이 해야 하는 행동들이 무엇인지에 대한 생각이 든다. 
 

 

관객4: 위선적인 말을 하는 로버트 미첨에게서, 지금 현실을 생각하며 분노를 느낀다. 이 영화는 누아르의 요소도 있지만, 동시에 아이들의 성장 영화인 느낌이 든다. 50년대 미국 사회에 앞으로 닥쳐올 수 있는 균열 같은 것을 찰스 로튼이 예감한 것이 아닌가하는 느낌도 있다. 시네마테크가 용기를 냈으면 좋겠고, 어린아이가 참고 견뎌내듯이 능히 우리도 견딜 수 있으리라 본다.

김성욱: 존 카사베츠가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아이들이 10대를 넘겨서도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바라보면서 영화를 만든다고. 근데 10대를 넘기기가 참 어려운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세르주 다네가 시네필에 대해 한 얘기를 짧게 읽으며 자리를 마감하고자 합니다. 

“나는 도망가지 않았다. 우리가 청소년이 됐을 때는 많은 도주하는 방법들이 있다. 환상적인 세계, 공상과학 속으로, 더 나은 세계로 도주할 수도 있었다. 그것이 정치적이든 종교적이든. 그런 유토피아가 있었는데, 그런 것에 나는 관심이 없었다. 왜냐면 나는 어떤 상상력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정말 호감이 있는 좋은 세상을 발견했다. 그리고 나는 거기에 살도록 허락되어 있다는 것이 너무나도 좋다는 것을 발견했다. 거기에 살도록 내버려 두었다. 왜냐하면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거기에서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의 생각은 이러했다. 우리는 이 세계를 가질 것이다. 이 세계에 있지만, 우리는 거기에서 결국은 살 것이다. 그것이 바로 내 시네필의 핵심이었다.” (정리: 박영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