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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시네토크

진정한 몽상가만이 진정한 리얼리스트이다!

이명세 감독이 선택한 오즈 야스지로의 <동경 이야기> 시네토크

날이 풀리는가 싶더니 심상치 않은 바람이 불던 일요일 오후. 3년간 연속 시네마테크의 친구로 활약해 온 이명세 감독이 추천한 영화 <동경이야기>의 상영이 있었다. 이명세 감독은 영화 학교를 만든다면 다섯 명의 감독을 교수로 세우고 싶다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강조해왔다. 그 다섯 명의 명단은 찰리 채플린, 버스터 키튼, 자크 타티, 페데리코 펠리니, 그리고 오즈 야스지로다. 이들의 영화를 본 사람들이라면 오즈의 이름 앞에서 고개를 갸우뚱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명세 감독은 ‘진정한 몽상가만이 진정한 리얼리스트’라는 자신의 지론을 토로하며 왜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를 선택했는지 진지하게 들려주었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 올해 이명세 감독님의 선택작은 평소 존경한다고 얘기한 다섯 명의 감독 중 한 분인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다. 처음에는 <만춘>을 선택했는데 필름 수급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동경 이야기>를 상영하게 됐다. 평소에 이명세 감독님이 오즈 야스지로에 대해 얘기를 많이 했는데, 오즈를 어떤 방식으로 만났는지,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 그 얘기부터 들어보며 시작하겠다.

이명세(영화감독): 오즈를 처음 만난 것은 1986년이었다. 초청을 받아 일본에 가서 <태어나기는 했지만>을 봤는데 그 영화가 너무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두어 편의 무성 영화와 다른 유성 영화를 봤을 때 어떤 느낌이 왔다. 이 분이야말로 영화를 영화로 찍는 감독이라는 느낌. 논리적으로 정리할 수 없지만 시간이 지나서 다시 뉴욕에서 오즈 야스지로 감독전에 갔는데, 그 때 이 분이야말로 영화를 영화로 찍는 감독이라고 다시 생각했다. 오늘도 다시 느꼈는데, 불교의 금강경 1장 1절이 오즈 영화의 핵심이 아닐까라고 생각했다. 부처님이 아침에 일어나서 옷을 입고, 때가 되어 공양을 나가고, 밥을 먹고 돌아와 발을 씻고 자리에 누웠다. 이런 변화 없는 일상이 바로 오즈의 핵심이다. 아시다시피 오즈의 묘비명에는 ‘무(無)’라고 적혀 있다. 하지만 이건 비어 있거나 없는 게 아니라 차있는 것일 수도 있다 생각한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막내딸과 며느리의 이야기가 이 영화의 모든 걸 정리한다. 세상은 흘러가고 변하고, 그렇지만 그대로 있다는 대사 말이다. 중간 중간에 보이는 일상의 인서트 숏은 그대로 똑같이 보인다. 평소와 다른 것이 없는 일상들. 들어오면 양말 벗고, 옷 벗고, 청소하고 하는 이런 변함없는 일상이 우리가 어쩔 수 없이 살아가야 하는 시간들이다. 이 시간들을 정확하게 자르는 것, 이것은 템포의 문제가 아니라 리듬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내재적인 리듬이 몸에 스며들게끔 말이다. 이것이 오즈 영화의 핵심이 아닐까 생각한다.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말씀드리면, 내가 꿈에서 만난 감독이 세 분 있다. 한 분은 오손 웰즈를 동물원에서 봤고, 또 한 분은 나에게 “M” 이라고 적힌 책을 주는 히치콕 감독이다. 그 분은 손만 봤다. 근데 오즈는 집에 놀러 왔었다. 오즈 영화의 한 장면처럼 앉아서 내가 오즈 감독님에게 “저도 오즈 감독님처럼 영화 찍고 싶다”라고 말했더니 “당신은 당신의 길을 걸어라”라고 말씀하셨다(웃음). 그래서 기념해야겠다 싶어서 사인을 받으려고 했는데 벌써 안 계시더라.

 

금강경 1장 같은 일상성이 오즈 영화의 핵심


 

김성욱: 나도 고다르를 꿈에서 본 적이 있다(웃음).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를 보고나면 사실 먹먹해진다. 감독님도 논리적으로 설명하기가 어렵다고 했지만 이게 형식의 힘에서 나오는 건지 아니면 오즈의 정신세계가 이 영화 안에서 구현되기 때문 인지 생각하게 된다. 오늘도 먹먹했던 것이 ‘세상은 원래 그렇게 변하는거야’라는 노리코의 대사를 들을 때였다. 오늘 볼 때는 두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하나는 할머니가 손자에게 “너는 커서 뭐가 될 거니?”라고 물어보는 장면이고, 또 하나는 할머니의 임종 전후에 보여주는 사람이 전혀 없는 무인의 풍경이었다. 감독님은 다시 보니 어떤 장면이 인상적이었나.

이명세: 이번에는 다른 것들이 많이 눈에 걸려들었다. 우에노 공원에서 인물들이 화면 밖으로 빠져나갔다가 우산을 챙기기 위해 돌아오는 사소함 같은 것들. 이게 내가 생각하는 영화의 사소함, 또는 일상성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이 영화가 얼마나 위대한가를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아무것도 아니지만 챙겨가야 하는 사소함 말이다. 사실 영화 내용을 아는 사람으로서는 그 장면을 보면 화가 난다. 어차피 죽고 다 놔두고 가야 하는데 챙긴다. 그런데 이런 게 살아가는 것이다. 아마 젊은 분들 중에서 시간이 지나서 이 영화를 다시 보면 다른 느낌을 갖게 될 것 같다. 이 영화는 시간의 영화이기 때문이다. <동경 이야기>는 시간이 조금 지나서 보면 다른 많은 디테일들이 들어올 것이다. 나도 10년 만에 보니까 오즈의 뻔뻔스러움이 눈에 들어왔다. 이를테면 버스 안에서 사람들이 같이 안 앉고 다 따로 앉는다. 내 생각에는 화면을 따로 잡을 때 그게 편해서 그런 것 같다. 또는 골목에 정종병 세워놓고 하는 것들. 그런 스타일이 참 뻔뻔해서 웃음이 난다. 오즈야말로 형식적인 영화를 만든다고 생각한다.

 

김성욱: 오즈 영화의 핵심은 무성영화가 아닐까란 생각이 든다. 정적인 카메라에 거의 정물 같은 프레임을 유지한다. 움직임이 없기 때문에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답답함을 줄 수도 있는데 방금 언급한 버스 장면만 봐도 인물들은 버스에 앉아 있어서 움직임이 없는데 버스의 진동이 사람들을 움직이게 만든다. 표정 변화도 없이 버스에 앉아있다는 것만으로 발생하는 움직임의 묘미가 있다. 자크 타티의 <플레이 타임>의 버스 장면과 비슷하기도 하다. 실내 공간 안에서 사람들이 얘기를 할 때 거의 의식을 취하듯 움직이지 않는다. 다만 향의 연기, 선풍기의 움직임, 등이 흔들리는 것들 같은 작은 움직임이 이상한 매혹을 준다.

이명세: 개인적으로 오즈의 영화를 배우나 신인감독에게 추천하고 한다. 정확한 내러티브와 연기의 리듬을 배우라는 것이다. 오즈의 완벽주의는 어느 정도냐 하면, 물을 먹고 나면 컵을 여기에 꼭 놔야만 한다. 이런 완벽성 때문에 이마무라 쇼헤이가 도망을 쳤을거다. 우디 알렌도 아침부터 저녁까지 연습하고 실제로 찍는 시간은 짧다고 한다. 이런 연습을 통해서 자연스럽고 보이지 않는 연기를 추구하는 것이다. 보통 연기를 잘 한다고 하면 소리 치고 하는 임팩트 있는 연기를 꼽지만 그런 건 개인적으로 아무나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드러나지 않는 연기야 말로 최고의 연기이고 고수의 경지이다. 최고의 사케맛은 물맛에 가까운 것처럼 말이다.

 

현재성 안에 영원성을 심어 놓는다!

김성욱: 나는 오즈의 영화들을 보편적이거나 고전의 반열에 들어선 과거의 영화들로 생각하지 않는다. 오즈의 핵심은 시대의 현실성이라는 생각이 든다. 미조구치 겐지나 구로사와 아키라와 비교하면 오즈는 당대의 현실, 변화하는 현실을 보여주었다. 노리코의 대사가 보여주듯이 변화할 것이고, 변화됐고, 나도 변화할거다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오즈는 사람들의 풍속을 보여주는 작가로서 뛰어나다는 생각을 한다. 허오 샤오시엔도 오즈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영화인 <카페 뤼미에르>를 만들면서 현실 세계의 변화를 담아내는 것이 중요하단 얘기를 한 적이 있다. 막연하게 오즈를 고전의 반열에서 보편적인 감독으로 받아들이는 것보다 그 영화의 동시대성을 고민하는 게 필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이명세: 뛰어난 영화는 현재성 안에 영원성을 심어 놓는다. 그래서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고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현실을 보여주는 영화는 많지만 영원성 속에서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오즈 감독님을 나중에 만나면 질문하겠지만(웃음), 나는 오즈가 근본적으로 시니컬하다고 생각한다. 아니, 냉소적이라기보다는 일종의 허무주의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 이런 느낌들이 먹먹하게 다가온다. 이런 점에서 오즈의 위대함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관객 1: 나는 부모님이 집으로 돌아갔을 때 영화가 끝나는 것이 맞다 생각했다. 그런데 그 후로도 영화는 계속 진행된다. 감독님은 이 영화의 끝을 어디서 자르는 게 좋다고 생각하시는지.

이명세: 이 영화는 시작과 끝의 공간이 똑같다. 다만 시작할 때는 두 사람으로 시작하고 마지막에는 한 사람으로 끝나는 것이 다르다. <만춘>도 이와 같은 방식이다. 사실 자르는 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대신 감독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저 감독은 어떤 의도로 저기서 끝냈을까를 생각해야 한다. 물론 전보 씬 없어도 된다. 하지만 그 하나하나의 흐름을 감독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 도날드 리치의 책을 읽어보니 오즈는 스토리를 풀어내기 보다는 끊었다고 얘기하더라. 그게 화두다. 왜 안 건너뛰었을까를 생각해야 한다.

 

관객 2: 감독님의 영화를 보면 형식적이고 장치가 많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여러 편을 보면서 생각보다 사실적이라는 생각도 든다. 감독님은 영화를 찍을 때 어떤 걸 중요하게 생각하시는지.

이명세: 질문하신 것은 나의 영화 찍는 원칙이다. 나는 기본적으로 땅에 발이 닿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장대높이뛰기 선수도 장대가 땅에 닿아야 한다. 진정한 리얼리스트만이 꿈을 꿀 수 있다. 그리고 진정한 몽상가만이 진정한 리얼리스트다. 그런데 사람들은 내가 떠있는 것만 본다. 하지만 뜨려면 땅에 발을 붙이고 장대가 땅에 닿아야 한다는 것이 내 상식이다. 나는 영화를 만들 때 현재성 속에 있는 영원성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내가 오즈를 좋아한다. 영화란 것이 예술이라고 했을 때 현실 너머의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런 감독 중에 한 분이 오즈이다.

 

시네마테크는 숨겨진 보물창고

 

김성욱: 오즈는 굉장히 비사실적이고 형식적이고 조형적인 것을 추구한 감독이다. 그런데 그게 어느 경지에 오르게 되면 또 사실적으로 느껴지는 역설적인 작가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시네마테크 전용관 추진위원회의 위원장으로서 시네마테크에 대한 생각을 들려 달라.

이명세: 이렇게 극장에서 동지를 만난다는 게 얼마나 귀한지 모르겠다. 영화를 보는 것은 미사 드리는 것 같기도 하고, 시골장터 같기도 하다. 중요한 건 주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 나는 ‘고전 영화’란 말보다 ‘보물창고’란 말이 좋다. 그래서 많이 보여주고 싶지 않다. 다들 경쟁자인데 어쩔 수 없이 보여주는 거다(웃음). 좋은 영화는 보물찾기처럼 수없이 숨겨져 있다. 여러분들이 영화를 사랑하고 많이 찾아야 가치가 있다. 보물창고에 먼지가 쌓이고 귀신창고가 되면 쓸데없어진다. 광장의 예술로서의 영화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시네마테크가 필요하다. 단지 영화를 좋아하는 몇몇의 공간이 아니라 문화적인 재산으로서 후배들에게 도서관이 필요한 것처럼 시네마테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정리: 김보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