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7일, 윤성호 감독의 <도약선생> 상영 후 대화가 있었다. 추운 날씨임에도 불구, ‘방어적으로 굴지 않고 재밌게 해주겠다’는 감독의 트윗 때문인지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이 극장에서 모였다. 윤성호 감독뿐 아니라 전영록 코치 역의 박혁권, 재영 역의 박희본, 원식 역의 나수윤 배우와 함께한 자리였다. 영화 상영 내내 터져 나오던 웃음소리는 시네토크 현장으로도 이어졌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 이 영화는 주문제작 영화인데, 윤성호 감독은 주문제작 영화에 굉장히 능수능란하다. 자기 식대로 바꾸고 해석하는 데 재능이 있다. 장대높이뛰기를 원래부터 좋아했었다고 들었다. 제안을 받고나서 장대높이뛰기 선수 이야기를 그리겠다고 처음부터 생각을 한 건지 궁금하다.
윤성호(영화감독): 아리랑 TV에서 “영화, 한국을 만나다”라는 프로젝트로 한국의 한 고장을 중심으로 하는 TV영화 제안이 왔다. 원래 배경은 순천이었다. 순천 송광사에 법정스님을 좋아하는 흑인 랩퍼가 찾아오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대구에서 열리는 세계육상선수권대회의 원조를 받을 수 있을 것 같다고 전달받아서 대구로 바꾸게 됐다. 처음엔 안하겠다고 했는데 앞으로 육상을 소재로 영화를 만들 일도 없을 것 같고, 극장에서 흥행해야 할 영화도 아니어서 남에게 피해를 줄 것 같지도 않고, 마음 편하게 작업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승낙했다. 더운 여름에 오래 뛰는 영화는 찍고 싶지 않아서 도움닫기가 최대한 짧은 장대높이뛰기를 선택했다. 원래 여자 장대높이뛰기를 좋아하기도 했다. 그런데 생각했던 것보다 예산이 절반 아래로 작아지는 문제가 생겨서 시트콤을 스크린에 옮기는 느낌으로 작업했다. 견적에 맞춰서 포부를 축소시킨 거다. 원래 기획한 장대높이뛰기 영화에서 장대높이뛰기에 대해 떠드는 영화로 바꾸기로 했다.

김성욱: 하이쿠 참조하는 게 나오고 전체적으로 노래, 내레이션 같은 것들이 사용되었다. 지금 사람들이 보면 웃을 수도 있고 옛날 사람들이 보면 노스탤지어 같은 느낌도 든다. 하이쿠나 랩처럼 언어를 자꾸 바꾸어 나가는 것들은 음악하시는 분이랑 같이 작업을 한 것인가.
윤성호: 음악을 맡아주신 분은 ‘9와 숫자들’의 송재경씨다. 온라인 시트콤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부터 같이 작업했다. 그땐 작업이라기보다 음악 삽입을 허락받는 정도였다. 나중에 사석에서 굉장히 잘 통하는 걸 알았다. 아까 말씀드렸듯이 적은 예산으로 하게 되면서 아예 로우-파이로 작업했다. 고맙게도 송재경씨가 흔쾌히 허락해주셨고, 저열한 사운드를 잘 만들어주셨다. 사실 이 자리에서 고백하자면, 주문제작식으로 욕심을 낮춰서 급하게 만들었고, 대본도 급하게, 매일 아침 예능 하듯이 만들었고, 편집실도 거의 잘 나가지 않았다. 애정 없이 작업한 셈이다. 그런데 막상 보니까 괜찮았다. 산발적으로 찍어서 없던 내러티브를 편집기사님이 만들어주셨다. 그때 욕심이 생겨서 음악을 녹음을 하기로 했다. 송재경씨랑 같이 떠들면서 녹음실 스튜디오에서 작업했다. ‘개드립’으로 했는데 말리는 사람도 없어서 잘 할 수 있었다.


김성욱: 영화 초반에 계속 반복되는 말들이 있다. “뭘 해야 하지? 뭘 할 수 있을까? 뭘 하면 되는데? 뭐라도 할까?” 이게 주문제작을 받은 영화감독의 심정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윤성호: 정확하다. 몇몇 스탭들은 느낄 수 있었을 거다. 지금까지 만든 영화들은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를 제외하면 다 주문제작식이었다. 주문제작을 받으면 거기에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살짝 넣는 정도로 만들어왔다. 온전히 내 마음을 갖고 창작을 한 적이 거의 없다. 동기부여가 없으면 움직이지 않는 내 성향 때문이다. 거기다 처음으로 함께 해오던 사람들이 아닌 분들로부터 주문제작을 받은 거라 자존감이 상하는 것도 있었다. 남들이 대충 넘어가려는 프로젝트에 발을 디뎠다는 느낌을 받은 거다. 거기에 대한 자조 섞인 말들을 넣었다. 추리닝이랑 장대 빌렸다가 반납한 것 말고는 도움을 받은 것도 없었다.

김성욱: 제작비의 지원이 없었단건가.
윤성호: 모르겠다. 받은 건 없고 중간 분들이 가져간 것 같다.

김성욱: 제목이 <도약선생>이면 다들 영화 후반부에 정말로 하늘을 향해 올라가는 선수의 활약을 기대할 것 같은데, 대부분 프리즈 프레임으로 끝나버린다.
윤성호: 원래 예산이 1억이 좀 넘었다. 그 때 가볍게 썼던 트리트먼트에는 원식이가 날아가는 데 성공하는 거였다. 그런데 예산이 축소되니까 와이어 쓰기가 싫었다. 영화적인 트릭으로 관객에게 넘었다는 착각을 줄 수도 있었지만 그것도 하기 싫었다. 첫 번째 이유는 저기 안 올라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들 실패를 했으면, 그냥 고꾸라져서 옆에 있는 사람들과 좋아졌으면 하는 생각. 다른 하나는 내가 스트레스 때문에 무릎이 아팠다. 오후 3~4시에 촬영이 끝났는데 무릎이 너무 아파서 그만뒀다.

김성욱: 스포츠 영화에는 외인구단처럼 사람을 끌어 모으는 식의 캐릭터가 종종 있다. <도약선생>에서 전영록 코치의 캐릭터를 설정할 때 윤성호 감독과 어떤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나.
박혁권(배우): 군대에서 다쳐서 머리가 돌아버린 그 설정은 촬영 중 후반부에 생겼다. 그 이후로 마음 편하게 했다. 윤성호 감독과는 10년 정도 같이 작업했기 때문에 이게 어디로 가고 있는지 불안해하는, 그런 우려는 전혀 없었다. 오히려 디렉션이 왔을 때 어떻게 더 놀아볼까 그런 고민을 했다.

김성욱: 일반 상업영화라면 장대높이뛰기 선수 역할을 하기 위해 촬영 전에 운동을 하는 준비를 했을 텐데. 다른 배우 두 분은 영화에 참여하면서 감독과 어떤 논의를 했는지 궁금하다.
나수윤(배우): 트레이닝을 받았어야 했는데 영화를 보니 그럴 필요가 없었던 게 아니라, 내가 원래 운동을 못해서 저렇게 나온 거다. 그래도 시켜주는 건 열심히 하려고 노력했다.
박희본(배우): 어렸을 때 전교1등할 정도로 운동을 잘 했다. 그래서 오히려 재영이라는 역할에 잘 맞았던 것 같았고, 감독님께서 그 부분 칭찬을 많이 해주셨다. 촬영할 때는 감독님이 주시는 디렉션에 맞게 이렇게 해볼까, 저렇게 해볼까 정도의 고민을 했다. 걱정은 전혀 안했다.


관객1: 도약하는 장면이 나올 줄 알았는데 나오지 않는다. <도움닫기 선생>이 더 잘 아울리지 않을까 싶다. 제목이 왜 <도약선생>이 됐고, 만약 제목을 바꾸고 싶다면 무엇으로 바꾸고 싶나. 그리고 조연들이 참 재밌었다. 대구에서 직접 구한 조연들이라고 했는데, 조연 에 대해서도 물어보고 싶다.
윤성호: 원래 제목은 <육상소녀>였다. 그런데 일본의 귀여운 저예산영화인 척하는 것 같아서 제목을 바꿀 생각은 있었다. 사실 주인공인 두 소녀보다 전영록 코치가 더 강해진 거다. 편집기사님이 캐릭터가 일관성 있게 해 주신 것이다. 이 영화의 중심은 미친 코치다, 이 생각이 들었다. 뭐 할까 고민하다가 도약을 가르치는 선생이니까 <도약선생>으로 써봤다. 그런데 나중에 찾아보니 진짜 그런 단어가 있었다. 그리고 도약과 도착, ‘도착선생’ 그런 느낌으로 받아들여지길 원했던 것 같다. 배우들은 이 세 분 말고는 다 현지에서 섭외한 분들이다. 30대 이상은 그쪽 지방에서 연극 하시던 분들이고 어색하듯 연기했던 친구들은 계명대 학생들이다. 즉흥적으로 촬영을 도와준 대구분들께 고마웠고, 육상대회에서 상영이 취소되니까 미안했다.

관객2: 남성 감독님께서 여성을 섬세하게 잘 그리신 것 같다. 동성애 코드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으셨는지 궁금하다. 배우분들은 연기하면서 어땠는지도 궁금하다.
윤성호: 여성들의 심리는 잘 모르는 것 같다. 남자가 아무리 섬세하게 그려도 불평등하게 대하지 않으려는 노력을 할 뿐이고, 특유의 결을 그리기는 힘들다. 그래도 내가 보고 싶은 건 넣는다. 주변에 커밍아웃한 성적 소수자가 많다. 이걸 자기들을 소비한 거라고 생각하지 않을까하는 걱정이 들었는데 그 분들이 보고 좋아하시더라. 잘못 건드리지는 않은 것 같다. 여성끼리 연애하는 걸로 바꾼 건, 원식이 캐릭터를 남자가 했으면 보기 안 좋았을 거다. 남자의 경우 집착하고, 뭐라도 해보려는 캐릭터가 너무 많다. 찌질하거나 전형적으로 보이지 않았으면 하는 트릭이다.
나수윤: 감독님 만나서 그 얘기를 들었을 때 찍으면 재밌을 것 같았고, 이성애자지만 거부감이 들지도 않았다. 극중에서 룸메이트이면서 친한 친구고, 그 이상일까 말까 하는 단계였기 때문에 별 거부감은 없었다. 그리고 상대 배우가 귀엽고 그래서 찍을 때도 수월했다.
박희본: 극중에서 재영이가 원식언니를 좋아하는 건 성적이라기보다 동경의 대상으로 좋아하는 것, 그 정도 감정선이라고 생각한다. ‘어떡하지, 언니랑 손을 잡아야 하는데‘ 이런 고민은 전혀 하지 않았다. 재밌게 찍었다.



관객3: 극 초반에 기모노를 입고 나오는 사람이 있다. 왜 기모노를 입은 건지 궁금하다.
윤성호: 극 초반은 꿈이다. 시나리오가 없어서 찍는 순서도, 어디에 뭐가 붙을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촬영했다. 그러다보니까 연결이 너무 안 될까봐 걱정이 됐다. 일관성이 없어서 고민하다가 연출부 막내가 꿈을 넣자는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꿈이니까 용서가 되고, 나중에 이야기 틈을 보완하는 역할을 할 수 있으니까 꿈을 급하게 넣었다. 문제는 꿈이라는 티가 나야하는데, 아련한 비주얼은 넣기 싫었고 부조리하게 의미 없는 아이콘을 등장시켰다. 양장을 입히면 현실 같으니까 뜬금없는 옷을 입혔다.

김성욱: 지금 준비하는 영화가 있나.
윤성호: 촬영은 끝나고 편집 중이다. 영화는 아니고 MBC 에브리원에서 방영할 시트콤이다. 저번엔 5분정도 10회를 했는데, 이번엔 30분씩 10회 분량이다. 그리고 지금 영화사와 장편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 남자 캐릭터 문제로 계속 고민 중이다.

정리 송은경(관객 에디터) | 사진 이호규(자원 활동가)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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