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승완 감독이 선택한 왕가위 데뷔작 <열혈남아> 시네토크

1월 22일 <열혈남아> 상영이 끝나고 영화전문지 『씨네21』 주성철 기자의 진행 하에 이 영화를 추천한 류승완 감독과의 시네토크가 이어졌다. 홍콩영화에 각별한 애정을 갖고 있는 두 사람이 만난 만큼, 한 시간 반 동안 상영관 안은 내내 이야기와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평소 시네마테크에서 홍콩영화를 함께 보고 싶었다는 류승완 감독은 영화 <열혈남아>에 대한 기억과 새로운 감회를 이야기하면서, 요즘 같은 때일수록 시네마테크에서 함께 영화의 본모습 그대로 체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며 시종일관 유쾌하게 진행되었던 이 날의 이야기를 일부 옮겨본다.


주성철(『씨네21』 기자): 예전에 이 영화를 보셨던 분들은 대만버전으로 기억하실 것 같다. 이번 상영에서 튼 홍콩버전은 영화에 쓰인 음악이 다르다. 공중전화 키스씬에서 <탑건> 주제곡을 리메이크한 노래가 나오는데, 큰 화면으로 보니까 좀 당황스럽다(웃음). 대만버전에서 쓰인 왕걸의 음악이 더 좋았다.
류승완(영화감독): 이 영화를 88년 동시상영극장에서 봤다. 등광영과 주윤발이 주연하고 왕가위가 각본을 쓴 <영웅투혼>이란 영화와 동시상영 하고 있었다. 당시 대사와 주제곡 가사의 번역이 아주 멋스러웠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기억하고 있던 대사는 장학우가 ‘나한테 너무 잘 해주지마, 이 빚을 갚을 수가 없잖아’라고 말하는 건데 그 대사가 멋있다고 생각했다. 의리랄지, 십대들이 한창 좋아할 법한 그런 정서가 있었다. 오늘 <열혈남아>를 보면서 흥미로운 건, 처음 볼 당시에는 이 영화가 어른들의 세계를 그리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다시 보니, 어른이 아니라 허세부리는 어린애들의 이야기라는 생각이 든다. 영화에 대한 느낌이 그렇게 바뀌었다는 것에 기분이 묘하다. 그 때는 이 영화가 청춘영화라는 생각을 못했었다.


구룡반도에 와서 얼마나 힘들게 살았을까 싶다 - 주성철


주성철: 란타우섬같은 <열혈남아>의 배경이 된 공간들을 직접 가본 적이 있다. 영화를 처음 봤을 때 재밌기도 했지만 잘 이해가 안됐던 점이, ‘왜 그렇게 유덕화나 장학우 같은 애들을 싫어하나’였다. 서로 조직이 다르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 너무 심하니까 잘 이해가 안됐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장학우의 고향집으로 나오는 곳이 예전에 대만으로 건너가지 못했던 국민당 사람들이 군락을 이루며 살기 시작한 곳이였다고 한다. 그쪽 사람들이 굉장히 자존심도 강하고 해서 집집마다 대만국기를 걸어 둘 정도였다고 하니 좀 이해가 되더라. 장학우나 유덕화 같은 인물들이 그 곳 출신인 건데, 다른 파 인물들이 장학우한테 ‘고향 가서 농사나 지어라’ 그런 얘기를 하는 장면이 있다. 약간은 홍콩원주민들 입장에서 볼 때 시골에서 온 사람들 같은 그런 느낌이 있는 거다. 그런 것들을 알고 영화를 보니 장학우나 유덕화를 보면서 쟤네들이 구룡반도에 와서 얼마나 힘들게 살았을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류승완: 큰 화면으로 다시 보니 저예산으로, 속전속결해서 만들어졌다는 걸 알겠더라. 이를테면 유덕화가 비를 맞으면서 뛰어가는 장면에선, 유덕화 저 뒤 쪽으로는 비가 내리지 않고 사람들도 우산도 없이 그냥 걸어 다닌다(웃음). 당시 얼마나 전투적으로 영화를 찍었을지 생각하게 된다. 장학우가 길에서 맞는 장면 같은 경우 엑스트라를 따로 통제하지 않았다. 인물의 동선을 지킬 수 있는 정도만 확보해 놓고 설정 자체를 사람들이 둘러싸서 인물들을 구경하는 것으로 만든 거 같다. 당시 이 영화가 크게 각인되었던 건 영화에서 새로운 표현방식으로 나왔던 스텝프린팅 같은 걸 텐데, 그런 효과들이 ‘미리 아주 치밀하게 계산된 건인가 아니면 환경이 만들어낸 것인가’를 생각해보게 된다. 이 영화의 촬영은 나중에 <무간도>를 만든 유위강이 했다. 스텝프린팅은 보통 저속촬영을 하는데, 처음 포장마차를 들어가는 부분은 살짝 고속처리가 되어있다. 이 영화가 예산을 크게 쓰지 않는 영화였기 때문에 밤 장면에서 적은 노출 안에서 그런 효과를 찾다보니 장님 문고리 잡듯이 그렇게 방법을 찾아갔던 게 아닐까 싶다. 그런데 마지막에 경찰서 습격장면은 대낮에 스텝프린팅을 쓴걸 보니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당시엔 스타시스템의 영화로서만 봤었는데, 지금 보니 참 흥미로운 저예산 영화다. 중간에 인물들의 상처 위치도 바뀌고, 옷도 바뀌기도 하고(웃음), 그런 영화의 빈틈들이 귀여웠다.

다시 보니 빈틈이 많아 귀여운 영화였다 - 류승완

주성철:
의사로 나온 사람이 장숙평 미술감독이다. 사실 몽콕 지역에 그런 식의 집이 잘 없다고 한다. 유덕화의 집이나 해변가 모텔도 그렇다. 그래서 사실은 굉장히 현실적인 공간에서 찍혀진 것 같지만, 미술적인 요소가 많이 들어가 있는 게 아닌가 싶다.
류승완: 이후 왕가위 영화에서의 공간은 촬영감독인 크리스토퍼 도일의 영향도 크지만 장숙평의 힘도 크다 생각한다. 그리고 이 영화 보면서 흥미로웠던 것이 배우들이다. 개인적으로 유덕화를 유난히 좋아했기 때문에, 영화가 별로였더라도 유덕화 때문에 기억에 남는 영화도 있었다. 특히 <강호정>에서의 유덕화를 정말 좋아했다. 그 또래 분들은 기억하실 텐데, 당시엔 <영웅본색>과 <천녀유혼>이 이상한 열풍을 일으키면서 홍콩영화가 동시상영관에서 난리가 났었다. 영화를 보는 것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고스란히 몸으로 체화해서 다녔던 시기였다. 유덕화나 주윤발의 의상이나 헤어스타일을 모두들 따라 했으니까. 동시상영관에서 싸구려 취급을 받던 그런 영화들이 당시 십대들에게는 이상할 정도로 열광을 일으켰던 시기였다. 그리고 이 영화를 볼 때 이렇게 멜로 축이 강했던 영화였는지 잘 몰랐다. <열혈남아>가 <천국보다 낯선>의 영향을 받았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천국보다 낯선>같은 감성이 홍콩느와르와 만나서 나오게 된 영화이다. 이 영화로부터 진짜 뒷골목의 세계가 영화에 나오기 시작했다. 영화 속에 리얼리티가 자리를 잡기 시작했고, <무간도>같은 요즘 영화에서 볼 수 있는, 영화적 상상과 현실의 세계 사이에서 균형 잡힌 모습의 출발점이 아니었나 싶다.

주성철: 당시 영화에서 유덕화는 항상 마지막에 죽었다. 안 죽었다고 해도 보면 죽을 뻔한다든지, <암전>에서는 죽은 척 한다(웃음). 늘 유덕화는 죽음의 이미지와 연결되어 있다. 당시 홍콩사람들의 심리, 어떤 패배감이나 불안감 같은 것들이 유덕화의 몸을 통해 재현된 게 아닐까 싶다. 그리고 예전에 이 영화를 보면서 꽉 짜여진 영화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굉장히 치밀하게 만들어졌다는 생각이 든다.
류승완: 나는 오히려 반대인 것 같다. 처음 볼 때는 빈틈없는 영화라고 생각했는데, 이 영화는 오히려 감성에 충만한 영화란 생각이다. 그리고 보통 <열혈남아>는 유독 왕가위의 다른 영화와 동떨어졌다고 생각하는데, 스텝프린팅 말고도 왕가위의 인장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이 분명 있다. 종이비행기를 날리는 장만옥 장면처럼 말이다. 그런 방식의 커팅, 장만옥을 바라보는 카메라의 시선 같은 것에서 왕가위스러운 점들을 발견하게 된다. 이 영화는 제작 당시 통제가 심했던 영화로도 유명한데, 시스템적인 제약과 어느 지점에서 자신의 스타일을 드러낼 것인가 사이에서 줄타기 하는 부분들이 흥미롭다.

시네마테크에서 영화의 원체험이 계속되길...

관객1: 감독님이 홍콩영화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영화와 리메이크 해보고 싶은 영화는 어떤 게 있는지.
류승완: 진짜 좋아하는 건 <폴리스스토리1>이다. 심지어 촬영 현장에서 틀어서 보곤 할 정도다. <폴리스스토리1, 2>를 정말 좋아한다. 미학적으로 충격을 줬던 건 서극이 <독비도>를 리메이크한 <서극의 칼>이었다. 최근에는 두기봉의 <흑사회1> 같은 영화를 좋아한다. 예전엔 리메이크하고 싶은 게 많았는데, 요즘은 별로 그런 생각을 안 한다. 그래도 만약에 리메이크한다면 약간 완성이 덜된 영화들 일테면 <사망유희>같은 영화가 떠오른다.


관객2: 한국영화에서 <킬리만자로>나 <파이란> 같은 영화를 보면 <열혈남아>와 비슷한 점들이 있는데, 그런 내용적인 유사성이 이 영화의 영향인지, 장르적인 특성인지 알고 싶다.
류승완: 홍콩느와르의 영향을 명확히 보여주는 것은 장현수의 <게임의 법칙>, 김성수의 <비트>같다. <게임의 법칙>은 캐릭터의 배치 같은 것에서 홍콩느와르의 영향이 분명히 드러난다. 박중훈은 홍콩느와르의 캐릭터를 한국식으로 완벽히 토착화 했다. <비트>는 촬영방식에 있어서 홍콩느와르와 한국적 스타일이 맞물려 새로운 스타일을 만들어낸 경우다. 송해성 감독이 <게임의 법칙> 조감독이었는데, 그 당시 홍콩느와르에서의 무너지는 청춘 같은 것들을 보면서 열광하고, 감정이입했던 세대들이 감독으로 데뷔 하면서 그런 영향이 분명히 드러난 듯하다. 송해성 감독은 지금 <영웅본색>의 한국식 리메이크버전을 만들고 있는데, 그 영화에는 <영웅본색> 뿐 아니라 당시의 홍콩영화들의 영향이 들어 있다. 그 세대의 감독들 중 홍콩영화의 영향에서 자유로운 감독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주성철: 예전에 『필름2.0』에 있을 때 감독들에게 ‘내가 가장 사랑하는 장면’을 물었던 적이 있는데, 거의 많이 꼽혔던 게 홍콩영화였고, 특히 <열혈남아>가 최고였다. 개인적으로 한국남성감독들이 영화에서 홍콩영화적인 영향이나 스타일을 무의식중에 담아내는 점들이 흥미롭다.

관객3: 홍콩영화에서 특정한 공간이나 장소가 나왔을 때 특별히 관심 가는 것이 있는지.
주성철: 사실 제가 그런 주제로 책을 쓰고 있다(웃음). 두기봉의 <흑사회>가 주는 공간적인 의미가 특히 흥미롭다. <흑사회>에서 사람들은 원숭이들이 뛰어다니는 야산에서 싸운다. 홍콩에 본래 원숭이가 많다고 한다. 싸우는 장면과 야생의 원숭이들이 겹쳐질 때 정말 지옥 같은 모습이라 공포스러웠다. <열혈남아>의 공간들도 인상 깊다.
류승완: 딱히 장소에 흥분하는 건 별로 없는 것 같고, 골든하베스트 로고에는 좀 흥분한다(웃음). 로케이션의 해석이 가장 흥미로웠던 건 <무간도>였다. <무간도>에서 보면 인물들이 자꾸만 옥상으로 올라가는데, 홍콩이란 공간에서 인물들이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고 피해서 갈 수 있는 곳이 옥상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도심촬영이 힘든 촬영 여건상의 문제 때문이었을 수도 있겠지만, 그런 공간적 맥락이 영화의 드라마에 다른 기능을 해준다는 느낌이 들었다. 홍콩의 재해석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너무나 홍콩스러운 로케이션과 홍콩의 액션팀 만이 할 수 있는 액션연출로는 두기봉의 <대사건>과 서극의 <순류역류>를 꼽고 싶다.

주성철: 영화를 다시 보며 느꼈는데, 영화라는 게 원체험이 중요하구나 생각했다. 지금 시네마테크가 힘들지만, 시네마테크에서의 체험이 그런 원체험이지 않을까 싶었고, 그런 의미에서 전용관 문제가 잘 해결됐으면 좋겠다.
류승완: 전부터 시네마테크에서 홍콩영화를 같이 보고 싶었다. 그런데 홍콩이 프린트수급이 굉장히 까다로운 편이다. 개막식 때 조희문 영진위원장이 “DVD로도 영화를 볼 수 있는 요즘 같은 때에, 필름 상영과 관람을 고집하는 시네마테크와 관객들이 갑갑하다”는 얘기를 했는데, 오히려 그런 시대이기 때문에 함께 모여 필름으로 영화를 감상하는 체험이 더욱 필요하다고 본다. 영화의 원판은 여전히 프린트이다. 단순히 화면의 크기 문제가 아니다. 마치 명화를 화집으로 보느냐 미술관에서 보느냐의 차이 같은 거다. 오히려 디지털 시대, 영화가 정보가 되는 시대일수록 시네마테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시네마테크가 어려운 상황에 있는데, 여러분들이 많이 관심을 가져주시고 자주 찾아주셔야 할 것 같다. 결국 관객들이 지켜낼 수 있는 것 같다. 시네마테크를 지키려는 관객들의 결집력이 중요하다. 불씨만 살아있으면 언제든 다시 지필 수 있으니까 말이다. (장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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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polly 2010.01.22 14: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주 기자님의 후덕한 웃음이 인상적이네요 :)

  2. 미래감독 2010.01.22 19:1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ㅎㅎㅎ어제 정말 최고였습니다. 홍콩영화로만 몇시간 떠들고 듣는게 참말로 오랜만의 경험...
    류감독,주기자님 두분다 너무 재밌었어요. 정리해주신 분도 감사하구요.

박찬옥 감독 선택작 마이크 리의 <네이키드> 시네토크

1월 19일 저녁, 박찬옥 감독이 선택한 영화 <네이키드>가 시작할 때쯤 비가 보슬보슬 내리고 있었다. 가볍게 내리는 비를 보면서 영화와 이 영화를 뽑은 박찬옥 감독이 왠지 모르게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를 본 관객들은 남자 주인공의 정곡을 찌르는 빠른 말솜씨에 감탄했고, 영화가 끝난 후 이어진 시네토크에서는 박찬옥 감독의 천천히 조용하게 흐르는 영화에 대한 이야기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들었다. 절룩거리면서 마지막에 떠나는 주인공 죠니의 모습만큼이나 긴 여운을 남겼던 박찬옥 감독과 함께한 토크를 옮긴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 먼저 이 영화를 고른 추천의 변부터 들려주신다면. 박찬옥(영화감독): 원래 음식이든 뭐든 누군가에게 추천을 잘 못 한다. 이번에 친구들 영화제에서 영화를 추천하라고 해서 했는데, 시네토크에 나와서 이야기 하려니 ‘하지 말걸 그랬나’라는 생각이 든다(웃음). 그냥 이 영화를 재미있게 봐서 했다. 돌이켜보니 얼마 전에 만든 영화 <파주>의 영향 아래 여전히 있는 것 같다. 그 영화를 만들었을 때 몇몇 영화중에서 두 가지 영화가 떠올랐는데, 둘 다 결말에 주인공이 떠나는 영화더라. 하나는 <정복자 펠레>이고 다른 하나는 이 영화다. <네이키드>의 떠남을 <정복자 펠레>보다 좋아하는 것이 솔직한 마음인 것 같다. 특별히 이유를 들자면 이 영화의 결말을 좋아해서 추천하게 되었다.

김성욱: 이 영화의 결말에서 남자가 떠난다는 것을 좋아한다고 하셨는데, 어떤 느낌인지 더 묻고 싶어진다.
박찬옥: 정말로 서로 통하는 친구가 같은 고향 맨체스터에서 사귀었는데 여자가 런던으로 오고 남자가 나중에 여자를 런던으로 찾아왔는데, 남자가 여자를 찾아와서 이러저러한 것들을 겪고 이제 착하게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 같다가 남자가 떠나버린다. ‘일종의 배신인가 배반인가’ 싶지만, 그렇게 떠나는 것이 그 남자다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인물은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것 같았고, 그런 마음을 좀 알 것 같았다(웃음).

김성욱: 이 영화를 보면서 고등학교 때 봤던 이장호 감독의 <바보선언>이 떠올랐다. 그 영화에서도 주인공이 국회의사당을 뒤로 하고 절룩거리면서 걸어간다. 이 영화를 보고 나면 많은 사람들이 인물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감독님은 영화 속 캐릭터들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하셨는지.
박찬옥: 영화학교에 처음 가서 친구들이 만든 영화를 봤는데, 고민하는 젊은이들이 많이 나온다. 그런 친구들 영화의 전형적인 주인공을 좋아하지는 않는데, 이 영화의 주인공도 역시 같은 범주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왜 좋아하는지 스스로도 의문이다. 그의 고민이 얼마나 골 깊은지 어떤 배경이 있었는지가 전혀 나오지 않는데도 배우가 주는 눈빛과 속도 있으면서 힘들어 보이는 모습에 그 사람이 싫지 않았던 것 같다. 그리고 남자가 발작을 일으킬 때 표정이나 말이 ‘배우 개인의 모습일까 아니면 시나리오에서 약속된 연기일까’라는 생각을 했다. 만약 내가 발작을 하거나 본능적으로 무의식이 튀어나올 때 어떤 말을 하게 될까라는 궁금함도 들었다. 소피의 역할을 맡은 배우 캐트린 카트리지도 매우 놀라운데 <비포 더 레인>뿐만 아니라 <브레이킹 더 웨이브>에서도 조연인데도 너무나 정확하게 자기 역할을 해주는 것 같아서 놀라웠다.

김성욱:
찾아보다 보니까 <네이키드> 영화 소개에 누군가가 ‘내가 이래서 영화제에서 상 받은 영화를 안 봐. 이 영화 이후로’ 이렇게 쓴 것이 있었다(웃음). 이 시절에 마이크 리는 방송이나 영화에서 유명세를 치루고 있었고 <네이키드>는 굉장히 작심하고 만들었다는 느낌이 든다. 물론 이 영화로 칸에서 상을 받아서 마이크 리라는 감독이 더 유명해졌다. 그러나 관객들은 이런 영화들을 볼 때 사실은 동조하지 못하고 불편해하거나 불쾌해하는데, 관객이자 감독인 입장에서 이런 반응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박찬옥: 처음에 이 영화를 집에서 비디오테이프로 봤다. 그리고 오늘 큰 화면으로 보게 되었는데, 스크린으로 보니까 드라마의 흐름이나 물리적인 시간이 더 직접적으로 몸에 다가왔다. 지루할 때는 극장 위에서 들리는 소리가 크게 들리다가 어떨 때는 보다가 영화에 빠져들기도 한다. 이 영화가 대중들을 위로하는 영화는 될 수 없지만 몇몇 사람들에게는 위로와 위안이 될 수 있다고 생각이 든다.

관객1: 이 영화를 보면서 현대 사회의 구원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인공 죠니가 대화하는 방식은 소크라테스의 문답법 방식이면서 내용은 하이데거의 현대철학을 떠오르게 한다. 죠니가 마지막에 떠나는 것도 현대철학의 영향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드는데.
박찬옥: 보신 분의 느낌이 맞을 것 같다. 제가 배우들에게 사색적이고 철학적인 대사를 하게 한다고 했을 때, 그 내용 자체보다는 그 사람의 경향을 보여주는 것이지 내용을 통해서 영화가 말하려는 무엇이 바로 전달되기 원하지 않다보니... 저의 경우에는 죠니가 떠들 때마다 ‘아 떠드는구나, 현재 자기의 상태와 세상에서 자신이 편하지 않는 것을 저런 숱한 말로 내뱉는구나’라는 생각을 하면서 봤다.

관객2: <네이키드>와 감독님의 영화 <파주>의 처음과 끝이 유사한데, 이 영화에서 영향을 받으셨는지 궁금하다.
박찬옥: 인물이 떠나는 것을 결말로 하고 싶은 영화를 만들고 싶다 했을 때 이 영화가 많은 영향을 준 것 같긴 하다. 사실 영화의 출발은 어렸을 때 보았던 <헐크>라는 미니시리즈였다. <헐크>의 엔딩에서 주인공은 헐크로 변신하는 자기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택시를 타고 떠난다. 다른 것은 기억에 없고 그 장면만 기억이 남는데 이것이 내용에 영향을 주었던 것 같다. <네이키드>의 주인공이 런던으로 와서 런던을 떠난다면 <파주>에서는 파주로 와서 파주를 떠나는데 이런 지점들은 떠남을 전제한 영화구조에서는 비슷한 듯 하다.

관객3: 영화를 보면서 배우들의 연기가 매우 인상적이었다. <네이키드>를 보다보니 자연스럽게 감독님의 영화가 떠오르면서 감독님의 연기연출 비법이나 스타일이 궁금해졌다.
박찬옥: 비법이라 할 것은 없고 그냥 개인적인 생각 중에 하나가 촬영, 미술, 조명, 콘티 다 훌륭해도 배우의 연기가 훌륭하지 못하면 보는 사람의 공감을 얻을 수 없다는 거다. 항상 배우의 연기가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 생각들이 잘 실현되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려운 일이라서 잘 실현되려면 저한테 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고 본다. 배우와 많은 교감과 신경전을 감당하면서 그 문제들을 풀어가야 되는데 배우도 감독도 어느 선에서 대충 접고 포기하고 가면 산으로 가게 된다. 그런데 항상 시간의 한정 속에서 결정해야 되기 때문에 배우와 저 사이의 허심탄회한 자리를 미리 만들려고 하는 편이다. 저는 현장에서 배우들에게 특별한 제스처가 없는 편이어서 이제는 제스처를 좀 해야겠다라는 생각을 할 때도 있지만 여전히 다이렉트한 접근이 유효하다는 생각도 한다. 기술로 배우들을 대하면 배우들도 그것을 알기 때문에 다이렉트 함이 유효할 수도 있다는 거다. 힘이 드니까 어느 선에서 접는 그런 것들이 없도록 좀 더 에너지를 많이 갖고 있어야 될 듯 싶다. (정리 : 신윤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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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indieponge 2010.01.21 01: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가 관객2군요... ^^
    수고많습니다, 신윤하님.

김한민, 윤종빈 감독과 함께한 으스타슈의 <엄마와 창녀> 시네토크


1월 17일 서울아트시네마에선 무려 4시간 가까운 상영시간에 달하는 장 으스타슈의 <엄마와 창녀>(1973)를 인터미션도 없이 상영 후 이 영화를 친구들의 선택으로 꼽은 김한민, 윤종빈 감독과의 시네토크가 진행됐다. 3시간 40분 동안 서너 명의 등장인물들이 각자의 방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전부인 영화. 이미 작년 11월에 일찌감치 이 영화를 선택했다고 하는 김한민, 윤종빈 감독은 왜 이 영화를 고른 것일까. 언뜻 보면 대조적이지만 은근히 잘 어울리던 두 감독의 마치 ‘시사토론회’ 같던 그 현장을 일부 옮긴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 : 오랜만에 이 영화를 온전하게 다시 봤다. 게다가 젊은 장 피에르 레오를 보니 새롭다. 이 영화는 2003년에 서울아트시네마가 소격동에 있던 시절에 ‘장 으스타슈, 필립 가렐 특별전’을 개최할 때 처음 한국에서 상영한 바 있다. 이후에 DVD를 갖고 있어 몇 번 보긴 했지만 집에서는 온전하게 다 본 적이 없었다(웃음). 7년 만에 필름으로 다시 보니 좋다. 오늘 거의 4시간에 달하는 영화를 추천해주신 두 감독님을 모시고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보도록 하겠다.
윤종빈(영화감독) : 나도 이 영화를 2003년 선재에서 봤다. 그 때는 상영 중간에 한 번 쉬었었는데 안 쉬고 보니까 더 색다르다. 그리고 여전히 감동적이다. 영화를 많이 보지는 못하지만 꼽으라면 베스트 5위 안에 들어가는 영화다.
김한민(영화감독) : 나는 사실 윤종빈 감독이 추천해서 봤다. 제목도 <엄마와 창녀>고 해서 재밌겠다싶어 DVD로 먼저 본 다음에 함께 나오게 되었다. 영화를 보면서 내가 치열하게 영화에 대한 감성을 다듬던 대학시절, 대학원시절의 영화적 감성이 다시 올라오더라. 밀란 쿤데라가 얘기했던 팽창된 영혼의 순간을 느꼈다. 보고 나니 담배와 술이 확 땡기더라.



김성욱 : 지난 해 말에 영화가 잘 안 돼서 우울한 김한민 감독을 만나 술을 마시러 간 적이 있는데 윤종빈 감독도 자리를 함께 했었다. 그 때 윤 감독이 <엄마와 창녀>를 굉장히 좋아한다며 지금 시대에 한번 쯤 다시 틀어도 좋겠다고 해서 이번 영화제에 두분을 초대하게 됐다. 윤종빈 감독의 영화 <비스티 보이즈>와도 상당히 많은 관련성을 느꼈다. 이 영화에서의 알렉상드르와 하정우 씨 같은 경우가 상황이 좀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겠다. 오늘 보면서 어땠나.
윤종빈 : 내가 좋아하는 감독들이 홍상수, 에릭 로메르, 장 으스타슈, 존 카사베츠 그런 감독님들이다. 그 감독들의 영화의 형식이라든지 세계관은 다 다르지만, 그들이 영화에 갖고 있는 믿음은 현실이 딱 깔끔하게 정리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현실은 거대 담론으로 해석되지 않는 것이라는 전제도 갖고 있다. 그래서 영화가 열려 있고, 어떤 결에 얽매이지 않으며, 느린 호흡으로 전개하면서도 인간의 풍부한 모습과 그 시대의 공기를 잘 전달한다. 나도 <비스티 보이즈>에서 그런 것을 해보려고 했는데 이런저런 이유 때문에 잘 안 된 것 같다. 하지만 계속 그런 것들을 염두에 두고 만들려고 한다.

김성욱 : 이 영화는 얼굴과 음성, 그리고 음악으로만 진행되는, 액션이 많지 않은 영화다. 얼굴과 말하는 것으로 네 시간을 끌고 가는데 김한민 감독의 영화는 액션도 많고 극적 전개가 많으니 좀 경우가 다르다. 이런 영화는 어떻게 생각하나.
김한민 : 사람들이 우리 두 사람을 보고 영화 스타일도 다르고 성격도 다른데 어떻게 친해졌느냐고 물어본다. 그런데 실제로 영화 이야기를 나눠보면 비슷한 영혼을 갖고 있고, 교감할 수 있는 지점이 많다. 나는 윤종빈 감독이 부럽고 장 으스타슈도 부럽다. 영화를 계속할 수 있고, 자신이 보는 세상의 본질을 자기 스타일의 영화로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게 부럽다. 가장 큰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내 영화의 경우에는 그런 지점에 있어서 장르적이고 짜인 작업이기도 하고, 상업적인 고민 등으로 인해 닫혀 있는 것 같다. 영화를 볼 때 외적인 현상이나 스타일로 볼 것인가, 아님 주제로 볼 것인가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후자의 측면에 있어서는 나도 조금 ‘의식적인’ 감독이라고 스스로 평가한다. 농담 삼아 프로그래머님에게 “작가를 말하다”에 나는 왜 안 불러주는지 물어본 적이 있다(웃음). 실제로 <용서받지 못한 자>, <비스티 보이즈>, <베티 블루>, <나쁜 피> 이런 영화들을 보면서 내가 영화를 그렇게 안 만든다고 해서 그런 영화에 공감 못한다는 건 아니다. 오늘 이 영화를 보면서 느낀 건 이 영화가 순간을 포착해내고, 자신의 삼각관계를 행복하게 바라본다는 거다. 저런 찰나의 순간, 아름다운 순간들이 내 젊은 시절에 있었던가. 없었다면 저런 시절이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이게 내 영화의 에너지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새로운 것들을 돌이켜보는 자리가 된 것 같다.

김성욱 : 예전에 필립 가렐이 인터뷰에서 사람들이 종종 영화가 삶을 구제해준다고 말하는데 으스타슈의 죽음을 돌이켜보면(장 으스타슈 감독은 81년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영화가 한 사람의 삶도 구제해주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끔찍한 사건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던 적이 있다. 가슴 아픈 일이다. 이 영화는 68혁명의 좌절 이후의 73년의 시대의 공기를 담고 있다. 윤종빈 감독도 그런 걸 좋아하는 듯한데.
윤종빈 : 이 영화랑 비슷한 걸 꼽자면 386의 후일담인 <경마장 가는 길>같다. 이 영화를 다시 보면서 확신이 드는 건 겉으로 남녀의 연애, 섹스 얘기를 하고 있지만 본질은 68혁명 이후 사람들의 공황상태와 그 시대의 공기를 담으려고 노력했다는 것이다. 영화 속 대사로 영화의 본질을 얘기할 때나, 68혁명 당시 “살고 싶었다” 같은 얘기, 베로니카가 울면서 하던 얘기도 그렇고, 대사에 소우주가 담겨 있다는 생각을 했다.

김한민 : 나는 마지막 장면에 의문이 들었다. 마지막에 레오가 바래다줄 때 마리는 혼자 계속 음악을 듣고 있다. 그리고 다시 바래다준다. 만약 홍상수 감독님이나 윤종빈 감독이라면 거기서 끊었을 것 같은데 그 뒤에 결혼 얘기와 토하는 것까지 나온 다음에 끝난다.
윤종빈 : 나는 그게 핵심이라고 생각했다. 처음 볼 때는 왜 이렇게 길게 갈까 했는데 마지막에 에디트 피아프의 노래가 또 나오는 걸 보니 회귀하는 것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성장하는 게 아니라 똑같은 과정으로 회귀한다는 느낌말이다. 그래서 이 음악을 틀어주는 죽은 시간이 이 영화에서 미학적으로 가장 파격적인 선택이 아닐까.

김한민 : 노래를 길게 끄는 건 좋은데, 그 뒤의 에필로그 같은 프로포즈와 토하는 장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윤종빈 : 레오가 바로 찾아가서 얘기하면 되는데 그렇게 안 한 이유를 생각해보면, 레오의 행위에 원래 그런 게 많기도 했다. 가다가 말고 돌아오는 그런 해위. 그래서 나는 이게 회귀라고 생각했다. 변하지 않는 것, 일테면 <해변의 여인>에서 고현정의 차가 유턴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 맥락에서 동질감을 많이 느꼈다. 한편으로 쟤 저렇게 살면 안 된다는 생각도 했다.

김성욱 : 장 으스타슈가 이 영화를 직접 들고 모로코에 가서 밤새 사람들이랑 진지하게 얘기했다고 하더라. 오늘도 이 영화에 대한 서로 다른 생각을 갖고 얘기하면 8시간, 10시간씩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오늘 긴 시간 영화도 보고 시네토크에도 참석해주신 관객 분들에게 감사드린다. (정리 : 김보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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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욱이 추천한 니콜라스 뢰그의 <쳐다보지 마라> 시네토크

1월 16일 3시, 서울아트시네마에서 니콜라스 뢰그의 <쳐다보지 마라> 상영 후 올해 친구들 영화제의 첫 시네토크가 이어졌다. 이 영화를 선택한 박찬욱 감독은 이 자리를 빌어 자신의 무의식에 크게 자리 잡고 있는 영화라고 소개하면서 영화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표현했다. 더불어 그는 얼마 전 영국에서 뢰그 감독을 직접 만날 기회가 있었다며 뢰그와 그의 영화에 관한 흥미진진한 비사도 전했다. 테마나 이미지에 있어 박 감독의 <복수는 나의 것>, <박쥐>와도 연결점을 발견할 수 있어 더 흥미로웠던 그 시간을 담아본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
: 친구들 영화제를 위해 감독님이 꼽았던 다른 두 편의 영화도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한 영화였다. 그 중 <쳐다보지 마라>를 상영하게 되었는데, 이 영화를 어떻게 선택하게 되셨는지. 그리고 오늘 다시 본 느낌은 어떠셨는지.
박찬욱(영화감독) : 이 영화는 논리적으로 말끔히 설명되지 않는다. 모든 것이 불명료하고 모호하다. 사실 그렇기 때문에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에도 가장 뛰어난 공포 영화, 또는 공포 영화 장르의 범주를 벗어나서, 가장 무섭고 아름다우며 불안한 영화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것 같고, 저도 그래서 좋아한다. 2003년, 제가 영화제 때문에 런던에 갔을 때 이 영화를 보게 되었다. 마침 그 때가 영화가 개봉한지 30주년이라 깨끗한 새 프린트로 영국 전역에서 정식으로 재개봉했다. 그만큼 이 영화는 영국인들이 자부심을 갖고 있는 영화다. 아내와 함께 영화를 봤는데 그 때의 경험이 우리 부부에게는 잊을 수 없는 경험으로 남아있다. 지금도 이 영화를 본 얘기를 하곤 한다. 요즘 들어 제 영화들을 돌이켜 보니까 이 영화에서 영향 받은 것이 많다는 생각을 했다. 이를테면 딸아이가 물에 빠져 죽은 <복수는 나의 것>의 아버지나 <박쥐>에서 계속해서 강우의 유령이 나타나는 이야기가 그렇다. 강우도 물에 빠져 죽고, 물에 젖은 그의 유령이 나타나자 집안도 젖어가고 축축해진다. 그것은 강우가 죽은 호수를 떠올리게 한 장치였는데, 어쩌면 그런 것들이 이 영화에서 근거한 것일지 모르겠다. 알게 모르게 저의 무의식에 크게 자리 잡고 있는 영화이다.

김성욱 : 감독님의 영화에서 ‘죽은 아이’라는 테마, <복수는 나의 것>에서 송강호에게 나타나는 물에 젖은 아이랄지, 그리고 이후의 영화들에서도 아이의 유괴나 죽음이 등장한다.
박찬욱 : 제가 아마 부모가 되지 않았더라면 그런 이야기를 다루지 않았을 텐데, 누구나 그렇듯이 부모가 되면, 자신의 죽음보다도 더 끔찍하고 가장 두려운 사건으로 상상하게 되는 게 아이에 관한 거다. 저는 제가 만드는 영화에서 항상 최악의 상태를 원하기 때문에, 모든 행복과 쾌락을 앗아가는 최악의 사건으로서 그런 이야기를 다루게 되는 것 같다.


김성욱 : 초반부 장면이 인상적이다. 도날드 서덜랜드가 보고 있던 사진에 빨간 물감이 퍼지고, 아이의 죽음과 연결되어지는 장면, 액체적인 방식으로 죽음을 표현한 것 같다. 또 죽음과 색채가 연결되는데, 영화 곳곳의 붉은 색이 그렇다. 그런 표현의 방식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박찬욱 : 이 영화에서 사용된 기법이란 것이 당시엔 상당히 충격적이었던 모양이다. 몇 달 전, 런던에서 뢰그 감독을 만나 얘길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감독이 하는 말이 자신은 영화를 만들어서 개봉 당시에는 한 번도 비평적으로 평가 받지 못했다고 하더라. 이 영화도 개봉했을 때 굉장히 평가가 안 좋았고 특히 미국평론가들의 혹평이 많았다. 이 영화에서 시제를 혼동시키는 것, 과거와 미래가 자꾸 현재에 끼어드는 방식은 뢰그 감독만의 개성이라고 할 수 있다. 데뷔작인 <퍼포먼스>에서도 그러한 점들이 나타난다. 특히 섹스장면에서의 크로스커팅과 플래시포워드는 영화를 처음에 봤을 때는 촬영 때부터 정해져있던 편집이었는지, 편집과정에서 즉흥적으로 나온 것인지 궁금했었다. 지금 보니 촬영단계에서 정해져있었던 게 아닌가 싶은데, 왜 그렇게 했을까. 이 영화에서 섹스 후 옷을 입고 화장하는 게 무슨 중요한 일이라고 굳이 그런 것들을 섹스장면에 집어넣었을까. 의도를 알기 어려운 편집인데, 감독이 직접 말하길, 그저 부부의 일상을 보여주고 싶다고 하더라. 섹스라는 것이 부부에게 옷을 입고 밥을 먹는 것처럼 자연스런 생활의 일부라는 생각을 갖고 찍었다고. 아마도 아이의 죽음 이후 부부가 처음 나누는 정사인 것 같은데, 어떻게 보면 드라마 상에서 중요한 터닝포인트라고도 할 수 있는 사건에서 부부의 관계회복이라든가, 일상으로의 복귀를 환기시킨다. 더 나아가 미래가 현재에 끼어든다는 것, 미래를 보는 남자와 장님을 그러한 형식, 기법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 같다.

관객1 : 거울장면이 기억 남는데, 줄리 크리스티가 거울 보는 장면에서 <올드보이>의 미용실 장면이 생각났다. 감독님의 소견은.
박찬욱 : 이 영화가 독특하고 알 수 없는 지점은 관객을 자꾸 엉뚱한 상상을 하게 만들면서 결말로 이끌어간다는 거다. 전 식당에서 여자가 기절하는 장면은 상징적인 죽음이 아닌가 생각했고, 그 이후의 삶이란 유령과 같은 것이라 보았다. 서덜랜드가 성당에서 떨어질 뻔한 것도 그렇고, 거울 장면도 그렇고, 경찰에 가져가는 폴라로이드 사진의 이미지도 전체적으로 유령과 같은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그런데 결말은 그녀가 아니라 결국 남편이 죽는 이야기다. 그래서 이 부부는 둘 다 유령 같다는 느낌이 들게 된다.

김성욱 : 영화 곳곳에 두 사람을 지켜보는 이상한 시선이 있다. 초반 화장실씬도 그렇고.
박찬욱 : 영화에서 주인공을 힐끗 보거나 쳐다보고는 사라지는 사람들이 계속 등장하는데, 뭔가 안 좋은 사건 한 가운데에서 사람들에게 관찰당하는 그런 느낌들을 받게 된다. 화장실의 늙은 여자, 주교와 면담하고 있는 젊은 여자와 그 한켠에서 안절부절 하는 젊은 남자, 여자경찰관 통역도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다. 형사도 그렇다. 그가 몽타주 그림을 보면서 ‘몽타주는 산 사람도 시체처럼 보이게 한다’는 말은 자매를 유령처럼 느끼게 하기도 한다. 주교의 표정도 이상하다. 살인사건의 범인은 주교인가 하는 생각도 들고, 아님 형사인가 싶기도 하다. (웃음) 의도적으로 뭔가 감추고 있는 것 같은 표정들로 불안을 조성한다.

관객2 :
<쳐다보지 마라 Don't look now>는 제목의 의미가 뭐라 보는지.
박찬욱 : 이 영화는 본다는 게 중요한 영화다. 장님인데 무언가 보는 사람, 자신의 미래를 보는 남자가 그렇다. 또 이 영화는 시간에 관한 영화이기도 하다. 보는 것과 시제에 관한 영화라는 걸 알려주는 제목이긴 한데 구체적으로 무얼 의미할까. 결론은 확실치 않지만, 더 이상 과거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이야기인 듯하다. 부부는 아이의 죽음에 대해서 죄의식을 갖고 있는데, 거기에 더 이상 사로잡히지 말라는 말이다. 결국 서덜랜드를 죽이는 연쇄살인자가 빨간 우비를 입은 사람이라는 것은 이 남자의 죄의식이 만들어낸 환영이 아닐까. 그가 보는 빨간 우비는 물에 비친 이미지로 나타나는데, 그런 장면들은 계속해서 이것은 환영이고 죄의식과 연결되어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김성욱 : 본다는 것과 관련해 인상적인 것은 형사가 시체를 찍은 사진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영화가 만들어진 시기인 70년대의 영화들에서, 이상하게 본다는 것과 죽음이 많이 연결된다. 끔찍한 것을 보는 행위가 영화에서는 분명히 명시되지 않고 색깔이나 다른 사람들의 모호한 시선을 통해 중개되어 나타난다. 이런 류의 모호하고 알 수없는 영화들이 나왔던 시대의 트라우마나 공기가 연결되어있다는 생각도 좀 든다.

관객3 : 감독님의 영화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맞게 되는 죽음, 운명이 나타나는데, 이 영화도 그렇다.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운명에 관한 이야기 같다는 생각도 드는데.
박찬욱 : 뭔가 정해진 운명에서 벗어나기 힘들다는 숙명론적인 세계관이 그 당시의 젊은 감독들에게 좀 있었던 것 같다. 데뷔작인 <퍼포먼스>라는 영화를 60년대 말에 만들었는데, 그 당시의 히피문화, 혁명에 대한 절망적인 시선이 들어나 있다. 이 영화는, 60년대를 보낸 지식인 부부가 부식되고 침몰하는 도시인 베니스에 와서 오래된 것들을 수리하고 복원하는 일을 하는데, 그것이 굉장히 부질없는 일처럼 느껴진다. 그런 암담한 전망이 이 영화에 들어있지 않나 싶다.

관객4 : 히치콕 영화의 느낌을 많이 받았는데.
박찬욱 : <현기증>을 떠올리게 하는 점이 있다. 이 영화의 원작자 다프네 뒤 모리에는 히치콕의 <새>나 <레베카> 같은 영화의 원작자이기도 하다. 이 영화가 각색을 너무 심하게 해서 제작자와 감독이 뒤 모리에에게 겁을 좀 냈다고 한다. 그런데 나중에 뒤 모리에가 감독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원작과 많이 바뀌긴 했지만, 자기가 처음 이 소설을 쓰면서 생각했던 이미지, 슬픔에 잠긴 부부와 베니스의 이미지가 잘 녹아있다는 얘기를 했다고 한다.

관객5 : 영화를 보면서 믿음과 우연의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둘 사이에 어떤 문제가 생겼는데, 무언가를 믿는 사람과 그렇지 않는 사람을 보여준다. 티끌이 눈에 들어가는 것에서 이야기가 시작되는데 그런 우연과 시선, 티끌 같은 것들이 쌓여가는 것에서 믿음과 운명을 떠올렸다.
박찬욱 : 말씀하신 것처럼 식당장면이 인상 깊다. 남자가 창문을 여니까 문이 열리고 거기서 비롯되어서 숙명 같은 예정된 파국을 향해서 가게 된다. 분열과 붕괴, 깨지는 이미지가 계속 등장한다. 초반에 아이가 깨트리는 유리, 엄마가 읽어주는 책 제목에도 아예 단어로 등장하기까지 한다.
김성욱 : 영화에서 모자이크 조각을 붙이다가 붕괴되어 파편화되는 장면도 그렇다.

관객6 : 이렇게 좋은 영화를 추천해주셔서 감사하다. 영화가 모호하긴 하지만 결론이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 ‘쳐다보지 말라’는 말은 결국 인간의 영역을 벗어나 신의 영역을 넘보지 말라는 그런 의미가 아닐까 했다.
박찬욱 : 그럴 수도 있겠다. 영화는 뭔가 봄으로써 파국을 맞는 그런 이야기다.

김성욱 : 끝으로 관객 분들께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박찬욱 : 재밌게 읽은 책 중에 <추락하는 천사들의 도시>라는 베니스에 관한 책이 있다. 바다와 소금기, 심지어 비둘기 똥에 의해 부식되고 썩어가는 베니스를 그린 논픽션이다. 가장 화려했던 유럽의 중심도시 베니스가 지금은 점점 가라앉고 붕괴되고 있는데, 이 영화도 그렇게 점점 썩어 가라앉고 있는 유럽문명에 대한 어두운 풍경을 담았다 본다.
(정리 : 장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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