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일 평론가가 추천한 루이 푀이야드의 <뱀파이어> 시네토크

2월 10일 서울아트시네마에서는 정성일 영화평론가의 선택작 루이 푀이야드의 <뱀파이어>가 하루 종일 상영되었고, 마지막 에피소드가 끝난 후 정성일 평론가의 강연이 이어졌다. 이 자리에서 정성일 평론가 “시네마테크는 영화의 박물관이 아니라 현재 진행하는 시간인 동시에 내일을 열어가는 장소라고 생각한다. 영화 자체를 물신화하지 말고 신화화하지 말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멀티플렉스에서 상영되는 <아바타>와 똑같은 관람 기분으로 1915년의 영화 <뱀파이어>를 만나기를 당부했던 그는 거듭해서 시네마테크라는 공간이 우리들에게 현재 진행형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단호하게 ‘이 영화는 내 인생의 영화’라고 말하는 정성일 평론가의 강연 내용을 전한다.


정성일(영화평론가):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에서는 영화를 선택하는 친구들에게 백지수표를 주었고 보통 친구들은 그것에 10편의 영화를 써서 냈다. 이번에 내가 가장 처음으로 상영 희망목록에 작성했던 영화는 루이 푀이야드의 <뱀파이어>였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나에게 ‘생애의 영화’이기 때문이다. 이 말을 유념해서 생각해주시기 바란다. 생애의 영화라는 건 최고의 걸작과 같은 말이 아니다. 생애의 영화라는 건 영화가 나에게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을 말한다. 나는 32세가 될 때까지 이 영화를 보지 못했고 그때까지 <뱀파이어>에 대한 이야기를 정보로 알고 있었다. 그러다가 1993년 서울단편영화제의 집행위원장으로 있을 때 끌레르몽 페랑 영화제에 참석하게 되었는데 그곳의 대학생들이 주최하는 심야상영에서 <뱀파이어>를 처음 봤다. 그때 영화를 소개하던 학생의 말이 참 인상적이었는데 그대로 옮기자면 다음과 같다. “여러분들 오신 걸 환영합니다. 우리 모두 이 영화를 1915년 당시 <뱀파이어>가 상영되었던 때와 동일하게 관람해봅시다. 영화를 보며 담배를 피워도 되고 술을 마셔도 되고 자다가 다시 와서 보셔도 되고 1915년의 상영과 같은 방식으로 이 영화를 봅시다.” <뱀파이어>의 첫 번째 에피소드가 끝날 즈음 이건 내 인생의 영화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이후에도 마음속으로 ‘이건 내 인생의 영화야’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또 한 편으로는 이 영화에 대한 끊임없는 의심이 생겼다. 그러다가 8년 후 키노를 만들던 시절 <뱀파이어>를 마침내 필름으로 다시 보며 나는 비로소 안심했다.

 

<뱀파이어>는 내 생애의 영화

 

푀이야드가 영화를 찍을 때만해도 연출은 기술자의 개념이었지 예술가의 개념이 아니었다. 푀이야드는 작업을 하면서 단 한 번도 자신을 예술가라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나는 그가 자서전에서 존경하는 예술가들의 이름을 나열할 때 그의 영화적 비밀을 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는 의젠느 앗제이라는 사진작가를 존경하며 그의 작업을 위대하다 생각한다고 고백했다. 의젠느 앗제는 평생 동안 사진을 기록의 매체로 생각했던 사람이다. 하지만 그의 사진은 발터 벤야민의 말을 빌면, 범행 현장을 미리 답사하는 느낌, 즉 파리라는 도시에 행해진 모더니즘의 비밀을 열어 보여준 느낌을 준다. 푀이야드의 <뱀파이어> 또한 그런 느낌을 준다. 푀이야드는 ‘자신이 만드는 영화는 미래의 관객을 위해 담아놓은 지금의 시간’이라는 말을 했다. 즉 그는 95년 후에 이 영화를 볼 우리를 위해 필름에 당대의 시간을 봉인해서 넘겨준 것이다. 그는 이미지의 개념들을 바쟁이 영화적으로 설명하기 이전에 영화로 인해 실천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푀이야드의 비극은 너무 빠른 속도로 영화를 찍어야했다는 것이다. 처음 이 영화를 볼 때는 잘 몰랐지만 두 번째 보았을 때는 즉각적으로 영화의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사실 푀이야드에게는 <뱀파이어>의 전체 시나리오가 없었다. 당시의 영화가 거의 그렇듯 첫 상영을 시작한 후 인기가 없으면 빨리 끝내거나 혹은 관객의 반응이 좋으면 2편을 준비하곤 했다. 때문에 푀이야드는 <뱀파이어>의 에피소드를 2주 간격으로 준비했어야 하는데 이건 정말 고역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의 전체가 가지는 불균질성, 밸런스 감각을 갖지 않고 있다는 것, 이것이 <뱀파이어>를 재밌게 만드는 요소이기도 하다.

 

푀이야드는 <뱀파이어>를 찍기 전인 1913년까지 매년 80편의 영화를 찍었다. 물론 대부분 단편영화였지만 그래도 80편은 적은 숫자가 아니다. 심지어 디지털 세대가 도래하기 전이었으니 그 고충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아실 것이다. 그러던 중 미국영화들이 넘어오기 시작했고 짧던 연쇄극들의 길이가 길어지며 프랑스 영화도 이에 동등한 경쟁력을 갖기 위해 미국의 체제에 돌입했다. 다소 따분하지만 미국영화들과의 경쟁은 전 세계영화들이 피할 수 없던 것이었다. 푀이야드가 <뱀파이어>를 찍고 4년 후에 채플린은 <키드>를 만들었고, 1915년에 그리피스는 <국가의 탄생>을 준비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전 세계적으로 갑자기 영화가 고전적인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 것이다. 미국인들은 재빨리 영화의 편집이 어떤 것인지를 깨달았고 러시아인들이 영화사에 도착하기 이전에 천재적인 수법으로 관객들을 사로잡았고 이때 톰 거닝의 논쟁 또한 시작되었다. 푀이야드는 이런 영화의 개념들이 동원되기 시작했을 때 그 길을 따라가지 않았다. 그 길은 영화의 길이 아니라 생각했던 거다. 희곡작가 아르토는 이렇게 말했다. ‘영화는 대중적으로 이끌리는 순간 천박해지지만 실험에 이끌리는 순간 부서질 거다.’ 푀이야드는 제3의 길을 믿었다. 그가 이 영화 속에서 사용했던 편집의 방식이나 딥 포커스, 그리고 특히 인상적인 부분은 더블액션을 받는 대목들이었다. 푀이야드는 의도적으로 매치 컷을 피해서 더블액션을 남겼다. 시간을 중복시켜서 중복데드타임을 자체로 활용해서 보여주고 진행하는 방식을 택했다. 다시 말하는 <뱀파이어>의 장점 두 가지. 하나는 리얼리티를 관찰하는 재능, 다른 하나는 스토리텔링에 대한 멈출 수 없는 사랑이다. 종종 두 가지는 병행할 수 없는 것으로 이야기하지만 그는 두 개를 연결시켰다.

 

‘파리’라는 도시의 기록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영화

 

무엇보다 <뱀파이어>가 훌륭한 결정적 이유는 1915년 파리를 고스란히 찍고 있다는 것이다. 기술을 동원하지 않고 고스란히 말이다. 이 정신은 다소 맥락은 다르지만 한참 후에 갑자기 장 르누아르의 영화에서 재현되어 보여지는 것, 그리고 다시 르누아르의 연출부였던 이탈리아감독들의 네오리얼리즘으로 확장된 개념을 갖고 체계화되어 발전한 것, 또 그것이 누벨바그 세대들로 이어지고 디지털카메라가 도착했을 때 중국이 그의 정신을 재조명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푀이야드는 표면을 잡으면 내부로 갈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와 함께 시대를 살던 사람들은 대부분 인상주의화가들이었고 푀이야드는 그들과 어울리며 같은 시대정신을 가지고 살았던 것이다. 여하튼 <뱀파이어>로 푀이야드가 찍어 보여준 ‘20세기 파리’의 의미는 이론적으로 말하자면 ‘모더니즘’을 찍는 것이다. <뱀파이어>의 핵심은 도시 그 자체에 있다. 그 안에서 이야기는 어떻게 작동하기 시작하는가. 그렇기 때문에 이야기에서 무엇이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보여주는가를 중요하게 생각했던 감독이 푀이야드다. 그는 그리피스가 영화의 길을 잘못 들어섰다라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하지만 영화사적으로 푀이야드는 틀렸고 그리피스는 맞았다. 영화에서 어떤 이의 천재적인 방법을 받아들이고 발전한 후 그 방법은 시간이 지나서 돌아볼 때 올드패션한 느낌을 준다. 푀이야드는 역사 속에서 저주받는 것이 꼭 역사 속에서 미학적 패배인가는 질문도 던진다. 그는 고유한 자기의 방식으로 영화를 만들며 이미지를 부수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가졌다.

 

‘왜 나는 <뱀파이어>를 보면 영화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되는가’하는 질문을 이 영화를 보면서 종종 가져왔다. 나는 가끔 영화가 언제부터 영화답게 된 것일까라는 질문 또한 종종 던진다. 이 영화는 정말 영화다운가. 사실 웃겼던 건 생전영화의 미래를 고민하지지 않던 천만 명이 어느 날 갑자기 <아바타>를 보고 영화의 미래를 근심하기 시작한 것이다. 고맙고 참 심금을 울리는 행동이었다. (웃음) 우리는 반대로 생각해야 한다. 영화를 보며 질문해보자. 무엇이 영화다운 것이고 어디서부터 영화다움이 이루어졌는가. 나는 거슬러 올라가고 싶었다. 그리고 <뱀파이어>에 도착하는 순간 이 영화가 어느 지점에서는 연극, 어느 지점에서는 사진, 그리고 어느 지점에서는 소설의 방식을 취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말하자면 부서지기 쉬운 경계에서 아슬아슬하게 걸친 채 영화다움의 정체성을 찾고 있는 영화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혹적이었다. 어느 날 문득 이 영화를 보며 ‘아, 영화는 교양으로 보는 것이구나, 상식으로 보는 것이구나’라는 걸 깨달았다. 1차 세계대전과 온전하게 겹치는 <뱀파이어>에는 전쟁이야기가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전쟁을 이야기하지 않으면서 불안의 공기를 온전히 영화 안에 끌어안고 활동하는 느낌을 전달받았을 때 바로 이것이 영화가 할 수 있는 최상의 표현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를테면 바로 이런 영화들이 보고 싶은 거다.

 

결정적으로 나는 왜 이 영화에 매혹되었을까. 첫 번째, 영화 전체의 경계들 사이로 사진이 절반정도 들어와 있었고 폐쇄된 공간에서 문을 열면 다른 세계가 나온다는 소설과 연극이 뒤섞인 공간이 존재했기 때문. 두 번째, 가장 놀라웠던 지점은 이르마 베프의 존재였다. 이게 거의 나를 미치게 만들었다. 이르마 베프의 동선 자체가 영화의 존재론을 알리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푀이야드의 <뱀파이어> 이후 이런 경이적인 체험을 단 한 번도 하지 못했다. 이건 고다르도 불가능하다. 주인공 자체가 사라지고 불투명하고 비가시적이었다가 가시적이고 또 그것이 유동적인 존재. (요즘은 조금 지났지만)유행어로, 그러니까 들뢰즈식으로 말하면 운동이미지 안에서 활동을 개시하는 시간이미지인 셈이다. 두 가지가 완벽하게 공존하고 있다. 이르마 베프라는 존재는 영화를 보기 위해서 절대적인 독해기호가 되었다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해야한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혹은 <뱀파이어>를 보고 나서 ‘이 영화가 참 훌륭했구나’라고 생각하지 말고 ‘그런데 내 생애의 영화는 뭐지?’라고 의문을 가졌으면 좋겠다. 최고 걸작을 뽑으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내게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집어던지는 작품이 어떤 것인지를 생각해보시기 바란다. 그리고 그걸 껴안을 수 있을 때, 내게 질문을 던지는 영화를 껴안을 수 있을 때 비로소 ‘영화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정리: 강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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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용, 전계수 감독이 함께한 존 워터스의 <디바인 대소동> 시네토크

 

2월 7일 일요일 오후,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컬트 영화, 존 워터스의 <디바인 대소동>이 상영된 후 이 영화를 추천한 이재용, 전계수 감독과의 대화가 이어졌다. 얼마나 많은 즐거움과 혐오감이, 환호와 야유가 교차했을지 궁금해지는 시간이었다. “영화를 처음 보신 분들은 뜨악한 반응도 있을 것 같고, 웃어야 할지 야유를 보내야 할지 주저하시는 것 같다. 워낙 특이한 영화”라는 말로 시작된 시네토크에서 이 영화를 추천한 이재용, 전계수 감독은 무엇보다 영화를 본 관객들의 반응이 제일 궁금하다고 했다. 많은 이야기들과 다양한 생각들이 오간, 영화만큼이나 예측할 수 없던 흥미로운 시간의 이야기를 옮겨본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 이재용 감독과 전계수 감독이 극장에 자주 영화 보러 오시는데, 그때마다 존 워터스 이야기를 했었고, 이재용 감독은 존 위터스 특별전을 하면 좋겠다고 말씀하시기도 했다. 전계수 감독의 경우 카탈로그 책자에 보면 추천의 변에 이렇게 썼다. “10년 전 일본의 허름한 독신자 아파트에서 그의 전작 <핑크 플라멩고>와 더불어 이 작품을 보는 내내 내가 가진 비위의 한계치를 계속해서 넓혀가야 했던, 특별히 더러웠던 경험을 기억합니다.” 두 분이 어떤 방식으로 존 워터스 감독의 영화를 접하셨는지, 어떤 점에 매력을 느끼는지 궁금하다.

전계수(영화감독): 악취미지적인 온갖 더러운 것들, 조잡한 것들, 나쁜 것들을 한데 모아서, 굉장히 설득력 없게 그리는 방식이 좋다. 왠지 ‘길티플레저(Guilty Pleasure)’ 느낌이다. 그 전에 봐왔던 숭고하고 고상한 가치를 지닌 영화들과 완전히 반대의 지점에서 출발한 영화들을 볼 수 있어서 너무나도 신기했다. 매년 친구들 영화제 프로그램들이 너무너무 좋은데, 그 대부분이 우리가 용인할만한, 포용할 수 있는 가치체계 안에서의 숭고한 가치를 보여주는 영화들이다. 나는 영화를 만드는 동기는 꼭 그런 것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고, 그래서 이 영화를 추천하게 됐다.

이재용(영화감독): 내가 처음 존 워터스 영화를 본 것은 95년, 다큐멘터리를 하다가 편집을 하기 위해서 뉴욕에 가 있을 때였다. 한국에서 좀처럼 볼 수 없었던 영화에 우선 끌렸던 것 같고, 모든 가치관이나 생각들을 뒤집는 면들에 쾌감을 느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처음 봤을 때 받았던 문화적 충격이 내 안에 잠재되어서, <다세포 소녀>에도 영향을 크게 미친 것 같다.

 

김성욱: 그러고 보면, 전계수 감독의 <삼거리 극장>도 그런 느낌이 있었던 것 같다.

전계수: <삼거리 극장>에서도 토하는 장면도 많고 온갖 더러운 것을 먹는 장면도 많다. <삼거리 극장>을 투자 받아 제작하게 됐을 때, 블로그에 존 워터스 감독에게 경의를 표한다고 쓴 적이 있었다. 정말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던 감독이다.

 

김성욱: 이런 영화를 두고 악취미라고 부르는데, 악취미의 본질이 어떤 걸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전계수 감독의 추천의 변을 보면, 꼭 이렇게 영화를 만들어야 될까라는 질문과 동시에 이렇게 만들면 왜 안 되느냐는 질문이 공존한다고 쓰셨다.

전계수: 존 워터스 감독의 다큐를 봤는데, 그가 영화를 만드는 이유는 딱 하나인 것 같다. 바로 엔터테인먼트. 워터스는 “내 영화가 아무 사회적 가치를 갖지 않은 것에 대해, 나는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심야상영관에서 영화를 봤으면 좋겠다. 그 때는 모든 가치들이 좀 더 열려 있고, 어떤 행동도 장면도 용납되고, 관객들의 반응이 어떻든 그것이 진심에서 우러나온 갈채든 야유와 비아냥이든 모든 것이 가능한 세계에서 영화가 보여지기를 원한다. 엔터테인먼트의 본질이 악취미”라고 말했다. 존 워터스 감독이 좋아하는 어린 시절의 기억이 있는데, 자동차 사고가 나서 그 안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피가 낭자한 채로 허리가 꺾어진 채 있었는데, 그 낭자한 피를 한 없이 들여다봤던 기억이라고 한다. 그 때 선혈이 낭자한 피를 보고 끌렸던 자신의 기억을 사람들과 공감하기 위해 이런 영화들을 만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김성욱: 존 워터스 감독이 했던 인상적인 또 다른 말이 있다. “만약 당신이 아웃사이더라면, 더 이상 불안해하지마라. 그걸 장점으로 하고 살아가다 보면, 당신은 더 이상 루저가 아니다. 바로 이런 것들이 내 모든 영화가 말하려던 거였다. 당신을 괴롭혀온 모든 것을 과장하고 심지어 자랑스러워한다면, 사람들은 정말로 당신을 존경하게 될 것이다. 노이로제랑 친해져라. 그것이 현대인의 성숙한 삶의 태도다.” 이재용 감독님은 이런 방식의 영화를 만드는 것, 이런 방식이 또 다른 삶의 태도라는 이야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이재용: 존 워터스 감독의 영화를 봤을 때 참 놀라웠다. 저런 영화를 만들 수도 있구나했다. 감독이 되기 전에 학창 시절부터 많은 영화를 보면서, 관습적이거나 어떤 공식이 있는 영화들, 대부분의 장르영화들, 다음 이야기가 예측되는 영화들이 어느 순간부터 재미가 없어진 것 같다. 일종의 직업병이랄까. 영화가 자꾸 눈에 보이고, 카메라 뒤에 사람들이 느껴지고, 연기할 때의 배우의 심정들이 느껴지니까, 일반 순수한 관객처럼 빠져서 영화를 못 보게 되더라. 그래서 점점 좀 다른 방식의 영화들에 빠져들게 됐다. 어설픈 연기, 우리가 연기를 하고 있다고 보여주는 것 자체가 오히려 더 거짓이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런 영화의 예측불허의 상황들을 따라가는 것이 더 즐겁다. <다세포 소녀>를 만들기 전에 만화 원작을 접했을 때, 이런 영화를 떠올렸던 것 같다. 스스로 어떤 경우는 메이저 느낌의 상업적인 영화도 만들지만, 기본적으로 그런 것들을 뒤집는 영화들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도 있기 때문에, ‘이런 영화를 나같이 이런 것을 즐기는 사람들이 어딘가에 있지 않을까, 그들과 접선을 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만들었던 영화였다.

 

김성욱: 이런 것을 즐기고 편하게 받아들이는 관객들은 한국에선 많지 않다. 전계수 감독도 <삼거리 극장>을 극장에서 맥주 마시면서 춤추고 난리치면서 보고 싶었는데, 사람들이 너무 점잖게 보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존 워터스를 비롯해서 파솔리니, 타비아니 형제, 페데리코 펠리니 같은 사람들은 세상의 참 특이한 사람들을 스크린에 가득 모아놓는다. 평상시에 잘 못 볼 것 같은 사람들이 영화 내내 진기명기처럼 등장한다. 이런 영화들의 어떤 점들을 특히 재밌게 보는지. 연기의 문제나,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의 전개나, 디바인이라는 여자의 캐릭터에 대해서나.

전계수: 제일 재밌었던 것은 디바인이 극장가서 쇼를 할 때, 쇼의 내용이 트램폴린 타는 것밖에 없는데, 그것만으로 장면이 가능하다고 생각한 존 워터스 감독의 절약정신이었다. 디바인이라는 여자가 도대체 어디까지 악행을 자신의 아름다움으로 치환해서 생각을 하는지, 그게 어떻게 가능한 건지 지켜보는 과정이 재밌었다. 범죄 안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는 역설을 존 워터스 감독은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사실 대부분의 영화들에 그런 면들이 있다. 범죄에 경도되는 대부분의 영화들에 형사나 범죄자들이 많이 나오는데, 그것은 그들의 삶이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정상성을 거스르는 추악한 나쁜 취향, 그리고 자신이 할 수 없는 범죄를 보는 쾌감들이 이런 영화를 만들게 하는 나쁜 피 중의 하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개인적으로 영화감독이 되고 싶었던 것에는 사실 그런 측면도 있다.

김성욱: 진짜 보신 분들의 반응이 궁금하다. 영화를 본 소감이나 궁금한 점이 있으면 이야기 해 달라.

 

관객1: 매혹적이고 신선하고 아주 재밌었다. 이재용 감독님이 존 워터스 감독의 전작을 보고 싶다고 하셨다고 하는데 나도 그렇다. 영화를 보는 행위는 일종의 관음적인 행위이고, 이런 신기한 일상을 벗어난 영화를 보는 것은 일종의 대리만족이다. 우리가 사람을 죽일 수는 없지만, 범죄영화를 보면서 그것을 대리로 만족하고 즐기지 않나. 이런 영화를 보니 그것을 아주 극대화시키는 것 같다. 아까 보니 ‘쓰레기 영화의 황제’라고 했는데, 그 말은 조금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 그리고 노망난 할머니는 비전문배우 같던데 맞나.

전계수: 들은 애기라 확실하진 않은데, 존 워터스의 고향이 볼티모어이고 지금도 거기서 살고 있는데, 영화에 나오는 사람들이 볼티모어에 사는 자기 이웃들이라고 한다. 저예산 영화로 찍었으니 그런 이웃을 쓴 것이겠지만, 연기를 잘하는 배우를 쓸 수도 있었는데 일부러 어색하고 책을 읽는 듯한 연기를 하게 한 것 같고, 모든 대사를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마저도 우스운 것으로 만들고 싶어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재용: 실제로 이웃이면서 친구면서 그런 문화를 아는 사람들끼리 즐기면서 만든 영화가 아닌가 싶다. ‘쓰레기 영화의 황제’라는 칭호는 고상한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 한 비난이라기보다는, 다른 의미로 저런류의 영화의 장르로의 대가라는 뜻으로 칭찬하는 말인 것 같다. 본인 스스로도 그런 말을 자랑스러워할 것이라 생각된다.


 

관객2: 존 워터스의 영화를 좋아하는데, 일관적으로 두 가지 주류를 한꺼번에 비교하면서 비판한다는 느낌이다. <디바인 대소동> 같은 경우, 주인공 여자가 자신이 아름답다는 생각을 밀고나가면서 그것으로 인해 범죄를 저지르고 그로 인해 사회적 비판을 받는데, 감독은 비판하는 사회 그 자체를 여주인공보다 더 비판한다는 느낌이 든다. 여주인공에 대해서는 연민을 느끼게 되기도 한다. 인물들의 행동이 지저분하고 폭력적이기도 하지만, 그 인물들에 애정이 생기기도 하는 것은, 감독이 그들에게 품고 있는 연민이 담겨 있기 때문인 것 같다. 또한 존 워터스 영화의 가장 큰 매력은 이야기의 전개가 전혀 예측불가능하고, 신선한 발상이 거침없이 드러나는 점에 있는 것 같다.

 

관객3: 나는 영화를 볼 때, 이 감독이 친구들과 영화를 가지고 그냥 논다고 하는 생각이 들어서, 나도 같이 참여해서 놀았다. 이런 영화를 당당하게 만든 존 워터스 감독의 용기가 존경스럽다.

이재용: 누군가가 <다세포 소녀>를 만들 당시 약을 먹고 찍었냐고 물었는데, 이 영화는 정말 약을 먹고 찍었을 것 같다. 이 영화는 극단적으로 가서 어떤 경지까지 이룬 느낌이 든다. 언젠가 제작의 여건이나 문화적 여건에 따라 이런 영화도 꼭 도전해 보고 싶다는 욕망이 있지만, 이런 것이 어떻게 관객과 만날 수 있을지가 가장 어려운 지점이다.

 

관객4: 영화를 보면서 굉장히 맘에 들었던 게, 보통의 영화처럼 엔터테인먼트나 쇼 비지니스의 화려한 이면 뒤의 역겨운 것을 풍자하지 않고, 오히려 진짜 직설적으로 스트레이트하게 ‘그것이 진짜 역겹다’고 보여준 점이다. 궁금한 게 이 당시 존 워터스 감독이 이런 영화를 만들 수 있었던, 할리우드의 산업구조를 알고 싶다.

이재용: 할리우드과 완전히 떨어진 독립영화다. 십시일반 자기 친구들 공짜출연으로 만들어진 영화였다. 심야영화나 예술영화관에서 이뤄지는 소통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런 것들이 어떤 진정성을 인정받으면서 조금씩 메이저로 들어가기도 했지만, 여전히 할리우드 메이저에서 영화를 만드는 감독은 아니다.

전계수: 산업적 배경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문화적 배경은 60년대의 히피 문화와 특히 펑크 문화가 드러나는 것 같다. 60년대의 약간 기성적인 것, 질서, 관습, 전통에 대한 의미 있거나 혹은 이유 없는 반발들이 하나의 세대적인 문화로 자리 잡았을 때의 그런 정신이, 이런 영화가 가능하고 이런 영화를 향유할 관객이 있다고 생각한 이유가 아닐까 싶다. 물론 이 영화는 처음에는 배급사를 못 잡았다. 놀랍게도 처음에는 교회를 빌려 상영했다고 한다. 다큐멘터리를 보니 그 교회의 목사님이 그 사실을 매우 자랑스러워하더라.

 

김성욱: 이런 영화를 상영하게 해준 목사든, 만든 사람이든, 출연한 배우든 자부심을 갖는 것일 게다. 영화 속에는 매일 매일이 트러블로 가득하다. 그 트러블들을 받아 안아서 그걸 가지고 과장되게 만들어 내는 것. 그것을 도피하거나 회피하지 않고 그걸 가지고 그것과 맞서서 살아가는 것. 그런 이상한 자신감이 이런 영화를 보며 생기는 거 같다. 죽음의 순간까지 수그러들지 않는 디바인의 모습은 어떤 면에서는 숭고하기도 하다. 나중에 존 워터스 영화 특별전을 하게 돼서 일주일 내내 이런 영화들을 보게 된다면 우리가 어떻게 변할지 궁금하다. 두 분이 평소에 전혀 틀지 못했던 영화를 선정해주셔서, 특이한 문화적 충격을 만들어내 준 것 같다. 하지만 아쉽게 끝내야 한다. 마지막으로 한마디 해주신다면.

전계수: 존 워터스 감독에게 가장 크게 배운 것은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눈치 보지 않고 밀어붙이는 태도가 우리의 삶을 다양하고 폭넓게 만든다는 점이다. 나도 계속해서 이상한 것들에 대한 끌림을 부정하지 않고 만개시키는 영화를 앞으로 만들겠다.

이재용: 어떤 면에서 영화는 큰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저 영화일 뿐이기도 하고 즐기기 위한 도구이기도 하다. 영화를 너무 진지하게만 보기보다는, 열린 마음으로 다양한 영화를 접할 수 있으면 좋겠다. (정리: 박영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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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 감독의 선택, 칼 드레이어의 <오데트> 시네토크

2월 6일 토요일 오후, 홍상수 감독의 선택작 <오데트>의 상영 이후 허문영 평론가의 진행 하에 관객과의 대화가 펼쳐졌다. 느린 트래킹으로 시작한 영화는 보는 이를 유혹하기 위해 현란한 재주를 부리는 영화와는 거리가 멀었다. 기적의 순간에 가닿기 위해서는 긴 기다림이 필요했다. 하지만 영화가 마지막에 다다르기도 전에 이미 우리 모두는 잉거의 부활을 마음속으로 바라고 있었을 것이다. 20년 만에 <오데트>를 다시 보게 되어 너무 좋았다는 홍상수 감독의 애틋한 목소리에서도 마지막 순간의 떨림이 그대로 이어졌다. 허문영 평론가 역시 과도한 설명을 아끼려는 모습이었던 그 현장을 전한다.


허문영(시네마테크부산 원장, 영화평론가): 이 영화를 보신 많은 분들도 그렇게 느끼시겠지만, 다시 볼 때마다 새롭게 느껴지는 신비로운 영화인 것 같다. 먼저 감독님이 이 영화에 대해서 느끼시는 바가 궁금하다. 이 영화를 처음 접했을 때의 느낌과 이 영화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으신지.

홍상수(영화감독): 사실 관객 분들이 어떻게 보셨는지가 더 궁금하다. 이 영화를 꼭 보여드리고 싶어서 추천했고, 같이 볼 수 있게 돼서 좋았다. 스물일곱인가 스물여덟에 처음 봤고, 오늘 두 번째로 봤다. 대학원 다닐 때였는데, 소위 말하는 클래식이란 영화들을 찾아보고 있던 시기였다. 그 때 보자마자 평생 기억하고 있을 만한 영화라고 생각했고, 이후로도 가끔씩 생각했던 영화다. 영화를 만들겠다고 생각했던 학생으로서 중요한 레퍼런스 포인트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또 영화를 만드는 사람으로서 내게 이상적 표본이 된 영화 중 하나다. 이후에 가끔 이 영화를 다시 떠올리면 카메라의 수평운동, 계속되는 카메라의 느린 움직임과 긴 기다림이 기억난다. ‘긴 기다림이 있어야만 이 결말이 믿어질 수 있구나’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카메라 움직임부터 여기 나오는 인물들, 그들의 성격이나 인품, 단순한 세팅, 이런 것들이 모두 모여서 우리를 자꾸 어떤 믿음으로 몰고 가고 준비시킨다. 그리고는 아주 한참 걸려서 우리는, 물론 만들어진 그림이고 연기한 것이지만, 마지막 장면의 기적이 실제로 일어난 것임을 믿게 된다. 다른 영화에서도 사람을 살리는 정도의 기적은 많이 만들어지지만, 그것을 보고 감동을 받은 적이나 정말 믿고 싶었던 적은 없었다. 그런데 이 영화를 봤을 때는 마지막 장면을 믿고 싶었고, 기적이 일어나길 기다렸고, 실제로 며느리가 다시 살아났을 때는 정말 믿었던 것 같다.

영화의 힘을 느꼈다. 이 영화에는 눈으로 기적을 볼 수 있게 만들고, 그것을 믿게 하는 힘이 있다. 이 영화는 만든 사람의 영악함이나 계산이 아니라, 만든 사람이 영화를 얼마나 진지하게 생각한 사람이었나를 생각하게 만든다. 영화를 통해서 이런 것을 할 수도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영화의 모든 부분들, 리듬이나 대사의 깨끗함, 인물들의 인품을 만들어낸 과정에서 만든 사람의 진지함, 충실함을 느낄 수 있다. 그런 점들이 좋아서 칼 드레이어가 쓴 책을 읽어봤는데, 책은 좀 답답하더라. 좀 답답한 사람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지혜로운 사람이라기보다는 충실함에 대한 바람, 관심, 열정이 있었던 사람인 것 같다. 충실한 마음가짐이 무엇인지, 우리는 그런 충실함으로부터 왜 멀어졌나에 대해 고민했던 것 같다. 그런 진심을 갖고 만들었기 때문에 이런 영화가 나왔다고 생각한다.

이런 영화를 보고나면 내가 믿고 있는 헛된 잡소리들, 내가 쌓아놓은 관념적인 탑들, 사람들한테 잘 통한답시고 습관처럼 하는 제스처들, 과잉된 자의식 같은 것들 때문에 움츠러들어서 제대로 사랑해 주지 않은 내 속마음을 있는 그대로 봐줘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한 사람의 관객으로서 봐도 이 영화를 잘 골랐다는 생각이 든다. 이 영화가 기독교 영화라고 생각하는 분도 있겠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서 이런 진지함과 충실한 마음으로 영화를 만들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해주는 영화다. 그런 중요한 문제를 환기시키고 건드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은 영화라 생각한다.

허문영: 말씀하신 것보다 더 나은 설명을 덧붙이기 어려울 것 같지만 그래도 몇 가지 질문을 드리긴 해야 할 것 같다. 기독교적인 부분들 때문에 얼핏 이 영화는 감독님과 안 어울려 보이기도 한다. 굉장히 경건하고 금욕적인 분위기의 영화처럼 보여서 많은 사람들이 쉽게 이 영화를 종교와 신앙 문제에 관해 고뇌하는 영화로 받아들이고, 잉거의 부활을 종교적 신앙의 실현, 믿음의 실현으로 이해하곤 한다. 기독교 영화로 보지 않으셨다면, 어떤 측면에서 이 영화를 보셨는지 궁금하다.

홍상수: 이 분이 어떤 배경에서 이 영화를 만드셨는지는 모르겠다. 기독교적 신앙이 있는 분이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예를 들어 전쟁 영화에서는 저 빌딩을 돌아서면 적이 있고, 적들을 죽이려면 오른쪽으로 돌지 왼쪽으로 돌지를 고민한다. 전쟁 얘기면 전쟁가지고 얘기하는 것이고, 연애얘기면 연애가지고 얘기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이야기가 다루는 문제가 어느 정도의 현실 속 리얼리티를 갖고 있느냐하는 점에 대해서는 별로 상관하지 않는다. 이 영화도 기독교와 상관없이 봐도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 분이 정하신 주제의식과 환경, 재료들이 있는 것이고, 그것들로 만들어낸 인물들과 주어진 상황 속에서 그것들이 부딪히면서 어떤 작용을 일으키느냐가 더 중요한 문제인 것 같다. 그런 점에서 너무 잘 만들어진 영화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마음속의 충실함이란 것에 도달하려는 사람들이 회의를 느끼는 모습들이 여러 인물들에 잘 나뉘어져 있다. 첫째아들과 아버지, 반대편에 있는 재단사, 그 모두를 다 사랑하는 며느리, 미친 사람 취급받는 남자에 잘 나눠져 있다. 그들이 믿음에 관해 하는 얘기도 전혀 교조적이지 않다. 아마 영화를 보시면서 충분히 느끼셨을 거라고 생각한다.

 

허문영: 계속해서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에 참여하고 있는데, 작년에는 에리히 본 스트로하임의 <탐욕>, 재작년에는 장 비고의 <라탈랑트>, 그 앞에는 브뉘엘의 <절멸의 천사>를 고른 것으로 기억한다. 최근 추천작들을 보면 <오데트>를 포함해서 모두 무성영화거나 무성영화 시대에 자신의 이력을 시작한 감독들의 영화다. 무성영화의 자장 안에 있는 영화들을 더 좋아하는 것 같다. 본인은 유성영화시대가 시작된 지 한참 지난 뒤에 영화를 시작해서 유성영화를 만드는 감독인데, 무성영화에 대한 남다른 애호가 있는 것 같다.

홍상수: 무성영화를 많이 보지는 못했다. 추천작들이 오래된 영화들이기는 하다. 보신 분들은 어떠실지 몰라도, 그 무렵의 영화들이 좋다. 보고 진짜 훌륭하다고 느끼는 영화들은 이런 옛날 영화들이더라. 자연스럽게 나에게 박힌 영화들이 있다. 굳이 얘기하자면 뤼미에르 형제가 맨 처음에 만든 짧은 단편들을 좋아한다. 영화관에서 틀 수 없을 정도로 짧은 쇼트들인데, 보고 너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안개 낀 부둣가에서 남자들이 배타고 가는 것을 찍은 쇼트가 있는데, 움직임 자체가 주는 느낌만으로도 예쁘고 아름다웠다. 영화의 원류가 된 분들의 영화에 많이 끌린다. 물론 초기 영화감독들도 전시대의 화가나 소설가에게 영향을 받았겠지만, 그들이 영화적 완성도에 도달하면서 영화의 위치가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 계속 다시 보고 싶다고 느끼는 영화들은 대부분 그런 분들의 영화다. 그 이후의 감독들은 시기적으로 늦게 태어나서 할 수 없이 그 전의 것들을 흡수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단지 흡수한 것을 여러 가지로 섞을 때 자신의 태도가 반영되고 재능이 표현되는 거라고 생각한다.

 

허문영: 그런데 이 영화의 제목은 공교롭게도 ‘말’이라는 뜻의 <오데트>다. 이 영화가 말을 다루는 방식은 우리가 보통 접하는 유성영화가 말을 다루는 방식과는 좀 다른 느낌을 준다. 그런 점에서는 감독님의 영화에서 대사를 다루는 방식과도 통하는 점이 있다고 생각된다. 단지 듣기에 아름다운 것뿐만 아니라 조화의 느낌이 있다. 대사가 정보 전달이나 의미 전달의 기능을 한다기보다는 그 자체로서 하나의 육체로, 혹은 배우라는 육체에 부착된 물질적 음성으로서 감각된다. 듣고 있으면, 저 음성과 저 방식으로 말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말의 물질성, 육체성을 중시하는 점이 공통적으로 느껴진다. 실제로 드레이어는 영화를 찍을 때 현장에서 음성을 매치시켜 보고 잘 안 맞다 싶으면 대사들을 빼버렸다고 한다. 감독님은 이 영화가 말을 다루는 방식에 대해서 어떻게 느끼셨는지.

홍상수: 개인적으로는 말들이 듣기에 너무 좋았다. 귀가 편했다. 내용은 자막을 통해서 이해했지만, 말들 한 마디 한 마디가 딱 있을 것만 있는 느낌이다. 인물들의 인품 때문에 그렇기도 하겠지만, 하나도 거슬리는 것이 없다. 상투적인 표현으로 음악 같다고 할까. 쓸데없는 것이 붙은 곳이 하나도 없는 것 같다. 인물들도 무척 좋았다. 저런 시대나 장소가 실재했었는지는 모르지만, 사람들이 하나의 가치관 속에 묶여 살면서 그 속에서 서로 더 충실하려고 애쓰고, 가끔은 서로 다른 의견 때문에 부닥치기도 하는 커뮤니티의 존재를 느끼게 해주는 것 같다. 오즈 영화에 나오는 인물들도 현실이라고는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예쁘지 않나. 하나의 큰 가치관 속에 묶여 있으면서 서로 충실하려는 사람들이고, 어떤 힘든 일이 생겼을 때 그걸 극복하려는 애씀 자체가 예쁜 인물들이라고 생각한다.

 

허문영: 말하셨듯이, 물결이 조용히 흐르는 것 같은 카메라의 수평 트래킹과 롱테이크가 특히 인상적이다. 물론 롱테이크나 트래킹이 새로울 것은 없지만, 이 영화에서는 각별한 느낌을 자아낸다. 드레이어는 영화사상 가장 격렬한 몽타주 영화 중 한 편인 <잔 다르크의 수난>을 만든 사람이지만, 전체 필모그래피에서 <잔 다르크의 수난>은 좀 예외적인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오히려 그는 이 영화에서와 유사한 카메라 워크와 롱테이크를 더 선호했었던 것 같다. 드레이어 본인도 인터뷰에서 “나는 롱테이크에 대한 강한 믿음이 있다”고 밝힌 바가 있다. 감독님이 영화를 만들겠다고 생각했던 청년시절에 이 영화를 봤을 때는 트래킹과 롱테이크가 어떻게 다가왔을지 궁금하다.

홍상수: 처음 봤을 때는 답답함이 있었다. 그러다 마지막에 가서, 그 답답함도 필요했었구나, 하고 생각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오늘 보면서는 훨씬 편했다. 나이 탓도 있겠고, 생각이 달라진 탓도 있을 것 같다. 그 때 놓친 것이 많았던 것 같다. 오늘은 인물들도 구경하고, 인물들이 만들어나가는 관계도 봤다. 사이사이에 구경하고 쳐다볼 게 너무 많아서 답답함을 못 느꼈다.

 

관객1: 영화를 본다는 체험이 어떤 것인지 알게 해 주는 위대한 영화라고 생각했다. 신이 있나 없나를 따지기 보다는, 감독이 다루고자 하는 주제를 어떻게 관객이 체험하게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트래킹과 긴 호흡을 통해 보여준 좋은 영화인 것 같다. 보면서 베르히만의 <처녀의 샘>이 계속 떠오르더라. 그 영화도 굉장히 호흡이 길면서 마지막에 큰 울림을 주는 영화였는데, 보셨다면 어떤 느낌이셨는지.

홍상수: 그 영화도 봤지만, 이 영화를 훨씬 좋아한다.

허문영: 실제로 드레이어가 좋아했던 영화 중 한 편이 <처녀의 샘>이었다.

 

관객2: 작년에 필름포럼에서 <오데트>로 강연하실 때 마지막 키스가 주는 육체적 느낌에 대해 말씀하셨던 것이 기억난다. 오늘 보니 훨씬 더 이상하고, 훨씬 더 육체적인 느낌이 든다. 마지막에 신을 부르는 대신 삶이라고 말하는 장면도 이상하게 다가온다.

허문영: 마지막에 나오는 잉거의 키스 장면은 너무 외설적일 정도로 적극적이다. 아기가 네 동강이 나서 죽었다는 끔찍한 사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다시 애라도 만들어야 할 것 같은 동물적인 느낌을 준다. 그런 느낌까지 드레이어가 계산했는지 여부를 떠나서, 이 영화에는 관능적이고 외설적이면서 육체적인 세계가 공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관객3: 진심이 전달되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한데, 믿음은 이성으로 되는 것도 아니고 의지로 되는 것도 아니고, 순수한 상태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이 일어나야 가능한 것 같다. 공통의 염원이 이루어지는 방식도 비슷한 것 같다. 영화에서 어린 딸이 신이 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단지 엄마가 살아 돌아오기만을 바라는데, 그런 순수함이 기적을 가능케 한 것 고, 거기서 오는 감동이 있다.

홍상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세상에서 제일 가치 있고, 그렇지만 잡으려면 잡을 수 없고, 또 있으면 엄청난 힘을 얻고 너무 편안해 지는 것이 믿음인 것 같다. 믿음은 특권 같다. 특권은 권리가 아니라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분석을 통해 믿음을 확보하는 방법을 찾거나, 증거가 있으니까 믿음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자기 자신이 제일 온전한 상태일 때 자기가 느낀 것, 본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이 아닌가 한다. 내가 본 것과 느낀 것을 통해서 이미 생각하기도 전에 내가 그것을 믿고 있는 거다. 하지만 내가 불안하고 흐트러져 있을 때는 온갖 잡것들이 낀다. 그러면 온전한 상태에서 느끼고 본 것을 자꾸 분석하려고 든다. 증거를 대야 믿을 수 있다는 목소리가 있어서 결국 못 믿게 만드는 거다. 믿음은 확고하거나 자물쇠로 채워놓은 것도 아니고, 내가 딴 생각이나 딴 짓거리 하고 다녀도 그대로 있는 것도 아니고, 한 번 믿으면 끝나는 것도 아니다. 내가 온전한 상태를 유지해야만 내 속에 계속 믿음이 있을 수 있다. 믿음은 너무 많은 것을 주는 큰 행복이기 때문에 그것에 증거를 댈 필요도 없고, 그것을 남에게 자랑하고 팔고 할 필요도 없는 것 같다.
(정리: 이후경)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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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 감독의 선택작 존 부어맨의 <서바이벌 게임> 시네토크

2월 5일 서울아트시네마 마지막 회는 봉준호 감독이 선택한 존 부어맨의 <서바이벌 게임>이 매진 사례를 기록하며 상영되었고, 이어서 봉준호 감독과의 흥미로운 시네토크가 진행되었다. 약간의 주석과 함께 존 부어맨 감독을 대신하여 영화의 각 장면들과 배우 그리고 흥미진진한 촬영 뒷이야기까지 전달해준 봉준호 감독의 걸출한 입담으로 시종일관 열광적인 분위기 속에서 이어진 시네토크는 <서바이벌 게임>의 여운을 더 남기게 했다. 선수보호 차원(?)에서 끝내야 하는 것이 너무 아쉬웠던 한 시간 반 동안의 뜨거웠던 봉 감독과의 대화의 시간을 옮긴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 지난 개막식 때 한 기자가 봉준호 감독에게 왜 이 영화를 추천했냐고 물었는데, 들러리 갔다가 봉변당한 느낌을 받을 영화라고 소개했다. 정말 예상치 못한 일들로 봉변당한 듯한 느낌을 줄 법한 영화다. 예전에 충무로 영화제에서도 한 번 상영을 했었는데, 그 때 상영비가 문제가 되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이번에도 처음에 프린트를 받을 때 잘못 들어와서 두 번의 과정을 걸쳐 어렵게 상영하게 된 작품이다. 이 영화를 추천하신 봉준호 감독은 어떻게 영화를 보셨는지.

봉준호(영화감독): 감기가 와서 몸의 상태가 안 좋은데 영화를 보고 나니까 더 힘들다. (웃음) 진이 빠지는 느낌이랄까. 오늘 여러분 덕분에 저도 시네마스코프 프린트, 제대로 큰 화면으로 보게 되었다. 프린트 컬러가 군데군데 불안정하게 변하는 부분이 있는데 어쨌든 큰 화면으로 보니까 좋다.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중학교 1, 2학년 즈음인 80년대 초에 이 영화를 KBS 명화극장에서 <구출>이라는 제목으로 처음 봤다. 그 당시에 약간 관심이 있었던 버트 레이놀즈가 나온다고 해서 엉겁결에 보았다가 영화에 완전히 빨려들었던 기억이 난다. 물론 KBS 공중파에서 했으니까 핵심적인 그 씬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우 강렬했던 기억이 있다. 88올림픽을 하고 비디오 시대가 열리고 VHS 비디오들이 나올 때, CIC에서 <서바이벌 게임>이라는 약간 이상한 제목으로 나왔다. 그래서 비디오로 다시 봤는데 텔레비전에서 못 봤던 장면들이 나오더라. 그 다음에 DVD 시대가 열렸다. 2001년경 집에 DVD를 장만하고 이 영화가 생각나서 아마존에 들어가 DVD를 샀다. 그 때 처음으로 2.35:1 비율로 영화를 봤다. 그리고 오늘 이렇게 큰 화면으로 보게 되었으니 이 영화를 필름으로 제대로 보기까지 27년의 세월이 걸린 셈이다. 괜히 혼자서 감개무량한데 다시 봐도 고통스럽고 힘든 영화인 것 같다.

 

김성욱: 버트 레이놀즈 배우는 왜 좋아하시는지.

봉준호: 좋아하지는 않았는데 ‘저 배우 참 느끼하다’라는 생각을 어렸을 때도 많이 했었다. <샤키 머신>은 <서바이벌 게임>보다 좀 더 뒤인 것 같은데 제가 호수극장에서 본 기억도 있고, 또 그 때 당시는 다른 배우들을 잘 몰라서, 존 보이트에 대해서도 긴가민가했다. 그리고 버트 레이놀즈가 그 당시에 느끼한 영화들, 막 나가는 상업영화들을 많이 했을 때여서 왠지 그 배우가 나온다고 하니까 호기심이 생겼던 것 같다. 존 부어맨 이라는 감독, 또 빌모스 시그몬드라는 촬영감독은 전혀 몰랐다. 그냥 봤었던 것인데 그렇게 보는 체험이 강렬한 것 같다. 오늘 이 시네토크를 위해 이것저것 찾아보았다. 존 부어맨 감독이 했던 인터뷰와 이 영화의 메이킹 다큐멘터리를 보고, 또 새로 나온 개정판 DVD에 감독의 코멘터리가 있어서 보고 왔다. 그분이 못오시는 자리이니 대신 전달해 드리도록 하겠다. 아울러 제가 느낀 이런저런 감상들을 더해서. <마더> 촬영기간에 이 영화를 다시 꺼내 보았는데, 마더는 엄마이고, 여기는 다 남자들만 나오는데 이상하게 닮은 구석이 있다. 자기 죄를 감추는 이야기를 좋아하고 죄를 저지르는 입장이 되는 것을 좋아한다. (웃음) 어렸을 때 몇 가지 일들도 있었고 이런 심리를 좋아하는 것 같다. 영화가 죄를 덮고 끝나잖나. 마더도 할아버지를 죽이고 나서 그렇게 끝나는데, 그래서 왠지 모르게 이 영화DVD에 다시 손이 갔었나 보다 싶다.

 

김성욱: 영화에 대해서 많이 연구를 해 오신 것 같은데, 이 영화는 어떤 영화인지.

봉준호: 존 부어맨 감독은 80년대 <엑스칼리버>라는 영화로 유명했다. 최근의 이 분 작품은 <제너럴>이라는 영화를 많이 기억하실 것 같다. 우리나라로 치면 조세현급의 마틴 카힐이라는 실제 아일랜드의 국민대도 일대기를 다룬 영화다. 감독은 이 영화로 깐느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했다. 저도 그 영화를 아주 좋아하는 편이다. 그 영화에 요즘은 할리우드 영화에도 자주 나오는 브렌단 글리슨이라는 아일랜드 배우가 출연하는데, 그 배우의 연기가 참 멋있다. 또 <엑소시스트 2>를 이 감독이 찍었다가 완전히 망하고 욕도 엄청 먹었다. 이 분이 들쑥날쑥 기복이 심하다. 그런 감독들의 필모그래피가 또 매력이 있는 것 같다. 스탠리 큐브릭처럼 매번 걸작을 찍는 사람들은 징그럽지 않은가. 그런 사람과 같이 밥을 먹으면 체할 것 같지만 이 분은 실패작도 많이 있었고, 숀 코네리가 삼각팬티를 입고 나오는 <자도즈>라는 이상한 SF 영화도 있었다. 스틸 사진만 봐도 좀 어이가 없어 보이는 그런 영화. 반면 리 마빈이 나오는 <포인트 블랭크>의 경우, 지금 보신 영화보다 더 초기작인데 아주 파워풀하다. 볼만하다. <서바이벌 게임>은 1972년도 영화이니 존 부어맨의 비교적 초창기 영화에 속한다. <대부>랑 같은 해에 나왔다. <대부>의 그늘에 많이 가리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카데미 감독상, 작품상 그 외에 몇몇에 후보에 오른 바 있다. 비록 상은 못 받았지만, 첫 번째 존 부어맨이라는 감독의 좌표로 놓고 영화를 볼 수도 있고, 70년대 미국 영화라는 관점에서 볼 수도 있다.

 

“70년대 기운의 파워풀한 괴력을 품고 있는 영화이다”

 

개인적으로 70년대 미국영화를 매우 좋아하는데 몇 년 전에 여기 오셨던 구로자와 기요시 감독도 70년대 미국영화를 매우 좋아하고 영감을 많이 받는다고 하였다. <서바이벌 게임>이 사실 70년대 초대형 히트 영화도 아니고 존 부어맨이 프란시스 코폴라처럼 한 시대를 완전히 주름잡았던 감독이 아님에도, 굉장히 파워풀하고 엄청난 괴력을 품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영화들이 또 스튜디오에서 만들어졌다. 이상한 남자 성추행하는 것에서부터 사람이 다쳐서 뼈와 살이 옷 밖으로 튀어나오는 등의 오히려 요즘 영화에서도 볼 수 없는 기괴하고 거침없는 묘사들이 나온다. 이런 영화들이 스튜디오에서 만들어지고 아카데미 상 후보에도 오르던 시대가 바로 70년대였다. 우리가 작가, 오떼르까지 치지 않더라도 시드니 루멧, 존 프랑켄하이머, 존 슐레진저, 알란 제이 파큘라 등의 감독들이 굉장히 힘 있는 영화들을 만들던 시절이었다. 좋은 프로듀서, 배우, 각본가, 감독들이 모두 많이 포진해 있었던 시대였다 보여진다. 존 부어맨 감독의 인터뷰를 봐도 ‘70년대 초였으니까 이런 영화를 스튜디오에서 만들 수 있었다.’, ‘스탭도 몇 명 안 되고 배우들 네 명이랑 똘똘 뭉쳐서 강에 가서 신나게 찍고 왔던 기억이 나면서 70년대니까 가능했다’고 한다.

 

<서바이벌 게임>은 원작 소설이 있는 영화로 원작자의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다. 영화 끝에 가면 배가 불룩 나온 보완관이 나오는데 그 분이 원작 소설가라라고 한다. 연기를 상당히 잘한다는 생각을 했다. 후반부에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줬는데 제임스 딕키라고 그 분이 원작자다. 메이킹 필름을 보니까 그 분이 미국 남부에 있는 대학교 교수라고 하더라. 시인이자 소설가인데 여대생을 모아 놓고 시 낭송을 하는 다큐멘터리 푸티지가 있는데 거의 뭐 최민수 형님으로 시를 몰입해서 읽고 있고 여학생들은 반해서 듣고 있는 모습이 있다. (웃음) 쇼맨십이나 포스가 강하게 있기 때문에 할리우드의 스타 배우들 사이에서도 연기를 잘하는 것 같다. 빅 클로즈업과 미묘한 대사들을 해내는데, 마지막의 조용히 가라는 대사를 하는 숏을 말하면 굉장히 인상적이다. 존 부어맨이 원작을 각색할 때 과격하게 각색을 하는 편인데, 이 영화 같은 경우는 비교적 소설을 충실하게 따라간 영화로 알려져 있다. 소설도 영화 제목처럼 ‘딜리버런스’다. 대신 도입부와 엔딩이 많이 다르다. 영화에서는 댐 공사부터 시작하면서 네 명의 주인공들이 강으로 진입하고 있는 것부터 시작하는데, 소설은 그 앞에 각 인물들의 소개 등의 전사가 있다고 한다. 그리고 라스트에 보면 물 속에서 손이 올라오는 장면이 있는데 그 장면은 존 부어맨이 만들어 낸 것이라고 하더라. 그 라스트는 요즘의 시점에서 보면 약간 관습적인 공포영화의 클리셰 같다. 그러나 이 당시의 관점에서 작품 전체로 넓게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생각된다. 나름의 근거가 있는 장면으로, 처음에 키 작은 남자를 매장할 때 보면 손이 튀어나와서 존 보이트가 그 손을 다시 집어넣는 장면이 나온다. 손을 향해서 약간 카메라가 줌인도 하는데 그 때 손의 이미지를 그런 식으로 사용할 것이 예고가 되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이런 식으로 소설에 충실하지만 변화를 준 부분들이 더 있다고 하더라.

 

“네 주인공의 앙상블이 뛰어난, 배우의 심리적 변화가 재미를 더하는 영화다”

 

촬영감독은 빌모스 시그몬드라고 스티븐 스필버그의 <미지와의 조우>를 촬영한 분이다. 러시아 사람인데 헝가리에 갔다가 할리우드까지 오게 되었고 70년대 많은 족적을 남겼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는 주인공 역을 맡은 네 명의 배우들이 모두 재밌다. 당시 존 보이트와 버트 레이놀즈는 이미 스타급 배우였고, 기타를 치는 로니 콕스와 최고의 명연기를 보여주었던 뚱뚱한 남자의 네드 비티 배우는 이 영화가 첫 영화였다고 한다. 브로드웨이에서 연극하던 분들 중에서 존 부어맨 감독이 열심히 찾아다녔다고 한다. 배우 네 명의 출신성분도 다양한데 버트 레이놀즈는 TV시리즈도 많이 했고 막 나가는 상업영화에도 많이 출연했다. 반면 존 보이트는 이미 영화계에서 자리 잡은 상태로 이 영화 이전에 오스카 작품상을 탄 <미드나잇 카우보이> 주인공을 한 바 있다. 영화를 보면 네 명의 앙상블이 대단히 뛰어난데 사실 배우들을 급류에 저렇게 몰아넣으면 어디서 어떻게 왔던 앙상블이 될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웃음) 돼지소리 내면서 성폭행을 당하는 장면은 다시 봐도 인상적인데, 이 씬은 이 영화의 전체적인 특징으로 자리잡는다. 사실 <서바이벌 게임>의 구조는 단순하다. 여행을 가다가 이상한 놈들을 만나고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총에 맞았는지 안 맞았는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로니 콕스가 물에 빠지게 된다. 또 이것을 처리해야 된다고 절벽에 올라가서 한 명을 죽이는데 그 사람이 같은 사람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상황이 된다. 모든 것이 애매하게 찜찜하게 사람을 미치게 하면서 끌고 간다. 너무 단순한데 매순간 매단계가 너무나 사실적이다. 화살에 관통된 키 작은 남자가 죽을 때의 그 과정을 생각해 보라. 죽은 사람을 나뭇가지에 걸어놓고 그 주변에서 토론을 하고 있다. 또 급류를 내려갈 때와 절벽을 올라갈 때의 장면은 정말 같이 올라가는 느낌이다. 쉽게 장면들을 축약해서 보여주지 않는다. 편집의 느릿한 호흡이나 리듬들이 이상하게 실시간이 보존된 느낌을 준다. 단순하고 느릿한 호흡인데 모든 것을 체험했다는 느낌말이다. 편집뿐만 아니라 배우들의 에너지와 연출 모든 것들이 체험했다는 느낌을 주는 것이 신기하다. 요즘 화려한 테크놀로지로 무장한 영화들을 봤을 때 느껴지지 않는 이상한 사실감이 있다. 이것이 진정한 입체감, 3D, 4D가 아닌가 싶다.

 

“느릿한 호흡과 리듬감이 이상한 사실감을 주는, 모든 걸 체험케 하는 영화다”

 

여튼 이렇게 체험시켜주는 느낌은 배우들과 연출의 힘이라 생각한다. 예를 들면 성폭행 당하는 장면의 경우 놀라운 디테일들이 많다. 성폭행 당하고 난 후의 네드 비티의 연기가 인상적이다. 자신을 성폭행한 사람이 나무 끝가지 걸려 죽어있으면 보통은 단세포적인 연기를 하거나 즉발적인 분노를 할 가능성이 많다. 그런데 화면 뒤 쪽에서 네드 비티는 넋이 나가 상태로 있고, 존 보이트는 네드 비티에게 애기처럼 옷을 입혀주고 있다. 그러다가 그 씬 마지막에 냉혹한 얼굴로 '묻어버리자'라고 한다. 과장이 없는 연기와 그런 표현들이 인상적이다. 그리고 그 인물이 점점 뒤로 갈수록 냉정하고 냉혹한 인물로 변한다. 시골 사람들과 식탁에서 밥 먹는 장면을 보면 지금까지 리더 역을 맡아왔던 존 보이트는 울고 네드 비트는 오히려 식탁의 분위기와 대화를 유도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헤어질 때 '당분간 보지 말자'라는 대사를 하면서 인물의 변화된 모습을 보여준다. 대단한 연기다. 물론 각본과 연출이 연기를 뒷받침해주고 있다. 버트 레이놀즈가 나중에 놀이터에서 다쳐 집에 와서 징징 우는 어린 아이처럼 존 보이트를 붙잡고 우는데, 이런 연기를 버트 레이놀즈가 리얼하게 보여준 것도 의외였다. 기계가 몰락한다, 시스템이 몰락한다고 최민수 형님 톤으로 계속 읊어대다가 육체가 몰락하는 동시에 완전히 몰락해버린다. 그리고 끝에 가서 침대에 누워 깜찍하게 아무것도 기억 안 난다고 하는데, 이러한 버트 레이놀즈의 변화가 재미있다. 존 보이트도 사슴을 겨누었을 때의 심약하고 소심한 모습의 얼굴 표정이 좋다. 그랬던 사람이 버트 레이놀즈가 다리뼈가 튀어나오면서부터 어쩔 수 없이 리더의 역할을 맡아서 모든 것을 리드한다. 기타 연주를 했던 로니 콕스는 캐릭터가 변할 기회도 없이 죽어버린다. 여담인데 마지막 로니 콕스의 팔이 뒤틀려 있는 것은 인터뷰를 보니까 자기가 그냥 한 것이라고 한다. 특수효과나 더미를 사용한 것이 아니라, '감독님 저 어깨로 재미있는거 할 수 있는데 보실래요'라며 로니 콕스가 그 모습을 보여주니까 감독이 좋다고하여 직접 하게 된 거라 한다. (웃음) 로니 콕스도 변화되는 모습이 나타나는데, 법과 민주주의 이야기를 하다가 매장하기로 결정하니까 미친 사람처럼 땅을 판다. 그 때의 순간은 앞에서 기타를 연주하거나 법, 민주주의, 경찰에 대해서 말하던 모습과 너무나 다른 모습이다. 네 명의 인물들이 황금비율을 갖고 분할되어 있으면서, 각 캐릭터가 짧지만 악몽 같은 여정을 통해서 변화되는 모습이 재미있게 실감되게 나타나 있다. 이 영화에서 네 명의 배우들은 환상의 조합을 보여주었던 것 같다.

 

매단계마다 우리를 질식시켜버릴 것만 같은 명확하지 않음, 모호함, 설명하지 않음의 것들이 더 체험하게 만드는 영화이다. 우리가 실제로 낯선 곳에 가거나 낯선 사람을 만났을 때 그 장소나 사람에 대해서 설명을 듣기는 힘들지 않은가. 그냥 마주대하고 겪는 것 뿐 이다. 그야말로 봉변을 당하는 것. 이런 식으로. 사실 처음부터 예고되었던 부분이 있었지 않나 싶다. 마을로 처음 들어왔을 때의 이상한 분위기들과 마을 주민들의 극도로 히스테리컬한 반응들은 봉변을 예고하는 듯하다. 그리고 잊을 수 없는 것은 벤조 치는 소년이다. 15살 되는 이 소년은 그 마을 커뮤니티에서 직접 뽑았다고 한다. 뒤에 다시 나타나지 않지만 누군가 떠나거나 무슨 일이 시작될 때 불길한 기운을 암시하는 인물이 있는데 소년이 바로 그런 역할의 인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게다가 그 인물의 이미지나 느낌 자체가 워낙 독특해서 이 영화 초반부의 백미이다.


 

관객: 오늘 <서바이벌 게임>을 보면서 캐릭터들이 감독님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겹친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향을 받거나 다른 영화들의 장치 혹은 캐릭터들을 재창조하신 다른 사례가 있는지.

봉준호: 제 단편 <지리멸렬>과 <플란다스의 개>를 보면 아파트 지하실 파이프 라인을 로우앵글로 머리 위로 지나가면서 트래킹한 샷이 있다. 저 개인적으로 이런 장면을 찍으면서 좋아했던 장면이었는데, 데이비드 린치의 <엘리펀트 맨>이라는 영화가 있는데 나중에 DVD를 사서 보니까 완전히 똑같은 장면이 있더라. 제가 이 영화를 처음 본 것이 중학교 3학년 KBS 명화극장에서 본 것인데 그 뒤로 이 영화를 다시 볼 기회가 없다가 나중에 <플란다스의 개> 개봉 후에 DVD로 보게 된 것이다. 어렸을 때 봤던 것들이 잠재의식 속에 있다가 나온 것 같다. 저도 그 샷을 찍으면서 쾌감을 느꼈었는데, 굉장히 묘한 기분이었다. (정리: 신윤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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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노는 건달 2010.02.08 17:3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07년 1회 충무로 영화제 때 이 작품과 몇몇 작품의 프린트가 '팬 & 스캔' 버전의 프린트가 들어와서
    문제가 되었던 적이 있었죠. 그래서 나중에 김홍준 위원장님이 사과글도 올리고 했었습니다

김지운 감독이 추천한 파솔리니의 <마태복음> 시네토크

 

이번 시네마테크 친구들 영화제에 김지운 감독은 무려 열편의 영화를 추천했다 하는데 최종적인 선택작은 예수의 생애를 다룬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의 <마태복음>이 상영되었다. 지난 1월 31일 오후 그의 선택작인 <마태복음> 상영 후 진행된 시네토크에서 김지운 감독은 설마 <마태복음>이 뽑힐 줄은 몰랐다며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하냐고 엄살(?)을 떨었지만 일단 마이크를 손에 쥐자 막힘없이 자신의 생각을 들려주었다. 백수 생활을 청산하기 위해 프랑스까지 날아가 <마태복음>을 처음 만났던 순간부터 김지운 감독이 생각하는 시네마테크의 의미까지 거침없는 이야기가 오갔던 그 시간을 전한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 이번 시네마테크 친구들 영화제에 김지운 감독은 열 편의 영화를 추천했었다. 나중에 그 영화들만 따로 상영해도 재밌을 것 같은데, <대부 Ⅱ>, <지옥의 묵시록>, 브레송의 <온순한 여인> 등 테마를 가늠하기 어려웠다(웃음). 먼저 <마태복음>을 처음 접했을 때의 이야기를 들려 달라.

김지운(영화감독): 사실 꿈에도 이 영화가 선택될 줄은 몰랐다. 하나님이 나를 시험하는 게 아닌가 생각도 했다(웃음). 기독교인이 아니라 예수님 생애도 잘 모르는데 이 시네토크를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하다. 하지만 주일(일요일)에 이렇게 은혜로운 영화를 보게 돼서 기쁘다. 90년대 초반, 그러니까 백수 7년차에 세상의 더 좋은 영화를 보고 싶어서 세상에서 영화가 가장 많은 곳이 어딘지 물어보니 누구는 베를린이라 하고 누구는 파리라고 하더라. 근데 파리에 가면 베를린도 런던도 갈 수 있다는 생각에 무작정 파리에 갔고 6개월 정도 무전여행을 했다. 근데 마침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에서 카이에 뒤 시네마가 준비한 특별전을 하고 있더라. 거기서 말로만 듣던 파솔리니의 영화를 보게 되었다. 그 때는 이태리말에 프랑스 자막이라서 어떤 말을 하는지 몰랐다. 영화를 본 사람이 마태복음을 그대로 영화로 옮긴거라고 해서 마태복음을 읽었던 기억이 있다. 잠깐 다른 얘기를 하자면, 내 경험에서 시네마테크의 중요성을 볼 수 있다. 백수 7년차면 가족이 버리고 사회와 세상이 방치하고 버린 존재지 않나(웃음).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고민하며 결정한 것이 세상에서 영화를 제일 많이 상영하는 곳에 가서 내 인생을 바꾸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시네마테크에서 <마태복음>을 본거다.

 

김성욱: 교인이 처음 신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고백하는 것 같다. 영화를 처음 봤을 때의 느낌은 어땠나.

김지운: 우리가 살면서 갖는 큰 화두 중 하나가 종교 아닌가. 근데 <마태복음>은 기독교인들이 보면 당혹스러울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비기독교인인 나는 오히려 영화를 보며 신을 영접하는 것 같은 영적 체험을 했다. 왜 그럴까 곰곰이 생각을 해봤는데 예수를 신화적인 존재가 아니라 인간적인 모습, 농민, 노동자의 모습을 한 예수의 삶을 보여줬다는 것이 감동적으로 다가왔던 것 같다. 살면서 사람들은 여러 가지 것들에 의지를 한다. 종교라든지, 예술이나, 또는 사랑하는 사람 등. 그리고 어려울 때는 숭고한 어떤 것을 경험하고 싶은 욕구도 생기고, 그런 맥락에서 신의 존재에 대한 심각한 질문도 하게 되는데, 나에게는 현실적으로 예수의 생애를 각인시킨 영화가 <마태복음>이었다. 예수가 그냥 성서에 나오는 신적인 존재가 아니라 우리와 가까이 있고 우리와 함께 호흡하고 생활하며 시대의 아픔과 모순들을 온 몸으로 싸워서 헤쳐 나가는 평범한 사람으로 그려져서 감동이 더 컸던 것 같다.

 

김성욱: 파솔리니가 <마태복음>을 만들 때 자신이 무신론자라는 것을 먼저 밝히고 예수가 신의 아들이란 걸 믿을 수는 없지만 그의 성스러움에 대해서는 믿는다며 이 역설을 영화로 표현하고 싶다고 말한바 있다. 이 영화에서 성스러움의 느낌이 어디서 나올까 고민했을 때 먼저 감동을 받은 부분은 인물들의 얼굴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굉장히 투박한 스타일의 다큐멘터리 같은 화면들이었다. ‘시네마 베리테’라고 불리는 스타일인데, 보통 예수의 생애를 다룬 영화는 매우 극화되어 있었던 반면 <마태복음>은 투박한 화법으로 인물들의 얼굴을 보여주며 이상한 감동을 준다. 감독님은 어떤 면이 인상적이었는지.

김지운: 2000년 전의 이야기를 마치 기록영화처럼 다룬 것이 인상적이었다. 제자들을 한 사람씩 만날 때 그 사람들의 표정을 보여주는 장면 등에서 파솔리니의 특징들이 나온다. 핸드헬드나 자연광을 사용하는 것이라든지, 현지에 가서 촬영하는 것, 그리고 비전문배우들을 기용한다든지 하는 것들 말이다. <마태복음>은 파솔리니의 이런 특성을 다 갖고 있는 영화 중 하나이다. 그리고 기교를 부리지 않고 무덤덤한 표정으로 상대를 응시하는 평범한 표정에서 파솔리니가 민중에 대해 갖고 있는 애정이 많이 담겨 있다고 본다. 예수를 연기한 사람의 경우도 그냥 대학생 같다. 평소 예수에 대해 생각하는 권위적인 모습과 다른 것 같다. 무척 곤두서있고 예민해 보이기까지 하지만 어린아이와 가난한자들, 병든 자들에게는 따스한 미소를 보인다. 이런 것에서 파솔리니의 시각이 나타나는 듯하다. 우리는 과학적인 태도로 삶을 살아가지만 숭고하고 신성한 순간을 경험하고 싶은 욕구가 있고 이를 통해 삶의 힘을 얻기도 한다. 그런데 <마태복음>에서는 예수가 설명 불가능한 존재가 아니라 납득 가능한 존재로 그려지기 때문에 현실과 와 닿는 느낌이 있다.

 

관객1: 고전영화들이 감독님 영화세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궁금하다. 그리고 저를 포함한 영화 학도들이 현대가 아닌, 고전영화를 통해 배울 수 있는 게 무엇이라 생각하는지 듣고 싶다.

김지운: 나는 사실 현대영화의 매력에 빠져 있다가 나이가 든 뒤 고전영화를 찾아서 보게 된 경우다. 고전영화를 보면 놀랄 때가 있다. 지금까지 새로운 형식, 새로운 감각, 새로운 미적 의식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이미 존재해온 것들이더라. 이를테면 얼마 전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를 다시 봤는데 그렇게 시종일관 쿨한 무정부주의적인 감성을 보여주는 영화를 현대에서는 찾기가 어렵더라. 그 사람들의 ‘쿨’은 어떤 심연을 안고 있는 ‘쿨’이라서 현대 영화가 이런 ‘깊은 쿨함’을 보여줄 수 있을까란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고전을 보면 기술이전에 영화의 순수한 형태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나도 미장센을 채워 넣고 이쁘게 하는 것들을 고민하다 고전영화를 보며 영화의 가장 기본적이고 순수한 상태가 주는 감동을 뒤늦게 깨닫는다. 그 당시 영화를 만든 사람들에게는 영화가 어떤 매체고 영화를 통해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를 고민한 지점들이 고스란히 들어 있다. 그런 것들이 나에게도 고민거리를 던져준다. 우리는 이미 지나온 것들을 보기 때문에 가볍게 생각하면 ‘지금 다 있는 거 아냐?’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 고민의 결을 보는 것이 가장 큰 공부일 것이다. 영화의 본질은 무엇인가. 영화를 가지고 뭘 고민해야 할 것인가를 종종 잊어버리는데 고전 영화가 이런 질문들을 다시 생각나게 해준다.

 

관객2: 특히 이탈리아 출신 감독들의 영화를 보면서 느끼는 것들이 많다. 비스콘티, 안토니오니, 펠리니, 베르톨루치 들의 영화는 어려운 시기에 마치 방부제처럼 그 시기를 버텨내게 하는 힘으로 작용했다. 시네마테크가 최근 처한 상황도 어렵다. 진보적 성향의 김지운 감독님이나 프로그래머님이 이 어려운 시기를 버텨내기 위한 작전이 있으면 들려 달라.

김성욱: 작전이라기보다는 마음의 기준점을 잘 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좋은 영화를 머리로 보는 게 아니지 않나. 선동이 필요한 문제가 아니라 생각한다. 몇 가지 질문을 던져야 할 것이다. 이를테면 시네마테크의 주인이 누군지를 물어야 한다. 영진위가 시네마테크를 공모한다는 것은 자기들이 주인이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하지만 시네마테크가 진짜 그들이 주인이라고 얘기할 수 있는가. 그럴 권리가 있는가 질문을 던져봐야 한다고 본다. 시네마테크의 진짜 주인은 누구일까를 고민해야 한다. 그 질문과 마주해서 생각을 하고 행동을 해야 할 것이다. 나는 김지운 감독이 진보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시네마테크의 친구인 감독들은 매우 보수적이다. 많은 사람들이 폐기 처분한걸 다시 보존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보수적일 수밖에 없다. 옛날 것들을 끌고 와서 가치를 따지는 거다. 그 가치들을 무너뜨리고 과거는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진보적인 사람들이다. 반면 소수의 사람들과 모여서 마음의 잣대를 정하는 것이 정말 보수적인 것 아닌가. 영화를 보며 영화에 스며든 그 상태로 생각을 하고나면 행동의 답이 각 개인에게 나올 거라고 생각한다. 그때 하는 행동들이 의미가 있을 것이다.

김지운: 사람은 불변하는 것에 의지를 하게 되는 것 같다. 사랑하는 사람도 변하고 좋아하는 음악도 변하고 다 변해간다. 하지만 절대 불변하는 것이 신적 존재이고 종교성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어려울 때 종교를 믿고 신을 찾는 것이 아닐까. 그런 맥락에서 내가 시네마테크에서 본 좋은 영화들이 내가 어렵고 힘들고 흔들릴 때 신앙처럼 작용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게 나만의 상황은 아닐 것이다. 이것이 시네마테크에 대해 내가 갖고 있는 현실적인 의미라고 생각한다. 나에게는 성소고, 인생에 대해 고민하는 공부방이고 도서관이다. 영화의 출신성분을 따진다면, 유학파도 있고, 현장파도 있고, 전문적 교육을 받은 사람들도 있다. 나의 경우는 분류하자면 ‘시네마테크파’다. 어두운 극장에서 스크린을 응시하며 저런 영화를 만들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고민하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시네마테크의 중요성을 현실적으로 느낀다. 어떤 형태로든 시네마테크는 존재해야 한다. (정리: 김보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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