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특별전/장철 특별전

[Review] 대서사극에서의 영웅의 해체 - <13인의 무사>



흙먼지를 일으키며 한 무리의 젊은 무사들이 등장한다. 카메라는 이들의 위풍을 차례대로 프레임에 담는다. 무려 열 세 명. 그것도 형제들이다. 이들은 영화 내내 협력도 하고 대립도 하며 죽이기도 한다. 극중에서 선과 악을 상징하며 대립하는 인물은 사실 두 명이다. 그럼에도 왜 형제가 열 한명이나 더 필요했을까?

이는 성서에 등장하는 야곱과 요셉의 이야기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영화 속에서 이극용이 막내 이존효를 지극히 사랑했듯이, 열두 명의 아들과 한명의 딸을 가진 야곱은 막내였던 요셉을 유독 사랑하지 않았는가. 이들의 공통점은 단순하다. 형제들보다 더 지혜롭고 뛰어난 것, 그래서 더 사랑받고 형제들의 질투를 받게 된다는 것. 다만 차이가 있다면 장철의 형제들은 해피엔딩을 거부했다는 점이다.

당 말기 ‘황소의 난’이 일어나자 변방 사타족의 제후인 이극용은 황제의 명을 받고 이를 진압하려 한다. 그에게는 ‘13인의 무사’로 불리는 뛰어난 아들들이 있었다. 특히 이존효(강대위 분)와 경사(적룡 분)는 남다른 신뢰와 총애를 받았는데, 이로 인해 형제들의 시기를 받게 된다. 13형제 중 존효를 비롯한 9명이 황소가 장악한 장안성으로 침투하는데, 이들은 뛰어난 무술실력으로 적진을 교란하고 결국 성을 탈환하지만 그 과정에서 형제간 반목의 불씨를 키우게 된다. 함께 황제의 명을 수행하던 지방관 주원은 이극용을 제거하고 황제의 자리마저 넘보기 위해 계략을 짜고 아버지에게 불만을 품던 네 째와 열 두 째를 이용한다. 경사만을 대동하고 주원의 성으로 들어간 이극용은 술에 취해 위기에 빠지게 되고 결국 경사의 장엄한 희생으로 가까스로 목숨을 건지게 된다. 신변의 위협을 느낀 네 째와 열 두 째는 결국 존효마저 함정에 빠뜨리고 오지절단이라는 끔찍한 방법으로 그를 살해한다. 그러나 이들의 악행은 결국 다른 형제들에 의해 처단되며 영화는 인과응보의 형식을 갖추며 끝을 맺는다.



장철감독의 트래이드 마크인 피칠갑과 신체훼손 그리고 주인공의 죽음은 <13인의 무사>에서 여전하며 그로 인한 쇼크는 지금 봐도 여전히 유효하다. 그러나 그의 다른 영화와 구별되는 <13인의 무사>만의 미학적, 그리고 철학적 지점이 존재한다. 먼저 규모면에서 보자. 캐스팅만 해도 당대 스타들이 총동원 됐음은 물론이고 수많은 엑스트라와 거대한 세트까지 1970년 당시 제작사였던 쇼브라더스의 사운을 걸고 만들었다는 말이 과장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과감한 줌인과 슬로우모션의 반복은 자칫 커진 스케일로 인해 느슨해 질 수 있는 화면에 적절한 속도의 완급을 줌으로써 긴장감을 부여해준다. 장판교에서 단신으로 적들을 상대하는 적룡의 전투씬은 화려하다 못해 비장하며 특히 눈을 부릅뜬 채 선 채로 숨을 거둔 장면은 두고두고 회자되는 명장면이다. 그러나 오지가 절단 돼 죽음을 맞는 주인공에 대해서는 철학적 해석이 필요하다. 역사적 영웅이자 영화의 주인공인 강대위가 주조연인 적룡의 용맹하고 아름다운 죽음과는 전혀 다른 끔찍하다 못해 초라한 죽음을 맞이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영웅의 해체이다. 장철감독은 너무도 간단하게 가장 뛰어난 주인공을 가장 시각적으로 명료하게 절단시켜 버린다. 이는 관객을 영화에서 분절시켜 버리는 것과 같다. 장철은 영웅들이 그렇게 허무하고 처참하게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러한 영화적 표현은 우리의 현실을 직시하게 한다. (김준완: 관객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