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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전/장철 특별전

[Feature] 죽었다, 그러나 원념 때문에 일어나 칼을 잡는다

마을 어귀. 한 사내가 마을을 떠나기 전 이별주를 마시고 있다. 악사들이 연주를 하고 그가 타고 떠날 백마가 한가로이 꼬리로 파리를 쫓는다. 하얀 옷을 입은 사내는 그를 전송하는 노인과 마지막 술잔을 나누고 자리에서 일어나 말에 올라탄다. 사내는 암살자. 누군가를 죽이러 길을 떠나는 것이다. 물론 살아서 돌아올 생각은 추호도 없다. 드디어 사내가 암살을 할 표적이 있는 도시에 도착한다. 자 이제부터 피가 튀는 혈투가 있으리라 기대를 했는데, 사내는 싸울 생각은 안하고 또다시 악사를 들여 음악을 연주하고, 산해진미를 차려놓고 술타령이다. 함께 영화를 보던 친구는 나의 감언이설에 속았다는 원망의 눈길을 보내면서 “싸우면 깨워라” 하고는 잠을 자기 시작한다. 영화를 보던 아저씨가 “뭔 놈에 무협 영화가 주구장창 술타령만 해?” 분노에 찬 한마디를 하고 극장 문을 박차고 나가버린다. 하하하. 장철의 영화 <대자객>이 상영되던 9년 전 부천 영화제의 극장 안 풍경이다. 이미 영화를 보았던 나는 폭풍 같은 감정이 휘몰아치는 라스트 혈투 시퀀스의 감동을 친구가 놓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어느 시점에서 깨워야 할까를 생각하느라 영화 보기는 뒷전이었다.


<대자객>은 사미천의 사기. 자객열전의 수많은 주인공들 중 섭정이란 주인공을 선택하여 만든 영화이다. 자객열전에 등장하는 수많은 멋진 자객들 중 왜 하필이면 섭정인가? 영화 <영웅>의 주인공 형가는 생선 속에 칼을 숨겨 진시황을 암살 하려다 실패한 비운의 자객으로 자객열전의 등장인물들 중 가장 유명한 자객이다. 장철은 왜 형가가 아니라 섭정을 선택 했을까? 섭정이란 자객은 조말처럼 장군 출신도 아니다. 섭정은 시장 통의 개고기 장사치이니 비천한 신분이다. 형가처럼 폭군 진시황을 처단하려는 대의를 명분으로 삼지도 않고, 예양처럼 지조를 지키기 위해 칼을 잡은 자도 아니다. 그가 칼을 잡은 이유는 단 하나. 개고기 장사치인 비천한 자신. 장전된 채로 구석에 놓여있는 총이었던(에밀리 디킨스의 시) 자신을 알아보고 불러내 준 이 때문이다. 국가를 위한 충의 때문도, 정의를 위한 대의 때문도 아니다. 자신의 재능을 간파한 자를 위해 자신의 숨겨진 재능을 소진하겠다는 것이다. 전국시대. 비천한 신분으로 태어난 재능 있는 자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인가? 아무것도 없다. 있다면 전장에 나가 공을 세우는 것. 병졸로 시작하여 수많은 전투를 치루고 죽지 않았을 때의 경우이니 하늘에 별 따기다. 섭정은 검술에 재능이 있었지만, 재능을 꽃 피울 전장을 찾지 못했다. 결국 개고기 장사치로 늙어 죽어야한다. 그런데 자신의 재능을 알아본 이가 나타나 가난한 그의 어머니와 누이를 보살펴 준다. 의리를 맺은 것이다. 의리는 갚아야한다. 섭정이 의리를 갚을 길은 단 하나 목숨을 내놓는 것뿐이다.



장철은 지극히 사적인 이유로 칼을 잡은 주인공을 선택한다. 관객들이 지금 보는 이 영화가 무협영화인가? 의심할 정도로 영화는 암살을 하기 전. 주변을 정리하는 섭정의 모습에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누이를 좋은 곳으로 시집보내고,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는 절대 일을 할 수 없다며 거사를 미뤄 자신의 암살 때문에 가족들이 피해를 받는 일이 없도록 한다. 그리고 남은 것. 사랑하는 연인이다. 섭정은 연인과 이별을 하고, 모든 재산을 다 처분하고서야 암살의 길을 떠나는 것이다. 장이모우의 <영웅>에서 형가와 진시황이 천하통일의 대업은 수많은 희생을 담보로 한다는 국가와 개인 간의 문제에 대한 파시즘의 혐의가 다분한 긴 대화 신이 있듯이, <대자객>에서는 섭정이 애인과 함께 죽음의 두려움과 빛나는 한순간을 위한 무모한 삶에 대해 긴 대화를 나누는 신이 있다. 80년대 고우영은 만화 <초한지>의 한 에피소드에서 섭정을 우매한 캐릭터로 묘사하면서 국가에 대한 충정도, 대의명분도 없이 개죽음을 한 자객이라 평한다. 사바 료타로는 막말의 암살자들에서 자신은 암살자들을 혐오한다고 한다. 암살자들이란 그들의 대의명분이 무엇이건 거래에 의해 타깃이 정해지고, 뒤에서 소리 없이 표적을 제거해야 하니 사내답지 못한 행동이란 말이다. 장철이 <대자객>을 촬영하기 위해 쇼 브라더스의 스튜디오로 출근을 할 때, 거리에서는 학생들의 데모 대문에 최류탄 연기가 자욱했었다고 한다. 그 때는 1967년이었다. 장철은 이런 시대에 이런 영화를 보러 누가 올 것인가? 한숨을 쉬며 일을 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파시즘에 항거하던 플라워 무브먼트의 젊은이들은 장철의 주인공 섭정을 보기 위해 극장으로 몰려들었다.


<대자객>의 라스트. 섭정을 연기한 왕우는 라스트 대혈투 신을 촬영하기에 앞서 장철에게서 “네가 최고다. 너는 슈퍼맨이다. 당당하고 단호하게 걸어라!”라는 주문을 받았다고 한다. 일백여명의 적군들이 도사린 적진에서 왕우는 강철로 만든 보검 한 자루에 의지하여 “나는 슈퍼맨이다”를 되뇌며 연기를 했다고 한다. 라스트 혈투 시퀀스가 시작되면 왕우는 단호한 걸음걸이를 너무 과도하게 연기하는 바람에 뒤뚱거려 관객에게 실소를 자아낸다. 하지만 그가 싸움을 시작하고, 그의 하얀 옷이 적들의 피로 붉게 물들기 시작하자 왕우는 섭정의 원념을 고스란히 빙한 것처럼 관객을 사로잡기 시작한다. 드디어 <대자객>의 가장 빛나는 장면. 암살에 성공하고, 자신의 존재를 지워버리기 위해 칼로 자신의 얼굴 껍질을 도려내는 섭정의 시점 쇼트. 이 단호한 한 쇼트를 위해 장철은 90분을 끌어온 것이다. 이름을 남기지 않고 자신의 모든 자취를 지워버리려는 자. 의협이니, 대의명분이니 하는 모든 것을 무화 시키는 행동을 하는 주인공. 장철은 자객의 이야기를 하면서 우국충정과 대의명분을 내세우는 주인공들 보다는 비천한 신분으로 태어난 자의 울분과 뜻하지 않게 맺어진 함정과 같은 의리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는 지극히 사적인 주인공을 내세워 파시즘과 아나키즘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다가, 결국 니힐리즘적인 자객이 등장하는 영화를 만들어 낸 것이다.

동시대 무협 영화를 만든 호금전이 액션 장면을 우아한 수평이동 롱 트래킹 쇼트로 촬영하여 중국 무협의 아취를 보여주었고, 서양의 추리소설 줄거리처럼 치밀한 복선과 주인공들의 암투에 주목하여 신 무협을 만들어 냈다면, 장철은 주인공의 원념을 일직선으로 투박하게 그리는 것에만 전념한 영화들을 만들어 낸다. 수호지의 무송 에피소드를 영화로 만든 <쾌활림>과 <복수>가 그런 특성이 잘 드러난 영화이다. 무송 에피소드는 반금련과 무대. 그리고 서문경의 불륜과 치정 살인 이야기가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두 영화 모두 거두절미. 장철은 서문경과 반금련의 불륜 에피소드는 별 관심이 없다. 아마도 tv의 아침 연속극 팬이라면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오는 영화라 분노 할 것이다. <쾌활림>이 시작되자마자 무송은 벌써 반금련의 목을 잘라 서문경이 있는 술집으로 간다. 반금련의 목을 서문경에게 던지며 두 사람의 혈투가 시작되고, 서문경은 무송에게 박살이 난다. 영화가 시작되고 오 분이 넘지 않아 모두 정리해 버리는 것이다. 장철의 관심은 무대의 복수를 한 무송의 유배를 떠나 쾌활림에 이르러 어린 아이부터 할머니까지 모두를 죽이는 피의 잔치를 벌이고 피에 젖은 자신의 옷소매를 찢어 벽에 “무송이 살인하다”라 쓰는 무뢰한의 원념을 표현하는 것이 중요 했던 것이다.

<복수>는 무송 에피소드를 현대로 옮겨 만든 것인데, 반푼 짜리 인간 무대를 멋진 외모와 대단한 무술 실력을 가졌지만, 아내를 만족 시키지 못하는 성급하고, 폭력적인 적룡으로 변모시켜 그를 영화가 시작한지 10분 만에 사기그릇이 깨어진 바닥을 맨몸으로 뒹굴다 죽어 버리게 한다. 장철에게는 적룡을 속여서 살해 한 파렴치한 간부들의 불륜과 음모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영화의 내용을 파악하게끔 아주 최소한의 이삼 분만 그들의 음모 장면에 할애하고, 나머지 80여분은 복수를 하는 적룡의 동생 깡따위(짜장면을 자장면이라 하면 안 되듯 깡따위를 강대위라 하면 왠지 섭섭하다)의 몫으로 만든다. 누가 형을 죽였는지 알아내는 수사와 추리 따위 역시 장철에게는 관심이 없다. 오직 형을 죽인 원수들을 향한 동생 깡 따위의 분노만이 중요하다. 그 분노는 깡 따위가 혈투 끝에 몸은 죽었는데도 정신만이 살아나 좀비처럼 원수를 갚게 만든다. 영화의 라스트에 깡따위가 난간에 기대어 두 눈을 부릅뜨고 서서 죽어 있는 긴 시간을 만나게 된다.
그 몇 초간 깡따위가 죽은 척 했다가 적이 다가오자 기습을 하는 것이라 오해하면 안 된다. 깡따위는 죽은 것이다. 형의 원수를 갚지 못하고. 그 원념이 너무나 사무쳐 그는 살아나 원수를 갚고서야 죽는 것이다. 왕우가 <금연자>에서 라스트 혈투 장면을 찍을 때 장철은 “너는 죽었다. 그러나 원념 때문에 부활 해야한다”고 주문을 했다고 한다. 왕우는 “이거 정말. 어떻게 죽었는데 다시 살아나?” 투덜댔었다고 한다. 그러나 적들에게 사지가 묶이고 가슴에 네 개의 말뚝이 박히는 장면을 촬영하며 스스로 광기에 휩싸여 촬영 전까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던 자신을 잊고 다시 살아나 칼을 들었다고 한다. 장철은 그런 감독이다. 투박하고 거친 사내들. 그들은 항상 불만에 차 있다. 결국 그들은 항상 파멸의 길을 선택하고 원념을 내뿜고 죽는다. 말이 되고 안 되고 간에. 피투성이가 되어 죽은 사내는 원념 때문에 다시 살아나야 한다. 그래야지만 장철이 원하는 영화가 완성되는 것이다.

1960년대 말. 왜 이런 남성 영화가 만들어 졌을까? 왜 이런 남성 영화가 팬들에게 환호를 받았고, 2012년 한국의 시네마 데끄에서 상영되는 것일까? 어차피 이런 종류의 액션 영화들은 비웃음거리가 되는 남성 판타지들이다. 비웃음은 남성성을 강조한 액션 영화들이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그러나 비웃음도 여러 가지 종류다. 나는 남성성을 강조한 액션 영화들 중 국가에 대한 충성. 명분. 의리. 대의 따위를 맹목적으로 또는 교묘하게 설파하는 영화들에 대해서는 진저리를 친다. 그러나 장철이 만든 자기도취 때문에 교만한 주인공들이 기득권자들이 지들 편리한 대로 만들어낸 이데올로기. 국가에 대한 충성. 명분. 대의. 의리 따위를 무화시키며 파멸하고, 말도 안 되지만 원념 때문에 되살아나 피를 뿌리는 이런 불손한 영화들에게는 반가운 비웃음을 보낸다.

(by
오승욱_영화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