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age Book

미스터리라 하지 말지어다 1~4권 / 다무라 유미 / 연재 중

소위 ‘순정 만화’의 예쁜 그림체를 갖고 있지만 꽤 끔찍한 사건들이 쉬지 않고 등장하는 추리 만화다. 왠만한 일에는 놀라지 않고 약간 눈치도 없어 보이는 천재형 주인공이 우연히 만난 사건 현장에서 멀뚱한 표정으로 사정 없이 진실을 파헤친다. 경찰을 비롯한 조연들은 뭐 이런 놈이 다 있나 하는 표정으로 주인공을 견제하지만 나중에는 그의 도움을 받고 결국 친밀감까지 느낀다. 그리고 주인공은 변함 없이 태연한 표정으로 유유히 일상으로 돌아간다(그러나 돌아가는 길에 즉시 또 다른 사건과 마주친다). 

사실 이런 설정과 전개는 많은 소설과 만화, 영화에서 찾아볼 수 있지만 이 만화에서 내가 특히 좋아하는 요소는 적절한 거리감이다. 백수인 주인공이 사건과 만나는 방식은 언제나 우연이다. 주인공은 버스에 타거나 산책을 하는 동안 사건과 마주치고, 그때마다 사건 당사자들의 가슴 아픈 비밀과 속사정을 알게 된다. 갑자기 타인의 인생에 깊이 관여하게 되는 것인데, 이 만화는 이때 발생하는 주인공의 책임감을 아주 능숙하게 잘 다룬다. 너무 흥미 본위로 접근해 경박하게 그리지도 않고, 너무 진지하게 파고들어 타인의 고유한 영역을 침범하는 실수도 저지르지 않는다. 말로는 정확하게 설명하기 어려운 애매한 영역인데도 작가는 매 에피소드마다 이 영역을 잘 포착한다.

발간 속도가 느린 게 좀 불만이지만 디테일이 워낙 많은 작품이라 생각날 때마다 다시 꺼내서 읽어도 매번 새로운 점이 눈에 들어온다.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다시 잠깐 봤는데 역시 재미있었다. (김보년)

Poster : 벽에 붙이고 싶은 포스터 고르기 6.

데이빗 린치 <트윈 픽스>

Fire walk with me

어렸을 때부터 타투에 대한 로망이 가득했던 나는 레터링을 한다면 첫 번째로 이 문장을 새겨넣기로 마음 먹었다. 이 문장과 함께라면 어디에서든 당당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아쉽게도 내 몸에는 별 모양 하나도 새기지 못했다. 엄마가 타투를 하면 호적에서 파버린다고 협박을 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이 협박에 순종하며 살았지만 지난 해 추석, 엄마에게 고백을 했다. 지금까지 기다린 것도 충분히 엄마를 위한 예우를 다 한 것이라 생각한다. 엄마가 상상하는 무서운 용 같은 건 그리지 않을 것이다. 제발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인정해줬으면 좋겠다. 엄마는 억울해했지만 우리는 더 이상 이야기를 나누지는 않았다. 그 날 밤은 조용했다.

나는 <트윈 픽스> 오타쿠라고 할 수도 없는데 그냥 이 작품을 마구 짝사랑한다. 언젠가 극장에서 <트윈 픽스>를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모여 시리즈 전편을 다 보고 나와 종로 뒷골목에서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식당에서 <트윈 픽스>, 그리고 데이빗 린치 이야기를 종일 할 수 있는 날을 상상해본다. 으악 좋다. (예그림)  

Lunch : 극장 직원의 극장 일기 - 종로3가에서 밥 먹기 6. 

대륙

간단한 식사를 이야기 할 때 중국집을 빼놓을 수 없다. 종로 주변에는 중국집이 꽤 많이 있지만 내가 자주 가는 곳은 “대륙”이다. 지금은 없어진 유니클로 건물 지하에 있는 곳이니 서울아트시네마의 관객이라면 아마 어딘지 대략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코로나로 최근 몇 달 간 장사를 쉬기도 했고, 내부 공사를 하면서 지금은 간판도 없어졌지만 여전히 성업 중이다.

이 가게는 주위에서 보기 드물게 깔끔한 중국집이다. 종로의 식당을 찾을 때마다 청결에 만족한 적이 거의 없는데 이 가게는 그래도 기본은 지키는 편이다(어디까지나 주위의 다른 식당에 비해 청결하다는 말이다). 접객도 친절한 편이고 음식도 골고루 맛있다. 볶음밥을 시키면 짬뽕 국물이 아닌 계란국을 준다거나, 배달을 하지 않는다는 점도 신뢰를 준다. 중국 냉면(여름 한정 메뉴)이나 유린기 같은 메뉴는 왠만한 중식집보다 맛있다고 생각한다.

또 하나의 장점은 별도의 방이 있다는 점이다. 일을 하다보면 식사와 회의를 같이 하거나 손님과 간단히 술을 먹어야 할 때가 있는데 그때마다 마땅한 식당이 없어서 항상 곤란하다. 종로 주위의 식당은 맛을 떠나 대부분 너무 시끄럽거나 테이블 간격이 좁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륙에는 작은 방이 여러 개 있어 손님들과 찾기 적합하다. 아마 우리 극장이 서울극장으로 옮긴 뒤 가장 많이 찾은 곳이 대륙일 것이다. 

조금 특별한 추억도 있다. 2018년 “하라 가즈오 특별전” 당시 하라 가즈오 감독님이 서울아트시네마를 찾았다. 시네토크가 끝나자 시간은 늦어졌고, 감독님은 ‘아무거나’ 먹어도 괜찮다고 하셨다. 택시를 타고 조금 멀리 나갈까도 싶었지만 감독님이 피곤해 보여서 결국 바로 앞에 있는 대륙을 찾았다. 감독님은 일본에도 이런 현지화된 중식당이 있다고 하시며 요리와 맥주를 맛있게 드셨고, 얼마 안 가 앉은 자리에서 바로 주무시기 시작했다. 너무 편하게 잠이 든 모습에 바로 깨우지도 못하고 우리끼리 조금 더 얘기를 하면서 밥을 먹었던 이상하고 즐거웠던 풍경이 기억난다.  (김보년)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댓글을 달아 주세요

Image Book

『화양적연화·택동25』 花樣的年華·澤東廿五

In the Mood for Films - 25th Anniversary of Jet Tone Films 2016.香港國際電影節協會

비록 수집가는 아니지만 책이 불러오는 기억들에 의존하는 편이다. 종종 외국 여행 중에 당장의 쓸모와 상관없이 책을 구입하는 이유다. 얼마전 파리 생 미셀의 백 년이 넘는 서점 ‘지베르 죈느(Gibert Jeune)’가 코로나 여파로 내년 3월에 문을 닫는다는 소식을 들었다. 생 미셀의 악시옹 크리스틴이나 에스파스 생 미셀 영화관을 갔다가 자주 들렸던 이 서점에서 샀던 책들이 책장 구석에 있는데, 꺼내보기 위해 손을 대는 것만으로도 도저히 막을 수 없는 기억이 밀려 든다. 그 책들은 이제는 사라질 어떤 장소의 기억을 영원히 간직하게 될 것이다.

연말에 왕가위 영화를 상영하면서 2016년 가을에 홍콩에서 구입한 책을 오래간만에 꺼내본다. 왕가위의 택동영화사 25주년을 기념해 홍콩국제영화제에서 기획 출간한 책이다. 홍콩의 브로드웨이 시네마테크를 방문했던 때에 맛난 스파게티를 먹고 큐브릭 서점에서 구입했다. 왕가위와 작업한 스태프들, 배우 들의 다양한 인터뷰가 실려있고 보기드문 포스터와 다양한 사진들이 페이지를 장식한다. 4년이 흘렀지만 중국어를 모르니 무슨 내용인지는 모르겠다. 이제는 궁금하지도 않다. 그때 홍콩의 기억만을 간직한 영원히 침묵에 있는 책으로 남았다. (김성욱)

 

Poster

벽에 붙이고 싶은 포스터 고르기 5.

스와 노부히로 <듀오> & <퍼펙트 커플>

 

“<듀오>에서 함께 일했던 다무라 마사키 촬영감독은 프레임을 꽉 짜기 보다는 중심을 의도적으로 지우고 틈새를 만드는데 탁월한 재능이 있었다. <퍼펙트 커플>의 카롤린 샹페티에 촬영감독은 여러 면에서 그와 대조된다. 그는 논리적이고, 납득을 하지 않으면 촬영을 하지 않는다. 그와 이야기를 하면 나의 연출 컨셉도 명확해진다. <퍼펙트 커플>에서는 미술을 비롯해 영화의 여러 부분을 함께 이야기했고 공동연출로 크레딧에 이름을 올렸다. 이 영화에서 카메라 두 대를 사용하게 된 것도 그의 의견이었다.”(스와 노부히로)

오며 가며 종종 인사를 하던 사람이 있었다. 우연히 보내온 사진 속, 그녀의 집 벽에 붙어 있던 스와 노부히로 <듀오> 포스터가 눈에 띄었고 어쩌면 그 포스터 때문에 그 친구와 가까워지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나는 어느새 한강이 보이는 그녀의 집에서 <듀오>의 실물 포스터를 보는 사이가 되었다. 그 친구와 게으르게 이불을 덮고 따뜻한 음식을 함께 먹으며 노트북으로 <듀오>를 틀어 보고 싶은, 2020년의 겨울이다. (예그림)

 

Lunch

극장 직원의 극장 일기 - 종로3가에서 밥 먹기 5.

할매국수

 

가끔씩 잔치국수, 또는 멸치국수를 먹고 싶어질 때가 있다. 나는 주로 정신적으로 지치고 육체적으로 허기질 때, 거기에 입맛도 별로 없을 때 잔치국수가 먹고 싶어진다. 그리고 그때마다 별 고민 없이 “할매국수” 로 간다.

서울아트시네마에서 걸어서 1분 거리에 있는 할매국수는 좁은 골목에 있는 작고 허름한 가게다. 그러다보니 ‘외부 사람’이 일부러 여기를 찾을 것 같지는 않다. 큰 길만 걸어다니면 여기에 식당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를테고, 그래서 그런지 주위 가게의 직원으로 보이는 분들과 식사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환경미화원 아저씨들과 같이 밥을 먹은 적도 있었다). 영업 시간도 깔끔하게 오후 6시까지라 ‘점심 장사’ 전문임을 알 수 있다. 

이 가게의 특징은 양이 엄청 많다는 것이다. 커다란 스텐인레스 그릇에 갓 끓인 소면을 가득 넣어주시는데 왠만큼 배가 고프지 않으면 국물까지 다 먹기가 어렵다. 고명은 김가루와 약간의 유부 뿐이지만 딱히 고명이 안 아쉬울 정도로 국수를 많이 주신다. 게다가 밥솥에 있는 보리밥도 자유롭게 먹을 수 있다. 국수만으로도 배가 불러서 밥까지는 엄두도 못 내지만. 

메뉴는 잔치국수, 비빔국수, 해물국수, 회국수, 떡국 등으로 은근히 다양한데 나는 잔치국수만 먹어서 다른 메뉴는 어떤지 잘 모르겠다. 솔직히 엄청 특별한 맛은 아니지만 잔치국수에 뭔가 놀랄 만한 개성이 있어도 이상할 것 같다. 그냥 반찬으로 나오는 시원한 신김치와 따뜻한 국수를 계속 먹고 있으면 이만한 음식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어느새 추운 겨울이 찾아왔으니 한동안 더 자주 찾을 것 같다. (김보년)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댓글을 달아 주세요

서교인문사회연구실(seogyo.net)

 

1. 간략한 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서교인문사회연구실(seogyo.net)에서 공부하고 있는 조지훈이라고 합니다. 줄여서 서교연이라고 부르는데요, 서교동에 위치한 작은 연구실입니다. 인문사회학 내의 다양한 전공을 가진 사람들이 대학 바깥에서 강의, 포럼, 논문 발표 등의 연구 활동을 하는 공간입니다.

 

2. 처음 극장에서 본 영화, 기억나는 영화적 체험은?

처음으로 임팩트가 강하게 남았던 영화는 이명세 감독의 <인정사정 볼 것 없다> 입니다. 메시지나 주제가 아니라 처음으로 영화의 장면과 구성에 대해 흥미를 갖게 해준 영화입니다. 극장에서 본 이후에도 여러 차례 보았는데, 영화를 볼 때 마다 장면들을 혼자서 이리저리 끼워 맞추는 상상을 해본, 말 그대로 영화적 체험을 곱씹게 해준 영화입니다.

 

3. 좋아하는 영화 다섯 편을 꼽자면?

주로 오래된 영화들이 생각나네요. 장 르누아르의 <게임의 규칙>(1939), 비토리오 데 시카의 <자전거 도둑>(1948), 팀 버튼의 <에드우드>(1994), 쿠엔틴 타란티노의 <펄프픽션>(1994) 그나마 최근 영화로는 장 뤽 고다르의 <아워 뮤직>(2004)이 생각납니다.

 

4. 당신의 공간과 어울리는 영화를 한 편 추천한다면?

김일란, 이혁상 감독의 <공동정범>(2016)을 추천합니다. 예전에 연구실 멤버들과 단체 관람을 했던 적이 있었는데요, 용산 참사라는 굵직한 사건을 선악의 구도가 아니라 운동 내의 다양한 입장과 생각을 통해 보여준 영화입니다. 어떤 영화적 기법을 논하지 않고도 다큐멘터리의 진수를 느낄 수 있었던 작품이고, 무엇보다 생각을 가장 많이 하게 만든 작품입니다. 하나의 사건과 문제에 관한 다양한 토론이 오가는 연구실에 어울리는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5. 시네마테크에서 지금 함께하고 싶은 영화 한 편이 있다면?

한 편의 영화보다 다큐멘터리의 기원 중 한 명인 지가 베르토프의 작품들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좋겠네요. 베르토프의 글들을 모아놓은 책 『키노 아이』를 매우 흥미롭게 읽었는데요, 마침 그 시기의 중요한 예술 사조였던 구축주의에도 관심이 있는지라 직접 작품을 보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쉽게 접하기 어려운 작품이라 시네마테크에서 상영을 한다면 꼭 관람하고 싶습니다.

 

 

'Community'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교인문사회연구실  (0) 2020.12.30
종로 라커스(Rockers)  (0) 2020.12.02
이음편집실  (0) 2020.10.27
아틀리에 아셰프  (0) 2020.10.07
동네책방 블루프린트북  (0) 2020.09.23
프릳츠  (0) 2020.09.23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댓글을 달아 주세요

아비정전(1990) 왕가위

그러니까 지금의 뉴욕은 그때의 뉴욕이 아니다. 25년 전의 얘기다. 카메라를 메고 사냥꾼처럼 맨해튼의 거리를 킁킁거리며 돌아다니던 때, 유독 나를 사로잡았던 장소가 있었다. 카날 스트릿을 중심으로 로어 맨해튼에 펼쳐진 중국 본토 이민자들의 거주지, 차이나타운. 그곳은 센트럴파크를 중심으로 유명한 뮤지엄들이 자리 잡은 어퍼 맨해튼과는 냄새부터 달랐다. 지하철역 계단을 올라오면 매운 양념으로 철판에 볶은 숙주와 국수 냄새, 협심당파 똘마니 같은 사내들이 뿜어내는 담배 냄새, 팔딱팔딱 생선가게 바닥에서 뛰어오르는 물고기들의 바다 냄새, 만두가게 찜통에서 연신 뿜어내는 증기 냄새, 한때는 1,000명도 넘게 살았다는 작고 오래된 건물의 벽돌 냄새, 젖은 신문지 쪼가리와 검은 흙탕물이 군데군데 고여있던 길바닥 냄새, 그 모든 냄새에 나는 매료되었다. 허리가 반으로 접힌 단발머리 할머니가 햇빛 속으로 사라지는 장면을 아득히 바라보거나 차이나타운 페어 같은 오락실에서 백발이 성성한 닭에게 동전 한 닢으로 미래를 점치면서 과거와 미래 사이를 빙글빙글 돌고 돌았다.

그러니까 그 차이나타운 끄트머리, 바로 맨해튼 브릿지가 시작되는 지점에 영화관이 있었다. 외관이 화양극장 비스무리한 그 극장의 이름이 로즈메리인 것이 꽤나 인상적이었는데, 나는 단박에 <시민 케인>의 로즈버드를 로즈메리로 떠올려냈고 저런 비범한 작명을 하다니 주인은 영화광인 게 분명한 거지, 매우 흐뭇해했다. 게다가 왕가위의 영화들을 상영한다니, 동네 비디오가게에서 빌린 <아비정전>을 자취방의 손톱만한 텔레비전으로 뒤늦게 봤던 터라 역시 뉴욕은 뉴욕다우며 로즈메리 극장은 이름값을 한다고 멋대로 생각했다.

그때를 떠올리면 극장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는 내 모습이 마치 영화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처럼 비현실적으로 다가온다. 극장 내부는 흐릿한 퇴락의 공기가 떠돌고 있었다. 영화를 보는 중에 발밑으로 쥐가 지나간다고 해도 놀랄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다른 영화관에 비해 이상스러울 만치 화면은 거대했고 천장은 드높았다. <아비정전>의 영어 제목은 “데이즈 오브 빙 와일드(Days of Being Wild)”. 거침없던 날들에 바치는 이 영화를 보기에 이보다 더 영화 같은 극장이 있을까 싶었다.  

그리하여 1994년 그 겨울, 그 극장에서 <아비정전>의 잊지 못할 첫 장면이 시작되었는데, 장국영이 흘깃 시계를 볼 때, 그 시계의 초침이 또각또각 12를 향해 올라갈 때, 너와 내가 함께 한 그 1분에 대하여, 장만옥의 동요하는 눈빛이 극장 내부를 꽉 채울 때, 화면 속에서 푸른 바람 한 줄기가 관객석 사이사이를 어루만지듯 불어왔고 불현듯 나 또한 지금 이 순간을 평생 잊지 못하겠구나, 스치듯 생각했다. 그때만 해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장소들이 여간해선 사라지지 않을 거라 마구잡이로 믿어버리던 때다. 그때만해도 로즈메리 극장이 2년 후에 문을 닫게 될 거란 생각을 미처 못했고 그때만해도 같이 영화를 보던 친구가 영원히 곁에 머물 줄 알았다.

그리고 25년이 흘렀다. 작년 뉴욕에 갔을 때 숙소를 차이나타운에 잡았다. 로즈메리 극장 자리에 자리잡은 번쩍번쩍 금칠로 뒤덮인 불교 사원의 머리통을 보면서 생각했다. 어쩌면 우리가 죽음을 당연히 맞이하는 순간이 온다면, 소중한 대상의 자리를 꿰찬 괴물들에게 오만 정이 떨어질 때가 아닐까. 늘 끝자리를 잘못 기억하는 나의 뇌세포 덕분에 <시민 케인>의 로즈버드처럼 나도 마지막 순간에 로즈메리를 외치는 건 아닐런지. 로즈메리 극장을 카메라에 담아두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울 뿐이다. 일기일회, 모든 순간이 단 한 번의 만남인 것을 그때는 몰랐다.

 | 박태희 (사진가, 안목출판사 대표)

*2020/06/19 뉴스레터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댓글을 달아 주세요

Image Book : 아카세가와 겐피이 『침묵의 다도, 무언의 전위』(안그라픽스)

『침묵의 다도, 무언의 전위』 아카세가와 겐피이, 안그라픽스, 2020

 

후방을 돌아보아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때 전방을 주목할 수 밖에 없고, 그래서 예술에도 전위라는 것이 있다. 낡은 것을 부수고 새로운 것을 창출하는 것이 그 역할이다. 주변은 모두 낡은 것이니 그것을 파괴하면 즉시 새로운 것이 나타날 것이다. 전위예술가 아카세가와 겐페이는 『침묵의 다도, 무언의 힘』에서 이런 설명을 다른 식으로 고쳐쓴다. 원래 예술이라 불리는 것들이 일상 생활에 존재했는데, 근대에 들어서 사람들이 일상 생활에서 예술을 추출했고, 예술이라는 개념이 사람들의 머리 위에 등장한다. 그때에 예술이라는 개념을 다시 일상으로 되돌리려 전위예술이 등장한 것이다. 예술을 직접적으로 일상 감각에 연결하려는 행위가 전위인 것이다. 책을 읽지는 않고 제목만 보고 서평을 쓰기도 했던 아카세가와 겐페이의 글은 『나의 클래식카메라 탐닉 - 금속인류학 입문』에서 말했던 것처럼 혈중금속농도가 올라간 사람을 자석처럼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 이미 30년전에 출간된 책이지만(국역본은 올해 1월에 출간됐다), “세상은 어떤 곳에서는 무언이 융성하고 어떤 곳에서는 달변이 지배한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곳은 어떤 세상일까. 귀를 맑게 정화하면 자연스럽게 알 수 있을 것이다.”라는 말의 울림은 여전하다.(김성욱)

Poster : 벽에 붙이고 싶은 포스터 고르기 4.

by Riadykuat Riadykuat

미야자키 하야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하쿠, 생각났어. 기억은 안 나지만 엄마한테 들은 얘기야. 내가 어렸을 때 강에 빠졌었는데 그 터에 아파트가 들어섰대. 문득 생각이 났어. 그 강의 이름이 코하쿠 강이었어. 네 진짜 이름은 코하쿠야.”

“치히로, 고마워. 내 진짜 이름은 니기하야미 코하쿠누시야. 나도 생각났어. 네가 내 안에 빠진 적이 있어. 신발을 주우려고 했었지?”

“맞아, 네가 날 얕은 곳에 옮겨 줬어. 정말 기뻐.”

(예그림)

Lunch : 극장 직원의 극장 일기 - 종로3가에서 밥 먹기 4. 

열심히 일하다보면 때로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럴 때 자주 찾는 식당 중 하나가 피카디리 앞에 있는 명동칼국수다. 상호에는 ‘칼국수’라고 적혀 있지만 내가 주로 먹는 메뉴는 11,000원짜리 특보쌈정식이다. 한끼 식사로는 살짝 부담스러운 가격이라도 고기와 야채가 꽤 넉넉하게 나온다. 균형 있는 식사를 했다는 뿌듯한 기분도 느낄 수 있어 좋다.

이 가게의 특징은 옆 테이블 손님에 따라 가게 분위기가 크게 좌우된다는 점이다. 무슨 말이냐면, 높은 확률로 밥과 술을 먹으며 시끄럽게 대화를 나누는 어르신들을 만나게 된다. 이건 사실 명동칼국수만의 특징은 아니고 종로3가에 있는 대부분의 식당에 해당되는 이야기다. 종로의 어르신들은 시간에 관계 없이 반주를 하는 경우가 많다. 나는 혼잡한 시간을 피해 늦은 점심, 또는 이른 저녁을 먹는 경우가 많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꽤 높은 비율로 술에 취한 어르신들을 만난다. 이분들은 기분 좋게 취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큰 목소리로 나누시고, 나는 본의 아니게 저분들의 속깊은 생각을 엿들으며 밥을 먹는다. 사업에 성공한 아들 자랑, 어린 시절 친구들과의 추억, 김정은과 문재인과 트럼프와 허경영에 얽힌 이야기를 들으며 밥을 먹다보면 복잡한 일 생각은 잠시 잊을 수 있다. 다른 곳이라면 이런 분위기가 불편할 법도 한데 의외로 이곳에서는 그런 나쁜 기억은 없다. (김보년)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