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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10주년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Cinetalk

[시네토크] <크리스마스에 기적을 만날 확률> 연상호 감독과의 대화 “이 영화의 캐릭터들은 모두 존중과 배려를 받고 있다.”

“이 영화의 캐릭터들은 모두 존중과 배려를 받고 있다.”

<크리스마스에 기적을 만날 확률> 상영 후 연상호 감독과의 대화




김성욱(프로그램 디렉터) 국내에서는 <크리스마스에 기적을 만날 확률>로 소개되었던 <동경대부>를 추천한 연상호 감독과 이야기를 나눠보도록 하겠다(*이하 <동경대부>). 애니메이션 영화는 그동안 ‘친구들영화제’에서 한 번도 상영한 적이 없었는데 이번이 처음이다.

영화를 보고 나니 지난 크리스마스에 틀었다면 더 좋았을 거란 생각도 든다. <동경대부>는 곤 사토시의 다른 영화들과 좀 다른 성격의 작품인 걸로 알고 있는데 이 작품을 어떤 이유로 선택했는지 먼저 듣고 싶다.

연상호(영화감독) 곤 사토시 영화 중 두 작품을 추천 했었다. 하나는 <퍼펙트 블루> 였고 하나는 이 영화였다. 곤 사토시 감독이 남긴 네 편의 장편영화와 한 편의 TV시리즈 중 <퍼펙트 블루> 다음으로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 <동경대부>다. 말씀하신 대로 곤 사토시의 다른 작품들과는 색깔이 많이 다르다. 강렬한 데뷔작이었던 <퍼펙트 블루>는 스릴러였고 환상과 실제를 넘나드는 설정이었는데 <동경대부>는 훈훈한 드라마다. 이 작품을 2003년 전주영화제에서 보고 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다.

곤 사토시 감독에 대해 먼저 조금 설명해야 할 것 같다. 원래는 만화가로 데뷔했었는데 크게 빛을 보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아키라>를 만든 오토모 가츠히로 감독의 <메모리즈>라는 작품에서 첫 번째 에피소드인 <마그네틱 로즈>의 각본을 쓰게 된다. 곤 사토시 감독은 만화가나 애니메이터로 알려져 있지만 유능한 각본가이기도 했다. <퍼펙트 블루>로 전 세계를 놀라게 했고, 두 번째 작품인 <천년여우>에서도 파격적인 스토리텔링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동경대부>는 시나리오를 쓸 때 조심해야 할 점들만 가지고 각본을 썼다는 생각이 든다. ‘우연’을 이용해 사건을 전개하는 건 시나리오를 쓸 때 기본적으로 피해야 하는데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우연으로 이루어져 있다. 개봉 당시 감독의 인터뷰를 보면 시나리오의 컨셉이 굉장히 단순했다고 하더라. 즉 우연이 어떤 기적을 만들어내더라도 그걸 전혀 부자연스럽게 보이지 않도록 만드는 컨셉. 각본가로서 대단히 큰 도전이라고 생각한다. 각본가로서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가지고 각본을 쓰는 경지에 오른 것이다. 그런 이유로 이 영화를 처음 보고 굉장한 충격을 받았다. 곤 사토시 감독이 대단한 이야기꾼인 동시에 각본가로서의 기술 또한 뛰어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시나리오 상의 테크닉이 굉장히 도드라지게 보이는 영화들과는 또 다르다. 특별한 방식을 쓰는데도 관객으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영화에 몰입하게 만드는 기술까지 갖고 있어서 <퍼펙트 블루>를 제외하곤 곤 사토시의 최고작이라 생각한다.

김성욱 서사를 만드는데 우연이란 요소를 사용하는 것과 애니메이션이라는 형식에는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

연상호 영화의 전체 컨셉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이 영화에선 알게 모르게 재밌는 장면들이 많이 나온다. 오프닝 장면에서 보이는 길거리의 간판들에 스텝들의 이름이 쓰여 있다든가, 인물들이 슬퍼하는 장면의 배경이 우는 모양을 하고 있다든가, 창틀이 인물들을 쳐다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게 했다든가 하는 것들. 그리고 불량청소년들이 주인공을 때릴 때 뒤쪽에 보이는 창문 두 개가 『스트리트 파이터』의 에너지 바처럼 한 대 맞을 때마다 한 칸씩 줄어들기도 한다. 그런 장치들이 굉장히 많이 숨어있다. 그리고 이런 장치들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게 아니라 보일 듯 말 듯 알아차릴 수 있는 사람만 보게끔 표현해 놨다. 사실적이면서도 판타지가 치밀한 설계에 맞춰 섞여 있는 것이다.

그 외에도 각본의 치밀성이 영화 곳곳에 많이 드러난다. 예를 들어 긴은 자신이 경륜선수였다고 거짓말을 하는데 나중에는 경륜선수보다 더 열심히 자전거를 타고 범인을 쫓는다. “우린 액션배우가 아니잖아”라는 대사도 나오는데 나중에는 액션배우보다 더 역동적으로 움직이며 배우보다 낫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렇게 앞뒤가 딱 맞아떨어지는 치밀함이 있다. 우연만으로 썼다고 보기에는 굉장한 짜임새를 갖추고 있다.

김성욱 말씀하신 광고판 장면을 이용한 오프닝 크레딧이 인상적이었다. 일반적으로 영화를 만들 때 배경과 앞에 놓인 인물들과의 관계를 어떤 식으로 설정하는지 궁금하다.

연상호 <동경대부>는 매우 안 어울리는 설정들이 함께 어우러진 영화다. 배경이 사실적인 데 비해서 인물의 표정 같은 건 만화적 표현을 많이 썼다. 이 점은 감독의 전작인 <퍼펙트 블루>나 <천년여우>, 이후에 나온 <파프리카>와도 다른 점이다. 굉장히 리얼한, 사진을 기본으로 한 배경에 만화적인 캐릭터를 등장시킨다. 그런데 그게 한 번도 연기적으로 이상하다는 느낌을 안 준다는 것도 대단하다. 나도 애니메이션 감독이라 그런지 모르겠지만 사실 <동경대부> 속 캐릭터의 연기를 실사 영화가 그대로 재현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이 영화의 목소리 연기도 물론 훌륭하지만 그 연기가 그림과 만날 때의 시너지 효과가 매우 강력하다.

김성욱 예전에도 비슷한 질문을 한 적이 있는데, 애니메이션에서 리얼함은 어떤 것이라 생각하는지 듣고 싶다. 곤 사토시 감독도 왜 실사영화가 아니라 애니메이션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많이 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 영화에서의 ‘리얼’은 즉시 지각되는 것인데 애니메이션의 ‘리얼’은 상당히 여러 층이 겹쳐진 것 같다.



연상호 이 영화는 대단히 배려심이 많은 시나리오와 연출이 만난 작품이다. 실제로 ‘리얼하다’는 표현을 쓰려면 현실에서 일어날 수 있는 사건들이 어느 정도의 연계성을 갖고 있어야 한다. 그런 측면에선 굉장히 배려심이 많은 작품이라 생각했다. 예를 들어 노숙자 노인이 죽었을 때 하나와 미유키가 그 노인을 긴으로 착각해 놀라는 장면이 있다. 이건 시신을 개그 장치로 사용한 것이다. 그런데 그 다음 장면에서는 두 사람이 죽은 이의 명복을 비는 모습을 보여준다. 캐릭터를 하나의 장치로 사용하는 게 아니라 살아있는, 실제의 인격체로 다룬다는 느낌을 준다. 또는 앰뷸런스가 부딪치면 앰뷸런스 운전사가 무사하다는 걸 따로 보여준다. 일반적인 영화 안에서 엑스트라는 역할을 다한 뒤 버려질 수 있는 존재인데 반해 <동경대부>의 캐릭터들은 모두 존중과 배려를 받고 있다. 그런 느낌을 주는 연출이자 시나리오다.

또 일본이 갖고 있는 사회적 문제나 시선을 다각도로 보여주는 사회적 리얼함도 갖고 있다. 술 취한 사람이 노숙자를 대하는 방식, 노숙자를 재미로 때리는 청소년들, 그리고 트랜스젠더 등 성소수자를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 등. 이런 문제를 그릴 때도 균형을 유지하려고 한다. 동시에 엔딩 크레딧을 보면 굉장히 사실적으로 보이는 건물이 갑자기 들썩이며 춤을 춘기도 한다. 이렇게 실제와 허구를 넘나드는 것이 곤 사토시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이다.

김성욱 듣다 보니 일종의 반어적인 리얼함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이 영화가 실사였다면 굉장히 터무니없게 보였겠지만 애니메이션이라 ‘리얼’하게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그런 점에서 애니메이션의 리얼함이란 단순히 실제와 똑같이 그리는 게 아니라 비현실적인 것 안에서 사실적인 것을 훨씬 극대화시키는 힘이라 생각한다. 다르게 말하면 영화는 마음을 그리기 매우 어렵다. 그런데 이 애니메이션은 마음을 그리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연상호 영화도 톤을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서 대사의 느낌이 달라진다. 이를테면 극단적인 컨셉의 타란티노 영화 같은 경우에는 그 영화 안에서만 통하는 대사의 스타일이 있다. 영화의 톤을 통해 암묵적으로 합의된 것이다. 애니메이션 역시 영화와는 완전히 다른 영상 언어를 쓰기 때문에 그 안에서 쓸 수 있는 장치가 무한하다. <내일의 조>를 보면 주인공이 주먹을 날리는 그 순간에 마치 염력처럼 상대방에게 얘기를 한다. ‘나는 어떤 과정을 거치며 살았어!’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그게 전혀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마음을 울컥하게 만드는 게 있다. 그런데 이걸 실사로 그대로 옮긴다면 어떨까. 아마 얼토당토않은 장면이 나올 것이다. 이처럼 영상 언어는 그 영상 언어의 특징에 따라 그 전달 방식이 굉장히 많이 달라진다. 같은 캐릭터라 하더라도 배우에 따라서 느낌이 완전히 달라지는데, 아예 질감 자체가 다른 영상이라면 그에 맞는 새로운 연출이 당연히 필요할 것이다.

김성욱 오프닝크레딧을 보면 제작, 캐릭터디자인, 작화감독, 미술감독, 색채설계 등 분야가 굉장히 많다. 색채설계나 작화감독 같은 건 생소하다.

연상호 캐릭터디자인은 말 그대로 캐릭터를 디자인하고 그리는 역할이다. 이 작품은 아마 곤 사토시 감독이 직접 했을 것이다. 작화 감독은 여기 나오는 동화, 즉 움직이는 장면에 쓰인 그림들이 하나의 영상이 되는 과정을 컨트롤하는 사람이다. 그림 그리는 사람이 100명이 있다고 하면 100명이 똑같은 그림체로 그림을 그리게 하는게 생각보다 어려운 일인데, 작화감독은 그 일을 한다.

다음으로 중요한 역할이 미술감독이다. 미술감독은 배경을 디자인하고 그리는 팀의 수장이다. 또 색채설계는 배경에 따라 달라지는 색깔을 설정하는 작업이다. 밤에는 같은 사람이라도 피부색이 밤에 맞게 달라져야 한다. 그 자료를 정리하고 맞추는 일이다. 그리고 애니메이션에서의 촬영감독은 말 그대로 배경과 동화를 한 장씩 찍는 감독이다. 굉장히 지루한 작업처럼 들리지만 애니메이션 같은 경우는 패닝이라든가, 틸업-틸다운 같은 카메라 워킹을 구현해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 카메라워크 효과를 주는 것까지가 촬영감독의 일이다.

김성욱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입장으로서 곤 사토시 감독의 작품에서 가장 부러운 지점은 무엇인가.

연상호 곤 사토시 감독은 상당히 부러운 환경에서 작업을 하는 감독이다. <동경대부>도 제작비가 6억 엔, 그러니까 60억 정도 될 거다. 곤 사토시 감독은 지금까지 네 편의 장편을 만들었는데 흥행에 성공한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런데도 보통 60억에서 70억 가까이 되는 제작비로 작업을 했다.



김성욱 그 비법이 뭘까? 제작자가 ‘매드하우스’였는데.

연상호 맞다. 매드하우스의 사장은 곤 사토시가 항상 최고의 환경에서 작업을 하게 만들겠다는 강한 의지를 갖고 있었던 걸로 알고 있다. 돈이 되느냐 안 되느냐를 떠나서... 한국 영화계엔 왜 그런 사람이 없을까(웃음).

김성욱 제작사 이름대로 정말 매드하다(웃음).

연상호 일본에서 돈 버는 애니메이션은 사실 <원피스>, <드래곤볼> 이런 것들이다. 곤 사토시 감독의 작품이나 <공각기동대>, <아키라> 이런 작품은 돈이 안 되는 작품들이다. 그런데 <아키라>가 1988년도에 만들어졌을 때 당시 제작비로 80억원이 들어갔다. 반다이에서 80년대에 투자했던 애니메이션이 <아키라>와 <왕립우주군-오네아미스의 날개>(야마가 히로유키, 1987)이다. 후자는 <신세기 에반게리온> 시리즈를 만들어 낸 가이낙스의 창립 작품이었는데, 둘 다 제작비가 70억에서 80억 정도 됐다. 그 돈을 거의 회수를 못 하고 전부 다 날렸다. 반다이 사장이 한국에 왔을 때 어떻게 그런 손해를 보면서도 투자를 할 수 있었는지 질문을 받았다. 그러자 “이런 작품들은 10년이나 20년이 지나도 남을 명작이기 때문이다. 명작을 제작했다고 하는 것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큰 가치가 있다, 그래서 우리들은 절대 손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답변했다. 한국의 투자자들 중엔 왜 이런 분들이 없을까(웃음).

김성욱 원래 투자라는 게 장기투자와 단기투자가 있다.

연상호 한국은 투자가 1년 단위로 들어간다. 그런 점에서 이런 작품이 정말 굉장히 부럽다.

김성욱 작품 안에서는 어떤 부분을 흥미롭게 느끼셨는지.

연상호 사실 나는 <동경대부>가 곤 사토시 감독의 정점이었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원하던 모든 걸 동원해 만든 작품인 것 같다. 이후에도 <파프리카>(2006)라는 작품을 만들었지만 사실 나는 그렇게 좋게 보지는 않았다. <파프리카> 이후 <꿈꾸는 기계>라는 작품을 만들다 돌아가신 걸로 알고 있는데, 내가 알기로는 제작사 매드하우스가 <꿈꾸는 기계>가 흥행에 성공해야 한다고 감독에게 압박을 주었다. 반면 <동경대부>는 포기라거나 희생의 느낌이 전혀 안 드는, 거의 완성형에 가까운 작품이다.

곤 사토시라는 이름이 나오면 누구나 <퍼펙트 블루>를 얘기하지만, 그 당시엔 워낙 신인이었기 때문에 제작비가 그렇게 많지 않았었다. 10억 정도의 돈으로 만든 작품이라서 이후에 만든 작품보다 영상적 퀄리티가 그렇게 좋지는 않다. 그런데 <동경대부>는 예산이나 연출적 측면에서 전혀 간섭을 받지 않았다. 감독으로서 흔치 않은 기회다. 정말 부럽다. <동경대부> 이야기가 나오면 인터뷰하는 사람들이 하나 같이 “‘곤 월드’를 잘 봤다”고 이야기한다. 어떤 감독의 이름을 딴 ‘월드’가 만들어지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 것의 정점에 있는 작품이 바로 <동경대부>다.

김성욱 나는 의사가 나오는 장면을 가장 인상적으로 봤다. 잠깐 이야기를 나눈 뒤 일어나자 그냥 별 설명도 없이 의족을 슬쩍 보여주고 지나간다. 이게 전부다. 하지만 이 작품의 모든 부분을 짧은 순간에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은 느낌까지 받았다.

연상호 곤 사토시 작품에 늘 깔려 있는 기조가 있다. 현실이 괴롭더라도 다른 것으로 꾸미지 말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철학. 이 작품에도 그런 철학이 깔려있다. TV 시리즈인 <망상 대리인>도 같은 주제를 갖고 있다.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다음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 곤 사토시는 늘 현실과 환상, 꿈과 현실, 영화와 현실을 넘나드는 감독인데 그 바탕에는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는 의식이 깔려 있다.

곤 사토시의 팬들 사이에서 그의 유언장이 대단히 화제였다. 곤 사토시 감독이 <꿈꾸는 기계>를 만드는 중 갑자기 췌장암이 발병해서 그 후 약 4개월 만에 사망하고 말았다. 그런데 그때 팬들에게 공개한 유언장이 매우 유머러스하면서도 냉정한 언어로 쓰여있다. 자기는 얼마 못 살 거고, 지금 판권이라든지 저작권 정리를 하고 있고, 말기 때 치료를 받으면서 어떤 환상을 보았는데 그 환상이 너무 창의적이지 않아서 자기 자신한테 실망했다는 이야기 등.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런 얘기를 한다. “여러분 죄송하지만 저는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유언장도 작품이다.

김성욱 말을 들으니 영화 속 노인도 생각난다. 노인이 죽은 것처럼 보였는데 갑자기 다시 깨어나서 술을 마시고 다시 죽는다. 그리고 그런 노인을 불량소년 패거리가 때린다. 이 장면과 아까 얘기한 의사 장면만 보아도 이 작품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애니메이션이고, 테크닉이고를 떠나서 ‘작가’라는 느낌이 든다.

연상호 DVD의 메이킹 필름들을 보면 곤 사토시의 유머 감각이 대단하다는걸 알 수 있다. 또 하나, 곤 사토시는 영화를 굉장히 좋아하는 감독이다. 특히 <천년여우>나 <파프리카> 같은 작품에는 영화에 대한 사랑이 잘 드러나 있다. 영화광 감독이다. 너무 빨리 돌아가셔서 정말 아쉽다.

관객1 곤 사토시라든지 오시이 마모루 등 ‘리얼한’ 작화 스타일을 갖고 있는 감독들은 항상 ‘왜 애니메이션이냐’란 질문을 많이 받았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애니메이션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고, 애니메이션이기 때문에 얻을 수 있는 효과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곤 사토시도 오시이 마모루도 그런 질문을 들을 필요가 없고, 굳이 실사 영화를 만들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감독님도 실사화에 대한 질문을 많이 듣는 것으로 알고 있다.

연상호 말씀하신대로 곤 사토시 감독은 생전에 왜 실사 영화를 만들지 않느냐는 질문을 굉장히 많이 들었다. 그런데 사실 내가 만드는 애니메이션도 실사와는 굉장히 다르다고 생각한다. 요즘 내가 실사 영화를 준비하고 있기 때문에 컷 나누는 방법 등을 두고 촬영 감독님과 매우 열심히 분석을 하고 있다. 그런데 내가 지금까지 애니메이션에서 해온 컷 나누는 방식 같은 것이 실사 영화와는 너무 달라서 난감하다고 하시더라.

나는 곤 사토시 감독을 워낙 좋아하기 때문에 곤 사토시 감독과는 좀 다른 방식을 써서 영화를 만들고픈 욕심이 있다. 곤 사토시 감독은 굉장히 사실적인 움직임을 보여주는데 그 움직임 대부분이 일본의 전통적인 애니메이션 테크닉이다. 작화 스타일이나 움직임 구현에 있어서는 개인적으로 <인랑>의 오키우라 히로유키 감독의 방식을 좋아한다. 더 리얼한, 실사에 가까운 작업들이다. 그런 맥락에서 <사이비> 등에서 내가 보여준 스타일은 내가 좋아하는 일본의 애니메이션과 나의 개인적인 취향, 그리고 한국에서의 현실적인 제작 규모가 결합해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김성욱 지금 준비하는 실사 영화가 공개되면 그런 질문은 이제 안 받을 것 같다.

연상호 애니메이션 영화를 만들 때는 실사 같은 애니메이션을 만든다는 소리를 들었으니 실사 영화를 만들고 나면 애니메이션 같은 실사 영화를 만든다는 이야기를 들을 것 같다. 어쨌든 이번 영화의 목적은 돈이다. 돈 되는 영화를 만들고 있다(웃음).

관객2 감독님의 작품에 대해 궁금한 점이 있다. <돼지의 왕>도 그렇고 <사이비>도 그렇고 주인공을 약간 초인으로 묘사하는 부분이 있다. 혼자서 여러 사람을 한꺼번에 제압하는 장면 같은 것들 말이다.



연상호 <돼지의 왕>은 우상에 관한 이야기다. 우상이라 하면 특별히 잘난 부분이 있으니 우상이 되는 게 아닐까? 그래서 철이라고 하는 캐릭터에 초인 같은, 우상이 될 수 있는 이미지를 넣었다.

<사이비>의 경우는, 초인적인 악당이 주인공인 작품을 하고 싶었다. 항상 그런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이 영화의 초인인 ‘민철’에게 가장 큰 모티프를 제공한 것이 <피와 뼈>(최양일)의 김준평이다. 김준평도 대단히 초인적인 인물이다. 중풍에 걸리고 나서도 돈으로 사람을 조종하는, 절대 꺾이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그런 모습이 <사이비>의 민철이라는 캐릭터에 영향을 많이 주었다. 그리고 지금 준비하는 <서울역>에는 초인적인 캐릭터가 나오지 않는 것 같다.

관객3 곤 사토시 감독의 다른 작품들은 현실을 직시하고 냉철한 시선으로 바라보는데 이 작품에서는 세상에 대한 따뜻한 애정이 느껴진다. 감독님도 지금까지 차가운 현실을 사실적으로 그린, 좀 매정한 느낌의 작품을 하셨는데 이후에는 따뜻한 작품을 만들 계획이 있는지 궁금하다.

연상호 그런 계획은 없다(웃음). 내가 만들었던 작품 중에서, 따뜻한 건 아니지만, 다른 작품과 가장 장르적으로 다른 영화가 코메디인 <사랑은 단백질>이라는 단편이다. 사실 내가 코메디 연출도 나름 잘 한다고 생각하는데 아무래도 감독으로서의 내공이 깊지 않다보니 여유가 좀 없는 것 같다. 확실히 웃음을 주는 포인트를 찔러넣지 않으면 마음이 불안해지고 영화가 망하는 게 아닌가 걱정이 든다(웃음). 그러다보니 나는 따뜻하고 웃음을 주는 영화를 선뜻 시도하지 못하는 것 같다.

그런 면에서 곤 사토시 감독은 내게 일종의 롤 모델 같은 분이다. <동경대부> 같은 걸 정말 만들어보고 싶긴 한데 잘 안 되더라. ‘따뜻한’ 아이템은 조금 있는데, 따뜻하다가 성폭행이 나온다거나, 그래서 문제다(웃음). 요즘엔 일단 영화를 담백하게 만드는 법부터 연습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지금도 물론 그렇지만 이전에는 항상 어떤 영화적 재미 같은 게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반전이 있다거나 엔딩에서 빵 터뜨린다거나 관객을 먹먹하게 만들어야 한다거나, 그런게 없으면 영화를 못 만든다는 두려움이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덤덤하고 담백한 영화를 만듦으로써 지금까지의 반복적인 패턴에서 벗어나고 싶다.

김성욱 준비 중인 <서울역> 같은 경우는 어떤가.

연상호 <동경대부>의 메이킹 필름을 보니 도쿄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는 감독의 의도가 있더라. <서울역>이 나에게 그런 작품인 것 같다. 노숙자, 가출청소년들을 중심으로 서울역 근처의 풍경을 담고 있다. 얘기하고 보니 <동경대부>와 굉장히 비슷하다(웃음).

최근 5~6년 동안 일어났던 서울의 묵직한 사건들을 넣으려고 노력을 많이 했다. 이를테면 촛불집회 같은 것들이 자연스럽게 담기는 영화가 될 것이다. <동경대부>와 비교하자면 어둡고 잔인하며, 웃음 대신 긴장과 공포가 있는 영화다. 한창 후반 작업 중인데 나도 기대를 많이 하고 있다.

김성욱 곤 사토시 감독이 이 영화와 관련해서 한 이야기가 있다. 이 영화는 인간의 삶을 압축적으로 90분 안에 묘사한 영화라는 것이다. 아이가 태어나고, 80세 정도 되는 노인이 죽는 게 나온다. 이 영화의 이야기는 사실 쉽게 믿기 힘든 우연들로 가득하지만 한 인간의 삶을 80분으로 압축한다면 그 안에 많은 우연이 들어있고 그 우연들을 잇는 연결점들이 있을 거라고 얘기를 했더라. 이 영화는 그런 점에서 흥미롭고 또 마음에 와닿는 부분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주인공들을 도와주고, 수없이 많은 행운과 우연이 반복돼서 아기가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된다.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우연을 생각하는 게 아니라 한 아이의 생명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그게 몹시 감동적이다.

연상호 여기 오신 관객 분들 중 곤 사토시 감독의 작품을 처음 보는 분도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 분들이 정말 부럽다. 이제부터 보면 되니 말이다. 난 이미 너무 많이 봐서 볼게 없다(웃음). 곤 사토시 감독의 작품을 한 번도 안 본 분들에게 소개를 쭉 드리자면, 파격적인 데뷔작이었던 심리 스릴러물 <퍼펙트 블루>가 있다. <블랙 스완>의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이 <퍼펙트 블루>의 광팬이다. 두 번째 작품은 <천년여우>인데 어떤 여배우의 삶을 따라가면서 그녀의 비밀을 밝혀내는, 굉장히 감동적인 연애에 관한 이야기다. <동경대부>는 오늘 보신 작품이고, 그 다음에 만든 작품이 곤 사토시 최초의 TV시리즈인 <망상 대리인>이다. 그걸 보는 낙으로 13주를 살았었다. 7화까지는 정말 ‘죽음 수준’으로 좋았다가 살짝 삐끗한 뒤 10화부터 또 좋아진다. 그 다음에 <파프리카>라고 하는 <인셉션>의 원형 같은 작품이 있다. 곤 사토시 감독은 요절했기 때문에 딱 이 작품들 밖에 없다. 그래서 늘 아쉽다. 곤 사토시의 다음 작품을 보고 싶은데 그럴 수 없어서 늘 허전하다.

김성욱 곤 사토시 감독의 짧은 필모그래피는 연상호 감독이 이어가야 할 작업 같다는 생각도 든다.

연상호 농담 삼아 얘기하면 <돼지의 왕>으로 캐나다에서 ‘곤 사토시 어워드’를 받았었다.

김성욱 굉장히 감격스러웠겠다.

연상호 <사랑은 단백질>이라는 단편을 할 때 일본의 애니메이션 연구가 한 분이 취재를 하러 온 적이 있다. 그때 그 분이 이렇게 말하는 거다. “당신하고 되게 비슷한 일본 감독이 있어, 내 친구야, 곤 사토시라고.” 내가 그 분의 완전 광팬이라고 말하니 조만간 만나게 해주겠다고 말했다. 정말 두근거렸다. 언젠가 곤 사토시와 만나 친구가 될거라는 꿈을 가졌었다. 그런데 곤 사토시 감독이 2010년에 돌아가셨다. <돼지의 왕> 작업을 한참 하던 중 아침에 친구한테 문자가 왔다. “네가 좋아하는 곤 사토시 감독이 죽었대”라고.

내가 영화감독의 죽음을 기억하는 순간이 두 번 있다. 한 번은 스탠리 큐브릭 감독이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군대에서 라디오로 듣고 큰 충격을 받았었고, 두 번째가 곤 사토시였다. 살아계셨다면 지금은 친구가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늘 생각한다. 특히 <돼지의 왕>으로 입봉하기 전에 돌아가셔서 더 아쉽다. 실사 스타일의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몇 안 되는 감독 중 하나였다는 사실이 더 안타깝게 만든다. 그래서 곤 사토시 감독의 어떤 영화를 보든 울컥한다. 그만큼 나에게는 굉장히 소중한 감독이다.


정리ㅣ 이상현 자원활동가

사진ㅣ 최미연 자원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