맷 리브스의 <렛미인>(2010)을 보면서 ‘해머영화’의 팬들은 입이 근질근질해지는 경험을 했다. 비록 토마스 알프레드슨 감독의 동명영화를 리메이크했지만 맷 리브스의 작품에는 해머영화를 특징짓는 요소들이 노골적으로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뱀파이어물의 전통적인 공포요소, 하얀 눈밭 위에 박힌 붉은 핏방울과 같은 강렬한 색감, 소년소녀가 주인공임에도 불구하고 난무하는 사지절단의 잔혹 묘사 등은 1960~70년대 세계 공포영화 팬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이끌었던 해머영화의 현대적인 재현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1980년대 중반 이후 문을 닫다시피 한 해머영화사(Hammer Film Production)는 2000년대 들어 재기를 꿈꿨고 제작사 중 한곳으로 참여한 <렛미인>은 해머영화의 부활을 알린 화려한 축포와 같았다.

해머의 시작

1948년 익스클루시브 필름스(Exclusive Films)의 회장인 윌 해머가 설립한 해머영화사는 처음부터 공포영화를 만들어 인기를 얻은 것은 아니었다. TV나 라디오에서 인기를 끌었던 소재와 캐릭터를 빌려와 저예산으로 빠르게 만들어 배급하는 마이너한 회사에 가까웠다. 워낙 파이가 작은 시장을 공략한 결과로 흥행에서는 고전을 면치 못했지만 해머영화사라는 독특한 브랜드를 영국 내에 알리는 데는 적지 않은 효과를 거뒀다. 신통치 않은 흥행 수익에도 불구하고 해머영화사가 꾸준히 작품을 제작할 수 있었던 이유는 영국 내 지점을 둔 할리우드영화사들의 지원사격 덕분이었다. 이는 해머영화사의 미래에 대한 투자개념이라기보다는 1년에 1천7백만 달러 이상 해외로 반출할 수 없는 영국의 법조항으로 인한 우회의 성격이 짙었다. 영국 내 할리우드영화사들은 영국영화사와의 공동제작을 통해 더 많은 수익을 영국 밖으로 가져갈 수 있었고 그들로서는 저예산으로 인지도를 높이고 있는 해머영화사야 말로 투자하기에 가장 적합한 회사였다.

해머영화사의 입장에서도 안정된 자금이 확보되는 할리우드영화사의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문제는 영국영화계에 있었다. 관객들이 가볍게 즐길만한 오락영화 제작에 관심을 쏟지 못하다보니 할리우드영화사들은 더 이상 영국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었다. 결국 1950년대 중반 이후 대부분의 할리우드영화사들이 영국에서 철수하게 됐고 자금줄을 잃게 된 해머영화사는 덩달아 시련을 맞기에 이른다. 그것은 위기이면서 또 다른 전환점이기도 했는데 <쿼터매스 익스페리먼트>(1955)는 그런 점에서 해머영화사의 운명을 바꾼 영화이었다. 1953년 BBC에서 제작된 6부작 TV시리즈를 영화로 옮긴 <쿼터맥스 익스페리먼트>는 필름느와르풍의 과학자 쿼터매리 박사가 겪는 불가사의한 모험을 다뤄 자국 박스오피스 기록을 연일 갱신했다.

<쿼터맥스 익스페리먼트>의 흥행 대폭발 이면에는 당시 영화팬들의 기대심리를 전혀 충족시켜주지 못한 영국영화계의 경직성이 한몫했다. 영국영화는 1950년대 중반까지 세계대전을 소재삼아 허구의 이야기를 사실인 것처럼 연출한 다큐멘터리와 이 같은 추세 속에 사회성을 확장한 사실주의 영화들이 강세를 보였다. 영국민들을 단합시키고 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무거운 주제의 영화들이 극장가를 장악하다보니 영국영화계는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할만한 오락영화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이었다. 이때, 침체에 빠진 영국영화의 뒤통수를 해머로 후려치듯 등장한 것이 바로 해머영화사의 공포물이다. 이를 일러 ‘해머공포영화’라고 부르는데 195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해머영화사가 제작한 일련의 공포영화를 일컫다.

해머가 공포에 전념한 것은 <쿼터맥스 익스페리먼트>의 흥행도 컸지만 영국영화 시장 뿐 아니라 세계 시장을 공략할 수 있는 보편성을 지닌 장르라고 판단한 까닭이다. 당시 해머영화사의 수장으로 있던 제임스 카레라는 단순히 TV인기프로그램을 가져와 영화화하는 것에 큰 불만을 품었다. 때마침 공포소설의 고전 <프랑켄슈타인>과 <드라큘라>의 판권이 소멸된 상태라는 소식을 접했고 이를 영화화하기로 결심했다. 별다른 주목을 끌지 못한 채 다양한 B영화를 만들던 테렌스 피셔를 감독으로 고용, 표현의 제약 없이, 다만 많은 관객들을 자극할 수 있는 작품으로 만들 것을 주문했다.

그렇게 완성된 <프랑켄슈타인의 저주)(1957)는 제임스 카레라의 바램대로 해머영화사를 영국영화사(史)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 부각시키는데 성공했다. <프랑켄슈타인의 저주>로 자신감을 얻은 해머영화사는 <드라큘라>(1958), <미이라의 복수>(1959), <늑대인간의 저주>(1961) 등 해머공포영화로 묶이는 일련의 작품들을 줄줄이 발표하기에 이른다.

해머의 특징



해머공포영화를 말할 때 가장 중요하게 언급되는 작품은 바로 <프랑켄슈타인의 저주>다. 이 영화는 출발부터 할리우드 유니버설의 1930년대 호러 클래식의 대표작인 제임스 웨일의 <프랑켄슈타인>(1931)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졌다. 해머는 유니버설의 작품들과 어느 지점에서 어떻게 차별을 둬야하는지에 고심을 거듭했다. 인간의 오만함이 빚어낸 과학의 위험성에 더 중점을 둔 <프랑켄슈타인>과 달리 테렌스 피셔는 메리 셸리의 원작에 더 충실한 쪽으로 연출의 가닥을 잡았다. 괴물보다는 창조자 빅터 프랑켄슈타인(피터 쿠싱)의 무의식 속에 숨겨진 악마성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사실 <프랑켄슈타인의 저주>와 <프랑켄슈타인>의 이야기적 관점은 단지 상대적인 수준의 차이점일 뿐이다. 오히려 유니버설의 호러클래식과 해머영화사의 공포물 사이에 존재하는 실질적인 차이는 흑백필름과 컬러영화 간의 다름만큼이나 명백하다. 흑백필름인 <프랑켄슈타인>은 명암의 차이를 이용한 촬영으로 독일의 표현주의 영화에 더 가깝다고 할만하다. 반면 <프랑켄슈타인의 저주>는 컬러영화로 촬영된 덕에 첨탑의 건축양식과 과장된 장식성이 돋보이는 고딕스타일이 소설 그대로 묘사됐다는 평을 받았다. 실제로 해머의 공포영화는 세트촬영이 돋보이는데 퇴폐적이라는 표현이 과하지 않을 만큼 원색 이미지가 강렬해 관객의 시각에 깊은 인상을 ‘새겨 넣은’ 것이다. (<프랑켄슈타인의 저주> 이전 컬러로 촬영된 ‘프랑켄슈타인 영화’가 없었다는 것도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평가받는 중요한 이유이기도 했다.)

<프랑켄슈타인의 저주>의 성공에 고무된 해머영화사는 테렌스 피셔 감독과 피터 쿠싱, 그리고 괴물 역의 크리스토퍼 리 트리오를 다시 기용하여 고딕 이미지와 핏빛 색채가 강렬한 브람 스토커의 <드라큘라>를 영화화하였다. <프랑켄슈타인의 저주>와 달리 <드라큘라>의 경우, 테렌스 피셔는 원작을 대폭 수정, 무대를 드라큘라 성으로 한정해 반 헬싱 박사와 드라큘라가 맞붙는 일대일의 대결 구도로 영화를 구성했다. 원작 자체가 고딕적인 색채가 강했고 드라큘라 성이 이런 특징을 가장 많이 함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탁월한 해석이었다. 하지만 <드라큘라>는 영국 개봉 당시 잔인하다는 이유로 많은 장면이 잘려 나간 비운의 작품이었다. 한정된 세트 안에서 증폭된 고딕이미지의 향연이 잔인함을 더 배가시키는 효과로 작용한 결과였다.

지금까지도 해머영화사를 말할 때면 <프랑켄슈타인의 저주>와 <드라큘라>가 대표작으로 꼽힌다. 이 두 편이 선사한 강렬한 이미지는 ‘해머고딕영화’라는 또 다른 브랜드 네임을 선사하기도 했는데 실제로 미국 시장에서만큼은 더 효과적인 전략으로 통했다. 유니버설의 작품과 제목이 같다는 이유로 <드라큘라>가 <The Horror of Dracula>로 개봉되는 등 유니버설의 호러클래식과 해머공포영화는 구별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유니버설과는 차별된 해머의 영화는 미국 내에서도 큰 인기를 모았다. 그 같은 결과에 힘입어 유니버설로부터 호러클래식 리메이크 권한을 넘겨받으며 <미이라> <늑대인간의 저주> <오페라의 유령>(1963) 등과 같은 라인업을 통해 해머영화사는 전성기를 구가한다.

해머의 스타


해머의 공포영화가 서구권에서 맹위를 떨치는 동안 이 장르는 두 명의 중요한 스타를 배출했다. 피터 쿠싱과 크리스토퍼 리가 그 장본인으로 이들을 언급하지 않고서 해머의 역사는 완성되지 않는다. 그중 피터 쿠싱은 해머가 공포의 하위 장르로 정착하는데 큰 역할을 했을 정도로 뛰어난 연기를 보여줬다. 특히 ‘광인’ 연기에 특출한 재능을 과시했는데 <프랑켄슈타인의 저주>에서의 연기가 대표적이었다. 피터 쿠싱의 매력을 간파한 해머 측은 <프랑켄슈타인의 저주>의 속편을 마구잡이(<프랑켄슈타인의 복수>(1958) <프랑켄슈타인 여자를 만들다>(1967) <프랑켄슈타인 죽이기>(1970) <지옥에서 온 프랑켄슈타인과 괴물>(1974) 등)로 제작하는 것은 물론 미친놈 캐릭터를 살리기 위해 원작의 이야기를 변형하는 등 그에게 추파를 서슴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피터 쿠싱은 놀라울 정도의 ‘미친놈스러운’ 연기를 펼쳐 미치광이 박사 역은 해머공포영화를 설명하는 중요한 키워드로 기능했다. <프랑켄슈타인의 저주>를 필두로 <지옥에서 온 프랑켄슈타인과 괴물>까지, 피터 쿠싱은 해머영화사의 전속 호러배우로 인식되었고 이는 갈수록 그 자신에게 큰 불만이었다. 후에도 해머 특유의 캐릭터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열렬한 추종자를 거느렸고 컬트배우의 지위까지 얻었으니 그리 나쁜 것도 아니었다.

우리에게 <반지의 제왕> 시리즈의 사루만으로 유명한 크리스토퍼 리는 연극무대에서 배우생활을 시작했던 피터 쿠싱과 달리 해머공포영화에 출연하기 전부터 B영화에 단골로 출연한 배우였다. 190cm가 넘는 큰 키에 웃음기가 전혀 숨을 구석이 없는 차가운 면상은 그의 면모를 잘 드러낸다. 다만 위압감을 준다는 점에서 괴물이나 악당은 크리스토퍼 리의 적역 같은 것이었지만 프랑켄슈타인의 괴물 이미지를 맡기에는 다소 동떨어진 마스크였다. 제임스 웨일의 <프랑켄슈타인>이 발표된 이래 프랑켄슈타인의 괴물 이미지는 위압적이라기보다는 동정을 불러일으켰고 사악하기보다는 순진해 보이는 인상으로 굳어졌다. 더군다나 유니버설은 오리지널 프랑켄슈타인의 모습을 모방 못 하도록 조치를 취한 상태였고 그런 여러 가지 사정을 고려해 <프랑켄슈타인의 저주>의 프랑켄슈타인은 크리스토퍼 리의 인상을 한껏 활용한 흉악한 괴물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

<프랑켄슈타인의 저주>를 시작으로 그는 해머영화사에서만 12편의 작품에 출연했다. (피터 쿠싱은 해머에서 총 14편의 작품에 출연했다.) 크리스토퍼 리 본인의 온전한 인상으로 등장한 영화는 없었다. 프랑켄슈타인의 괴물 역을 필두로 드라큘라, 미라 등이 그의 캐릭터였다. 특히 보리스 카를로프, 벨라 루고시와 함께 드라큘라 3대 전문배우로 악명(?)을 떨치며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했지만 크리스토퍼 리는 자신의 얼굴이 괴물 분장에 가려지는 것을 더 이상 원치 않았다. 해머는 <드라큘라>의 성공 이후 후속편을 기획했지만 크리스토퍼 리의 고사로 제작이 연기됐고 우여곡절 끝에 완성된 <드라큘라의 신부>(1960)는 이례적으로 드라큘라가 출연하지 않는 드라큘라영화가 되었다. 해머의 드라큘라 시리즈 출연을 포기한 크리스토퍼 리는 괴물전문 배우에서 악역전문 배우로 돌아갔다. <007 황금총을 가진 사나이>(1974)의 매력적인 나쁜 놈 ‘스카라망가’에서부터 <반지의 제왕> 시리즈의 사루만까지, 크리스토퍼 리는 후대에 길이 남을 악역의 진수를 보여줬다.

해머의 영향


해머영화사가 공동제작으로 참여한 <렛미인>이 발표되기는 했지만 해머의 공포물이라고 부르기에 토마스 알프레드슨의 원작영화가 가진 영향력이 너무 짙다. 굳이 <렛미인>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해머영화사가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기에 현대영화의 성격은 물론 제작시스템 역시 예전과는 완전히 변모했다. 불온한 상상력은 갈수록 표준화 가까운 것으로 뭉툭해졌고 제작과 촬영 역시 고도화된 제작 시스템 하에서 장기간의 시간을 필요로 하게 됐다. 다만 해머라는 브랜드가 여전히 현대에서도 의미를 갖는 것은 수많은 영화에서 감지할 수 있는 해머의 ‘공포분자’ 때문이다.

굳이 해외로 갈 필요 없이, 김지운 감독의 <장화, 홍련>(2003)은 해머의 영향력이 얼마나 너른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김지운 감독은 제작자가 고딕풍의 공포영화를 만들어 볼 의향이 없느냐고 의견을 타진하기에 그 자리에서 단박에 수락했단다. 그 결과 탄생한 것이 바로 ‘벽지 공포’, ‘가옥 공포’라는 신조어를 탄생시키며 무수한 아류작을 양산한 <장화, 홍련>이었다. 정말이지 이 영화가 보여준 무대세트라든지 미술이 제공하는 이미지는 김지운 감독이 의식했든, 하지 않았든 해머의 공포영화에서 받은 영향임은 부인할 수 없다. 다시 말해, 해머의 공포영화가 영화 역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것은 색깔 있는 시각적 이미지가 동서양을 막론한 후배 영화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는 점이다. 해머라는 제작사 자체는 존재가 희미해졌지만 해머의 핏방울은 여전히 전 세계 영화계를 강렬하게 적시고 있는 것이다.

글/
허남웅(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댓글을 달아 주세요



B영화의 제왕이라 불린 로저 코먼의 자서전 제목은 '나는 어떻게 할리우드에서 백편의 영화를 만들고 한 푼도 잃지 않았는가'입니다. 얼마나 돈을 벌었는지가 아니라 얼마나 손해를 보지 않았는가가 핵심입니다. 돈을 버는 일보다 영화를 많이 찍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로저 코먼은 메이저 영화사들이 스튜디오를 매각하고 자사의 영화관을 정리하던 1940년대 말에 영화계에 들어섰습니다. 당시 영화관들은 생존전략으로 특색 있는 작품들을 찾고 있었고 그런 요구에 재빨리 대응해 작품을 만들 수 있는 작가들이 일말의 기회를 얻을 수 있던 시기입니다. 그렇게 로저 코먼의 전설적인 영화적 삶이 시작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B영화의 작가들 대부분이 그러하듯 로저 코먼을 통상적인 의미의 ‘개인적’인 작가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후대의 평가야 물론 작가라는 개인의 이름으로 작품들을 선별하겠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B영화의 작가들은 당대에 언제나 작품의 뒤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익명적‘인 작가들이었습니다. 그는 3백여 편의 영화에 제작자로서 이름을 올렸고, 갖은 방식으로 영화에 관여했습니다. 그가 관여하는 방식, 혹은 그의 주변에 몰려든 이들과의 관계에서 볼 때 로저 코먼은 개인으로 호명되기 보다는 집단체, 결합체, 혹은 운동체로서의 작가라 부를 수 있습니다.

1960년대에 그의 주변에는 영화계 입문의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젊은 영화인들이 모여들기 시작합니다.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를 위시해 잭 니콜슨, 데니스 호퍼, 피터 폰다, 찰스 브론슨, 로버트 드 니로, 토미 리 존스, 워렌 오트, 로버트 타운, 몬티 헬만, 피터 보그다노비치, 마틴 스콜세지, 조나단 드미, 제임스 카메론, 조 단테, 론 하워드, 존 세일즈 등이 코먼의 영화학교 문하생으로 성공적으로 영화계에 뛰어들 수 있었습니다. 코먼은 그들에게 영화인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고, 이들은 나중에 할리우드를 위기에서 구해낸 뉴시네마의 기수들로 성장합니다. 코먼은 제작 외에도 해외의 예술작품을 미국에 공개하는 활동도 벌여 국제적인 영화의 이식에 관여하기도 했습니다. 비록 저예산의 한계적인 영화를 만들었을지언정 코먼은 모든 영화, 모든 장르에 손을 대어 세상을 여행했고 영화계가 위기에 처한 순간에 구제를 시도한 영화인이 되었습니다.

이번 ’B영화의 위대한 거장 특별전‘에서 소개하는 리처드 플레이셔, 테렌스 피셔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리처드 플레이셔는 로버트 와이즈와 더불어 모든 장르영화에 손을 대었고 세계를 돌아다니며 영화를 만들고 오슨 웰즈에서 아놀드 슈왈제네거까지 다양한 배우들을 섭렵한 다채로운 작가입니다. 로버트 알드리치, 사무엘 풀러 등과 더불어 리처드 플레이셔는 1950-1970년대 아메리칸 시네마에서 재발견해야만할 위대한 작가입니다. 비록 공포영화에 전념했지만 1930년대 미국공포영화와 1970년대 새로운 공포영화의 가교가 되었던 해머 공포영화의 걸출한 작가 테렌스 피셔도 있습니다. 이들은 영화사의 정식 교과서에 제대로 등재되지 못한 인물들이지만 영화를 위기에서 구한 숨은 공로자들입니다.

글 / 김성욱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댓글을 달아 주세요

()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대표 최정운 www.cinematheque.seoul.kr) 4 9일부터 5 8일까지 한 달간  ‘B영화의 위대한 거장 3인전이란 제하로 리처드 플레이셔, 로저 코먼, 테렌스 피셔 이 세 감독의 대표적인 B영화들을 조명해보는 특별전을 개최한다. 상영작은 총 18편으로 리처드 플레이셔의 영화 9, 로저 코먼의 영화 3, 테렌스 피셔의 영화 6편을 소개한다.

B
영화는 1930~40년대 당시 관객 감소를 우려한 미국의 스튜디오들이 한 번에 두 편의 작품을 볼 수 있는 동시상영을 기획하면서 나온 용어다. 메이저에서 잘 나가는 감독과 배우를 고용해 만든 A영화와 상대적으로 예산이 적고 한물간 스타나 신인배우를 기용해 만든 마이너한 영화를 하나로 묶어 상영하게 된 것. 그래서인지 B영화는 졸속 제작한 작품이라는 인식을 관객들에게 심어 놓았다. 하지만 할리우드 스튜디오 시스템에 대한 독점금지법과 컬러영화에 대한 관객들의 선호로 인해 전통적인 개념의 B영화는 오래지 않아 사라졌다. 이러한 이유로 로저 코먼은 자신의 작품에 대해 B영화라고 소개하는 매스컴에 대해 강한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이번에 소개하는
B영화의 위대한 거장 3인은 B영화에 대한 개념을 완전히 바꾸어놓은 감독들이다. 리처드 플레이셔와 로저 코먼과 테렌스 피셔는 영화 역사상 가장 오락적이면서 가장 막 나가는 영화를 만든 감독으로 유명하다. 저예산 졸속의 B급이 아닌 메이저에서 허용하지 않는 자유로운 상상력과 제작환경을 최대한 활용한 영화는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전 세계 영화 팬들의 열띤 환호를 받고 있다. 이들이 만든 영화는 각자의 개성도 뚜렷해서 B영화라는 범주로만 묶일 뿐 작품의 성격은 전혀 다른 방향을 향한다.
 

리처드 플레이셔는 서구사회의 이면을 건드린 테마로 주목 받았으며, 로저 코먼은 메이저에서 독립한 영화가 가져야 할 창조적인 연출과 손해 보지 않는 제작방식을 확립했다. 또한 테렌스 피셔는 익숙한 괴수물을 가져와 자극적인 소재와 충격적인 연출을 가해 독특한 영화적 기운을 창조하기도 했다. 이들이 후대에 미친 영향도 막대해서 리처드 플레이셔의 <닥터 두리틀>(1967) <레드 소냐>(1985) 등의 작품은 리메이크되어 큰 인기를 모으기도 했다. 로저 코먼의 경우, 그의 작품을 통해 영화를 배웠던 마틴 스콜세지,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잭 니콜슨 등이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감독과 배우의 위치에 올랐으며, 미술과 세트가 돋보이는 테렌스 피셔 영화의 특징은 현대 공포물에서 지대한 영향을 미쳐 현대 공포물에 공통적으로 인용되는 요소가 되었다.


이번 영화제를 기획한 김성욱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는 이번 ‘B영화의 위대한 거장 3인전은 각기 다른 개성과 색깔, 스타일을 지닌 감독들의 세계를 만나며 색다른 영화보기의 즐거움을 선사할 것이라며 주류 할리우드와는 다른 불순한 상상력으로 무장한  소위 B영화의 진가, 할리우드의 어두운 그림자를 확인할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 말했다.

한편 이번 영화제에서는 가장 많은 상영작을 선보이게 된 리처드 플레이셔를 중심으로 이러한
B영화들이 현대영화사에 미친 영향력을 살펴볼 수 있는 강연도 마련한다.  B영화와 리처드 플레이셔’란 주제로 마련된 시네토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지평이 넓은 B영화의 위대함을 이해할 수 있는 특별한 기회가 될 것이다.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