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코올 중독자인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은 채플린은 정신병원에 끌려가는 어머니를 봐야 하는 고통 속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어머니가 완전히 정신병원에 갇힌 뒤에는 경찰의 일제 단속에 걸려드는 고통을 겪었다. 그는 켄싱턴 로드의 벽을 따라 숨어 다니던 9살짜리 부랑아였던 것이다. 그의 회고록에 따르면, 그는 '사회의 하층계급'에 속했다. 자주 이야기되어온 그의 유년 시절을 내가 다시 언급하는 것은 절대적인 빈곤 속에 폭발적인 것이 있음을 모두가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쫓고 쫓기는 영화들을 찍기 위해 키스턴 영화사에 들어가려 할 때 채플린은 뮤직홀의 동료들보다 빨리, 멀리 뛰었을 것이다. 그는 배고픔을 묘사한 유일한 영화인은 아니더라도 그것을 겪은 유일한 영화인이기 때문이다. 1914년 그의 영화필름들이 유통되기 시작하면서부터 전 세계의 관객들은 그것을 느꼈을 것이다."

                                                                          - 프랑수아 트뤼포, 앙드레 바쟁의 <찰리 채플린> 서문에서

2012년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 개막작은 찰리 채플린의 <황금광시대>다. 개막작 후보로 언급된 몇 작품이 있었지만 이견 없이 <황금광시대>로 모아졌다. '이것이 영화다'라는 이번 영화제의 콘셉트에 가장 부합하는 작품이었던 까닭이다. 아마 그렇기 때문에 1925년 발표된 이후 지금까지 90년 가까운 시간동안 전 세계 관객들에게 사랑받을 수 있었으리라. 이는 어떤 점에서 <황금광시대>가 품고 있는 현대적인 면모의 한 증거이기도 하다. 한 예로, 지금의 주류영화라는 것은 일방적인 감정 전달 방식의 드라마투르기에 목매고 있는 형국이라 할만하다. 그 훨씬 이전에 찰리 채플린은 이미 관객의 감정을 쥐락펴락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인 배우이자 연출가였다.

그 중 <황금광시대>는 채플린 본인이 후세에 이름이 알려질 작품이라고 자평했을 만큼 뛰어난 영화다. 희극과는 전혀 무관한 배경과 소재를 통해 관객들의 웃음을 자아냈다는 점이 결정적인 이유였다. 금을 손에 넣겠다며 광활한 설원을 찾은 수천 만 명 모험가의 광경을 담은 첫 장면의 풀 쇼트는 확실히 비극의 오라(aura)를 군데군데 담아낸다. 추운 날씨를 못 이겨, 굶주림을 견디지 못해 대오를 이탈하는 이들의 모습은 당대의 노동자 혹은 서민들이 처한 녹녹치 않은 현실을 감지케 한다. 찰리 채플린이 연기한 떠돌이 역시 그런 모험가 중 한 명이지만 특유의 우스꽝스러운 복장 - 중산모와 콧수염과 지팡이, 그리고 꽉 조인 재킷과 펑퍼짐한 바지 - 덕에 처음부터 비극적인 요소를 눈치 채기가 쉽지 않다.

서민의 모습을 염두에 둔 떠돌이의 복장은 그 자체로 희극의 소재지만 고단한 현실을 이겨내기 위한 장치로 고안됐다는 점에서 찰리 채플린이 가지고 있는 웃음의 철학이 농축된 미장센이다. 이에 대해 채플린은 <찰리 채플린 나의 자서전 My Autobiography>에서 이렇게 얘기했다. "역설적이지만, 한 편의 희극을 창조함에 있어 그 희극성을 돋보이게 하는 장치로 이용되는 것은 비극성입니다. 희극성이라는 것이 반항적인 태도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일 겁니다. 전지전능한 자연 앞에 선 우리의 미약함을 발견하고 취할 수 있는 대처 수단이란 웃음밖에 없을 것입니다. 아니면 미쳐버리고 말겠지요." 그러니까, 비극적인 떠돌이의 모습을 통해 많은 웃음을 자아내는 채플린의 영화 혹은 연기는 웃음과 눈물이 결코 떨어져서 생각할 수 없는 원초적 감정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사례다.


<황금광시대>에 대해 가장 많은 이들이 언급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헌 구두짝을 삶아 먹는 장면이다. 설원을 헤매던 중 길을 잃고 찾아간 외딴 집에서 떠돌이는 어느 모험가를 만나지만 이들은 먹을 게 없어 굵어죽기 일보직전이다. 이때 떠돌이는 꺼진 등의 양초를 시험 삼아 씹어 먹다가 별 이상이 없자 구두 한 짝을 저녁식사로 해결하는 엽기적인(?) 행위를 선보인다. 스파게티 면발을 먹듯 구두끈을 후루룩 삼키고 못이 박힌 구두 밑창은 생선 가시를 골라내듯 발려 먹는데, 이 장면이 제공하는 웃음의 이면에는 인생역전을 꿈꿨다가 먹을 것 하나 구하지 못하는 신세로 떨어진 보통사람들의 애환이 그림자처럼 엎드려있다. (촬영에 쓰인 구두는 감초로 만든 것이었다. 해당 장면의 촬영이 끝난 후 채플린은 3일 동안 복통에 시달렸다고 한다.)

웃음과 눈물의 밀접한 관계성을 기막히게 살려내는 찰리 채플린의 감각은 본인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가수인 아버지와 배우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지만 각각 알코올중독과 정신분열을 겪는 부모 밑에서 지독한 궁핍과 허기에 시달린 불우한 어린 시절은 잘 알려져 있다. 열 살 때 아동극단에서 탭댄스를 배우고 무대에 서게 되면서 그는 희극의 즐거움을 알게 됐는데 <황금광시대>에는 그런 경험의 소산이라 할 만한 장면이 등장한다. 사랑하는 여인 조지아(조지아 헤일)와의 식사 장면에서 떠돌이가 그녀를 즐겁게 하기 위해 두 개의 빵에 포크를 꼽아 탭댄스를 추는 장면이다. (이에 대한 당시 관객들의 반응이 얼마나 열렬했는지 극장 측은 이 장면을 연이어 다시 한 번 보여주었다고 한다.)


결국 현실의 고단함을 이겨내는 것은 이를 잊게 해주는 웃음이다. 이 웃음의 정체는 혼자가 아닌 사람과 사람끼리 부딪히는 관계의 과정 속에서 생성된다. 안 그래도 <황금광시대>는 떠돌이가 부자가 되는 이야기인 것 같지만 실은 조지아와의 사랑이 맺어지는 구조로 진행된다. 이는 채플린이 <황금광시대> 이후 <시티라이트>(1931) <모던 타임즈>(1936) 등에서 일관되게 역설해온 바다. 돈이 잠시간의 행복을 가져올지 몰라도 해피엔딩을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것. 오히려 <황금광시대>에서 우연히 금광을 찾아 부자가 된 떠돌이가 가장 기뻐하는 순간도 사랑하는 여인 조지아와 맺어지는 장면에서다. 그 둘은 미국으로 향하는 뱃속에서 관계가 완전히 역전되고 마는데 한때 잘나갔던 조지아는 밀항자 신세로 전락한 상태다. 하지만 떠돌이는 이에 개의치 않고 조지아를 받아들이며 환하게 웃음 짓는다.

<황금광시대>에 대해 현대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이와 같은 부분 때문이다. 채플린의 영화가 어필을 할 수 있었던 주요한 이유는 날로 기계화되어 가는 시대 속에서 빠르게 잊히는 인간적인 가치에 대해 역설했던 까닭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신자유주의가 기승을 부리고 있는 현재도 물질의 가치에 현저히 밀리고 있는 인간성의 회복을 목격하기 위해 극장을 찾는 관객이 대다수다. 그런 까닭에 최근 영화들 역시 메시지 전달보다는 희로애락의 감정을 전달하는 이야기에 치중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다만 채플린이 희극과 비극이라는 두 감정의 이미지 충돌을 통한 몽타주를 구사하며 영화적으로 관객을 끌어들였다면 현대의 영화들은 전혀 생각할 틈을 주지 않으면서 감정을 전달하는 일방향 연출에 매진하는 추세다.

장 콕토는 "채플린의 도움으로 인류는 바벨탑의 건설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면서 만국공용어로 작용하는 그의 연기와 영화에 대해 극찬을 표한 바 있다. 올해 친구들 영화제의 개막작 <황금광시대>는 '희극이라는 이름의 애수'로 불리는 찰리 채플린 영화의 정수를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또한 상품으로 기능하는 현대영화가 잊은 '영화란 무엇인가'의 가치에 대해 다시금 돌아보는 시간을 제공할 것이다.

글|허남웅 영화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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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다른 엔딩


1942년, 찰리 채플린은 애초에 무성영화로 만들어진 <황금광 시대>에 자신의 내레이션과 그가 작곡한 음악을 삽입했다. 이 때 몇몇 장면들이 삭제되거나 수정되면서 재개봉 버전의 러닝타임은 오리지널보다 20여 분 짧아진 형태로 완성되었다. 눈에 띄는 변화 중 하나는 다름 아닌 영화의 엔딩이다. 이번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에서 상영되는 1942년의 재개봉 버전의 엔딩은 다음과 같다. 떠돌이 찰리는 금광을 찾아내 백만장자가 되고, 그가 탄 배에서 사랑하는 여인 조지아와 우연히 재회한다. 둘은 손을 맞잡고 함께 갑판의 계단을 오르고 화면은 페이드 아웃된다. 그런데 여기에는 또 다른 엔딩이 숨겨져 있다. 1925년의 오리지널 버전에서 두 사람은 계단을 오른 뒤, 사진 기자의 카메라 앞에서 함께 포즈를 취한다. 마주 본 두 사람의 얼굴에 미소가 떠오르고, 사진 기자의 투덜거림에도 아랑곳 않고 행복한 키스를 나누며 영화는 끝난다. 그로부터 17년 후, 재개봉을 위한 편집 과정에서 채플린은 이 장면을 삭제해 버린다. 대신 그는 계단을 오르는 두 사람의 뒷모습과 함께 ‘해피엔딩’이라고 읊조리는 내레이션으로 영화를 마무리한다. 본래의 엔딩에 비하면 재편집된 버전의 엔딩은 내러티브나 화면 구도에 있어서 조금은 어색하고 불안정해 보인다. 어째서 채플린은 이 마지막 키스 씬을 잘라낸 걸까?

찰리 이후의 채플린


그의 영화에서 희극과 비극은 늘 맞물려 있지만, <황금광 시대>에는 분명 어떤 낙관주의가 남아있다. 당시 채플린은 당대의 스타 배우들, 감독과 함께 유나이티드 아티스츠 영화사를 창립했는데, 이로써 그는 기존 스튜디오와의 착취적인 계약관계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게 된다. <황금광 시대>는 그가 바로 이 유나이티드 아티스츠 시절에 감독과 주연을 겸하여 만든 첫 영화이다. 채플린은 종종 이 영화로 자신이 기억될 거라 말하곤 했다고 한다. ‘좋은 시절’로 기억되는 미국의 20년대, 채플린 역시 어떤 기대와 믿음, 낙관의 정서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고, 황금과 여인, 모두를 얻는 <황금광 시대>의 이야기는 그의 영화에서 유일한 키스 씬으로 행복하게 끝맺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후 영화들에서 ‘해피엔딩’은 점차 사라진다. 마지막에 이르면, 결국 모두가 떠나버리고 홀로 남겨지거나(<서커스>(1928)), 시력을 되찾은 소녀의 앞에서 깨어진 꿈으로 남거나(<시티 라이트>(1931)), 애잔한 뒷모습으로 멀어져만 간다(<모던 타임즈>(1936)). 특히 떠돌이 찰리 캐릭터와 작별한 이후, 그의 영화는 더욱 어두워진다. <위대한 독재자>(1940)에서는 고통 받는 연인에게 목소리만이 간신히 가닿을 뿐이고, <살인광 시대>(1946)에서는 ‘살인이 사업의 연장’인 베르두 씨로 등장해 무심히 교수대에 오른다. 대공황, 산업화, 전쟁, 학살의 시간을 지나면서 그의 영화는 점점 세상을 향해 비판과 근심, 냉소를 내비치고 있었다. <황금광 시대>가 처음 만들어진 1925년의 채플린과 재편집된 1942년의 채플린, 이 둘 사이에는 간극이 존재할 수밖에 없으며, 그러한 간극의 흔적이 이 영화의 삭제된 엔딩에 남아있는 셈이다. 그런 맥락에서 곱씹어 생각하게 되는 것은 삭제된 장면 그 자체보다, 그러한 차이를 만들 수밖에 없었던 한 예술가의 ‘선택’이다. 당시 채플린은 이미 유명한 ‘할리우드 스타’ 그 이상이었다. 그것은 단지 그가 <황금광 시대>가 재개봉하던 1942년에도 전쟁과 관련된 수많은 대중 집회에서 연설하는 등 사회적 문제에 적극 참여하고 있었다는 것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영화사상 사람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인물을 창조해낸 그는 어느 순간 영화가 단지 대중의 꿈이 투사되는 것으로서 존재하는 것을 거부하고서, 이 통렬한 과정을 이후 자신의 필모그래피를 통해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따라서 채플린의 후기 영화들은 보는 것은 작품들 하나하나가 지닌 흥미와 놀라움 뿐 아니라, 용기 있고, 열정적인 한 예술가가 자신의 시대를 예민하게 바라보는 방식과 만나는 것이며, ‘찰리’ 이후의 시기에 재편집된 버전의 <황금광 시대> 역시 미묘하게나마 그러한 과정 안에 있다.

by 장지혜 관객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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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만병통치약이다.’ 내게 누군가 영화의 정의를 내리라면 이렇게 얘기할 것 같다. 어린 시절부터 영화를 좋아하는 아버지 덕에 상당히 영화를 즐겨봤다. 그래서 초등학교에 가서도 여가시간에 비디오 대여점에서 매일 두 세편의 영화를 빌려서 봤었다. 하지만 영화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가진 적은 없었다. 그런데 우연히 만나게 된 친구로 인해 어느 순간 영화의 매력에 푹 빠졌고 거의 매일 영화관을 들락거리기에 이르렀다. 적어도 내겐 영화 보는 일이 제일 우선이 된 것이다. 영화는 그렇게 하루가 다르게 크게 와 닿았고, 지금은 볼 수 없는 영화들에 대한 목마름은 더욱 커져만 갔다. 그렇게 서울아트시네마에 조금씩 가까워졌다.

서울아트시네마를 처음 알게 된 것은 18살 때의 일이다. 고전영화와 예술영화를 주구장창 틀어준다는 말을 들었을 때에 빨리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낙원상가에 그런 극장이 있다니!’ ‘책에서 보던 고전을 프린트로 볼 수 있다니!’ 상상만으로 행복했다. 얼마 후, 영화관에 처음으로 가던 날. 극장을 가기 위해 여러 국밥 집을 지나쳤다. 그리고 옥상에 도착하자, 허리우드 극장과 그 옆의 서울아트시네마가 나를 반겼다. 있는 위치마저 ‘참 영화적이다’라는 생각을 했다. 게다가 자주 가던 멀티플렉스와는 너무나도 다른 분위기. 대부분의 사람들이 혼자 온 것 같았다. 요즘 보기 힘든 광경이었다. 좌석은 많으나 소수의 관객들이 있을 뿐. 그때는 몰래 자신의 소중한 영화 서재에 와서 조용히 영화를 음미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난 지금 나는 이곳, 서울아트시네마에서 관객 에디터로 활동하고 있다. 그 결과가 이렇게 이어져서 기쁘게 지내고 있다. 내가 사랑하는 곳에서 영화를 사랑하는 여러 사람들과 영화를 보고 느끼고 나눌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즐겁고 행복한지 모르겠다.


영화는 대중과 가장 가까이 접해있고, 큰 파급력을 가지고 있다. 그런 이유로 찰리 채플린이나 버스터 키튼과 같은 감독이 위대하다고 생각한다. 평단과 관객을 동시에 만족시키고 사회를 은유 하는데 이르기 때문이다. 그런 영화를 프린트로 볼 수 있는 시네마테크는 그 어떤 학교보다 좋은 가르침을 주는 곳이다. 내가 가고 싶은 때에 찾아가도 언제나 나를 반겨주는 그런 곳이다. 영화라는 약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면 시네마테크는 좋은 약만 지어 관객들에게 고루고루 나누어 주고 있다. 이 곳이 더 좋은 집에서 오래도록 관객들과 함께했으면 좋겠다. (정태형 시네마테크 서울아트시네마 관객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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