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토크] 배우 전무송·안성기·송길한 작가와 함께한 임권택 감독의 <만다라>

지난 20일 일요일 늦은 오후 마지막회로 상영된 임권택 감독의 <만다라> 상영 후 열린 시네토크의 현장에는 특별한 친구들이 가득했다. 당초 계획과 달리 몸이 편찮으신 관계로 참석이 어려우셨던 감독님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영화의 두 주연배우 전무송, 안성기 씨와 시나리오작가 송길한 씨가 서울아트시네마를 찾았다. 그리고 객석에는 영화 <만다라>의 감수를 맡아주셨던 평상스님까지. 평소 임권택 감독과 친분이 두터운 패밀리들이 모였다. 그들은 30년 전 영화임에도 새록새록 그 때 그 시절을 회고했다. 정성일 영화평론가의 진행으로 넘치는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았던 그 현장을 전한다.


정성일(영화평론가/영화감독):
영화를 30여년 만에 극장 객석에서 본 소감이 어떠한가?
전무송(영화배우): 영화가 개봉했을 때 단성사에서 처음 이 영화를 볼 때의 느낌이 났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안성기, 송길한 작가, 평상스님과 함께 이 영화를 보니 감회가 새롭다. 촬영당시 추억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송길한(시나리오 작가): 이렇게 다시 보게 되니 감흥이 남다르다. 다시 한 번 영화에 조목조목 감수를 해주시고 도움을 주신 평상스님께 감사드린다. 유난히도 가족같이 끈끈했던 스텝과 배우들의 마음이 묻어나는 작품이다. 작품 속에 들어있는 정신들을 오늘 함께하신 관객들이 알아주셨길 바란다.
안성기(영화배우): 성인이 되고 배우 활동 초창기 시절 출연한 영화다. 당시엔 나이 좀 먹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까 ‘애’다. 당시 정일성 촬영감독님과 임권택 감독께서 ‘정노인’, ‘임노인’ 하시며 장난치셔서 정말 나이가 많으신 노인인줄 알았다. 하지만 알고 보면 지금 현재 내 나이보다 어리셨다. 참 세월이 느껴진다. 또 촬영하면서 겪었던 여러가지 에피소드들이 생각난다.

정성일: 마이크를 객석에 넘겨 영화의 고문을 봐주신 평상스님의 소감도 듣고 싶다.
평상스님: 오랜 세월이 지나 30여년 만에 보는 것이다. 죽지 않고 살아서 이렇게 볼 수도 있구나 싶다. 이런 일도, 저런 일도 있었지 하는 생각들이 난다. 옛 생각을 하게 되서 좋고 여러분과 이 영화에 대한 얘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게 감회가 남다르다.
안성기: 염불 한번 해주셔야지 좋지 않겠나? (웃음) 영화 속 나와 지산스님의 염불은 모두 평상스님의 염불 외는 소리로 대체 되었었다.
전무송: 우리도 잘 배웠는데 리듬이 안 좋았다.
송길한: 둘의 염불 연습의 증인은 나다. 순천에서 촬영할 때 같이 술을 많이 마시고 나는 잠시 나왔는데, 민박집 불이 그 늦은 밤에 환히 켜진 채로 있더라. 다가가 보니 고 곽지균 조감독과 두 배우가 밤을 새워 다음 촬영씬 리허설을 하더라. 술이 확 깨던 순간이었다.

정성일:
'필름 2.0'에서 비평가들에게 ‘내인생 최고의 한국영화’를 꼽으라고 했을 때, 1위에 <오발탄>, 2위에 <하녀>, 그리고 3위에 <만다라>가 올랐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암살이후 모두들 지겨운 시대의 끝이라고 생각했지만, 유신과 1980년 5월 광주사건은 한국 사회가 다른 차원으로 돌입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했다. 그 때 그 시대의 공기를 전해주는 두 영화가 <바람불어 좋은 날>과 <만다라>였다. 시간의 무게를 견디고 <만다라>는 오늘 우리에게까지 왔다. 보는 사람을 사로잡는 이 영화의 힘은 절실함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촬영당시 병 때문에 죽을 각오로 찍은 정일성 촬영감독의 절실함과 삭발투혼을 발휘한 두 배우 분, 혼이 빠질 때까지 시나리오 집필을 하신 송길한 선생의 절실함이 마법의 힘을 발휘하는 것 같다. 또한 이 작품은 안성기라는 배우의 위치를 굳게 해준 영화라고 생각된다. 삭발을 하며 집중해 임했던 이 영화가 갖는 개인적인 의미에 대해 듣고 싶다.
안성기: <만다라>라는 작품을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유신 정권 속에서 꿈틀하는 힘을 발휘한 두 작품 모두에 출연한 것 또한 운이 좋았다. 그 이전에 성인 배우로서 찍은 4편의 영화에서 나는 회의를 느꼈다. 일생을 걸고 영화에 뛰어들었는데 약간 암울한 감정이 있었다. 그러던 중에 <바람불어 좋은날>을 만나 새로운 영화를 관객에게 보여줬고 나는 힘을 얻었다. 그리고 바로 <만다라>를 만나 영화의 새로운 역사를 쓰는 것에 함께 수 있었다. 배우로서 입지를 굳힐 수 있었고 그 이후 내가 원하는 작품에 내가 배우로서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작품에 출연할 수 있었다.

정성일: 많은 감독들과 작업해보면서 느낀, 임권택 감독님의 연기지도 스타일이 갖는 차별성은 무엇인가?
안성기: 구체적으로 말씀을 안 하신다. “해~봐, 해봐” 하실 뿐이다. 임권택 감독님은 특이한 습관이 있으신데, 감정 연기에 따라 고개를 올리신다. 고개가 끝까지 뒤로 안 올라가시면 NG고 고개가 다 올라가시면 좋은 것이다.

정성일:
전무송 씨는 원래 연극배우로 활동하시다가 처음 하게 된 영화라고 알고 있다. 처음 만나 같이 작업한 영화감독인 임권택 감독님은 어떠셨나?
전무송: 일반 관객 앞이 아닌 카메라 앞에서 연기를 해야 했다. 영화계 선배인 안성기 씨가 카메라 앞에 서는 법에 관해 많은 도움을 주었다. 처음 감독님을 만났을 때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인자하시고 부드러우셨다.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그저 “이렇게 해봐요. 저렇게 해봐요.” 하셨다. 그러곤 “어때요? 괜찮아요?”하시는데 내가 이상하다 하면 다시 찍곤 했다. 배우에게 표현과 움직임에 대해 말하지 않으시지만 당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들 때까지 촬영을 다시 하게끔 지도 하신다.

정성일: 이 영화의 시나리오는 참으로 이례적인 것 같고 그 형식이 파격적이라고 느껴진다. 쓰인 배경이라든지 쓸 때 어떤 마음가짐으로 했는지 궁금하다.
송길한: 당시에 일반 회사에 들어가 월급쟁이가 되려 했다. 그러던 중 임감독님이 이미 촬영이 들어간 영화가 큰일이 났다며 살려달라고 찾아왔다. 영화사 기획실장이였는데 집에 일이 생겼다고 하고 충무로 여관방에 들어가 4박 5일 동안 잠도 안자고 시나리오를 섰다. 여관방을 나왔을 때 하늘이 노랗다는 말을 실감했다. 극도로 몰려서 초능력적인 힘이 발휘된 것인지, 내가 썼나 싶을 정도로 좋은 대사들이 나왔다.

정성일: 영화와 원작 소설의 엔딩이 다르다.
송길한: 절집의 비리는 이 영화가 해야 되는 얘기가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두 젊은이가 삶을 완성해가는 길에 관한 얘기니까, 두 젊은이가 치열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담아내야 했다.


관객1: 안성기 씨 출연작을 많이 보았고 연기에 감동을 많이 받는다. <만다라>에서는 어떻게 캐릭터를 해석했기에 이런 연기가 나온 것 인가?
안성기: 착한 사람이다. 허나 화도 있다. 선배스님인 지산스님이 쿡쿡 찔러올 때 분노의 감정도 있고 그것을 표현해야했다. 지금 보니 부족한 점이 너무 많이 보인다. 특히 엔딩씬에서 어머니의 손을 잡고 너무 밝게 속이 들여다보이게 웃고 있다. 조금 무표정으로 해도 더 좋았을 것 같다. 이 영화에서 나의 연기는 미숙한 점이 많았다.

관객2: 법운스님의 마지막 장면이야기가 나오니 지산스님의 마지막에 관해 묻고 싶다. 어떤 생각과 마음가짐으로 그 죽은 척하는 연기를 했나? 그리고 그 당시 눈이 정말 많이 온 것 같은데 기다린 것인가 우연의 일치인가?
전무송: 설악산에서 촬영했는데, 오색 약수터에서 눈이 오길 보름을 기다렸다. 4월 중순까지 눈이 오는 경우도 있다는 동네 주민의 말에 기다리고 기다리다 내년에 찍던지 하자하며 철수를 하려고 한 날에 눈이 그렇게나 많이 내렸다. 마지막에 딱히 어떤 표정으로 누워있자 한 것은 아니다. 이 영화에서 계속 남는 것은 “견성하거든 나 좀 제도해줘”와 “내 눈의 점안은 누가 해주나”이다. 내가 하지 못하는 일들이고 남이 해줘야한다. 제대로 알고 행동하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의 고민거리다. 나는 지산이 그것을 알고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평생 구하고 있는 인생의 답을 나타내는 탑 밑에서 죽었다. 계속 남는 두 대사와 나의 탑을 생각하고 그것을 찾는 마음으로 연기했다.


관객3: 지산스님이 애인을 찾아갔을 때 애인이 고무신과 양말을 빨아주는 장면이 아름다우면서도 이해가 선뜻 안됐다. 무슨 의미가 깃든 것인가?
송길한: 굉장히 아름다운 씬이다. 아무리 창녀지만 기둥서방이 있다. 겪어보니 좋고 무슨 고민이든 털어놓을 수 있어 지산을 애인 삼은 것이다. 딸랑 고무신 하나 신고 만행을 하는 그의 신을 씻어 준 것은 막달라 마리아가 비싼 향유를 예수에게 부은 것과 닮았다고 본다. 별 것 아닌 것 같은 씬이 빛나는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평상스님: 몇 가지 더하고 싶은 말이 있다. 영화 제목 ‘만다라’의 뜻은 '세계', '세상'이다. 우리가 사는 곳, 우주, 인생, 자연을 담는 총체적인 말이다. 엔딩이 원작과 달라진 이유는 내 고집도 있었다. 법운스님이 수행자로서의 인생에 있어 새로운 출발은 하게 한 것은, 지산의 삶에 매료되는 원작의 끝과 다르다. 대사가 달라진 곳이 있는데, 죽은 지산의 불상을 그의 애인에게 전해줄때 애인이 “그분은 성불하셨겠죠?”라 묻고 법운은 “그분은 그분이 원하는 곳을 가셨을 겁니다.”라고 대답한다.

관객4: <만다라>라는 영화가 개인적으로 인생에 어떤 영향을 끼쳤나?
송길한: 많은 내적 변화가 있었고 모르는 것들을 많이 배웠다. 승려의 삶도 이렇게 치열한가 싶었다.
전무송: “내 눈에 점안은 누가 해주나”를 생각하다가 ‘내 눈은 내가 떠야 하지 않는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막연한 불교 신자였는데, 영화 촬영 후 더 깊게 불교에 빠지게 되었다. 이 후에 <원효대사> <아제아제 바라아제> 같은 다수의 불교영화에 출연하기도 했다.
안성기: 빡빡 깎은 머리와 승복을 내 몸에 맞추려고 영화 촬영 전에 준비도 많이 하고 승려처럼 돌아다니며 많은 체험을 했다. 그 때 많이 배우고 느꼈다.


정성일: 관객 분들이 임권택 감독의 다른 불교영화 <아제아제 바라아제>를 보셨으면 한다. 또 감독님의 101번째 영화 <달빛 길어 올리기>가 3월 17일에 개봉한다니 꼭 보시라.
송길한: 종이를 만드는 사람들의 얘기다. 자기 이름과 돈을 바라고 영화를 만든 것이 아니라, 영화를 위해 만들고 이야기를 해기위해 만드셨다. 그의 정성과 감동이 잔잔하게 가슴에 배어드는 영화다.

(정리: 배준영 시네마테크 서울아트시네마 관객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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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토크] 영화평론가 정성일 감독이 추천한 에릭 로메르의 <나무, 시장, 메디아테크>

‘2011년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가 어느덧 2주차에 접어들었다. 지난 25일은 에릭 로메르의 영화 세 편을 상영했던, 일명 '로메르 데이'였다. 마지막 회 <나무, 시장, 메디아테크>가 상영 후에는 이 영화를 추천했던 정성일 영화평론가 겸 감독과 함께하는 시네토크도 이어졌다. 정성일 감독은 로메르의 영화세계 전반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매우 긴 시간동안 열성적이고 유쾌하게 들려주었다. 객석을 가득 매운 관객들은 늦은 시간까지 자리를 떠나지 않은 채 끝까지 집중하는 모습이었다.


정성일(영화감독/영화평론가): 올해로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에 6년째 개근이다. 올해에도 백지수표가 도착해서 매우 기뻤고 어떤 영화를 써 넣을까 생각했다. <나무, 시장, 메디아테크>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세 편 중 하나이며, 이 영화가 로메르 영화의 정수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오늘은 여러분들과 로메르 영화세계에 대한 추억을 떠올려 보고, 더불어 이 영화에 대한 짧은 생각을 말씀드리려 한다.

로메르는 1920년 4월 4일 생이다. 영화가 아직 무성영화에 머물러 있던 시절, 장편영화가 막 시작했던 시절에 태어났단 뜻이다. 다른 누벨바그 동료들은 모두 토키영화가 시작된 후에 시작했다. 로메르 영화를 보면서 고다르, 트뤼포, 샤브롤의 영화와 완전히 다르다는 느낌을 받는 것은, 로메르가 그들과 아주 다른 세대에 속하는 사람이며, 영화를 경유하여 세상의 리듬을 느끼는 방식에 있어 완전히 다른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라 생각한다. 로메르는 2차 대전 당시, 다른 누벨바그 세대 감독들처럼 어린 아이로서 보낸 게 아니다. 10대에서 20대를 통과하는 나이에 전쟁을 겪었고, 자의식을 갖고 고스란히 보았을 뿐만 아니라, 20살에 게슈타포에게 잡혀가서 레지스탕스 활동을 한 형을 고발하라는 위협을 받기도 했다. 로메르는 이때, 어떤 일이 있어도 세상의 변화에 관여하지 않고, 정치에 관여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돌아왔다고 한다. 로메르는 1948년에 '영화, 공간의 예술'이라는 글을 썼다. 이처럼 로메르는 공간을 통해 영화에 다가갔던 사람이다. 여기서 로메르는 영화 공간에 두 개의 가능성이 앞으로 남아있다고 말했다. 하나는 오슨 웰즈의 딥 포커스의 공간, 또 하나는 카메라를 들고 거리에 나갔던 로셀리니의 공간이다. 로메르는 두 개의 공간을 다 활용하고 싶어 했다. 도덕이야기, 희극과 격언, 사계절 이야기 같은 영화들은 로셀리니의 길을 따르며, 70년대 만들어진 시대극들은 웰스의 전통을 따른다. 또한 그는 파울로 우첼로나 엘 그레코 등, 화가에 대한 사랑을 포기한 적이 없다. 그리고 실제로 1960년대 후반에 네스토르 알멘드로스라는 촬영기사를 만나면서 그와 함께 인상주의 화가들이 해냈었던 것과 같이 영화작업을 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인다. 로메르를 이끌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독일적인 문화였다.

카이에 뒤 시네마의 '작가정책'은 영화에서 스타일의 혁신을 이야기했다. 로메르는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로메르는 영화는 스타일이 아니라 테마라고 생각했다. 일종의 고전주의자였던 셈이다. 로메르는 사물을 거기에 배치했을 때, 그것이 주는 가짜스러움을 끔찍하게 혐오했다. 일례로 트뤼포의 영화에서 나오는 눈은 다 가짜 눈이었던데 반해, 로메르의 영화에서는 가짜 눈이 내린 적이 없다. 그러기 위해서 로메르는 그 지역을 찍기 3년 전부터 일기예보를 계속 체크했다고 한다. 로메르는 좋은 영화는 어떻게 스타일을 혁신해서 새로운 영화를 만드느냐가 아니라, 테마에 어떻게 접근하느냐에 따라 나온다고 말했다. 태도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테마와 주제를 연결시킬 때, 그에게 핵심은 도덕이라는 문제였다. 자기 영화에서 끌어안아야만 하는 것은 도덕이었다. 반대로 고다르에게 영화는 스타일이고, 스타일이 모든 것이었다. 고다르가 정치적으로도, 미학적으로도 무정부주의자였던 이유다. 모든 것에 대한 와해가 필요했던 것이다. 자기의 세계관과 영화를 분리했을 때, 대부분 그 영화는 사기다. '좋은 영화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을 가지지 않은 사람은 아직 영화를 만들 준비가 안 된 것이다. '좋은 영화란 무엇인가'라고 밀어붙였을 때, 로메르에게는 결국 도덕이라는 문제로 귀결된 것처럼, 또한 고다르가 무정부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감독이라면 자기가 영화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마음속에 원칙이 되는 대답을 가지고 있어야 된다고 믿는다. 사람들에게 가장 좋아하는 로메르의 영화를 물으면, 목록이 겹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신기한 것은 로메르의 경우, 상대방이 어떤 영화를 이야기했을 때에도 이의를 제기하고 싶지 않으며, 그 사람이 어떤 영화의 취향과 미감을 가진 사람인지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사실상 로메르 영화의 테마는 간단하다. "어떻게 살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 이 두 가지의 끝없는 변주이고 반복이다. 차이는 단지 영화들 사이에서 어떤 사람이 어떤 계절에 어느 장소에서 누구와 만나느냐의 문제다. 이 말의 방점은 '만남'에 있다. 이 만남을 어떤 방식으로 조직하느냐에 따라 많은 변주가 발생한다.

로메르의 많은 영화는 현대를 무대로 해서, 모던한 세계에서의 일상생활을 담는다. 모던한 소도구들, 건축물들, 모던한 구조 안에 둘러싸인 세계. 로메르는 실내에 들어가서조차도 망원렌즈를 쓰면서 인물과 배경을 갖다 붙이는 방식으로 밀어붙여 공간의 깊이를 없애고 몽드리앙의 그림처럼 선으로 이뤄진 세계로 화면을 쪼개나가기 시작한다. 그러면 인물을 쪼개나가기가 매우 힘들어진다. 이를테면 가상선을 그어 인물의 이쪽과 저쪽을 자르고 붙이기가 매우 힘들어진다. 그 때 로메르는 창문을 걸어 찍으며, 이쪽과 저쪽을 연결시킨다. 로메르가 일상생활을 찍어나가는 방법에서 또한 흥미로운 점은, 핸드 헬드 카메라에 대한 여타 누벨바그 감독들과 다른 방식의 활용이다. 이는 인류학자이자 다큐멘터리 감독인 장 루슈의 '시네마 베리떼'의 방법론과 유사하다. 루슈가 다큐멘터리에서 한 방법을 로메르는 극영화에서 한 것이다. 로메르가 확보하려 한 것은 카메라의 존재론적인 객관적 인칭을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오히려 대상에 대해 탐구하는 방식으로서의 카메라를 취하는 것이었다.

로메르 영화의 이야기가 고전적인 방식으로 진행되고 문제가 발생할 때, 기적이라는 것이 슬쩍 개입되면서 문제가 갑자기 해결된다. 로메르의 영화에는 기적에 대한 기대가 있다. <나무, 시장, 메디아테크>에서도 '~하지 않았더라면' 이라는 방식으로 진행되며, 문제는 늘 갑자기 해결된다. 이 기적을 즐기면서 세상이란 얼마나 신비로운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일상생활에서의 기적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라는 배움은 아마도 칼 드레이어에게서 받은 것으로 보인다. 특히 <오데트>에서. 또한 로메르에게는 파스칼 적인 측면이 있다. "인간학으로부터 우리는 어떤 내기를 해야 하는가?" 로메르는 그 내기에 영화가 개입하는 방식을 택했다. 인간학, 그리고 탐구로부터, 기적 같은 내기를 해야 하는 순간이 발생한다. 로메르가 그것을 유머로 긍정으로 비전으로 열어놓는 방식을 택했다면, 반대로 염세와 추락의 방식을 택했던 내기꾼이 있으니 이는 키에슬로프스키다. 의외로 이 두 사람이 편집하는 방법에 있어 상당 부분 유사점을 찾을 수 있다. 많은 비평가들이 로메르의 영화를 이야기할 때, 마치 그 수많은 영화들이 동시에 만들어진 것처럼 시기와 순서를 무시하곤 한다. 이는 로메르는 영화를 만들면서 자기 스타일을 발전시키거나 형식을 수정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대신 결정의 선택권을 누구에게 주느냐를 놓고 영화의 네트워크를 이어나갔다. 관객은 게임의 규칙을 아는 순간 이야기가 아닌 프로세스에 대해 집중적으로 관심을 두게 된다. 영화를 보는 관객으로 하여금 이야기에 대해 흥미를 잃게 만들어야만 영화를 제대로 본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때로는 이 네트워크를 어떻게 교란시킬 것인가의 문제를 밀고나간다. 로메르 영화에서 깜짝 놀라는 순간은, 이야기를 좇아가면서 이 이야기의 구조로는 절대 불가능하리라고 생각했던 일이 갑자기 가능해지는 순간을 만드는 것이다. 이게 기적 같은 것이다. 불가능한 현실이라는 네트워크를, 단지 관점을 바꿈으로써, 가능한 현실로 변경을 가져오는 것이다. 이는 아마도 19세기 탐정소설에서 가져온 서사문제의 해결 방식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무, 시장, 메디아테크>는 로메르의 영화중 가장 단순한 영화다. 그리고 말이 많다. 이 영화를 이야기 할 때는 '왜 이렇게 말이 많은가?'라는 질문이 그 시작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 영화가 시작하면 교장선생님은 아이들이게 조건법과 종속절을 설명하고, 그 이후의 영화는 모두 조건법, 종속절로 진행이 된다. 사실상 이 영화는 '말'을 찍었다. 존재하는 나무와 존재하지 않는 메디아테크. 과거에서 현재로 이어지는 나무와 현재에서 미래로 만들어질 준비를 했던 미디어테크 사이의 대립이, 말을 사이에 놓고 진행되고 있다. 즉 진행 중에 놓인 시제에 대해, 말을 가지고 영화를 진행하고 있다. 영화가 공간이라고 믿었던 사람이 시제를 담기 위해 택한 것은 결국 '말'이다. 영화에서 대사가 미장센의 경지에 오르며 시네마틱한 것으로 활용된 사례는 거의 없었다. 말의 미장센이라는 측면에서 우리를 놀라게 만든 것은 스트라브와 위예의 방식이다. 로메르는 그와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말의 미장센'을 보여주었다. 가장 아름답게. 나는 이 영화가 로메르의 이례적인 영화라는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무, 시장, 메디아테크>는 로메르의 영화 미학의 어떤 극단까지 밀어붙인 영화라고 믿는다.

(정리: 박영석 시네마테크 서울아트시네마 관객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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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8일 서울아트시네마에서 한국영화아카데미 총동문회가 주최하는 포럼이 열렸다. ‘한국영화아카데미, 어떻게 할 것인가’를 토픽으로 열린 이날 포럼은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의 편장완 교수가 사회를 맡고, 명지대학교 영화과 황규덕 교수, 건국대학교 영화과 송낙원 교수, 계원조형예술대학교 이용배 교수 등이 발제자로 나섰으며, 영화계 원로 하명중 감독과 영화평론가 정성일, 민주당 최문순 의원이 토론자로 참여했다.


원래 일정은 2시간여 동안 1부 발제, 2부 토론 시간으로 나눠 진행키로 했으나 발제에 앞서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 조희문 위원장이 현 영화아카데미 문제에 대한 영진위의 입장을 설명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며 먼저 발언을 시작했다. 조희문 위원장은 “공공영역에서 이뤄지고 있는 영화인력 양성을 담당하고 있는 아카데미의 역할과 방향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지를 검토하는 일이 필요하다”면서, “현 문제에 대해서 영진위는 아직 아카데미를 어떻게 하겠다는 구체적인 계획을 가지거나 사업을 발표한 적이 없고 공석으로 되어 있는 한국영화아카데미 원장이 곧 선임될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그는 정치적인 시각에서 과거의 사례를 갖고 예단하지 말 것을 주문했는데, 조희문 위원장의 발언이 마무리될 무렵, 이용배 교수는 지난해 11월 11일 주무장관 업무보고서를 인용해서 조희문 위원장이 기능 축소와 재교육 중심으로 가겠다고 보고했던 것을 지적했다. 그러면서 이날 포럼은 발제에 앞선 토론장 분위기로 흘러갔다. 조희문 위원장은 2012년 영진위의 부산 이전을 앞두고 기획재정부 차원에서 영화아카데미의 잔류 조건으로 영화인 재교육 중심으로의 기능 개편을 요구했다며 업무보고를 그렇게 했더라도 확정된 것은 아니라고 답했다.

 

조 위원장의 발언으로 불거진 토론 과정에서는 내년도 신입생 모집 요강도 발표하지 못하고 있는 현 상황에서 영화아카데미가 교육의 지속성을 유지할 수 있는지 의문이 제기되었고 조희문 위원장은 현재 상황에서 아무 것도 달라진 것이 없다며 (영화아카데미에 대하여) 학교라는 표현은 안 썼으면 좋겠다고 말해 토론자들과 청중들의 반발을 샀다. 객석에 있던 권칠인 감독도 조희문 위원장에게 영화아카데미의 현 상황에 대한 문제제기를 했으며, 조희문 위원장은 사회, 발제, 참석자 등이 영화아카데미 중심이라 생각을 공유하는 사람들끼리만 논의가 진행되는 것은 아니냐고 아쉬움을 나타냈다.

 

조희문 위원장이 자리를 뜬 후 먼저 황규덕 교수가 ‘공공 영화창작 교육의 한 모델로서, 한국영화아카데미의 역사와 성과’라는 제목으로, 두 번째로 송낙원 교수가 ‘영화창작교육 발전을 위한 공공부문의 고유 역할’이라는 제목으로 발제했다. 송낙원 교수는 홍콩과 일본 등의 영화 산업이 쇠퇴하고 있는 요인으로 국가 차원의 인재 양성 등한시를 들면서 영화아카데미를 지원하는 것이 중복 투자라는 논리를 비판했다. 송낙원 교수는 또한 영화아카데미의 개편과 축소 주장은 현 정권이 아니라 오래 전부터 꾸준히 제기되어 왔음을 밝혔다. 이어서 발제한 이용배 교수도 한국영화아카데미의 영진위로부터의 독립과 국립영화학교로의 발전을 주장했다.

 

10분간의 휴식 시간에 이어서 진행된 2부의 토론에서 최문순 의원은 먼저 정권이 한국영화아카데미 운영에 간섭할 수 없도록 하는 법안을 내겠다고 말했다. 이어서 정성일 평론가는 영화아카데미가 스스로의 독립성을 확보하고 안정적으로 운영될 수 있기 위해서 국가 기관 내에서 오픈 유니버시티 혹은 실험 대학처럼 공공부문으로 옮겨가야 되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했다. 정성일 평론가는 또한 한국영화아카데미와 영상원의 공존의 철학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하명중 감독은 지금 가장 큰 문제는 영화를 만들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영화를 만들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면서 이 문제를 갖고 왜 영화아카데미를 없애면 안 되는지 사람들을 설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홍성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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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필 정성일의 선택, 사샤 기트리의 <어느 사기꾼의 이야기> 시네토크

2월 11일 특별섹션으로 마련된 카르트 블랑슈: 시네필의 선택작으로 정성일 평론가가 추천한 사샤 기트리의 <어느 사기꾼의 이야기> 상영 후 정성일 평론가와 관객과의 대화가 있었다. 정성일 평론가는 ‘영화가 상영되는 지금 이 시간에도 시네마테크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김성욱 프로그래머에게 힘찬 박수를 보내자’는 말을 건네며, <어느 사기꾼의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와 시네필의 강령을 전달했다. 그는 시네마테크의 관객들이 극장을 지키기 위해 행동해야만 할 것이라며 행동이 결여된 채 극장에 앉아있다는 것은 영화를 사랑하는 행위가 아니라고 말했다. 약 두 시간에 걸쳐 진행된 강연은, 시네마테크가 처한 위기를 슬기롭게 헤쳐 나가자는 ‘선배 시네필’의 지혜와도 같은 것이었다.

정성일(영화평론가): 사샤 기트리의 <어느 사기꾼의 이야기>는 영화사적으로 고전의 반열에 오르지 못한 영화 중 하나다. 이 영화에 관한 글을 찾는다면 호의적인 비평보다 비판적인 글들을 쉽게 접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사기꾼의 이야기>의 비판들은 대부분 이 영화가 연극적인 것이라는 부분을 지적한다. 여기서 질문. 영화가 연극을, 영화가 회화를, 혹은 영화가 문학과 음악을 끌어안는 것은 잘못된 것일까 하는 문제. 나는 <어느 사기꾼의 이야기>를 보는 즉시 매혹되었다. 굉장한 걸 봤다는 느낌이 들었다. 기트리의 영화 13편 정도를 보았는데 당시 영화를 함께 보았던 친구들은 아무도 나의 기트리에 대한 방어를 동조하지 않았다. 결국 나는 내 세대에서 누구와도 기트리에 관한 사랑을 함께 나누지 못한 것이다. 그의 영화에 대한 사랑을 나눌 친구들을 기다리고 기다리며 내 방식으로 글을 읽고 영화들을 찾았다. 여전히 기트리에 대한 책들은 한글은 물론이고 영어연구서적도 찾을 수 없다. 프랑스에서조차 그에 대한 연구서적 2권과 자서전 1권, 연대기 1권 정도가 전부다. 이번 친구들 영화제의 목록을 정하면서 김성욱 프로그래머가 ‘어쩌면 이번 영화제가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말을 했을 때, 다른 영화는 아무래도 상관없으니 사샤 기트리의 <어느 사기꾼의 이야기>만큼은 꼭 상영했으면 좋겠다고 간곡히 부탁했다. 이유는 세대를 건너뛰어 나의 친구를 찾고 싶었기 때문이다. 8년 동안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사샤 기트리의 영화가 단 한 편도 상영된 적이 없었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그러다가 김성욱 프로그래머에게 올해 사샤 기트리의 상영계획이 잡혔다는 말을 들었다. 이기적으로 이야기하면 그걸 보기 위해서라도 서울아트시네마는 계속되어야한다. (웃음)

 

기트리는 매우 긴 시간 동안 작업을 했었고 대중적으로도 성공을 거둔 감독이지만 프랑스바깥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무엇보다 연극을 사랑했던 사람이다. 영화를 연출했지만 동시에 연극무대를 포기하지 않았던 감독이다. 연극은 프랑스영화사에서 매우 뿌리 깊은 전통을 가지고 있다. 연극배우들 대부분이 영화로 흘러들어왔으며 기트리도 그런 맥락에 놓여있는 사람 중 하나였다. 물론 기트리는 장 르느와르의 위대함에 비견할만한 자리에 오르지 못했으며 그는 마르셀 까르네나 쥘리앵 뒤비비에가 아니었다. 나는 기트리가 까르네나 뒤비비에보다 더 위대하다고 생각한다. 기트리는 대중들의 사랑을 받았지만 비평가들의 관심 밖에 놓였다. 기트리를 비평의 범주에 놓이게 한 것은 1950년대 까이에 뒤 시네마의 젊은이들이었다. 특히 세 사람이 기트리를 옹호했다. 한 사람은 고다르였고, 다른 한 사람은 알렝 레네, 또 하나는 크리스 마르케였다. <사기꾼의 이야기>의 첫 장면, 제작과 음악감독 등을 소개하는 장면은 고다르의 <경멸>의 첫 장면과 동일하다. <경멸>은 프리츠 랑에게 바치는 존경의 표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기트리에게 바치는 존경의 표시이기도 하다.

 

“기트리의 영화가 발견된 건 시네마테크의 공로다”

 

기트리는 1895년 2월 21일에 러시아에서 태어났다. 이것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뱀파이어> 상영 때 말씀드렸던 것과 마찬가지로 기트리는 태어나서 영화의 탄생을 본 셈이다. 그리고 그가 러시아 페테스부르크에서 태어났다는 뜻은 맑스주의의 보급이 진행된 시기를 말하며 볼세비키들의 활동이 조직화로 이어지는 초입의 시대였다. 그는 고향을 떠나 프랑스에 온 후 1차, 2차 세계대전과 유대인색출, 나치 승복 등 격정의 시기 속에 힘겹게 러시아인으로서의 생을 보냈다. 기트리는 연극에 매우 재능이 있던 사람이었다. 스무 살에 직접 쓴 희곡을 무대에 올리고 연출을 했다. 기트리는 연극에서 즉흥연기를 중요하게 생각했고 느슨하게 구성된 연기의 가능성들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기트리가 영화와 인연을 맺은 것은 1915년, 그는 연극을 했던 사람답지 않게 <우리 집의 그들>이라는 다큐멘터리로 데뷔했다.

20세기 초 드가나 로댕, 마네와 같은 예술가들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찍었지만 곧 영화에 관심을 잃고 연극에 전념했다. 그는 토키영화(유성영화)의 시작과 함께 다시 영화계로 돌아왔다. 1957년까지 기트리는 30여 편의 영화를 찍었다(이것은 미완성된 영화들 포함한 것이다). 영화계로 복귀한 기트리에 대해 비평가들은 대부분 공격적인 태도를 취했다. 지나치게 연극적이라는 비판을 받았고 ‘필름 다르(예술영화를 낮춰 부르는)’라는 치욕을 받았다. 하지만 알랭 레네는 가장 강력하게 기트리의 영화를 지지했다. 레네는 <어느 사기꾼의 이야기>를 자기 생애의 베스트 중 하나로 뽑았고, <히로시마 내 사랑>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기트리의 아이디어를 훔쳐왔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두 작품 사이의 친척관계에 대해 생각해보자. 이것은 결국 시네마테크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이기도 했다. 기트리의 영화는 영화사적으로 버림받았기 때문에 상업극장에서는 볼 방법이 없었다. <어느 사기꾼의 이야기>를 볼 수 있었던 것은 시네마테크의 도움 때문이었고 랑글루아의 프로그래밍 덕분이었다.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의 랑글루아에게는 원칙이 있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시네마테크의 프로그램을 감독, 배우, 장르 중심으로 짜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시네마테크는 학교가 아니고 박물관이 아니며 사람들을 가르치기 위해 있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러 영화들을 섞어서 상영하며 관객들 각자의 방식으로 영화사를 만들고 연관성을 찾아내고 영화들을 새롭게 받아들일 수 있는 충격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주의였다. 랑글루아는 졸작을 함께 상영할 때에 진정한 시네마테크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레네는 기트리의 영화를 지지하며 이렇게 말했다. ‘순수영화와 싸워라.’ 시네필이나 비평가들 혹은 감독들 중에서 영화만으로 순수하게 생각해야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레네는 그것에 동의하지 않았다. 진정한 영화는 순수한 영화 밖에서 활동하기 시작한다고 믿었다. 영화 이전에 존재했던 긴 예술의 행적을 부정할 수는 없는 거다. 기트리는 기꺼이 그 순수의 논리에 반하여 연극과 우정을 나눴다고 생각한다. 누구나 영화를 보시면 즉각적으로 발견하는 <어느 사기꾼의 이야기>의 보이스내레이션. 토키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시종일관 과거로만 넘어가면 모든 장면들이 단 한 번의 대사도 없이 보이스오버내레이션으로 찍혀진다. 틀림없이 브레송은 이걸 보았을 것이다(맹세코 이야기할 수 있다). 그리고 그는 <시골사제의 일기>를 찍으며 사샤 기트리를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히로시마 내 사랑>의 내레이션도 역시 기트리의 연장선인 것이다. 이 영화가 또 재미있게 느껴지는 것 중 하나는 흔히 말하는 ‘크레타인 문제’를 떠올리게 만든다는 것이다. 거짓말의 부분과 전체집합, 발화와 언술의 전체와 부분집합의 논제가 이뤄지는 거다. 영화를 보고 있으면 궁극적으로 모우리가 보았던 모든 말들이 사기가 아니라는 보장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예민한 분들이라면 이게 이 영화의 핵심이라는 생각을 할 것이다. 문득 ‘이 모든 것이 사기라면 이것을 믿을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질 때 이것은 즉각적으로 관객을 생각하게 만드는 부분들이다.

 

기트리의 영화 중 내가 특별하게 사랑하는 영화는 그의 필모 중 마지막 세 편의 것이다. 물론 기트리의 영화들 중에 여러분을 질겁하게 할 만한 위인전 시리즈가 있다. (웃음) 영화를 아직 보지 않으신 분들에게 선입관을 주고 싶지 않으니, 그때까지 시네마테크가 버텨준다면 기트리의 회고전을 보며 다시 이 이야기를 하고 싶다. 기트리를 방어한 레네의 이야기를 더 붙이면, 레네의 열렬한 팬들이라면 레네의 영화가 1970년대 중반이후 갑자기 전환점을 맞은 것처럼 변화를 가져온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레네는 그때부터 연극처럼 영화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이런 레네의 영화들을 보면 아주 명백하게 이 영화들은 기트리가 만들었던 연극과 영화 사이의 우정관계에서 시네마틱한 무언가를 찾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어느 사기꾼의 이야기>를 보며 가장 감동받았던 건 사기를 치는 장면들 많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이 영화를 보며 깨달은 사실, 영화 속의 사기행각은 단 하나도 흉내를 낼 수 없다는 것. 모두 영화적인 방법으로만 성립되는 사기라는 것이다. 카메라, 편집, 보이스오버내레이션 등이 있을 때 만 성립되는 사기, 기트리는 메소드 속에서 사기의 메소드가 어떻게 시네마를 성립하는 것인가. 순간 모든 것이 부서져버린 거다. 영화는 무엇보다 ‘시네마’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 어떻게 견디는 것인지를 생각해야한다. 결과적으로 그렇게 견디어진 영화들이 두 번 보고 DVD를 구입해서보고 그것이 세계 명작인양 소유하고 하는 유혹을 건네주는 것이다.


 

관객1: 영화의 연극적인 부분에 대해 간략하게 말씀 부탁드린다. 그리고 어제 <뱀파이어>를 보면서 느낀 것이 있는데 스턴트들이 굉장히 과감하게 짜여진 것 같았다. 무성영화의 공통적인 특징인가.

정성일: 연극적인 부분에 대한 것은 세트 디자인과 클로즈업 씬을 보면 알 수 있다. 일단 세트라는 공간이 정해지면 그 공간을 스테이지화하는 것이 <어느 사기꾼의 이야기>의 특징이다. 이 영화에는 클로즈업이 없는데 당대 비평가들은 이런 영화 속 동선이 지나치게 연극적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 무성영화에서 가장 중요한건 스펙타클이었다. 그것이 아니라면 관객들을 매혹시킬만한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무성영화에서 가장 발전하지 못한 것이 멜로드라마다. 당시에는 카메라와 인물사이의 거리를 관습적으로 떨어뜨리는 방식이 진행되었고 이에 따라 액션들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팡토마>를 보시게 된다면 재밌는 부분들을 발견하실 수 있을 것이다.

관객2: 시네마테크를 얼마 다니지 않았는데 영화를 어떻게 봐야하나 고민해야 할 때가 많다. 항상 그냥 영화를 보러 오곤 하는데 어떤 마음가짐이나 태도나 접근방식을 가지고 오면 좋을지에 대한 조언과 시네마테크 전용관의 필요성에 대해 말해달라.

정성일: 아무 생각 없이 이곳에 오는 게 맞다. 이곳은 다른 곳과 다르다고 생각하는 순간 시네마테크는 게토가 되는 것이다. 행여 이곳에 온다고 해서 선민의식을 갖고 내 안목은 훌륭하다 생각하는 건 참 웃기다. 상영하는 영화가 좋고 프로그램이 좋아서 여기에 오는 것 뿐이다. 시네마테크 전용관도 있어야 하는 것이지만 사실 어떤 영화를 상영하는가에 더 관심을 가져야한다고 생각한다. 이 장소의 목표는 영화 상영에 있어야 하고, 지금의 이 좌석이 중요한 게 아니라 영화가 중요하기 때문에 이 공간을 확보하려 노력하는 거잖나.

관객3: 정성일 평론가가 관객들과 스크린 사이에서 말을 할 때 나에게는 그게 하나의 영화 같다는 생각이 든다. (웃음). 시네필의 형님으로서 한 마디 한다면.

정성일: 마음 같아서는 시네필 소림사를 하고 싶다. (웃음) 하지만 지켜지지 못한 것이 많다. 일례로 키노는 100호를 만들지 못하고 끝났는데 중요한 교훈을 줬다.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들도 많았으나 ‘있을 때 잘 하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는 시네마테크가 있을 때 잘하셔야한다는 것이다. 그때 시네마테크가 있었어, 이건 다 헛소리다. 잘하는 게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각자 답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 답을 가지고 행동을 하면 된다. 그 답을 가지고 있어야 시네필이다. 답을 가지지 않고 이 자리에 앉아있으면 사실 그 분이 시네필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다. 답을 갖고 행동하는 것 두 가지가 지금의 시네필 강령이 아닌가 생각한다. 세월이 좋아 태평성대 보내며 영화를 보던 시절은 끝났다. 지금 무엇을 할 것인가. 만일 답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나는 그에게 ‘영화는 도대체 무엇인가’라고 반문하고 싶어진다. (정리: 강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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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일 평론가가 추천한 루이 푀이야드의 <뱀파이어> 시네토크

2월 10일 서울아트시네마에서는 정성일 영화평론가의 선택작 루이 푀이야드의 <뱀파이어>가 하루 종일 상영되었고, 마지막 에피소드가 끝난 후 정성일 평론가의 강연이 이어졌다. 이 자리에서 정성일 평론가 “시네마테크는 영화의 박물관이 아니라 현재 진행하는 시간인 동시에 내일을 열어가는 장소라고 생각한다. 영화 자체를 물신화하지 말고 신화화하지 말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멀티플렉스에서 상영되는 <아바타>와 똑같은 관람 기분으로 1915년의 영화 <뱀파이어>를 만나기를 당부했던 그는 거듭해서 시네마테크라는 공간이 우리들에게 현재 진행형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단호하게 ‘이 영화는 내 인생의 영화’라고 말하는 정성일 평론가의 강연 내용을 전한다.


정성일(영화평론가):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에서는 영화를 선택하는 친구들에게 백지수표를 주었고 보통 친구들은 그것에 10편의 영화를 써서 냈다. 이번에 내가 가장 처음으로 상영 희망목록에 작성했던 영화는 루이 푀이야드의 <뱀파이어>였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나에게 ‘생애의 영화’이기 때문이다. 이 말을 유념해서 생각해주시기 바란다. 생애의 영화라는 건 최고의 걸작과 같은 말이 아니다. 생애의 영화라는 건 영화가 나에게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을 말한다. 나는 32세가 될 때까지 이 영화를 보지 못했고 그때까지 <뱀파이어>에 대한 이야기를 정보로 알고 있었다. 그러다가 1993년 서울단편영화제의 집행위원장으로 있을 때 끌레르몽 페랑 영화제에 참석하게 되었는데 그곳의 대학생들이 주최하는 심야상영에서 <뱀파이어>를 처음 봤다. 그때 영화를 소개하던 학생의 말이 참 인상적이었는데 그대로 옮기자면 다음과 같다. “여러분들 오신 걸 환영합니다. 우리 모두 이 영화를 1915년 당시 <뱀파이어>가 상영되었던 때와 동일하게 관람해봅시다. 영화를 보며 담배를 피워도 되고 술을 마셔도 되고 자다가 다시 와서 보셔도 되고 1915년의 상영과 같은 방식으로 이 영화를 봅시다.” <뱀파이어>의 첫 번째 에피소드가 끝날 즈음 이건 내 인생의 영화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이후에도 마음속으로 ‘이건 내 인생의 영화야’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또 한 편으로는 이 영화에 대한 끊임없는 의심이 생겼다. 그러다가 8년 후 키노를 만들던 시절 <뱀파이어>를 마침내 필름으로 다시 보며 나는 비로소 안심했다.

 

<뱀파이어>는 내 생애의 영화

 

푀이야드가 영화를 찍을 때만해도 연출은 기술자의 개념이었지 예술가의 개념이 아니었다. 푀이야드는 작업을 하면서 단 한 번도 자신을 예술가라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나는 그가 자서전에서 존경하는 예술가들의 이름을 나열할 때 그의 영화적 비밀을 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는 의젠느 앗제이라는 사진작가를 존경하며 그의 작업을 위대하다 생각한다고 고백했다. 의젠느 앗제는 평생 동안 사진을 기록의 매체로 생각했던 사람이다. 하지만 그의 사진은 발터 벤야민의 말을 빌면, 범행 현장을 미리 답사하는 느낌, 즉 파리라는 도시에 행해진 모더니즘의 비밀을 열어 보여준 느낌을 준다. 푀이야드의 <뱀파이어> 또한 그런 느낌을 준다. 푀이야드는 ‘자신이 만드는 영화는 미래의 관객을 위해 담아놓은 지금의 시간’이라는 말을 했다. 즉 그는 95년 후에 이 영화를 볼 우리를 위해 필름에 당대의 시간을 봉인해서 넘겨준 것이다. 그는 이미지의 개념들을 바쟁이 영화적으로 설명하기 이전에 영화로 인해 실천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푀이야드의 비극은 너무 빠른 속도로 영화를 찍어야했다는 것이다. 처음 이 영화를 볼 때는 잘 몰랐지만 두 번째 보았을 때는 즉각적으로 영화의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사실 푀이야드에게는 <뱀파이어>의 전체 시나리오가 없었다. 당시의 영화가 거의 그렇듯 첫 상영을 시작한 후 인기가 없으면 빨리 끝내거나 혹은 관객의 반응이 좋으면 2편을 준비하곤 했다. 때문에 푀이야드는 <뱀파이어>의 에피소드를 2주 간격으로 준비했어야 하는데 이건 정말 고역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의 전체가 가지는 불균질성, 밸런스 감각을 갖지 않고 있다는 것, 이것이 <뱀파이어>를 재밌게 만드는 요소이기도 하다.

 

푀이야드는 <뱀파이어>를 찍기 전인 1913년까지 매년 80편의 영화를 찍었다. 물론 대부분 단편영화였지만 그래도 80편은 적은 숫자가 아니다. 심지어 디지털 세대가 도래하기 전이었으니 그 고충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아실 것이다. 그러던 중 미국영화들이 넘어오기 시작했고 짧던 연쇄극들의 길이가 길어지며 프랑스 영화도 이에 동등한 경쟁력을 갖기 위해 미국의 체제에 돌입했다. 다소 따분하지만 미국영화들과의 경쟁은 전 세계영화들이 피할 수 없던 것이었다. 푀이야드가 <뱀파이어>를 찍고 4년 후에 채플린은 <키드>를 만들었고, 1915년에 그리피스는 <국가의 탄생>을 준비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전 세계적으로 갑자기 영화가 고전적인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 것이다. 미국인들은 재빨리 영화의 편집이 어떤 것인지를 깨달았고 러시아인들이 영화사에 도착하기 이전에 천재적인 수법으로 관객들을 사로잡았고 이때 톰 거닝의 논쟁 또한 시작되었다. 푀이야드는 이런 영화의 개념들이 동원되기 시작했을 때 그 길을 따라가지 않았다. 그 길은 영화의 길이 아니라 생각했던 거다. 희곡작가 아르토는 이렇게 말했다. ‘영화는 대중적으로 이끌리는 순간 천박해지지만 실험에 이끌리는 순간 부서질 거다.’ 푀이야드는 제3의 길을 믿었다. 그가 이 영화 속에서 사용했던 편집의 방식이나 딥 포커스, 그리고 특히 인상적인 부분은 더블액션을 받는 대목들이었다. 푀이야드는 의도적으로 매치 컷을 피해서 더블액션을 남겼다. 시간을 중복시켜서 중복데드타임을 자체로 활용해서 보여주고 진행하는 방식을 택했다. 다시 말하는 <뱀파이어>의 장점 두 가지. 하나는 리얼리티를 관찰하는 재능, 다른 하나는 스토리텔링에 대한 멈출 수 없는 사랑이다. 종종 두 가지는 병행할 수 없는 것으로 이야기하지만 그는 두 개를 연결시켰다.

 

‘파리’라는 도시의 기록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영화

 

무엇보다 <뱀파이어>가 훌륭한 결정적 이유는 1915년 파리를 고스란히 찍고 있다는 것이다. 기술을 동원하지 않고 고스란히 말이다. 이 정신은 다소 맥락은 다르지만 한참 후에 갑자기 장 르누아르의 영화에서 재현되어 보여지는 것, 그리고 다시 르누아르의 연출부였던 이탈리아감독들의 네오리얼리즘으로 확장된 개념을 갖고 체계화되어 발전한 것, 또 그것이 누벨바그 세대들로 이어지고 디지털카메라가 도착했을 때 중국이 그의 정신을 재조명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푀이야드는 표면을 잡으면 내부로 갈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와 함께 시대를 살던 사람들은 대부분 인상주의화가들이었고 푀이야드는 그들과 어울리며 같은 시대정신을 가지고 살았던 것이다. 여하튼 <뱀파이어>로 푀이야드가 찍어 보여준 ‘20세기 파리’의 의미는 이론적으로 말하자면 ‘모더니즘’을 찍는 것이다. <뱀파이어>의 핵심은 도시 그 자체에 있다. 그 안에서 이야기는 어떻게 작동하기 시작하는가. 그렇기 때문에 이야기에서 무엇이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보여주는가를 중요하게 생각했던 감독이 푀이야드다. 그는 그리피스가 영화의 길을 잘못 들어섰다라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하지만 영화사적으로 푀이야드는 틀렸고 그리피스는 맞았다. 영화에서 어떤 이의 천재적인 방법을 받아들이고 발전한 후 그 방법은 시간이 지나서 돌아볼 때 올드패션한 느낌을 준다. 푀이야드는 역사 속에서 저주받는 것이 꼭 역사 속에서 미학적 패배인가는 질문도 던진다. 그는 고유한 자기의 방식으로 영화를 만들며 이미지를 부수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가졌다.

 

‘왜 나는 <뱀파이어>를 보면 영화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되는가’하는 질문을 이 영화를 보면서 종종 가져왔다. 나는 가끔 영화가 언제부터 영화답게 된 것일까라는 질문 또한 종종 던진다. 이 영화는 정말 영화다운가. 사실 웃겼던 건 생전영화의 미래를 고민하지지 않던 천만 명이 어느 날 갑자기 <아바타>를 보고 영화의 미래를 근심하기 시작한 것이다. 고맙고 참 심금을 울리는 행동이었다. (웃음) 우리는 반대로 생각해야 한다. 영화를 보며 질문해보자. 무엇이 영화다운 것이고 어디서부터 영화다움이 이루어졌는가. 나는 거슬러 올라가고 싶었다. 그리고 <뱀파이어>에 도착하는 순간 이 영화가 어느 지점에서는 연극, 어느 지점에서는 사진, 그리고 어느 지점에서는 소설의 방식을 취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말하자면 부서지기 쉬운 경계에서 아슬아슬하게 걸친 채 영화다움의 정체성을 찾고 있는 영화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혹적이었다. 어느 날 문득 이 영화를 보며 ‘아, 영화는 교양으로 보는 것이구나, 상식으로 보는 것이구나’라는 걸 깨달았다. 1차 세계대전과 온전하게 겹치는 <뱀파이어>에는 전쟁이야기가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전쟁을 이야기하지 않으면서 불안의 공기를 온전히 영화 안에 끌어안고 활동하는 느낌을 전달받았을 때 바로 이것이 영화가 할 수 있는 최상의 표현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를테면 바로 이런 영화들이 보고 싶은 거다.

 

결정적으로 나는 왜 이 영화에 매혹되었을까. 첫 번째, 영화 전체의 경계들 사이로 사진이 절반정도 들어와 있었고 폐쇄된 공간에서 문을 열면 다른 세계가 나온다는 소설과 연극이 뒤섞인 공간이 존재했기 때문. 두 번째, 가장 놀라웠던 지점은 이르마 베프의 존재였다. 이게 거의 나를 미치게 만들었다. 이르마 베프의 동선 자체가 영화의 존재론을 알리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푀이야드의 <뱀파이어> 이후 이런 경이적인 체험을 단 한 번도 하지 못했다. 이건 고다르도 불가능하다. 주인공 자체가 사라지고 불투명하고 비가시적이었다가 가시적이고 또 그것이 유동적인 존재. (요즘은 조금 지났지만)유행어로, 그러니까 들뢰즈식으로 말하면 운동이미지 안에서 활동을 개시하는 시간이미지인 셈이다. 두 가지가 완벽하게 공존하고 있다. 이르마 베프라는 존재는 영화를 보기 위해서 절대적인 독해기호가 되었다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해야한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혹은 <뱀파이어>를 보고 나서 ‘이 영화가 참 훌륭했구나’라고 생각하지 말고 ‘그런데 내 생애의 영화는 뭐지?’라고 의문을 가졌으면 좋겠다. 최고 걸작을 뽑으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내게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집어던지는 작품이 어떤 것인지를 생각해보시기 바란다. 그리고 그걸 껴안을 수 있을 때, 내게 질문을 던지는 영화를 껴안을 수 있을 때 비로소 ‘영화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정리: 강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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