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7일, 몬테 헬만의 <자유의 이차선> 상영 후, 이용철 영화평론가의 시네토크가 이어졌다. <자유의 이처선>이 당시 뉴아메리칸시네마와 공명하는 지점들을 통해 몬테 헬만이라는 낯선 이름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던 이 날의 강연을 옮긴다.

 

 

이용철(영화평론가): 몬테 헬만은 1932년 뉴욕에서 태어났고, 어릴 때 캘리포니아로 이사를 가서 그곳에서 성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처음 시작했던 것은 연극이었고, 틈틈이 TV나 영화의 편집 등을 하면서 돈을 벌었다. 그가 영화를 시작한 것은 로저 코만의 역할이 컸다. 당시 로저 코만과 젊은 감독들의 만남은 당연한 일이었던 것 같다. 이전 세대의 감독들과 다르게, 학교에서 영화를 배운 이 젊은이들은 학교를 나와서 정작 영화를 만들 방법이 없었다. 그 때 코만은 아주 적절한, 구세주 같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코만이 항상 구세주였던 것만은 아니었다. 코만의 입장에서는 젊은 사람들의 싼 노동력을 제공 받을 수 있고, 그가 하라는 대로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코만과 젊은 감독들의 만남은 오래 지속되진 않았다. 게다가 <이지 라이더>라는, 무명의 젊은이들이 만든 이상한 영화가 미국에서 엄청난 성공을 거둔 이후, 스튜디오들은 젊은 감독들을 찾는데 혈안이 되었었다. 그래서 젊은 감독들은 쉽게 코만을 떠났는데, 헬만의 경우는 그렇지가 않았다. 헬만은 괴수영화로 데뷔했다. 그 이후 대부분의 영화들의 제작을 맡은 것은 코만이었고, 그는 헬만에게 다른 영화의 편집이나 촬영 같은 잡일도 많이 시켰다. 그렇다보니 헬만은 코만이라는 존재를 긴 세월동안 벗어나질 못했다. 헬만이 공식적으로 감독으로 올라가있는 영화는 열 편 정도밖에 안 된다. 하지만 헬만이 관여했던 영화는 50여 편 정도가 된다고 한다. 하지만 크레딧에서는 헬만의 이름을 지워버리는 바람에 그로서는 아주 이상한 역사를 지니게 되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로 아주 소수의 지지자들만이 헬만의 가치를 인정하고 있다. 이렇게 된 데에는 헬만 작품 자체에도 문제가 있지 않나 생각된다. 당시 뉴아메리칸시네마의 영화들과는 달리, 헬만은 제작자들이 원하는 대로 영화를 찍다보니까 그야말로 싸구려 장르영화들만 찍게 되었다. 헬만 영화를 대표하는 장르가 있다면 서부극과 서부극을 변주한 것들인데, 이 역시도 헬만이 원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헬만의 서부극은 독특하다. 헬만의 서부극은 당시 미국인들의 불안을 다뤘다고 해서 실존적 웨스턴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의 영화에서 보통의 서부극에서 보이는 공동체나 이상향을 향해 떠나는 카우보이 같은 것은 없다. 그냥 서부를 떠도는 총잡이만 있을 뿐이다. 그래서 헬만의 서부극에 나오는 인물들은 당시 뉴아메리칸시네마 영화의 인물들과 비슷한 면이 있다. <자유의 이차선>은 헬만의 영화에서 가장 잘 알려진 영화인데, 오늘 보시고 만약 헬만의 영화에 관심이 생기신다면 <복수의 총성>이나 <바람 속의 질주>같은 헬만의 서부극들을 찾아보셔도 좋을 것 같다. 그런 영화들은 현재 외국에서 재평가되고 있는 작품들이기도 하다.

 

동부와 서부의 사이에서

<자유의 이차선>는 당시에는 저평가되고, 알려지지 않았지만 지금에 와서는 상당히 인정받는 지위에 올라와있다. 뉴아메리칸시네마의 분위기를 전하는 다른 영화들과 함께 <자유의 이차선>을 비교해보시라는 의미에서 몇몇 이미지들을 준비했다. 제리 샤츠버그의 <허수아비>에서 진 해크만과 알 파치노는 서부에서 만난다. 이 영화에서 서부의 공간은 황량하고 바람만 부는 저 텅 빈 공간이다. 두 사람이 함께 피츠버그에 가는 여정을 다룬 영화이다. 밥 라펠슨의 <마지막 지령>의 을씨년스러운 풍경은 <허수아비>에서와 같은 황야의 황량함 함께 뉴아메리칸시네마를 대표하는 풍경들이다.

미국영화의 70년대는 뉴욕이라는 도시가 할리우드를 삼켜버린 시기로 기록된다. 이 당시에 영화들이 주로 그렸던 것은 서부에서 동부로 다시 돌아가는 과정을 그린 것이라고 생각된다. 왜 서부에서 동부로 가는 것일까. 서부는 할리우드의 공간, 꿈속의 공간이다. 하지만 이 당시 젊은 감독들이 꿈꿨던 것은 할리우드와는 정반대의 세계였고, 그래서 자연스럽게 동부로 가는 길을 걷게 된다. 동쪽으로 간다는 것은 할리우드가 꿈꿔왔던 것에서 현실로 이동하는 것을 의미하는 듯하다. 그런데 사람들은 동부에 바로 도착하지 못한다. <자유의 이차선>에서도 워싱턴에 도착하지 못하면서 끝이 난다. 왜 동부로 가는가라는 질문과 함께 그들은 왜 도착하지 못하는가라는 두 번째 질문을 던져야 한다. 이 인물들은 동부와 서부의 사이의 어떤 공간에 사로잡혀 있고, 벗어나오지 못하는 느낌을 준다. 그 공간은 꿈의 공간도 아니고, 현실의 공간도 아니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마치 연옥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느낌을 받는다. 그곳은 황량하고, 쓸쓸하고, 차가운 곳이다. 인물들은 자신들이 돌아가야 할 곳이 현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정작 그것을 주저하는 게 아닌가 생각된다. 알고는 있지만 두려워하는 것이다.

<허수아비>에서 피츠버그로 가는 길에는 산업지대가 존재한다. 인물들은 그 공간을 바라만 볼 뿐 멈춰 서서 그곳에서 일을 하진 않는다. <이지 라이더>의 한 장면에서도 길옆의 공장지대가 존재하지만 인물들은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산업지대가 계속 나옴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을 이쪽에 귀속시키지 않는다. <자유의 이차선>의 인물들 역시 그냥 앞을 보고 달리고만 있을 뿐이다. 뉴아메리칸시네마의 특징 중의 하나는 영화를 끌어가는 것이 플롯이 아니라 캐릭터라는 점에 있다. 인물만이 주어진 상태에서 그 인물이 영화를 계속 이끌어간다. 그들에게는 있어 공통점은 하나다. 현실 거부한다는 것이다. 할리우드 영화의 근간은 가족이다. 그렇지만 뉴아메리칸시네마의 인물들에게 가족은 자신을 구속하는 존재이고, 직업은 자신들을 하나의 부품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특정 직업을 오래 유지하지 않으며, 함께 길 위에 있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들과 가족을 구성하지 않는다. <자유의 이차선> 역시 마찬가지다. 심지어 이들에게는 이름도 없다. 이름이 주는 억압, 구속까지도 거부한다. 헬만은 이들에게 이름조차 주고 싶지 않았으며, 그만큼 자유로운 인물들이라고 말한다.

이런 영화들의 마지막 장면의 살펴보면 <마지막 지령>에서, 결국 꼬마 해군을 감옥에 이송한 후 두 사람은 돌아가지만, 그들이 어디로 가는지는 알 수 없다. <이지 라이더>의 유명한 마지막 장면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가던 두 남자는 총에 맞아 죽고, 오토바이는 불에 탄 채 부감 쇼트로 멀리 길을 보여주며 끝난다. <추억의 전주곡>의 마지막 장면에서, 잭 니콜슨은 여자친구와 차를 타고 집으로 가던 길이었는데, 결룰 여자는 혼자 남겨지고, 잭 니콜슨은 트럭을 타고 떠나버린다. 헬만의 <복수의 총성>에서는 복수는 끝이 났지만, 잭 니콜슨이라는 총잡이는 서부에 둥그러니 남겨진다. 그가 이제 뭘 해야 할지는 그 자신도, 우리도 알 수가 없다.

 

실존적 의미의 추구

뉴아메리칸시네마는 60년대의 사회변혁운동과 맥을 같이 한다. 대중적인 영역에서 집합적으로 영화가 실존의 의미를 다룬 것은 아마 뉴아메리칸시네마 세대가 최초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이전의 할리우드가 보편적인 선을 추구했다면 새로운 할리우드는 나 자신의 문제와 그에 맞는 답을 구하려고 했다. <자유의 이차선>에서 지티오가 드라이버에게 자기 개인사를 말하려 하자 드라이버는 바로 말을 끊는다. 나는 관심이 없고, 그건 내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보편적이거나 추상적인 것은 이들의 관심이 아니다. 그들에게 소중한 것은 내 실존과 관련된 것이다. 그러기에 그들은 고독하고 극복하기 어려운 비극성 위에 존재한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헬만이 연극 무대에 있을 때 올렸던 작품이기도 하다. <고도를 기다리며>의 두 인물이 말하는 것과 기다리는 것으로 존재한다면, 헬만 영화에서 인물이 존재하는 것은 이동을 통해서이다. 그들은 하나의 공간에 머물지 않고, 계속 이동을 한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이동에 끝이 없다는 것이다. 헬만의 영화에서 끝에 마지막 지점에 도달하는 인물은 없다. 애초의 목적지 뿐 만 아니라 어떤 곳에도 도달하지 못한다. 헬만은 어떤 의미에서, 욕망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말하는 것 같다. 현대사회는 어떤 목적을 쟁취하는 데에 의미를 둔다. 어떤 현실적인 목표를 추구하는 게 현대사회인 셈이다. 영화도 마찬가지로 욕망을 재생산한다. 이전에 나왔던 욕망정도로 안되니까 더 큰 욕망을 목표로 하게 된다. 이는 현대사회가 강박적으로 추구하는 것이다. 헬만의 영화는 욕망을 도구로 전락한 현대인에 대한 개념에 저항하는 것처럼 보인다. <자유의 이차선>의 마지막 장면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나올 수 있다. 헬만은 그 이미지 자체에 집중하기를 원했던 것 같다. 소리가 상당히 작아지고 속도가 두 배로 느려진다. 그리고는 원래 그 자리에 ‘The End' 같은 글자가 등장해야할 순간에 필름이 불에 타 버린다. 헬만은 죽음이 우리를 찾아오기 전에 마지막 지점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정리: 장지혜 관객에디터 사진: 최미연 자원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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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 페킨파는 1972년에 <플레이보이>지와 가진 인터뷰에서 “후진 영화에 열광하던 평론가들이 좋은 영화를 놓칠 때면 화가 난다. 피터 보그다노비치의 <마지막 상영관>에 환호하고 몬테 헬만의 <자유의 이차선>을 무시한 게 그런 경우다”라고 말했다. 마치 헬만이 견뎌야 할 부당한 평가를 예언한 듯하다. 헬만은 1932년에 태어나 스탠포드 대학교와 UCLA에서 연극과 영화를 배웠다. 연극무대에서 활동하는 사이에 간간이 TV영화의 편집을 맡으며 1950년대를 보낸 그는 로저 코먼의 도움으로 감독의 길에 들어섰다. 갱스터, 괴수영화, SF가 뒤섞인 <지하광산의 괴물>로 데뷔한 헬만은 그러나, 코먼을 거친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나 마틴 스콜세지처럼 아메리칸 뉴시네마의 주무대로 오르지 못했다. 주요 영화제들이 미국의 새로운 작가를 모시느라 법석을 떨던 1970년대에도 그의 영화는 일부 평론가와 감독으로부터 주목받는 데 그쳤고, 어떤 때는 타의에 의해 초대 리스트에서 빠지는 불운까지 겹쳤다.

 

 

그리고 수십 년이 지나도 사정은 달라지지 않아, 소수의 지지자들만이 그의 가치를 인정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 이유 중 하나는 헬만이 동시대의 미국 작가들과 정반대의 노선을 걸었다는 데서 구할 수 있다. 할리우드 장르의 전통에서 빗겨난 작품들로 채워진 아메리칸 뉴시네마의 리스트와 반대로, 헬만은 제작자의 요구에 따라 외형상 상업적인 장르영화로 필모그래피를 쌓았으며, 거친 남자들을 내세운 헬만의 작품에선 보통사람들의 평범한 삶을 기록하는 척하는 작가연한 자세 또한 찾아보기 힘들었다. 헬만이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발표한 주요 작품들은 서부영화 혹은 서부영화의 변주라는 영역에 속한다. 그 작품들을 재평가할 때에야 헬만이 겪은 비운의 역사가 되돌려질 것이다.

헬만은 코먼의 지시로 첫 번째 서부영화 두 편 - <복수의 총성>과 <바람 속의 질주> - 을 만들었다. 그러니까 헬만식 서부가 자의로 시작된 건 아니었지만, 카우보이와 서부의 오랜 신화가 놓친 의미를 따져 물었던 그는 자질부터 남달랐다. 헬만 영화의 주인공들은 옛 서부영화의 카우보이와 달리 낭만을 버리고 현실의 시간을 산다. 그들은 공동체와 어울리지 못하는 고독한 남자가 아니었으며, 이상향을 향해 떠나야 하는 운명을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단지 황폐한 시간을 꿈을 잃은 채 헤매는 존재인 그들은 바로 1960년대와 1970년대를 살아가는 미국인에 다름 아니었다.

헬만은 자기 영화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작품으로 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꼽는다. 헬만 영화의 각본은 매번 다른 사람이 썼지만, 신기하게도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나눈 대화의 흔적이 한결같이 발견된다. ‘권리를 헐값에 팔아치운 사람’이 등장해 “우리 시대가 특별히 나쁘다곤 생각하지 않아. 옛날보다 더 불행할 것도 없으니까. 그렇다고 좋다고 말할 것도 없지”라고, 아니면 “어느 날 우리가 태어난 것처럼, 어느 날 우리는 죽을 거야”라고 대사를 읊은 뒤 사라진다. 억울하다고 세상을 탓하지 않고, 쉽사리 허무에도 빠지지 않는 그들이 삶을 지탱할 수 있는 건 욕망 때문이다. 한데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욕망조차 타인에겐 하찮아 보일 뿐, 애초에 삶의 목표나 가치 있는 행동과는 거리가 멀다. <복수의 총성>의 추적, <바람 속의 질주>의 유랑, <자유의 이차선>의 내기 경주, <닭싸움꾼>의 닭싸움이 그것이다. 때때로 폭력적인 성향으로 욕망을 표출하는 그들은 ‘죽음’을 선택하기 전에는 공허한 여정의 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헬만의 영화가 샘 페킨파와 돈 시겔 영화 유의 남성영화와 연결되면서도 다른 지점으로 갈라지는 건 그 부분이다. 여기엔 강한 터프 가이의 매력도, 자기파괴적인 남자의 장렬한 종말도 없다.

헬만 영화의 또 하나의 특징은 시시한 남성성을 비판하기 위해 여성 캐릭터와 서부의 공간을 배치하는 데 있다. 남자들의 내기에 함께 빠지거나 남자들이 이끄는 대로 뒤따르는 대신, 원초적인 가치에 관심을 기울이는 헬만의 여자들은 ‘사랑과 자유’를 기치로 내건 동맹을 맺는다. 그녀들은 과거보다 현실에, 욕망보다 감정에 충실하다. 예를 들어, <지옥행 비밀지령>에서 적에 대한 살상 외에 다른 행동을 하지 못하는 남자들 사이에서 한 남자에 대한 사랑을 지키는 여자와, <자유의 이차선>과 <복수의 총성>에서 남자들의 성적 관심을 따돌린 채 자기 의지를 따르는 여자는 독립된 그들만의 세계를 구축하는 데 성공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늘과 땅으로 단순하게 나뉜 서부의 시각적인 선명함은 지리멸렬한 남자들의 삶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서부는 탈출구의 부재와 그것의 현존을 동시에 드러내는 장소로서 기능한다.

 

<바람 속의 질주>의 한 장면에서 늙은 카우보이와 늙은 여인이 나눈 대화를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가 “서부는 여자에게 외로운 곳이 아닌가요?”라고 묻자, 그녀는 “남자에게도 그렇지요”라고 대답한다. 결국 헬만의 영화는 서부의 공간과 떠돌이 남자들을 빌려, 인간이란 원초적으로 고독하고 고통 받는 존재임을 기록한 실존주의 서부영화가 아닌가 싶다. 그의 영화 전체는 돌고 돌면서 <고도를 기다리며>와 마주보고 있는 게다. 전통적인 할리우드 영화와 다르게 항상 열려있는 결말과,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 등장해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다는 내용은 그런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아무도 죽지 않고, 아무도 용서받지 못하고, 아무도 안식처를 찾지 못한다. 그들은 시작할 때 그랬듯이 어디론가 떠나는 행위를 반복하면서 끝을 맺는다. 실존적인 고통에 싸인 인간의 현실을, <자유의 이차선>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불타는 필름’보다 잘 표현하기는 힘들 것이다. 헬만은 구원을 기다리며 제자리를 맴도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의 재현으로서 영화의 인물을 인식했을 법하며, 그런 점에서 그는 동시대 미국 작가들이 영화 속 보통사람들을 비웃었던 우를 범하지 않은 희귀한 감독으로 남았다.

헬만의 초기영화에서 제작, 각본, 주연 등을 맡으며 파트너 역할을 다한 사람은 잭 니콜슨이었다. 그가 <이지 라이더>의 성공으로 헬만의 곁을 떠나자, 빈자리를 채운 사람은 워렌 오츠다. 결코 주류에 끼지 않았던 성향과, 허세와 쓸쓸함이 나란히 묻어나는 외모로 인해 오츠는 헬만의 페르소나로 남을 수 있었다. 죽기 전날, 헬만에게 전화를 걸어 심장마비에 걸렸다고 농담했던 오츠는 다음 날 심장마비로 죽는다. 페킨파와 헬만 등 일부 감독에게만 자신의 진가를 바친 외톨이 배우의 삶은 어찌 그리도 헬만의 영화와 닮았는지 모르겠다.

헬만은 1980년대 후반에 발표한 <이구아나>와 <고요한 밤, 끔찍한 밤 3부>을 마지막으로 감독의 자리에 앉지 못했다. 하지만 수많은 작품의 뒤에서 이름을 숨긴 채 활동했던 그는 지금까지 영화인으로서 한시도 쉰 적이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중 기억할 만한 일은, 1990년대 이후 미국 작가주의의 두 경향을 대표하는 감독 두 사람이 헬만의 힘으로, 헬만에게서 영감을 얻어 데뷔했다는 사실이다. 헬만이 할리우드의 한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쿠엔틴 타란티노를 만나 제작 지원을 약속하지 않았다면 타란티노의 떠들썩한 데뷔작 <저수지의 개들>는 세상과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타란티노의 반대 진영에서 외로운 자를 위한 로드무비의 전통을 계승한 빈센트 갈로는 <버팔로 ‘66>를 준비하면서 자기의 영화적 영웅인 헬만을 염두에 두었다고 밝혔다. 아메리칸 뉴시네마의 역사에서 잊혀진 인물이 양극단의 작가에게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은 흥미로움을 넘어 헬만의 위치를 재인식하게 만든다. 그러나 타란티노가 아무리 헬만의 서부영화가 위대하다고 떠들어댔어도 대중은 그의 이름을 발견하지 못했으며, B급영화가 영화보기의 새로운 대상으로 떠오른 시기에도 그의 이름은 좀체 불려나오지 않았다.

글 이용철 영화평론가

*2007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프로그램인 <몬테 헬만 회고전>의 카탈로그에 실린 글을 옮긴 것이다. 헬만은 2010년에 신작 <로드 투 노웨어>를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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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테 헬만은 뉴아메리칸 시네마의 저주받은 작가였다. 프리웨이를 질주하는 자동차와 방황하는 젊은이를 그린 <자유의 이차선>(1971)은 <이지 라이더>(1969)의 계보를 잇는 70년대 로드무비의 숨겨진 걸작이지만, 흥행부진 때문에 몬테 헬만은 할리우드 영화사로부터 방출되는 불운을 겪어야만 했다. <자유의 이차선>은 젊은이들이 자유롭게 무엇이든 실패할 수 있는 권리가 있음을 보여주지만 역설적으로 작가는 그럴 권리를 누릴 수 없었다. 그가 ‘지옥에 떨어진 남자 Hell-Man’라 불리는 것은 뼈아픈 일이다.

 

 

영화의 역사에서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다. 작가주의를 주창한 ‘카메라-만년필론’으로 유명한 알렉상드르 아스트뤽은 비평에서 시작해 영화감독이 된 첫 번째 비평가로 누벨바그(특히 고다르)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이 시기 드물게 이스트먼 컬러로 촬영한 <여자의 일생>(1958)은 그러나 누벨바그 태동기에 개봉해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했고, 오랫동안 관객들에게 보여줄 기회를 얻지 못했다.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의 미국적 재래라 불린 찰스 버넷의 혁명적인 데뷔작 <양 도살자>(1979)도 필름으로 만나기 쉽지 않았던 작품이다. 몇 년 전에야 35미리 필름으로 복원되어(한국에서는 2008년 한국영상자료원에서 개최된 ‘복원전’에서 처음 복원된 영화가 상영되었다) 관객과 만날 수 있었다. 자크 베케르의 <황금투구>는 지금은 그의 대표작이 됐지만 개봉 당시에는 시네필의 나라 프랑스에서조차 상업적으로나 비평적으로 환대받지 못했다. 영국의 린제이 앤더슨이 그의 영화를 옹호하는 편지를 ‘카이에 뒤 시네마’에 쓰는 일이 벌어졌을 정도였다.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들만큼 큰 수난을 겪었던 이는 세르게이 파라자노프이다. 타르코프스키를 두고 종종 ‘영화의 순교자’라 말하지만 파라자노프야 말로 말 그대로 순교자였다. 워낙 독특한 개성덕분에 그는 영화만큼이나 평생 고초를 겪어야만 했다. 1968년에 완성한 <석류의 빛깔>(원래 제목은 ‘사야트 노바’였다)은 영화의 역사 그 어디에도 빚지지 않는 독특한 영상과 수법으로 아르메니아인의 민족적인 아름다움을 도취적으로 표현했다는 이유로 소련의 검열을 당해야만 했다. 동시대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알렉산더 루블료프>(1966)가 상영이 금지되는 수모를 겪었지만(이 영화는 1971년에야 상영이 될 수 있었다) 파라자노프의 작품은 작품이 훼손되는 과정을 거쳐 오랫동안 제대로 공개될 기회를 얻지 못했었다. 그런 점에서 한국에서의 첫 상영은 의미가 있다. 파라자노프는 이미 그의 실질적인 데뷔작인 <잊혀진 조상들의 그림자>(1965)에서 고대적인 전통과 민족적 삶을 그렸다는 이유로 영화계의 이단자로 취급받았었다. 파라자노프는 오랜 시간동안 고초를 겪었고, 구소련의 해체가 진행되면서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작가에게 이는 너무 늦은 시기였다. 영화제작을 준비하던 1990년, 66세의 나이로 파라자노프는 세상을 떠났다.

 

<석류의 빛깔>의 첫 시작부에 나오는 문구처럼 파라자노프는 삶과 영혼에 시달린 시인이었다. 고다르는 그를 ‘이미지, 빛, 그리고 현실로 구성된 영화사원의 사제’라 말했었다. 다른 작가들에게도 이와 비슷한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친밀한 삶’이라 붙인 이번 특별전은 그런 의미에서 영화의 사원에 자리한 영화들을 소개하는 기회다. 봄날의 산보자처럼 한가로이 19편의 작품들로 장식된 영화의 사원을 거닐 수 있기를 기대한다.

 

글 김성욱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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