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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전/100편의 시네마오디세이2-친밀한 삶

[Review] 몬테 헬만, 우리가 잊어버린 그 이름

샘 페킨파는 1972년에 <플레이보이>지와 가진 인터뷰에서 “후진 영화에 열광하던 평론가들이 좋은 영화를 놓칠 때면 화가 난다. 피터 보그다노비치의 <마지막 상영관>에 환호하고 몬테 헬만의 <자유의 이차선>을 무시한 게 그런 경우다”라고 말했다. 마치 헬만이 견뎌야 할 부당한 평가를 예언한 듯하다. 헬만은 1932년에 태어나 스탠포드 대학교와 UCLA에서 연극과 영화를 배웠다. 연극무대에서 활동하는 사이에 간간이 TV영화의 편집을 맡으며 1950년대를 보낸 그는 로저 코먼의 도움으로 감독의 길에 들어섰다. 갱스터, 괴수영화, SF가 뒤섞인 <지하광산의 괴물>로 데뷔한 헬만은 그러나, 코먼을 거친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나 마틴 스콜세지처럼 아메리칸 뉴시네마의 주무대로 오르지 못했다. 주요 영화제들이 미국의 새로운 작가를 모시느라 법석을 떨던 1970년대에도 그의 영화는 일부 평론가와 감독으로부터 주목받는 데 그쳤고, 어떤 때는 타의에 의해 초대 리스트에서 빠지는 불운까지 겹쳤다.

 

 

그리고 수십 년이 지나도 사정은 달라지지 않아, 소수의 지지자들만이 그의 가치를 인정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 이유 중 하나는 헬만이 동시대의 미국 작가들과 정반대의 노선을 걸었다는 데서 구할 수 있다. 할리우드 장르의 전통에서 빗겨난 작품들로 채워진 아메리칸 뉴시네마의 리스트와 반대로, 헬만은 제작자의 요구에 따라 외형상 상업적인 장르영화로 필모그래피를 쌓았으며, 거친 남자들을 내세운 헬만의 작품에선 보통사람들의 평범한 삶을 기록하는 척하는 작가연한 자세 또한 찾아보기 힘들었다. 헬만이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발표한 주요 작품들은 서부영화 혹은 서부영화의 변주라는 영역에 속한다. 그 작품들을 재평가할 때에야 헬만이 겪은 비운의 역사가 되돌려질 것이다.

헬만은 코먼의 지시로 첫 번째 서부영화 두 편 - <복수의 총성>과 <바람 속의 질주> - 을 만들었다. 그러니까 헬만식 서부가 자의로 시작된 건 아니었지만, 카우보이와 서부의 오랜 신화가 놓친 의미를 따져 물었던 그는 자질부터 남달랐다. 헬만 영화의 주인공들은 옛 서부영화의 카우보이와 달리 낭만을 버리고 현실의 시간을 산다. 그들은 공동체와 어울리지 못하는 고독한 남자가 아니었으며, 이상향을 향해 떠나야 하는 운명을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단지 황폐한 시간을 꿈을 잃은 채 헤매는 존재인 그들은 바로 1960년대와 1970년대를 살아가는 미국인에 다름 아니었다.

헬만은 자기 영화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작품으로 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꼽는다. 헬만 영화의 각본은 매번 다른 사람이 썼지만, 신기하게도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나눈 대화의 흔적이 한결같이 발견된다. ‘권리를 헐값에 팔아치운 사람’이 등장해 “우리 시대가 특별히 나쁘다곤 생각하지 않아. 옛날보다 더 불행할 것도 없으니까. 그렇다고 좋다고 말할 것도 없지”라고, 아니면 “어느 날 우리가 태어난 것처럼, 어느 날 우리는 죽을 거야”라고 대사를 읊은 뒤 사라진다. 억울하다고 세상을 탓하지 않고, 쉽사리 허무에도 빠지지 않는 그들이 삶을 지탱할 수 있는 건 욕망 때문이다. 한데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욕망조차 타인에겐 하찮아 보일 뿐, 애초에 삶의 목표나 가치 있는 행동과는 거리가 멀다. <복수의 총성>의 추적, <바람 속의 질주>의 유랑, <자유의 이차선>의 내기 경주, <닭싸움꾼>의 닭싸움이 그것이다. 때때로 폭력적인 성향으로 욕망을 표출하는 그들은 ‘죽음’을 선택하기 전에는 공허한 여정의 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헬만의 영화가 샘 페킨파와 돈 시겔 영화 유의 남성영화와 연결되면서도 다른 지점으로 갈라지는 건 그 부분이다. 여기엔 강한 터프 가이의 매력도, 자기파괴적인 남자의 장렬한 종말도 없다.

헬만 영화의 또 하나의 특징은 시시한 남성성을 비판하기 위해 여성 캐릭터와 서부의 공간을 배치하는 데 있다. 남자들의 내기에 함께 빠지거나 남자들이 이끄는 대로 뒤따르는 대신, 원초적인 가치에 관심을 기울이는 헬만의 여자들은 ‘사랑과 자유’를 기치로 내건 동맹을 맺는다. 그녀들은 과거보다 현실에, 욕망보다 감정에 충실하다. 예를 들어, <지옥행 비밀지령>에서 적에 대한 살상 외에 다른 행동을 하지 못하는 남자들 사이에서 한 남자에 대한 사랑을 지키는 여자와, <자유의 이차선>과 <복수의 총성>에서 남자들의 성적 관심을 따돌린 채 자기 의지를 따르는 여자는 독립된 그들만의 세계를 구축하는 데 성공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늘과 땅으로 단순하게 나뉜 서부의 시각적인 선명함은 지리멸렬한 남자들의 삶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서부는 탈출구의 부재와 그것의 현존을 동시에 드러내는 장소로서 기능한다.

 

<바람 속의 질주>의 한 장면에서 늙은 카우보이와 늙은 여인이 나눈 대화를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가 “서부는 여자에게 외로운 곳이 아닌가요?”라고 묻자, 그녀는 “남자에게도 그렇지요”라고 대답한다. 결국 헬만의 영화는 서부의 공간과 떠돌이 남자들을 빌려, 인간이란 원초적으로 고독하고 고통 받는 존재임을 기록한 실존주의 서부영화가 아닌가 싶다. 그의 영화 전체는 돌고 돌면서 <고도를 기다리며>와 마주보고 있는 게다. 전통적인 할리우드 영화와 다르게 항상 열려있는 결말과,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 등장해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다는 내용은 그런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아무도 죽지 않고, 아무도 용서받지 못하고, 아무도 안식처를 찾지 못한다. 그들은 시작할 때 그랬듯이 어디론가 떠나는 행위를 반복하면서 끝을 맺는다. 실존적인 고통에 싸인 인간의 현실을, <자유의 이차선>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불타는 필름’보다 잘 표현하기는 힘들 것이다. 헬만은 구원을 기다리며 제자리를 맴도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의 재현으로서 영화의 인물을 인식했을 법하며, 그런 점에서 그는 동시대 미국 작가들이 영화 속 보통사람들을 비웃었던 우를 범하지 않은 희귀한 감독으로 남았다.

헬만의 초기영화에서 제작, 각본, 주연 등을 맡으며 파트너 역할을 다한 사람은 잭 니콜슨이었다. 그가 <이지 라이더>의 성공으로 헬만의 곁을 떠나자, 빈자리를 채운 사람은 워렌 오츠다. 결코 주류에 끼지 않았던 성향과, 허세와 쓸쓸함이 나란히 묻어나는 외모로 인해 오츠는 헬만의 페르소나로 남을 수 있었다. 죽기 전날, 헬만에게 전화를 걸어 심장마비에 걸렸다고 농담했던 오츠는 다음 날 심장마비로 죽는다. 페킨파와 헬만 등 일부 감독에게만 자신의 진가를 바친 외톨이 배우의 삶은 어찌 그리도 헬만의 영화와 닮았는지 모르겠다.

헬만은 1980년대 후반에 발표한 <이구아나>와 <고요한 밤, 끔찍한 밤 3부>을 마지막으로 감독의 자리에 앉지 못했다. 하지만 수많은 작품의 뒤에서 이름을 숨긴 채 활동했던 그는 지금까지 영화인으로서 한시도 쉰 적이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중 기억할 만한 일은, 1990년대 이후 미국 작가주의의 두 경향을 대표하는 감독 두 사람이 헬만의 힘으로, 헬만에게서 영감을 얻어 데뷔했다는 사실이다. 헬만이 할리우드의 한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쿠엔틴 타란티노를 만나 제작 지원을 약속하지 않았다면 타란티노의 떠들썩한 데뷔작 <저수지의 개들>는 세상과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타란티노의 반대 진영에서 외로운 자를 위한 로드무비의 전통을 계승한 빈센트 갈로는 <버팔로 ‘66>를 준비하면서 자기의 영화적 영웅인 헬만을 염두에 두었다고 밝혔다. 아메리칸 뉴시네마의 역사에서 잊혀진 인물이 양극단의 작가에게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은 흥미로움을 넘어 헬만의 위치를 재인식하게 만든다. 그러나 타란티노가 아무리 헬만의 서부영화가 위대하다고 떠들어댔어도 대중은 그의 이름을 발견하지 못했으며, B급영화가 영화보기의 새로운 대상으로 떠오른 시기에도 그의 이름은 좀체 불려나오지 않았다.

글 이용철 영화평론가

*2007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프로그램인 <몬테 헬만 회고전>의 카탈로그에 실린 글을 옮긴 것이다. 헬만은 2010년에 신작 <로드 투 노웨어>를 발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