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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전/100편의 시네마오디세이2-친밀한 삶

[Cinetalk] 뉴아메리칸시네마의 숨겨진 걸작, <자유의 이차선>

지난 4월 7일, 몬테 헬만의 <자유의 이차선> 상영 후, 이용철 영화평론가의 시네토크가 이어졌다. <자유의 이처선>이 당시 뉴아메리칸시네마와 공명하는 지점들을 통해 몬테 헬만이라는 낯선 이름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던 이 날의 강연을 옮긴다.

 

 

이용철(영화평론가): 몬테 헬만은 1932년 뉴욕에서 태어났고, 어릴 때 캘리포니아로 이사를 가서 그곳에서 성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처음 시작했던 것은 연극이었고, 틈틈이 TV나 영화의 편집 등을 하면서 돈을 벌었다. 그가 영화를 시작한 것은 로저 코만의 역할이 컸다. 당시 로저 코만과 젊은 감독들의 만남은 당연한 일이었던 것 같다. 이전 세대의 감독들과 다르게, 학교에서 영화를 배운 이 젊은이들은 학교를 나와서 정작 영화를 만들 방법이 없었다. 그 때 코만은 아주 적절한, 구세주 같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코만이 항상 구세주였던 것만은 아니었다. 코만의 입장에서는 젊은 사람들의 싼 노동력을 제공 받을 수 있고, 그가 하라는 대로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코만과 젊은 감독들의 만남은 오래 지속되진 않았다. 게다가 <이지 라이더>라는, 무명의 젊은이들이 만든 이상한 영화가 미국에서 엄청난 성공을 거둔 이후, 스튜디오들은 젊은 감독들을 찾는데 혈안이 되었었다. 그래서 젊은 감독들은 쉽게 코만을 떠났는데, 헬만의 경우는 그렇지가 않았다. 헬만은 괴수영화로 데뷔했다. 그 이후 대부분의 영화들의 제작을 맡은 것은 코만이었고, 그는 헬만에게 다른 영화의 편집이나 촬영 같은 잡일도 많이 시켰다. 그렇다보니 헬만은 코만이라는 존재를 긴 세월동안 벗어나질 못했다. 헬만이 공식적으로 감독으로 올라가있는 영화는 열 편 정도밖에 안 된다. 하지만 헬만이 관여했던 영화는 50여 편 정도가 된다고 한다. 하지만 크레딧에서는 헬만의 이름을 지워버리는 바람에 그로서는 아주 이상한 역사를 지니게 되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로 아주 소수의 지지자들만이 헬만의 가치를 인정하고 있다. 이렇게 된 데에는 헬만 작품 자체에도 문제가 있지 않나 생각된다. 당시 뉴아메리칸시네마의 영화들과는 달리, 헬만은 제작자들이 원하는 대로 영화를 찍다보니까 그야말로 싸구려 장르영화들만 찍게 되었다. 헬만 영화를 대표하는 장르가 있다면 서부극과 서부극을 변주한 것들인데, 이 역시도 헬만이 원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헬만의 서부극은 독특하다. 헬만의 서부극은 당시 미국인들의 불안을 다뤘다고 해서 실존적 웨스턴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의 영화에서 보통의 서부극에서 보이는 공동체나 이상향을 향해 떠나는 카우보이 같은 것은 없다. 그냥 서부를 떠도는 총잡이만 있을 뿐이다. 그래서 헬만의 서부극에 나오는 인물들은 당시 뉴아메리칸시네마 영화의 인물들과 비슷한 면이 있다. <자유의 이차선>은 헬만의 영화에서 가장 잘 알려진 영화인데, 오늘 보시고 만약 헬만의 영화에 관심이 생기신다면 <복수의 총성>이나 <바람 속의 질주>같은 헬만의 서부극들을 찾아보셔도 좋을 것 같다. 그런 영화들은 현재 외국에서 재평가되고 있는 작품들이기도 하다.

 

동부와 서부의 사이에서

<자유의 이차선>는 당시에는 저평가되고, 알려지지 않았지만 지금에 와서는 상당히 인정받는 지위에 올라와있다. 뉴아메리칸시네마의 분위기를 전하는 다른 영화들과 함께 <자유의 이차선>을 비교해보시라는 의미에서 몇몇 이미지들을 준비했다. 제리 샤츠버그의 <허수아비>에서 진 해크만과 알 파치노는 서부에서 만난다. 이 영화에서 서부의 공간은 황량하고 바람만 부는 저 텅 빈 공간이다. 두 사람이 함께 피츠버그에 가는 여정을 다룬 영화이다. 밥 라펠슨의 <마지막 지령>의 을씨년스러운 풍경은 <허수아비>에서와 같은 황야의 황량함 함께 뉴아메리칸시네마를 대표하는 풍경들이다.

미국영화의 70년대는 뉴욕이라는 도시가 할리우드를 삼켜버린 시기로 기록된다. 이 당시에 영화들이 주로 그렸던 것은 서부에서 동부로 다시 돌아가는 과정을 그린 것이라고 생각된다. 왜 서부에서 동부로 가는 것일까. 서부는 할리우드의 공간, 꿈속의 공간이다. 하지만 이 당시 젊은 감독들이 꿈꿨던 것은 할리우드와는 정반대의 세계였고, 그래서 자연스럽게 동부로 가는 길을 걷게 된다. 동쪽으로 간다는 것은 할리우드가 꿈꿔왔던 것에서 현실로 이동하는 것을 의미하는 듯하다. 그런데 사람들은 동부에 바로 도착하지 못한다. <자유의 이차선>에서도 워싱턴에 도착하지 못하면서 끝이 난다. 왜 동부로 가는가라는 질문과 함께 그들은 왜 도착하지 못하는가라는 두 번째 질문을 던져야 한다. 이 인물들은 동부와 서부의 사이의 어떤 공간에 사로잡혀 있고, 벗어나오지 못하는 느낌을 준다. 그 공간은 꿈의 공간도 아니고, 현실의 공간도 아니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마치 연옥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느낌을 받는다. 그곳은 황량하고, 쓸쓸하고, 차가운 곳이다. 인물들은 자신들이 돌아가야 할 곳이 현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정작 그것을 주저하는 게 아닌가 생각된다. 알고는 있지만 두려워하는 것이다.

<허수아비>에서 피츠버그로 가는 길에는 산업지대가 존재한다. 인물들은 그 공간을 바라만 볼 뿐 멈춰 서서 그곳에서 일을 하진 않는다. <이지 라이더>의 한 장면에서도 길옆의 공장지대가 존재하지만 인물들은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산업지대가 계속 나옴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을 이쪽에 귀속시키지 않는다. <자유의 이차선>의 인물들 역시 그냥 앞을 보고 달리고만 있을 뿐이다. 뉴아메리칸시네마의 특징 중의 하나는 영화를 끌어가는 것이 플롯이 아니라 캐릭터라는 점에 있다. 인물만이 주어진 상태에서 그 인물이 영화를 계속 이끌어간다. 그들에게는 있어 공통점은 하나다. 현실 거부한다는 것이다. 할리우드 영화의 근간은 가족이다. 그렇지만 뉴아메리칸시네마의 인물들에게 가족은 자신을 구속하는 존재이고, 직업은 자신들을 하나의 부품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특정 직업을 오래 유지하지 않으며, 함께 길 위에 있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들과 가족을 구성하지 않는다. <자유의 이차선> 역시 마찬가지다. 심지어 이들에게는 이름도 없다. 이름이 주는 억압, 구속까지도 거부한다. 헬만은 이들에게 이름조차 주고 싶지 않았으며, 그만큼 자유로운 인물들이라고 말한다.

이런 영화들의 마지막 장면의 살펴보면 <마지막 지령>에서, 결국 꼬마 해군을 감옥에 이송한 후 두 사람은 돌아가지만, 그들이 어디로 가는지는 알 수 없다. <이지 라이더>의 유명한 마지막 장면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가던 두 남자는 총에 맞아 죽고, 오토바이는 불에 탄 채 부감 쇼트로 멀리 길을 보여주며 끝난다. <추억의 전주곡>의 마지막 장면에서, 잭 니콜슨은 여자친구와 차를 타고 집으로 가던 길이었는데, 결룰 여자는 혼자 남겨지고, 잭 니콜슨은 트럭을 타고 떠나버린다. 헬만의 <복수의 총성>에서는 복수는 끝이 났지만, 잭 니콜슨이라는 총잡이는 서부에 둥그러니 남겨진다. 그가 이제 뭘 해야 할지는 그 자신도, 우리도 알 수가 없다.

 

실존적 의미의 추구

뉴아메리칸시네마는 60년대의 사회변혁운동과 맥을 같이 한다. 대중적인 영역에서 집합적으로 영화가 실존의 의미를 다룬 것은 아마 뉴아메리칸시네마 세대가 최초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이전의 할리우드가 보편적인 선을 추구했다면 새로운 할리우드는 나 자신의 문제와 그에 맞는 답을 구하려고 했다. <자유의 이차선>에서 지티오가 드라이버에게 자기 개인사를 말하려 하자 드라이버는 바로 말을 끊는다. 나는 관심이 없고, 그건 내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보편적이거나 추상적인 것은 이들의 관심이 아니다. 그들에게 소중한 것은 내 실존과 관련된 것이다. 그러기에 그들은 고독하고 극복하기 어려운 비극성 위에 존재한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헬만이 연극 무대에 있을 때 올렸던 작품이기도 하다. <고도를 기다리며>의 두 인물이 말하는 것과 기다리는 것으로 존재한다면, 헬만 영화에서 인물이 존재하는 것은 이동을 통해서이다. 그들은 하나의 공간에 머물지 않고, 계속 이동을 한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이동에 끝이 없다는 것이다. 헬만의 영화에서 끝에 마지막 지점에 도달하는 인물은 없다. 애초의 목적지 뿐 만 아니라 어떤 곳에도 도달하지 못한다. 헬만은 어떤 의미에서, 욕망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말하는 것 같다. 현대사회는 어떤 목적을 쟁취하는 데에 의미를 둔다. 어떤 현실적인 목표를 추구하는 게 현대사회인 셈이다. 영화도 마찬가지로 욕망을 재생산한다. 이전에 나왔던 욕망정도로 안되니까 더 큰 욕망을 목표로 하게 된다. 이는 현대사회가 강박적으로 추구하는 것이다. 헬만의 영화는 욕망을 도구로 전락한 현대인에 대한 개념에 저항하는 것처럼 보인다. <자유의 이차선>의 마지막 장면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나올 수 있다. 헬만은 그 이미지 자체에 집중하기를 원했던 것 같다. 소리가 상당히 작아지고 속도가 두 배로 느려진다. 그리고는 원래 그 자리에 ‘The End' 같은 글자가 등장해야할 순간에 필름이 불에 타 버린다. 헬만은 죽음이 우리를 찾아오기 전에 마지막 지점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정리: 장지혜 관객에디터 사진: 최미연 자원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