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샤 기트리는 러시아 페트로그라드 출생으로 프랑스 극작가이자 배우로 출발했다. 아버지의 무대에서 배우로 활약하다가 극단을 위해 가벼운 희극을 쓰기 시작했는데 영국에서 많이 상영되었다. 그의 작품은 환상, 정열, 기지로 가득 차 있고 수법이 교묘했다. 1920년 런던에서 <노노 Nono>(1905)를 아내 Y.프랭탕과 공연했으며 자작 희극을 직접 연출하고 때로는 아내와 함께 출연하여 ‘연극의 귀신’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후 영화연출에도 관심을 보였는데 대표작으로는 <파스퇴르>(1919), <모차르트>(1925), <어느 사기꾼의 이야기>(1936) 등이 있다. ‘프랑스 영화의 황금기: 1930-1960’에서는 <꿈을 꾸다>(1936)와 <절름발이 악마>(1948) 두 편이 상영된다.


독일 점령기의 파리를 배경으로 한 프랑수아 트뤼포의 <마지막 지하철>(1980)에는 장 포아레가 연기한 겉으로는 파렴치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따뜻한 마음을 지닌 연극 연출가가 등장한다. 트뤼포가 자신의 영화에 이 특이한 인물을 등장시킨 것은 사샤 기트리를 흠모했기 때문이었다. 생전에 대중적인 성공을 거두긴 했지만 오랜 시간동안 그저 연극적인 영화라는 비판적 선입견을 벗어나지 못했던 사샤 기트리를 재발견했던 것은 트뤼포를 위시한 누벨바그 감독들이었다. 누벨바그 감독들은 한 편의 영화에서 거의 모든 단계를 주관하고 자신의 세계관을 덧입혔던 총체적 예술가로서의 그의 지위를, 그리고 연극적인 요소가 많이 있다고 해도 틀에 얽매이지 않은 기트리의 독특하고 자유로운 문체를 찬미했다. 그래서 트뤼포는 그에게 진정한 시네아스트라는 직위를 부여했고 또한 초기영화의 거장 에른스트 루비치와 비교하기도 했다.
사샤 기트리는 1885년 페트로그라드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19세기 말 연극계의 거장이었던 배우 뤼시앙 기트리였고 차르 알렉산더3세가 그의 대부였기 때문에 막대한 후원 속에서 자랄 수 있었다. 그의 유년시절에 어린 기트리는 아버지를 따라 유럽 전역을 순회하였고 그의 그늘 아래서 자랐다. 부친의 영향으로 오귀스트 로댕, 콜레트, 사라 번하르트, 아나톨 프랑스, 클로드 모네와 같은 보헤미안적이고 사교계의 지식인들과 가까이 지냈다. 18세에 고등학교를 마치고 풍자에 특별한 재능이 있었던 기트리는 마침내 1905년에 작가, 연극연출가, 그리고 배우로서 <노노 Nono>라는 작품으로 연극계에서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재기 넘치는 젊은이였던 사샤 기트리는 아버지처럼 그 분야에서 인정받고 성공하기를 원했다. 그는 거침없었을 뿐 아니라 항상 여러 개의 프로젝트를 동시에 진행하는 능력의 소유자였다. 그는 복잡하게 얽힌 감정을 다룬 이야기(그의 첫 번째 부인은 아버지의 정부였다)에서 재치 있는 말을 사용하는 고상한 익살꾼 역할을 맡았다. 그는 무대에서나 삶에서 게임을 즐겼다. 그의 당돌한 무례함과 창조에 대한 능력은 비평가들의 신경을 자극하기도 했는데, 특히 일간지 ‘피가로’는 그의 평생 작품 활동 동안에 가장 충실한 적이 되었다.
그가 만든 33편의 영화중 첫 번째 작품은 1915년에 만들어진다. 다큐멘터리 <우리 집에 온 그들 Ceux de Chez nous>은 그가 어린 시절 교류했던 예술가들과 학자들에게 헌정한 작품이다. 22분의 이 짧은 영화에서 기트리는 화면 밖 소리에 대한 지식이 없음에도 실험적인 방식을 창안해서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 디스크에 해설을 녹음했다. 이 작품 이후에 한동안 그는 영화와의 거리를 유지했는데, 1935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자신의 세 번째 배우자인 자클린 들르박의 영향으로 자신의 연극 작품을 각색한 과학자 파스퇴르에 관한 극영화인 <파스퇴르 Pasteur>를 연출한다. 이때 그의 나이는 50세였다.
1936년 기트리는 4편의 작품을 연출했다. 그중 자신의 동명 제목의 소설을 각색한 <어느 사기꾼의 이야기 Roman d'un tricheur>는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비상하고 놀라운 작품이다. 이 영화의 줄거리는 한 젊은 남자가 카지노에서 사기를 치면서 부자가 되고 명망을 얻게 되는데 후에 정직하게 변하면서 모든 것을 잃게 된다는 것이다. 기트리가 쓰고, 연출하고, 주연을 맡은 이 영화는 거의 대사가 없다. 단지 내레이터 기트리의 고상하면서 엉큼하고, 감언이설 투이면서 과장된 어조, 연극적 목소리이면서 동시에 영화적 목소리가 되는 탁월한 목소리에 의해 지속적인 리듬을 얻고 있다. 거의 매 장면마다 등장하는 사샤 기트리는 영화가 시작될 때부터 자신의 완벽한 예술가적 위치와 자기중심적인 면모를 보여주었다.
그때부터 자신의 작품의 각색자이자 시네아스트로 사샤 기트리는 주요한 두 가지 경로를 밟아나갔다. 첫 번째는 프랑스 역사의
에피소드를 자유롭게 재해석한 연대기적 작품들이다. 1937년에 만든 <캄브로느의 말 Le mot de Cambronne>, <왕관의 진주 Les perles de la couronne>가 그런 작품들이다. 두 번째는 사교계와 보드빌적인 작품들이다. 1936년의 <아버지는 옳았다 Mon père avait raison>과 1937년의 <카드리유 Quadrille> 등이 그러한 작품이다. 그의 영화적 경력은 그러나 전쟁의 발발과 더불어 변화를 겪었다. 독일군의 점령이후 사샤 기트리는 에두아르VII 극장의 감독으로 자신의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 파리에 남기로 결정한다. 그는 자신의 역할이 점령군에 맞서 프랑스적 영혼의 영속성을 구현하고 대중들을 계속 즐겁게 해주는데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 작품들 중 <데지레 클레리의 놀라운 운명 Le fabuleux destin de Désiré Clary>, <나의 마지막 정부 Donne moi tes yeux>가 있으며, 또한 <필립 페탱의 잔 다르크 Jeanne d'Arc à Philippe Pétain>는 역사적 부침 속에서도 지속되는 프랑스의 위대함을 표현하고자 했던 영화다.
해방과 더불어 기트리는 독일 점령군에 협조했다는 혐의로 체포되기도 했는데, 얼마 후 무혐의로 풀려났다. 그는 투옥되었던 수치심을 씻고 명예회복을 위한 기회가 얻고자 했고 검열 문제로 난항을 겪긴 했지만 1947년에 아버지 뤼시앙 기트리에게 헌정하는 <배우 Le comédien>을 촬영했고 1948년에는 조국에 봉사한다는 목적으로 여러 체제를 지지해 논란이 된 역사적 인물인 탈레랑에 관한 전기 영화 <절름발이 악마>를 만들었다. 사샤 기트리는 이 영화로 자신을 설명하고 방어하고 면죄 받을 기회를 얻었다. 프랑스 혁명 시기에 활동한 외교관 탈레랑에 관한 영화로, 기트리 자신이 탈레랑을 연기했다. 그는 절대왕정기를 거쳐 19세기 초까지 50년간 고급공무원과 장관을 역임했는데, 기트리는 그가 왕들을 세우기도학고 폐위시키는 진짜 군주로 묘사한다. 특히 숭배자의 측근들에 둘러싸인 탈레랑이 한 젊은 대사에게 외교술을 연극 예술로도 정의하며 강의를 펼치는 동일한 동작으로 젊은 대사를 임명했다가 이후에 해고시키는 장면에서 그러하다.


이 영화에서도 기트리는 그의 적대적 비평가들을 실망시키지 않고 선동가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 비평가들은 다시금 그가 여전히 자기중심적이며 역사를 경망스럽게 다루었고 그저 ‘촬영된 연극 théâtre filmé’에 불과하다며 그의 작품을 비난했다. 하지만 이와 관련해서는 비평가인 장 두셰의 말을 주의 깊게 들을 필요가 있다. 장 두셰는 비평의 지점을 ‘연극화된 영화 cinéma théâtralisé’라는 말로 바꿀 것을 제안한다. 그것은 기트리가 고전연극에서 사용했던 자신의 특징들을 스크린으로 잘 변화시켰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주인과 하인이라는 관계의 모호성을 강조한 첫 장면이나, 탈레랑의 절뚝거리는 걸음걸이를 리듬에 맞추어 입장하고 퇴장시키는 장면들은 기트리가 섬세하게 주의를 기울인 순간들이다. 가면을 모두 쓰고 있어야 할 가장 무도회에서 모든 이들이 가면 대신 얼굴을 드러낸 장면은 신분이나 계급의 외양을 중시한 사회를 코미디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1950년대는 사샤 기트리에게 성공적인 시기였다. 그는 코미디를 번갈아 만들었다. 1950년의 <넌 내 생명의 은인 Tu m'a sauvé la vie>, 1951년의 <나는 세 번째였어 J'ai été 3fois>, 1952년의 <독 La Poison>, 그리고 당대 스타들이 총출연한 역사 3부작 <베르사이유를 내게 말한다면 Si Versailles m'était conté>(1953), <나폴레옹 Napoléon>(1954), <파리를 우리에게 말한다면 Si Paris nous était conté>(1956) 등이 있다. 그의 영화에 출연한 배우들은 부르빌, 장 모레, 미셀 모르강, 제라르 필립, 다니엘 겔랑, 에디트 피아프, 피에르 브라세르, 그리고 기트리를 자신의 스승 중 한사람으로 꼽았던 오손 웰즈가 있다. 그는 1957년에 두 편의 영화, <살인자와 도둑Assasins et voleurs>, <셋이 한 쌍 les trois font la paire> 등의 작품을 만들었지만 1957년 7월 파리에서 세상을 떠났다.
오랜 기간 동안 사샤 기트리의 영화는 영화화된 연극이라는 불명예스런 비판을 받아야만 했다. 누벨바그의 호평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최근 몇 년이 되어서야 이제 그를 오명에서 구제하는 노력이 시작되고 있다. 2007년에 시네마테크 프랑세즈는 그에게 오마주를 바치는 회고전과 전시회를 개최했다. 사샤 기트리는 이제 사유를 영화의 한 쇼트에 집약시킬 수 있는 예술의 설계자이자 이미지의 명인으로 새롭게 조명 받고 있다.

글|임세은(영화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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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툼누씨 2012.03.30 00: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봤어용

시네필 정성일의 선택, 사샤 기트리의 <어느 사기꾼의 이야기> 시네토크

2월 11일 특별섹션으로 마련된 카르트 블랑슈: 시네필의 선택작으로 정성일 평론가가 추천한 사샤 기트리의 <어느 사기꾼의 이야기> 상영 후 정성일 평론가와 관객과의 대화가 있었다. 정성일 평론가는 ‘영화가 상영되는 지금 이 시간에도 시네마테크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김성욱 프로그래머에게 힘찬 박수를 보내자’는 말을 건네며, <어느 사기꾼의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와 시네필의 강령을 전달했다. 그는 시네마테크의 관객들이 극장을 지키기 위해 행동해야만 할 것이라며 행동이 결여된 채 극장에 앉아있다는 것은 영화를 사랑하는 행위가 아니라고 말했다. 약 두 시간에 걸쳐 진행된 강연은, 시네마테크가 처한 위기를 슬기롭게 헤쳐 나가자는 ‘선배 시네필’의 지혜와도 같은 것이었다.

정성일(영화평론가): 사샤 기트리의 <어느 사기꾼의 이야기>는 영화사적으로 고전의 반열에 오르지 못한 영화 중 하나다. 이 영화에 관한 글을 찾는다면 호의적인 비평보다 비판적인 글들을 쉽게 접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사기꾼의 이야기>의 비판들은 대부분 이 영화가 연극적인 것이라는 부분을 지적한다. 여기서 질문. 영화가 연극을, 영화가 회화를, 혹은 영화가 문학과 음악을 끌어안는 것은 잘못된 것일까 하는 문제. 나는 <어느 사기꾼의 이야기>를 보는 즉시 매혹되었다. 굉장한 걸 봤다는 느낌이 들었다. 기트리의 영화 13편 정도를 보았는데 당시 영화를 함께 보았던 친구들은 아무도 나의 기트리에 대한 방어를 동조하지 않았다. 결국 나는 내 세대에서 누구와도 기트리에 관한 사랑을 함께 나누지 못한 것이다. 그의 영화에 대한 사랑을 나눌 친구들을 기다리고 기다리며 내 방식으로 글을 읽고 영화들을 찾았다. 여전히 기트리에 대한 책들은 한글은 물론이고 영어연구서적도 찾을 수 없다. 프랑스에서조차 그에 대한 연구서적 2권과 자서전 1권, 연대기 1권 정도가 전부다. 이번 친구들 영화제의 목록을 정하면서 김성욱 프로그래머가 ‘어쩌면 이번 영화제가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말을 했을 때, 다른 영화는 아무래도 상관없으니 사샤 기트리의 <어느 사기꾼의 이야기>만큼은 꼭 상영했으면 좋겠다고 간곡히 부탁했다. 이유는 세대를 건너뛰어 나의 친구를 찾고 싶었기 때문이다. 8년 동안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사샤 기트리의 영화가 단 한 편도 상영된 적이 없었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그러다가 김성욱 프로그래머에게 올해 사샤 기트리의 상영계획이 잡혔다는 말을 들었다. 이기적으로 이야기하면 그걸 보기 위해서라도 서울아트시네마는 계속되어야한다. (웃음)

 

기트리는 매우 긴 시간 동안 작업을 했었고 대중적으로도 성공을 거둔 감독이지만 프랑스바깥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무엇보다 연극을 사랑했던 사람이다. 영화를 연출했지만 동시에 연극무대를 포기하지 않았던 감독이다. 연극은 프랑스영화사에서 매우 뿌리 깊은 전통을 가지고 있다. 연극배우들 대부분이 영화로 흘러들어왔으며 기트리도 그런 맥락에 놓여있는 사람 중 하나였다. 물론 기트리는 장 르느와르의 위대함에 비견할만한 자리에 오르지 못했으며 그는 마르셀 까르네나 쥘리앵 뒤비비에가 아니었다. 나는 기트리가 까르네나 뒤비비에보다 더 위대하다고 생각한다. 기트리는 대중들의 사랑을 받았지만 비평가들의 관심 밖에 놓였다. 기트리를 비평의 범주에 놓이게 한 것은 1950년대 까이에 뒤 시네마의 젊은이들이었다. 특히 세 사람이 기트리를 옹호했다. 한 사람은 고다르였고, 다른 한 사람은 알렝 레네, 또 하나는 크리스 마르케였다. <사기꾼의 이야기>의 첫 장면, 제작과 음악감독 등을 소개하는 장면은 고다르의 <경멸>의 첫 장면과 동일하다. <경멸>은 프리츠 랑에게 바치는 존경의 표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기트리에게 바치는 존경의 표시이기도 하다.

 

“기트리의 영화가 발견된 건 시네마테크의 공로다”

 

기트리는 1895년 2월 21일에 러시아에서 태어났다. 이것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뱀파이어> 상영 때 말씀드렸던 것과 마찬가지로 기트리는 태어나서 영화의 탄생을 본 셈이다. 그리고 그가 러시아 페테스부르크에서 태어났다는 뜻은 맑스주의의 보급이 진행된 시기를 말하며 볼세비키들의 활동이 조직화로 이어지는 초입의 시대였다. 그는 고향을 떠나 프랑스에 온 후 1차, 2차 세계대전과 유대인색출, 나치 승복 등 격정의 시기 속에 힘겹게 러시아인으로서의 생을 보냈다. 기트리는 연극에 매우 재능이 있던 사람이었다. 스무 살에 직접 쓴 희곡을 무대에 올리고 연출을 했다. 기트리는 연극에서 즉흥연기를 중요하게 생각했고 느슨하게 구성된 연기의 가능성들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기트리가 영화와 인연을 맺은 것은 1915년, 그는 연극을 했던 사람답지 않게 <우리 집의 그들>이라는 다큐멘터리로 데뷔했다.

20세기 초 드가나 로댕, 마네와 같은 예술가들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찍었지만 곧 영화에 관심을 잃고 연극에 전념했다. 그는 토키영화(유성영화)의 시작과 함께 다시 영화계로 돌아왔다. 1957년까지 기트리는 30여 편의 영화를 찍었다(이것은 미완성된 영화들 포함한 것이다). 영화계로 복귀한 기트리에 대해 비평가들은 대부분 공격적인 태도를 취했다. 지나치게 연극적이라는 비판을 받았고 ‘필름 다르(예술영화를 낮춰 부르는)’라는 치욕을 받았다. 하지만 알랭 레네는 가장 강력하게 기트리의 영화를 지지했다. 레네는 <어느 사기꾼의 이야기>를 자기 생애의 베스트 중 하나로 뽑았고, <히로시마 내 사랑>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기트리의 아이디어를 훔쳐왔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두 작품 사이의 친척관계에 대해 생각해보자. 이것은 결국 시네마테크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이기도 했다. 기트리의 영화는 영화사적으로 버림받았기 때문에 상업극장에서는 볼 방법이 없었다. <어느 사기꾼의 이야기>를 볼 수 있었던 것은 시네마테크의 도움 때문이었고 랑글루아의 프로그래밍 덕분이었다.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의 랑글루아에게는 원칙이 있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시네마테크의 프로그램을 감독, 배우, 장르 중심으로 짜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시네마테크는 학교가 아니고 박물관이 아니며 사람들을 가르치기 위해 있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러 영화들을 섞어서 상영하며 관객들 각자의 방식으로 영화사를 만들고 연관성을 찾아내고 영화들을 새롭게 받아들일 수 있는 충격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주의였다. 랑글루아는 졸작을 함께 상영할 때에 진정한 시네마테크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레네는 기트리의 영화를 지지하며 이렇게 말했다. ‘순수영화와 싸워라.’ 시네필이나 비평가들 혹은 감독들 중에서 영화만으로 순수하게 생각해야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레네는 그것에 동의하지 않았다. 진정한 영화는 순수한 영화 밖에서 활동하기 시작한다고 믿었다. 영화 이전에 존재했던 긴 예술의 행적을 부정할 수는 없는 거다. 기트리는 기꺼이 그 순수의 논리에 반하여 연극과 우정을 나눴다고 생각한다. 누구나 영화를 보시면 즉각적으로 발견하는 <어느 사기꾼의 이야기>의 보이스내레이션. 토키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시종일관 과거로만 넘어가면 모든 장면들이 단 한 번의 대사도 없이 보이스오버내레이션으로 찍혀진다. 틀림없이 브레송은 이걸 보았을 것이다(맹세코 이야기할 수 있다). 그리고 그는 <시골사제의 일기>를 찍으며 사샤 기트리를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히로시마 내 사랑>의 내레이션도 역시 기트리의 연장선인 것이다. 이 영화가 또 재미있게 느껴지는 것 중 하나는 흔히 말하는 ‘크레타인 문제’를 떠올리게 만든다는 것이다. 거짓말의 부분과 전체집합, 발화와 언술의 전체와 부분집합의 논제가 이뤄지는 거다. 영화를 보고 있으면 궁극적으로 모우리가 보았던 모든 말들이 사기가 아니라는 보장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예민한 분들이라면 이게 이 영화의 핵심이라는 생각을 할 것이다. 문득 ‘이 모든 것이 사기라면 이것을 믿을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질 때 이것은 즉각적으로 관객을 생각하게 만드는 부분들이다.

 

기트리의 영화 중 내가 특별하게 사랑하는 영화는 그의 필모 중 마지막 세 편의 것이다. 물론 기트리의 영화들 중에 여러분을 질겁하게 할 만한 위인전 시리즈가 있다. (웃음) 영화를 아직 보지 않으신 분들에게 선입관을 주고 싶지 않으니, 그때까지 시네마테크가 버텨준다면 기트리의 회고전을 보며 다시 이 이야기를 하고 싶다. 기트리를 방어한 레네의 이야기를 더 붙이면, 레네의 열렬한 팬들이라면 레네의 영화가 1970년대 중반이후 갑자기 전환점을 맞은 것처럼 변화를 가져온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레네는 그때부터 연극처럼 영화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이런 레네의 영화들을 보면 아주 명백하게 이 영화들은 기트리가 만들었던 연극과 영화 사이의 우정관계에서 시네마틱한 무언가를 찾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어느 사기꾼의 이야기>를 보며 가장 감동받았던 건 사기를 치는 장면들 많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이 영화를 보며 깨달은 사실, 영화 속의 사기행각은 단 하나도 흉내를 낼 수 없다는 것. 모두 영화적인 방법으로만 성립되는 사기라는 것이다. 카메라, 편집, 보이스오버내레이션 등이 있을 때 만 성립되는 사기, 기트리는 메소드 속에서 사기의 메소드가 어떻게 시네마를 성립하는 것인가. 순간 모든 것이 부서져버린 거다. 영화는 무엇보다 ‘시네마’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 어떻게 견디는 것인지를 생각해야한다. 결과적으로 그렇게 견디어진 영화들이 두 번 보고 DVD를 구입해서보고 그것이 세계 명작인양 소유하고 하는 유혹을 건네주는 것이다.


 

관객1: 영화의 연극적인 부분에 대해 간략하게 말씀 부탁드린다. 그리고 어제 <뱀파이어>를 보면서 느낀 것이 있는데 스턴트들이 굉장히 과감하게 짜여진 것 같았다. 무성영화의 공통적인 특징인가.

정성일: 연극적인 부분에 대한 것은 세트 디자인과 클로즈업 씬을 보면 알 수 있다. 일단 세트라는 공간이 정해지면 그 공간을 스테이지화하는 것이 <어느 사기꾼의 이야기>의 특징이다. 이 영화에는 클로즈업이 없는데 당대 비평가들은 이런 영화 속 동선이 지나치게 연극적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 무성영화에서 가장 중요한건 스펙타클이었다. 그것이 아니라면 관객들을 매혹시킬만한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무성영화에서 가장 발전하지 못한 것이 멜로드라마다. 당시에는 카메라와 인물사이의 거리를 관습적으로 떨어뜨리는 방식이 진행되었고 이에 따라 액션들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팡토마>를 보시게 된다면 재밌는 부분들을 발견하실 수 있을 것이다.

관객2: 시네마테크를 얼마 다니지 않았는데 영화를 어떻게 봐야하나 고민해야 할 때가 많다. 항상 그냥 영화를 보러 오곤 하는데 어떤 마음가짐이나 태도나 접근방식을 가지고 오면 좋을지에 대한 조언과 시네마테크 전용관의 필요성에 대해 말해달라.

정성일: 아무 생각 없이 이곳에 오는 게 맞다. 이곳은 다른 곳과 다르다고 생각하는 순간 시네마테크는 게토가 되는 것이다. 행여 이곳에 온다고 해서 선민의식을 갖고 내 안목은 훌륭하다 생각하는 건 참 웃기다. 상영하는 영화가 좋고 프로그램이 좋아서 여기에 오는 것 뿐이다. 시네마테크 전용관도 있어야 하는 것이지만 사실 어떤 영화를 상영하는가에 더 관심을 가져야한다고 생각한다. 이 장소의 목표는 영화 상영에 있어야 하고, 지금의 이 좌석이 중요한 게 아니라 영화가 중요하기 때문에 이 공간을 확보하려 노력하는 거잖나.

관객3: 정성일 평론가가 관객들과 스크린 사이에서 말을 할 때 나에게는 그게 하나의 영화 같다는 생각이 든다. (웃음). 시네필의 형님으로서 한 마디 한다면.

정성일: 마음 같아서는 시네필 소림사를 하고 싶다. (웃음) 하지만 지켜지지 못한 것이 많다. 일례로 키노는 100호를 만들지 못하고 끝났는데 중요한 교훈을 줬다.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들도 많았으나 ‘있을 때 잘 하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는 시네마테크가 있을 때 잘하셔야한다는 것이다. 그때 시네마테크가 있었어, 이건 다 헛소리다. 잘하는 게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각자 답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 답을 가지고 행동을 하면 된다. 그 답을 가지고 있어야 시네필이다. 답을 가지지 않고 이 자리에 앉아있으면 사실 그 분이 시네필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다. 답을 갖고 행동하는 것 두 가지가 지금의 시네필 강령이 아닌가 생각한다. 세월이 좋아 태평성대 보내며 영화를 보던 시절은 끝났다. 지금 무엇을 할 것인가. 만일 답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나는 그에게 ‘영화는 도대체 무엇인가’라고 반문하고 싶어진다. (정리: 강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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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읽기] 사샤 기트리의 <어느 사기꾼의 이야기>


사샤 기트리 영화의 핵심은 ‘역설’에 있다. 역설은 기트리의 영화, 기트리와 영화의 관계를 모두 이해하는 데 근사하게 쓰이는 말이다. 일례를 들어보자. 1912년, 연극에 주력하던 이십대의 기트리는 감히 ‘영화는 정점을 지나버릴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이후 감독이 되어서도 그는 영화를 얕보는 태도와 주장을 굽히지 않았는데, 그런 자세는 기존의 영화 관습과 약호를 거부하는 결과를 낳았다. 영화에 대한 경멸에서 비롯된 기트리의 독창성은 누벨바그 감독들의 열렬한 지지를 얻었고, 혹자는 그를 ‘모던 시네마의 아버지’로 치켜세우기도 했다. 한편, 그를 옹호하지 않는 자들로부터 단조로운 희극, 삼각관계 실내극 정도로 취급받는 기트리의 영화는 사실 반코미디의 정서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의 영화 <꿈을 꿉시다>(1936)에 나오는 두 노파는 “관객은 결혼 장면만 나오면 행복해져서 ‘좋은 코미디’로 평가하지. 그건 비극의 시작인데 말이야”라는 내용의 대화를 나눈다. 우디 앨런 이전에 과연 이런 톤의 코미디를 거침없이 창조한 작가가 있었을까 싶다. 기트리는 우리가 아직 발견하지 못한 마지막(이자 궁극의) 코미디언이다.

프랑수아 트뤼포가 ‘프랑스의 에른스트 루비치’라 칭한 기트리의 전공은 우아하고 화려한 계층의 러브스토리이지만, 그의 영화는 가족 같은 전통적인 관계의 유지보다 분열에 더 흥미를 느끼곤 한다. 기트리의 영화를 대표하는 <어느 사기꾼의 이야기>는 위의 특성들을 잘 드러낸 작품이다. 영화는 오십대의 남자가 카페에 앉아 쓰는 회고록에 맞춰 진행된다. 부모의 가게에서 돈을 훔친 12살 소년은 벌로 식사를 굶는데, 하필 그날 저녁에 독버섯이 든 음식을 먹은 나머지 11명의 가족이 모조리 죽고 만다. 성실한 자들의 죽음과 도둑의 생존이 불러일으킨 기묘한 의문은 주인공의 삶을 방향 짓는다. 호텔에서 일하며 부유한 삶이 찾아오길 바라던 소년은 성장의 단계마다 비슷한 일을 거듭 겪는다. 선의에 의한 행동이 처벌받는 것과 반대로, 사기가 매번 좋은 결과를 낳자, 그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운명을 따르기로 한다. 20년 동안 국적, 이름, 외모, 직업을 수없이 바꾸며 부를 거머쥔 그는 전쟁터에서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남자와 재회한 뒤 기로에 선다.



<어느 사기꾼의 이야기>의 연출, 각본, 주연을 도맡은 건 물론, 내레이션과 모든 출연자의 목소리까지 혼자 연기한 기트리는 완전작가의 영역을 탐한다. 사진과 다큐멘터리를 삽입하고, 상반된 연기를 대비시키며, 낯선 편집을 과감하게 시도하는 등 기트리 특유의 스타일들이 빛나지만, 기트리 영화의 진정한 가치는 삶을 대하는 자세에 있다 하겠다. 죽음, 만남, 이별의 과정과 살아온 길을 서술하는 남자의 내레이션에는 일체의 감정이나 낭만이 끼어들 자리가 없다. 한 발짝 떨어져 주인공을 바라보는 영화는 도덕과 부도덕의 경계를 성큼성큼 넘나드는 삶을 냉정하게 분석하고 해부한다. 거기에다 카드 테이블에 앉아 속임수를 연기하는 기트리가 사기와 기만을 몸소 가르치는가 하면, 영화 또한 사기의 종말 다음에 교훈극을 따로 펼칠 마음이 없다. 기트리는 ‘사기와 기만’이 자본주의 사회를 이끌어가는 진짜 규칙이 아니냐고 말하고, 사기꾼들이 훨씬 잘살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정치적인 올바름’을 앞세우는 현대인은 독단적인 의견을 눈치 보지 않고 술술 늘어놓는 기트리의 자세가 위험하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의 말 속에는 괴변과 야유가 많은 만큼 지혜로운 경구와 사회질서에 대한 비판이 푸짐하다. 앞에선 예의 바른 척하다 뒷자리에선 본심을 털어놓는 인간보다 언제나 유쾌하고 호탕하고 자신감 넘치는 인간을 지지하고 싶은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런 자들에게 기트리의 영화는 경전에 다름 아니다. (이용철 영화칼럼니스트)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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