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특별전/프랑스 영화의 황금기:1930-1960

연극화된 영화의 창조자, 사샤 기트리

사샤 기트리는 러시아 페트로그라드 출생으로 프랑스 극작가이자 배우로 출발했다. 아버지의 무대에서 배우로 활약하다가 극단을 위해 가벼운 희극을 쓰기 시작했는데 영국에서 많이 상영되었다. 그의 작품은 환상, 정열, 기지로 가득 차 있고 수법이 교묘했다. 1920년 런던에서 <노노 Nono>(1905)를 아내 Y.프랭탕과 공연했으며 자작 희극을 직접 연출하고 때로는 아내와 함께 출연하여 ‘연극의 귀신’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후 영화연출에도 관심을 보였는데 대표작으로는 <파스퇴르>(1919), <모차르트>(1925), <어느 사기꾼의 이야기>(1936) 등이 있다. ‘프랑스 영화의 황금기: 1930-1960’에서는 <꿈을 꾸다>(1936)와 <절름발이 악마>(1948) 두 편이 상영된다.


독일 점령기의 파리를 배경으로 한 프랑수아 트뤼포의 <마지막 지하철>(1980)에는 장 포아레가 연기한 겉으로는 파렴치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따뜻한 마음을 지닌 연극 연출가가 등장한다. 트뤼포가 자신의 영화에 이 특이한 인물을 등장시킨 것은 사샤 기트리를 흠모했기 때문이었다. 생전에 대중적인 성공을 거두긴 했지만 오랜 시간동안 그저 연극적인 영화라는 비판적 선입견을 벗어나지 못했던 사샤 기트리를 재발견했던 것은 트뤼포를 위시한 누벨바그 감독들이었다. 누벨바그 감독들은 한 편의 영화에서 거의 모든 단계를 주관하고 자신의 세계관을 덧입혔던 총체적 예술가로서의 그의 지위를, 그리고 연극적인 요소가 많이 있다고 해도 틀에 얽매이지 않은 기트리의 독특하고 자유로운 문체를 찬미했다. 그래서 트뤼포는 그에게 진정한 시네아스트라는 직위를 부여했고 또한 초기영화의 거장 에른스트 루비치와 비교하기도 했다.
사샤 기트리는 1885년 페트로그라드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19세기 말 연극계의 거장이었던 배우 뤼시앙 기트리였고 차르 알렉산더3세가 그의 대부였기 때문에 막대한 후원 속에서 자랄 수 있었다. 그의 유년시절에 어린 기트리는 아버지를 따라 유럽 전역을 순회하였고 그의 그늘 아래서 자랐다. 부친의 영향으로 오귀스트 로댕, 콜레트, 사라 번하르트, 아나톨 프랑스, 클로드 모네와 같은 보헤미안적이고 사교계의 지식인들과 가까이 지냈다. 18세에 고등학교를 마치고 풍자에 특별한 재능이 있었던 기트리는 마침내 1905년에 작가, 연극연출가, 그리고 배우로서 <노노 Nono>라는 작품으로 연극계에서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재기 넘치는 젊은이였던 사샤 기트리는 아버지처럼 그 분야에서 인정받고 성공하기를 원했다. 그는 거침없었을 뿐 아니라 항상 여러 개의 프로젝트를 동시에 진행하는 능력의 소유자였다. 그는 복잡하게 얽힌 감정을 다룬 이야기(그의 첫 번째 부인은 아버지의 정부였다)에서 재치 있는 말을 사용하는 고상한 익살꾼 역할을 맡았다. 그는 무대에서나 삶에서 게임을 즐겼다. 그의 당돌한 무례함과 창조에 대한 능력은 비평가들의 신경을 자극하기도 했는데, 특히 일간지 ‘피가로’는 그의 평생 작품 활동 동안에 가장 충실한 적이 되었다.
그가 만든 33편의 영화중 첫 번째 작품은 1915년에 만들어진다. 다큐멘터리 <우리 집에 온 그들 Ceux de Chez nous>은 그가 어린 시절 교류했던 예술가들과 학자들에게 헌정한 작품이다. 22분의 이 짧은 영화에서 기트리는 화면 밖 소리에 대한 지식이 없음에도 실험적인 방식을 창안해서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 디스크에 해설을 녹음했다. 이 작품 이후에 한동안 그는 영화와의 거리를 유지했는데, 1935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자신의 세 번째 배우자인 자클린 들르박의 영향으로 자신의 연극 작품을 각색한 과학자 파스퇴르에 관한 극영화인 <파스퇴르 Pasteur>를 연출한다. 이때 그의 나이는 50세였다.
1936년 기트리는 4편의 작품을 연출했다. 그중 자신의 동명 제목의 소설을 각색한 <어느 사기꾼의 이야기 Roman d'un tricheur>는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비상하고 놀라운 작품이다. 이 영화의 줄거리는 한 젊은 남자가 카지노에서 사기를 치면서 부자가 되고 명망을 얻게 되는데 후에 정직하게 변하면서 모든 것을 잃게 된다는 것이다. 기트리가 쓰고, 연출하고, 주연을 맡은 이 영화는 거의 대사가 없다. 단지 내레이터 기트리의 고상하면서 엉큼하고, 감언이설 투이면서 과장된 어조, 연극적 목소리이면서 동시에 영화적 목소리가 되는 탁월한 목소리에 의해 지속적인 리듬을 얻고 있다. 거의 매 장면마다 등장하는 사샤 기트리는 영화가 시작될 때부터 자신의 완벽한 예술가적 위치와 자기중심적인 면모를 보여주었다.
그때부터 자신의 작품의 각색자이자 시네아스트로 사샤 기트리는 주요한 두 가지 경로를 밟아나갔다. 첫 번째는 프랑스 역사의
에피소드를 자유롭게 재해석한 연대기적 작품들이다. 1937년에 만든 <캄브로느의 말 Le mot de Cambronne>, <왕관의 진주 Les perles de la couronne>가 그런 작품들이다. 두 번째는 사교계와 보드빌적인 작품들이다. 1936년의 <아버지는 옳았다 Mon père avait raison>과 1937년의 <카드리유 Quadrille> 등이 그러한 작품이다. 그의 영화적 경력은 그러나 전쟁의 발발과 더불어 변화를 겪었다. 독일군의 점령이후 사샤 기트리는 에두아르VII 극장의 감독으로 자신의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 파리에 남기로 결정한다. 그는 자신의 역할이 점령군에 맞서 프랑스적 영혼의 영속성을 구현하고 대중들을 계속 즐겁게 해주는데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 작품들 중 <데지레 클레리의 놀라운 운명 Le fabuleux destin de Désiré Clary>, <나의 마지막 정부 Donne moi tes yeux>가 있으며, 또한 <필립 페탱의 잔 다르크 Jeanne d'Arc à Philippe Pétain>는 역사적 부침 속에서도 지속되는 프랑스의 위대함을 표현하고자 했던 영화다.
해방과 더불어 기트리는 독일 점령군에 협조했다는 혐의로 체포되기도 했는데, 얼마 후 무혐의로 풀려났다. 그는 투옥되었던 수치심을 씻고 명예회복을 위한 기회가 얻고자 했고 검열 문제로 난항을 겪긴 했지만 1947년에 아버지 뤼시앙 기트리에게 헌정하는 <배우 Le comédien>을 촬영했고 1948년에는 조국에 봉사한다는 목적으로 여러 체제를 지지해 논란이 된 역사적 인물인 탈레랑에 관한 전기 영화 <절름발이 악마>를 만들었다. 사샤 기트리는 이 영화로 자신을 설명하고 방어하고 면죄 받을 기회를 얻었다. 프랑스 혁명 시기에 활동한 외교관 탈레랑에 관한 영화로, 기트리 자신이 탈레랑을 연기했다. 그는 절대왕정기를 거쳐 19세기 초까지 50년간 고급공무원과 장관을 역임했는데, 기트리는 그가 왕들을 세우기도학고 폐위시키는 진짜 군주로 묘사한다. 특히 숭배자의 측근들에 둘러싸인 탈레랑이 한 젊은 대사에게 외교술을 연극 예술로도 정의하며 강의를 펼치는 동일한 동작으로 젊은 대사를 임명했다가 이후에 해고시키는 장면에서 그러하다.


이 영화에서도 기트리는 그의 적대적 비평가들을 실망시키지 않고 선동가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 비평가들은 다시금 그가 여전히 자기중심적이며 역사를 경망스럽게 다루었고 그저 ‘촬영된 연극 théâtre filmé’에 불과하다며 그의 작품을 비난했다. 하지만 이와 관련해서는 비평가인 장 두셰의 말을 주의 깊게 들을 필요가 있다. 장 두셰는 비평의 지점을 ‘연극화된 영화 cinéma théâtralisé’라는 말로 바꿀 것을 제안한다. 그것은 기트리가 고전연극에서 사용했던 자신의 특징들을 스크린으로 잘 변화시켰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주인과 하인이라는 관계의 모호성을 강조한 첫 장면이나, 탈레랑의 절뚝거리는 걸음걸이를 리듬에 맞추어 입장하고 퇴장시키는 장면들은 기트리가 섬세하게 주의를 기울인 순간들이다. 가면을 모두 쓰고 있어야 할 가장 무도회에서 모든 이들이 가면 대신 얼굴을 드러낸 장면은 신분이나 계급의 외양을 중시한 사회를 코미디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1950년대는 사샤 기트리에게 성공적인 시기였다. 그는 코미디를 번갈아 만들었다. 1950년의 <넌 내 생명의 은인 Tu m'a sauvé la vie>, 1951년의 <나는 세 번째였어 J'ai été 3fois>, 1952년의 <독 La Poison>, 그리고 당대 스타들이 총출연한 역사 3부작 <베르사이유를 내게 말한다면 Si Versailles m'était conté>(1953), <나폴레옹 Napoléon>(1954), <파리를 우리에게 말한다면 Si Paris nous était conté>(1956) 등이 있다. 그의 영화에 출연한 배우들은 부르빌, 장 모레, 미셀 모르강, 제라르 필립, 다니엘 겔랑, 에디트 피아프, 피에르 브라세르, 그리고 기트리를 자신의 스승 중 한사람으로 꼽았던 오손 웰즈가 있다. 그는 1957년에 두 편의 영화, <살인자와 도둑Assasins et voleurs>, <셋이 한 쌍 les trois font la paire> 등의 작품을 만들었지만 1957년 7월 파리에서 세상을 떠났다.
오랜 기간 동안 사샤 기트리의 영화는 영화화된 연극이라는 불명예스런 비판을 받아야만 했다. 누벨바그의 호평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최근 몇 년이 되어서야 이제 그를 오명에서 구제하는 노력이 시작되고 있다. 2007년에 시네마테크 프랑세즈는 그에게 오마주를 바치는 회고전과 전시회를 개최했다. 사샤 기트리는 이제 사유를 영화의 한 쇼트에 집약시킬 수 있는 예술의 설계자이자 이미지의 명인으로 새롭게 조명 받고 있다.

글|임세은(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