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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테 헬만

[Cinetalk] 자크 리베트의 '미치광이 같은 사랑' 시네토크 자크 리베트 상영 후 김성욱 프로그램디렉터 시네토크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 이번에 ‘친밀한 삶’이라는 제목의 특별전을 하면서 소개하는 몇 편의 영화들이 굉장히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오늘 보신 리베트의 영화는 몬테 헬만의 이나 필립 가렐의 영화, 찰스 버넷의 영화와 공명하는 부분이 있다. 모두 삶의 내밀함을 영화로 표현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는 라신의 연극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것들을 제외하면, 사실 관객에게 명료하지 않은 것들은 대부분 없다고 생각한다. 누군가 자크 리베트의 영화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일주일 후에나 열흘 후에 혹은 몇 주, 몇 년 후에 현실적인 삶과 연결되었을 때 성공할 수 있을 거라 말했는데, 그런 점에서 보자면 지금 이 영화에 대해 말하는 것이 조심스럽다... 더보기
[Cinetalk] 뉴아메리칸시네마의 숨겨진 걸작, <자유의 이차선> 지난 4월 7일, 몬테 헬만의 상영 후, 이용철 영화평론가의 시네토크가 이어졌다. 이 당시 뉴아메리칸시네마와 공명하는 지점들을 통해 몬테 헬만이라는 낯선 이름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던 이 날의 강연을 옮긴다. 이용철(영화평론가): 몬테 헬만은 1932년 뉴욕에서 태어났고, 어릴 때 캘리포니아로 이사를 가서 그곳에서 성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처음 시작했던 것은 연극이었고, 틈틈이 TV나 영화의 편집 등을 하면서 돈을 벌었다. 그가 영화를 시작한 것은 로저 코만의 역할이 컸다. 당시 로저 코만과 젊은 감독들의 만남은 당연한 일이었던 것 같다. 이전 세대의 감독들과 다르게, 학교에서 영화를 배운 이 젊은이들은 학교를 나와서 정작 영화를 만들 방법이 없었다. 그 때 코만은 아주 적절한, 구세주.. 더보기
[Review] 몬테 헬만, 우리가 잊어버린 그 이름 샘 페킨파는 1972년에 지와 가진 인터뷰에서 “후진 영화에 열광하던 평론가들이 좋은 영화를 놓칠 때면 화가 난다. 피터 보그다노비치의 에 환호하고 몬테 헬만의 을 무시한 게 그런 경우다”라고 말했다. 마치 헬만이 견뎌야 할 부당한 평가를 예언한 듯하다. 헬만은 1932년에 태어나 스탠포드 대학교와 UCLA에서 연극과 영화를 배웠다. 연극무대에서 활동하는 사이에 간간이 TV영화의 편집을 맡으며 1950년대를 보낸 그는 로저 코먼의 도움으로 감독의 길에 들어섰다. 갱스터, 괴수영화, SF가 뒤섞인 로 데뷔한 헬만은 그러나, 코먼을 거친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나 마틴 스콜세지처럼 아메리칸 뉴시네마의 주무대로 오르지 못했다. 주요 영화제들이 미국의 새로운 작가를 모시느라 법석을 떨던 1970년대에도 그의 영화는.. 더보기
[Essay] 영화의 사원 몬테 헬만은 뉴아메리칸 시네마의 저주받은 작가였다. 프리웨이를 질주하는 자동차와 방황하는 젊은이를 그린 (1971)은 (1969)의 계보를 잇는 70년대 로드무비의 숨겨진 걸작이지만, 흥행부진 때문에 몬테 헬만은 할리우드 영화사로부터 방출되는 불운을 겪어야만 했다. 은 젊은이들이 자유롭게 무엇이든 실패할 수 있는 권리가 있음을 보여주지만 역설적으로 작가는 그럴 권리를 누릴 수 없었다. 그가 ‘지옥에 떨어진 남자 Hell-Man’라 불리는 것은 뼈아픈 일이다. 영화의 역사에서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다. 작가주의를 주창한 ‘카메라-만년필론’으로 유명한 알렉상드르 아스트뤽은 비평에서 시작해 영화감독이 된 첫 번째 비평가로 누벨바그(특히 고다르)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이 시기 드물게 이스트먼 컬러로 촬영한 (1..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