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일러 오브 파나마>는 작가 존 르 카레와 감독 존 부어맨의 만남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먼저 실제 베를린에 파견되어 영국 스파이로 활동하기도 했던 존 르 카레는 동서 냉전기의 독일을 무대로 이중간첩을 소재로 한 세 번째 소설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가 크나큰 성공을 거두며 스파이 소설의 대가로 군림해왔다. 그런 그가 제작은 물론 시나리오 집필에도 참여한 작품이 바로 <테일러 오브 파나마>다. 영화의 핵심은 거짓 정보 때문에 벌어지는 파나마의 가상의 정치현실이다.

영국 정부는 전략적 요충지인 파나마 운하의 운영권이 제3국으로 넘어가지 않을까, 하는 우려로 영국 정보부 M16 소속 앤디 오스나드(피어스 브로스넌)를 파나마로 파견한다. 앤디는 재단사 해리 펜델(제프리 러시)의 비밀스런 과거를 약점 삼아 정보원으로 일하게 만든다. 해리는 파나마의 정, 관계 요인들을 대상으로 고급 양복점을 운영하고 있는 데다 그의 미국인 부인 루이사(제이미 리 커티스)는 파나마 운하위원회에서 일하고 있다. 운하의 운영권을 중국으로 넘기려 한다는 해리의 거짓 정보는 급기야 미국이 군사작전까지 동원하게 만든다.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픽션처럼 느껴지지만, 미국 부시 행정부가 이라크전을 시작하며 주장했던 ‘이라크 내 대량살상무기’가 지난 2004년 최종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밝혀졌던 일을 떠올려보면 될 것이다. 하지만 영화의 내용도 그렇듯 존 르 카레의 다른 작품들과 비교하면 미국의 대외정책을 풍자하는 블랙코미디적인 성격이 강하다. 한창 제임스 본드로 활동하고 있던 피어스 브로스넌을 <007 언리미티드>(1999)와 <007 어나더데이>(2002) 사이에서 비열한 바람둥이 스파이로 캐스팅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이언 플레밍의 반대말이 존 르 카레라면 피어스 브로스넌은 역시 똑같은 M16 요원으로 둘 모두를 오간다. 리 마빈의 매력이 빛나는 독특한 필름 누아르 걸작 <포인트 블랭크>(1967), 시종일관 긴장을 놓치지 않는 호러 어드벤처 <서바이벌 게임>(1972), 기이한 컬트 SF <자도즈>(1973) 등을 만들며 장르영화에 대한 과감한 시도와 재해석을 보여줬던 존 부어맨으로서는 바로 첩보영화 장르에 대한 도전이었을 것이다. 개봉 당시 <사이트 앤 사운드>의 마크 싱커는 “들쑥날쑥하지만 가끔은 뛰어난 작가인 존 르 카레와 마찬가지로 들쑥날쑥하지만 훨씬 무원칙적으로 뛰어난 감독 존 부어맨의 만남”이라고 썼다. 유머와 풍자라는 점에서 <테일러 오브 파나마>는 단점도, 장점도 많은 그들로부터 장점이 더욱 큰 교집합을 이룬 의외의 첩보영화 수작이다. 더불어 해리는 2차대전 첩보영화 <카사블랑카>(1942)를 빗대 파나마를 찾은 앤디에게 “영웅들이 없는 카사블랑카가 바로 파나마”라고 말한다.

by 주성철 씨네21 취재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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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오 바바는 영화광들 사이에서 서로 은밀한 눈웃음을 교환하는 패스워드 같은 존재다. 마틴 스콜세지의 오랜 애정은 말할 것도 없고 슬래셔 무비의 원전으로 회자되는 <베이 오브 블러드>(1971)는 존 카펜터가 <할로윈>(1978)을 만들며 그 주관적 시점 카메라를 응용했고, 쇠꼬챙이 살해 등 거의 리메이크라 해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 <13일의 금요일>(1980)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웨스 크레이븐은 <리사와 악마>(1973)에서 얻은 영감으로 <나이트메어>(1984)를 만들었고 팀 버튼은 <슬리피 할로우>(1999)를 통해 <블랙 선데이>(1960)를 비롯한 그의 고딕호러 영화들에 오마주를 바쳤다. 쿠엔틴 타란티노가 <블랙 사바스>(1963) 에피소드 구성으로부터 <펄프 픽션>(1994)의 아이디어를 떠올렸다는 것도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블랙 선데이>의 ‘호러 여신’ 바바라 스틸에게 매혹된 데이빗 크로넨버그와 브라이언 드팔마의 경배는 또 어떤가. 죽은 소녀의 유령이 마을을 떠도는 <킬, 베이비... 킬!>(1966)은 스콜세지의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1988)에 인용됐을 뿐 아니라 루키노 비스콘티와 페데리코 펠리니의 영화에도 스며들었다.


이에 덧붙여 최초의 지알로 호러영화로 인정받는 <너무 많이 아는 여자>(1963)에 이르기까지, 마리오 바바가 동료 혹은 후대 감독들에게 재평가 받는 부분은 아무래도 그 특유의 고딕호러 스타일이다. 그런 점에서 마리오 바바의 후기작 <미친개들>은 난데없는 영화다. 인공적 세트가 등장하는 일체의 실내 장면이 없고, 무엇보다 밤 장면이라고는 없이 거의 차안에서만 벌어지는 리얼타임 도주극이다. 리더(모리스 폴리)를 비롯 각각 블레이드(돈 백키)와 써티투(조지 이스트먼)라 불리는 세 남자가 살인사건을 저지르고는 돈을 탈취해 달아난다. 체포되려는 찰나 마리아(리아 랜더)를 인질로 잡고 위기를 모면한 그들은 우연히 리카르도(리카르도 쿠치올라)가 모는 차에 올라타게 되고, 아이를 데리고 병원으로 가는 중이었던 리카르도를 위협해 도시 밖으로 도주한다. 마리아를 그레타 가르보라 부르며 성희롱을 하고 죄책감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그들은 ‘미친개들’이나 마찬가지다.

마리오 바바는 <엘러리 퀸 미스터리 매거진>에서 읽은 한 에피소드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미친개들>을 구상했다. 하지만 여건이 좋지 못해서 제작비가 모자라 크랭크인 이틀 만에 촬영감독을 자르고 자신이 직접 촬영했다. 1974년 크랭크업하긴 했으나 제작자는 결국 파산했고 깔끔하게 완성되지 못한 채로 남겨졌다. 그렇게 거의 20년 동안 창고에 잠들어 있던 필름에 마리아 역의 배우 리아 랜더가 돈을 대고 아들 람베르토 바바가 미진한 부분을 마무리해 완성했다. 그러니까 공개 순서로 보자면 <미친개들>은 마리오 바바의 유작이라 해도 틀리지 않다.

<미친개들>은 자동차의 여정을 따른다는 점에서 직접적으로 에드가 울머의 <우회로>(1945)를 연상시킨다. 자동차 안의 미친개들은 발정난 개 마냥 여자를 괴롭히고 급기야 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여자에게 소변을 보게 하며 자신의 성기를 만지도록 시킨다. 마리오 바바의 이전 영화들과 비교해도 느닷없고 역겨운 장면들의 연속은 영화 속 인물들을 너무나 가혹하게 다룬다. 에드가 울머의 <우회로>를 향해 로저 에버트가 “내러티브에 있는 비약과 모순은 악몽의 심리학에 해당한다.”고 했던 얘기는 <미친개들>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그리하여 영화는 오히려 지나치게 비관적이고 운명적이다. 그럼에도 거칠고 대담하게 정체불명의 요소들이 한데 뒤엉켜 끝까지 내달리는 <미친개들>은 기묘한 혼돈의 매력으로 가득 차 있다. 영화의 에너지를 제 맘대로 쥐었다 놓았다 하는 특유의 긴장감도 팽팽하다. 전혀 예상치 못한 라스트의 반전에 이르러서는 운명의 그 잔혹하고 서늘한 힘에 기어이 굴복당하고야 만다. 마리오 바바의 가장 파괴적이고도 음울한 로드무비다. (주성철_씨네21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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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토크] 류승완 감독 선택작 마리오 바바의 <미친개들>

지난 23일, 이번 영화제 첫 매진사례를 기록한 류승완 감독의 추천작 마리오 바바의 <미친개들>의 상영 후, 씨네21 주성철 기자의 진행으로 언제나 유쾌한 모습을 보여주는 류승완 감독과의 대화가 이어졌다. 영화의 빠르고 에너지 넘치는 질주 후에 이어진 시네토크 시간, 장내에는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그 담백하고 유쾌했던 현장을 전한다.


주성철(씨네21 기자): 마리오 바바의 <미친개들>(1974)을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에서 함께 볼 수 있어 좋았다. 이 영화를 추천한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
류승완(영화감독): 사실 마리오 바바의 영화를 많이 접해보거나 크게 관심을 둔 편은 아니었다. 2005년에 <주먹이 운다>가 나왔을 때 어떤 교수님이 내게 "당신은 마라오 바바의 <미친개들>의 영향을 받은 게 분명하다"라고 말했다. 난 원래 내가 본 영화는 자랑을 하고 싶어 안달하는 편인데 이 영화는 본적이 없었다. 그래서 도대체 어떤 영화인가 싶어서 봤는데 무척이나 좋았다. 영어 자막만으로도 영화를 이해해서 뿌듯하기도 했고. (웃음) 친구들 영화제에 추천할 영화를 고민하다가 이 영화를 목록에 썼다. 다행이 필름 수급이 되서 이렇게 여러분과 함께 나눌 수 있어 기쁘다. 혼자만 보긴 너무 아까운 영화다.

주성철:
오늘 상영된 것은 복원판인데, 처음 접할 때 본 <미친개들>도 오늘 아트시네마에서 상영된 버전이었나?
류승완: 워낙 좋지 않은 화질로 봐서 기억이 정확하진 않다. 내가 인상 깊게 느꼈던 장면들은 그대로인 것 같다.

주성철: 원래 이 영화는 마리오 바바가 <남자와 소년>이라는 제목으로 시작했는데, 영화사의 부도로 완성을 못했다고 한다. 아들인 람베르토 바바가 손을 봐서 97년에 <미친개들 Rabid Dogs>로 나왔고, 여주인공 리아 렌더가 2002년에 <Kidnapped>란 제목으로 복원했다. 복원판에는 재촬영한 장면들이 몇 있는데, 마지막 유괴범과 엄마의 통화 장면은 나중에 추가된 것이라 한다.
류승완: 맞다. 내가 본 버전에서는 원래 유괴범이 혼자 통화하는 장면으로 끝을 맺었는데, 그 엔딩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주성철: 실시간으로 차안에서만 진행되는 스릴러라는 점에서 흥미로운데 어떻게 생각하나?
류승완: 제한된 시간과 공간에서 영화를 찍는 것은 어렵다. 이런 영화를 잘 만들기 위해선 소위 내공이란 게 필요하다. 영화의 진행이 예측 불가능하고 덜컥 나오는 각종 상황들이 급작스러우면서도 자연스럽기 때문에 대단한 것 같다. 저예산의 장르영화로서 인물들의 비정상적인 반응과 성격으로 극을 진행시킨다는 점 또한 흥미롭다. 영화는 단순히 돈으로만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니라는 걸 다시 한 번 느낀다. 이 영화가 놀라운 점은 시작하자마자 본론으로 들어가 빠른 속도로 전개되며 우리를 몰입시킨다는 점이다. 이런 속도감과 함께 관객의 집중도를 끌어내기란 쉽지가 않다. 인물의 사연이나 행동의 원인 등 시나리오 작법에 나오는 원칙들이 사용되지 않고, 인물 묘사가 현재 상황만으로 대체된다는 점에서 하드보일드 문학과도 비슷하다고 생각된다.

주성철:
가장 좋아하는 장면을 꼽아본다면?
류승완: ‘단검’이 과수원에서 포도를 따먹는 장면이다. 내가 이마무라 쇼헤이의 <복수는 나의 것>에서 좋아하는 장면과 흡사하다. 주인공이 살인 후, 자신의 소변으로 피 묻은 손을 닦고 한손으로는 과수원의 사과를 따먹는 장면이다. ‘단검’의 행동은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된다. 갑자기 구토를 하고 차를 세워 포도를 따먹고, 과수원 주인을 만나 돈을 쥐어주는 이 모든 장면이 잘 짜여진 이야기 같아도 사실 말이 안 되는 이야기다. 설득된다는 게 신기하다. 처음에 이 영화를 볼 때도 대충 만든 것 같은데 에너지가 넘쳐서 압도당했다. 이 영화는 일반적인 공식을 벗어나 이 영화만의 공식을 만들어간다.

주성철: 제작 당시 돈이 부족해지자 7~8년 정도 촬영감독으로 일한 경험이 있던 마리오 바바가 직접 촬영감독으로 나섰다고 하는데, 차 내에서 카메라를 앞뒤좌우 할 것 없이 자유자재로 다루는 기법이 놀라웠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류승완: 광각렌즈를 과다하게 사용하는 것에서 엘 마리아체의 느낌이 난다. 예산 때문에 핸드 핼드 카메라를 쓴 것이 오히려 영화 전체의 일관된 형식을 잡아주며 느낌을 살린다. 광각렌즈를 시종일관 사용하면 경박해 보이면서도 이상한 활력을 가져다주는데, 약간의 싼 티와 거친 느낌이 잘 표현된 것 같다.

주성철: 배우들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다. 특히 ‘32’ 나 ‘단검’의 미친 개 같은 연기나, 마지막 반전을 이끄는 착해 보이기만 하는 유괴범의 연기가 강하게 다가왔다.
류승완: 처음에 나도 연기에 대한 얘기를 듣고 추천을 받았는데 연기에 매혹되기 보단 배우들 캐스팅에 관심이 갔다. 나는 마지막 반전을 알고 보는 데에도 그의 선량한 생김새 때문인지 최후의 나쁜 놈인 운전하는 인질에게 감정이 이입됐다. 요즘 나는 얼굴과 상황만 봐도 답이 나오는 쉬운 영화가 좋다. 한마디로 설명 없이도 역학구도가 딱딱 나오는 그런 영화가 좋다. 이 영화에서 또한 캐릭터 설정에 딱 들어맞는 정확한 얼굴들이 흥미로웠다. 또한 옥수수 밭 전신 샷을 볼 때 이탈리아인의 기럭지에 감탄을 했다. (웃음)

주성철:
결말의 반전을 알고 보니 새로이 발견되는 재밌는 장면들이 많다. 예를 들어 여자가 아이를 병원에 대신 데려가겠다고 하는 장면이나 그녀가 강도들에게 차는 가지고 인질들을 풀어 달라고 할 때, 운전자, 즉 최후의 승자인 유괴범이 무슨 생각을 했을까 상상하게 되더라. 신기한 점은 반전을 알고 봐도 몰입이 되더라는 것이다.
류승완: 그렇다. 반전을 알고 보면 재밌는 상황들이 꽤 있다. 유괴범도 나름 범죄자인데 강도들이 타서 범죄자 행세를 하니 어이가 없었을 것이다.

주성철: 팀 루카스의 「마리오 바바 : 어둠의 모든 색깔」라는 책으로 바바에 관한 사전 조사를 했다. 책의 서문을 쓴 마틴 스콜세지가 말하길 전 세계적 거장인 알프레드 히치콕이나 세실 데밀에 견주어 봐도 마리오 바바는 뒤지지 않는다고 한다. 다른 위대한 감독들과 다른 점이라면, 그는 뛰어난 스토리텔링으로 거장의 자리에 간 것이 아니라는 거다. 스토리텔링이 뛰어났다면 마리오 바바는 남들과 차별화된 좋은 감독이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다. 이점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류승완: 서구의 서스펜스 미스터리영화는 도저히 문학으로는 재현될 수 없는 광기가 있고 바바의 영화에는 그런 에너지가 있다. 스콜세지의 <택시 드라이버>도 스토리보단 에너지로 나를 사로잡았다. 스콜세지의 <성난 황소>의 오프닝 부분은 너무나도 영화적인 미학으로 파워풀하게 우리를 매료시킨다. 그야말로 ‘영화적이다’라는 말이 그럴 때 쓰이는 것이다. 이 영화도 기승전결보다는 영화적 에너지가 살아있다. 극악무도한 강도들과 여러 비논리적인 상황들로 극을 빠르게 끌고 가는 그 에너지. 핏빛 넘치는 그 시절 70년대 영화들이 그립다.

주성철: 나 또한 감독님과 같이 마리오 바바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그의 골수팬들은 <미친개들>이 그가 말년에 힘들게 만든 작품으로 여기던데 나는 이 영화가 더 좋았다.
류승완: 마리오 바바는 영화의 테크닉적인 면보다는 사람을 보는 세계관이나 가치관이 특별한 것 같다. 세상을 보는 시선이 남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에너지가 살아있는 이런 영화가 나온 것 같다. <미친개들>은 남다른 에너지가 있는 영화다. 이런 이탈리아 영화들이 우리나라 정서에 맞는 것 같다. 길이 막히는 가운데 벌어지는 교통사고 장면은 마치 우리나라 시골길에서 벌어질 법한 풍경이다. 언성 높이고 따지는 모습이 너무 익숙하지 않은가.


관객1: 만일 감독님이 <미친개들>을 리메이크 한다면 어떤 배우들을 쓰고 싶나?
류승완: 현재 한국 영화계는 배우 층이 매우 두텁다. 그래서 딱히 ‘이 배우!’하지는 않을 것 같다. 차안에만 있어도 존재감이 있는 개성강한 배우들을 써야 할 것 같다. ‘단검’은 원빈?! (웃음)

관객2: 영화 속 자리 배치가 흥미로웠다. 그리고 '32'와 '단검' 같은 바보들이 말썽을 부리는 걸 보며 왜 두목은 그들에게 운전을 시키지 않는지 의아했다.
류승완: 사실 그건 마리오 바바에게 물어봐야할 질문이니 뭐라 단언 할 순 없지만, 같은 직업 종사자로서 드는 생각은 있다. (웃음) 운전자가 선량해보여야 톨게이트나 도로를 달릴 때 덜 의심받는다. 그리고 인질을 앞에 둬야 뒤에서 감시를 할 수 있고 상황을 통제 할 수 있다. 나 같으면 두목을 뒷좌석에 앉혔을 것 같긴 하다. ‘32’와 ‘단검’을 뒤에 같이 두니 감정의 격함이 뒷좌석에 집중된 것 같았다.


관객3: <부당거래>를 보며, 개인적으로 전작들보다 더 냉혹하고 잔인하다고 느꼈다.
류승완: 내가 더 악랄해진 것인지는 모르겠다. 허나 영화를 대하는 태도는 달라졌다. 이제는 영화를 보는 행위가 두렵다. 너무 뛰어난 영화를 보면 질투가 나고, 못 만든 것 같은 영화를 보면 나도 언제든지 그런 졸작을 만들지도 모른다는 공포심이 든다. 직업 감독이 된지 10년이 된 지금, 영화라는 것에 대한 생각이 바뀐 듯싶다. 예전에는 영화가 없으면 죽을 것 같았지만, 지금은 영화가 내 삶보다 중요하다고 보지는 않는다. 현장에서 더 이상 안달복달 하지 않는다. 영화는 사람 뜻대로 쉬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영화를 만들 때 조금 편해지고 거리를 두고 보니 시선이 차가워진 것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계속 바뀌기 때문에 나중에는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다.

(정리 : 배준영 시네마테크 서울아트시네마 관객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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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혈남아>(1988)는 왕가위 감독의 첫 번째 영화다. 홍콩 느와르가 인기 절정을 누리던 80년대는 한편의 히트작에 관한 속편과 아류작들이 대량으로 제작되어 영화감독과 스태프가 상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이었다. 그로 인해 많은 시나리오 작가들이 감독으로 데뷔했는데 이런 분위기 속에서 왕가위도 시나리오 작가에서 감독으로 나섰다. 당시 왕가위는 흑사회를 소재로 한 ‘홍콩 느와르’ 장르를 정착시킨 등광영 밑에서 시나리오 작가로 일하고 있었는데, 친구인 유진위가 왕가위를 추천하게 되면서 등광영의 지원, 제작으로 연출하게 되었다 한다.

<열혈남아>는 줄거리 상으로는 80년대 홍콩영화의 주류장르였던 홍콩 느와르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왕가위는 느와르 혹은 갱스터 장르의 정석적인 틀만을 유지하고 있다. 구룡의 어두운 뒷골목을 방황하는 두 청년 소화(유덕화)와 창파(장학우)에게서 강호의 호걸과 초막의 군자가 결합된 홍콩 느와르풍의 영웅은 볼 수가 없다. 오히려 소화와 창파에게서는 실패한 영웅의 모습과 영웅 콤플렉스로 가득 찬 어린 남성의 모습이 그려진다. 가진 것 하나 없으며 사랑하는 여자에게 어떤 앞날도 약속을 할 수 없는 소화와 단 일분이라도 영웅이 되고 싶어 하는 창파의 모습은 어두운 뒷골목을 방황하며 쓰레기 같은 삶을 살고 있는 가장 현실적인 영웅의 모습으로 왕가위는 기존의 홍콩 느와르와 구별되는 변형된 영웅 캐릭터를 만들었다.



영화에서 느껴지는 암울함, 불안함, 허무함, 우울함의 정서는 10년 후인 1997년 중국으로의 홍콩반환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의 정서로 읽히기도 한다. 특히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는 소화의 말은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불투명한 홍콩의 운명에 대한 은유다. 그리고 오우삼의 크고 화려한 홍콩 도시와 대비되는 싸구려 네온사인 간판과 불빛만 반짝이는 어둡고 비좁은 뒷골목이라는 영화 속 공간은 홍콩의 미래에 대한 불안의 정서가 반영된 공간적 메타포다.

한편 왕가위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는데, 바로 그의 트레이드마크 된 슬로우 모션효과의 ‘스텝프린팅’ 기법이다. 데뷔작인 <열혈남아>에서도 왕가위 특유의 스텝프린팅 기법이 눈길을 끈다. 소화가 창파의 복수를 하는 포장마차 액션씬과 소화와 아화(장만옥)의 공중전화부스 키스씬 장면이다. 시간을 늘려서 액션의 순간과 키스의 찰나를 담아내는 이 장면들에서 왕가위는 액션의 강약을 조절하고 슬로우 모션을 통해 심리적 지속감을 유지시킨다.

1989년 국내 개봉 당시 <열혈남아>의 마지막 장면은 바보가 된 채 감옥에 수감된 소화를 아화가 면회하고 나오는 버전이었다. 실제로 <열혈남아>는 소화를 면회하고 나오는 아화로 끝나는 홍콩판과 경찰서에서 바로 죽은 소화로 끝나는 대만판, 이렇게 두 가지 버전이 있다. 이 영화가 가진 서로 다른 결말을 어떻게 읽어야 될까? 정확한 대답은 할 수 없지만 확실한 것은 어떤 결말이라도 영화가 주는 여운은 강하다는 것이다. (신윤하)

▣ 상영일정
1월 21일 (목) 19:00 상영 후 시네토크_류승완, 진행_주성철
1월 26일 (화) 17:30
2월 7일 (일)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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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만드는 데 있어 중요한 건
재능이 있는지의 여부가 아니라 자신이 재능이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2010년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에서 처음 카페에서 선보인 ‘시네 클럽’ 첫 번째 시간이 1월 21일 인사동의 한 ‘북 카페’에서 류승완 감독이 참여해 진행되었다. 이번 ‘시네 클럽’은 영화를 만들고 싶은 친구들과 격의없이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로 마련됐다. 빼곡하게 앉은 30여 명의 영화동아리 학생들과 감독 지망생들 앞에서 류승완 감독은 슬며시 자신의 이야기 제목에 대해 운을 띄우며 자리를 시작했다.  



“이번 행사의 제목을 이렇게 짓게 된 건 제가 지금 제 영화 제목 짓는데 애를 먹고 있기 때문이에요. 보통 감독들이 제목을 짓는데 애를 많이 먹거든요. 제일 힘들었을 때가 <주먹이 운다>를 찍을 때였는데, 당시 제가 하도 고민을 많이 하니까 박찬욱 감독님이 좋은 제목이 생각났다고 말씀하시면서 ‘1999, 주먹대장과 맷집왕’이 어떠니 하시더라구요. 이번 시네 클럽 제목도 고민을 하다가 어차피 제가 할 수 있는 이야기가 거창한 건 못되고, 로저 코먼의 자서전 제목 ‘나는 어떻게 할리우드에서 백 편의 영화를 만들고 한 푼도 잃지 않았는가’가 떠오르면서 그냥 제가 어떻게 영화를 하게 되었는지를 함께 이야기하면 좋겠다 싶었습니다.”



2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영화 현장의 조수 생활과 힘든 연출부 생활을 거치면서 입봉을 준비를 하는 동안 류승완 감독은 자신의 재능을 확신할 수 없다는 점이 가장 두려웠다고 한다. 그때 그를 지탱해준 건 ‘영화를 만드는 데 있어 중요한 건 재능이 있는지의 여부가 아니라 자신이 재능이 있다고 믿는 것’이라는 박찬욱 감독(자신도 <달은 해가 꾸는 꿈>을 찍고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의 격려였다고 한다. ‘어쩌다 영화를 시작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류승완 감독의 짧은 이야기 이후 참석자들의 질문이 이어졌다. 이 중 일부를 간략하게 옮겨본다.



관객질문1: 디지털 영화와 필름 영화에 대한 차이, 그리고 향후 디지털 영화에 대한 전망은?  류승완: 사실 나는 아직 디지털 룩look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 여러 작업을 디지털로 해보았는데 디지털과 필름의 선택은 영화의 내용과 형식에 따라 결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최근 들어 3D영화에 대한 논의들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데 3D영화를 선호할 장르는 에로티시즘 영화들과 <파고>처럼 리듬이 매우 느린 영화들일 것이다. 나같이 액션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은 3D와는 맞지 않는 것 같다.



관객질문2: 시나리오 작성 시 중요한 점은?
류승완: 시나리오를 쓰는 것은 건물을 지을 때 설계도를 그리는 것이다. 그런데 설계도의 기능적인 측면을 간과해서 시간에 대한 계산을 하지 않는 경우를 많이 본다. 나는 영화가 시간과 싸우는 매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시간에 따라 영화의 구조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그런데 그건 어디서 배우는 게 아니라 각자 자기 안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우선 자기가 좋아하는 영화를 그대로 복기를 한 뒤 그 플롯 구조가 시간에 따라 어떻게 변화하는지 체크해보는 훈련이 필요하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자신의 시나리오에서 한 페이지가 어느 정도 시간이 나오는지 감이 있어야 한다. 나는 보통 한 페이지 당 1분 30초에서 2분 정도가 나온다. 이 때 평균 20분에 한 번씩은 플롯에 포인트/서스펜스 요소들을 넣어주는 것이 필요하다.
나는 어떠한 영화도 이러한 서스펜스(꼭 히치콕 방식의 서스펜스만이 아닌 더 넓은 의미의)를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시나리오에서의 한쪽 측면인 스토리에 관한 것이라면 다른 한쪽은 그 위에 청사진을 제시하는 ‘사람’, 즉 캐릭터에 대한 고민이다. 그런데 이 캐릭터를 잘 구축하려면 그 세계에 대해서 전문적인 수준으로 알고 경험하는 것이 중요하다. 마이클 만의 영화 <히트>의 시가전 장면은 SWAT팀의 교본으로 쓰일 정도라고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동네 조기 축구회도 가보고, 사회부 기자도 무작정 찾아가 만나보면서 직접적으로 자신이 쓰고자 하는 세계에 접근하려고 노력하는 게 중요하다. 결국 시나리오는 발로 쓰는 거다. 눈과 머리, 그리고 몸이 따라가는 시나리오가 좋은 시나리오라고 생각한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처럼 계속 영화작업을 하려는 태도를 갖아야 합니다"



 

잠시의 쉬는 시간도 없이 2시간 동안 진행된 류승완 감독과의 자리는 ‘대한민국에서 영화감독으로 살아가면서 꼭 지켜야 할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다음과 같은 그의 대답으로 마무리되었다.



“자전거가 쓰러지지 않으려면 페달을 계속 밟아야 하는 것처럼 영화를 만드는 사람도 끊임없이 무언가를 계속 하고 있는 것이 중요해요. 행동을 못하는 건 사실 실패를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권투 신인왕전을 보면 지는 선수의 특징이 맞는 걸 두려워하는 사람이에요. 맞는 걸 무서워하면 때리지 못하니까요. 갑자기 오손 웰즈가 되겠다고 마음을 먹기보다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처럼 꾸준하게 계속 무언가를 하면서 영화 작업을 하겠다는 태도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혜경: 시네마테크 관객에디터)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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