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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상영작 소개

왕가위의 <열혈남아> - 암울한 홍콩의 미래를 이야기하다


<열혈남아>(1988)는 왕가위 감독의 첫 번째 영화다. 홍콩 느와르가 인기 절정을 누리던 80년대는 한편의 히트작에 관한 속편과 아류작들이 대량으로 제작되어 영화감독과 스태프가 상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이었다. 그로 인해 많은 시나리오 작가들이 감독으로 데뷔했는데 이런 분위기 속에서 왕가위도 시나리오 작가에서 감독으로 나섰다. 당시 왕가위는 흑사회를 소재로 한 ‘홍콩 느와르’ 장르를 정착시킨 등광영 밑에서 시나리오 작가로 일하고 있었는데, 친구인 유진위가 왕가위를 추천하게 되면서 등광영의 지원, 제작으로 연출하게 되었다 한다.

<열혈남아>는 줄거리 상으로는 80년대 홍콩영화의 주류장르였던 홍콩 느와르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왕가위는 느와르 혹은 갱스터 장르의 정석적인 틀만을 유지하고 있다. 구룡의 어두운 뒷골목을 방황하는 두 청년 소화(유덕화)와 창파(장학우)에게서 강호의 호걸과 초막의 군자가 결합된 홍콩 느와르풍의 영웅은 볼 수가 없다. 오히려 소화와 창파에게서는 실패한 영웅의 모습과 영웅 콤플렉스로 가득 찬 어린 남성의 모습이 그려진다. 가진 것 하나 없으며 사랑하는 여자에게 어떤 앞날도 약속을 할 수 없는 소화와 단 일분이라도 영웅이 되고 싶어 하는 창파의 모습은 어두운 뒷골목을 방황하며 쓰레기 같은 삶을 살고 있는 가장 현실적인 영웅의 모습으로 왕가위는 기존의 홍콩 느와르와 구별되는 변형된 영웅 캐릭터를 만들었다.



영화에서 느껴지는 암울함, 불안함, 허무함, 우울함의 정서는 10년 후인 1997년 중국으로의 홍콩반환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의 정서로 읽히기도 한다. 특히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는 소화의 말은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불투명한 홍콩의 운명에 대한 은유다. 그리고 오우삼의 크고 화려한 홍콩 도시와 대비되는 싸구려 네온사인 간판과 불빛만 반짝이는 어둡고 비좁은 뒷골목이라는 영화 속 공간은 홍콩의 미래에 대한 불안의 정서가 반영된 공간적 메타포다.

한편 왕가위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는데, 바로 그의 트레이드마크 된 슬로우 모션효과의 ‘스텝프린팅’ 기법이다. 데뷔작인 <열혈남아>에서도 왕가위 특유의 스텝프린팅 기법이 눈길을 끈다. 소화가 창파의 복수를 하는 포장마차 액션씬과 소화와 아화(장만옥)의 공중전화부스 키스씬 장면이다. 시간을 늘려서 액션의 순간과 키스의 찰나를 담아내는 이 장면들에서 왕가위는 액션의 강약을 조절하고 슬로우 모션을 통해 심리적 지속감을 유지시킨다.

1989년 국내 개봉 당시 <열혈남아>의 마지막 장면은 바보가 된 채 감옥에 수감된 소화를 아화가 면회하고 나오는 버전이었다. 실제로 <열혈남아>는 소화를 면회하고 나오는 아화로 끝나는 홍콩판과 경찰서에서 바로 죽은 소화로 끝나는 대만판, 이렇게 두 가지 버전이 있다. 이 영화가 가진 서로 다른 결말을 어떻게 읽어야 될까? 정확한 대답은 할 수 없지만 확실한 것은 어떤 결말이라도 영화가 주는 여운은 강하다는 것이다. (신윤하)

▣ 상영일정
1월 21일 (목) 19:00 상영 후 시네토크_류승완, 진행_주성철
1월 26일 (화) 17:30
2월 7일 (일) 19: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