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 다르크의 재판>이 극도의 미니멀리즘 형식을 표현했다면, 이후 발표한 <당나귀 발타자르>(1966)는 브레송의 영화중에서 비교적 복잡한 내러티브 구조를 가진다. 이 영화에서 당나귀는 일곱 차례에 걸쳐 잔혹한 주인에게서 또 다른 주인의 손으로 넘겨지며 온갖 고난과 악을 경험한다. 동시에 당나귀의 유일한 친구로 묘사되는 소녀 마리 역시 많은 남성들의 손을 거치며 육체적 고난과 모욕을 겪는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백치』에서 영감을 받은 이 영화는 당나귀와 마리라는 소녀의 이야기를 병치시키며 진행된다.

<당나귀 발타자르>는 브레송의 필모그래피에서 중간 지점에 위치하는 동시에 그의 영화적 세계관이 변화하는 기점에 놓인 작품이다. 이전까지 브레송의 영화는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기독교적 격언에 부합하는 은총이 존재하던 세계였다. 물론 이 시기의 세계관에도 즐거움이나 믿음은 포함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시기의 인간은 적어도 신에 의해서 결정된 자신의 운명을 능동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존재로 표현됐다. 이 세계관은 <죄악의 천사들>에서부터 <잔 다르크의 재판>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그려지지만, 특히 <사형수 탈출하다>에 가장 잘 부합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영화에서 탈옥을 준비하던 퐁텐느는 예기치 못한 새로운 감방동료를 만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임으로써 감옥에서 탈출할 수 있는 은총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당나귀 발타자르>에서부터 신의 은총은 점차 모호해진다. 뿐만 아니라 세속적인 것의 악한 모습이 묘사되면서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으로 죽음 혹은 자살만이 제시되기에 이른다.



당나귀 발타자르와 마리에게는 오로지 육체적인 고통과 모욕만이 허락된 것처럼 보인다. 당나귀는 타락한 주인들의 손에 이끌려 화상을 입거나 자갈밭을 오르다가 밀수과정에서 총에 맞아 죽는다. 마리는 제라르의 유혹에 굴복하고 매춘에 몸을 내맡기게 되며 많은 이들의 폭력에 의해 벌거벗겨져 모욕당하게 된다. 그러나 수많은 고난에도 불구하고, 이 두 명의 주인공에게는 은총이나 선택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단지 그들에게는 예정된 고난을 묵묵하게 수행하는 길만이 제시될 뿐이다. 결국 이들은 죽음을 운명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인다.

여기에서 마리의 자살이나 당나귀의 죽음은 브레송의 전작인 <잔 다르크의 재판>처럼 스스로 죽음을 선택함으로써 자유를 얻는 것과 다른 의미를 지닌다. 오히려 이 영화에서의 죽음은 세속적으로 이용당하는 희생양의 이미지로 표상된다. 한편 세속적인 가치를 공유하지 못하는 인물들이 겪어야 하는 수난도 드러나기 시작한다. 가령 마리의 아버지는 그와 관계를 맺고 있는 이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고독(도덕적 결백함)을 겪는다. 결국 스스로를 고립시키려는 아버지의 삶 역시 파멸의 길로 치닫게 된다.

이로써 신의 은총이 사라진 빈자리는 세속적인 물질들과 돈으로 대체된다. 계속해서 등장하는 라디오 음악소리, 자동차, 여러 가지 도구들 그리고 죽기 직전에 당나귀가 지고 있던 밀수품, 매춘을 하는 마리와 아버지의 법정재판 등이 그것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끊임없이 거짓된 종교와 교회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대표적인 악으로 그려지는 제라르는 끊임없는 범죄를 저지르지만 교회의 성가대에서 천연덕스럽게 성가를 찬송한다. 마리의 어머니는 쇠약해진 남편을 데려가지 말아달라고 간곡히 기도하고, 사제는 그 기도에 응답이라도 하는 듯 그녀를 부르지만,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건 남편의 죽음뿐이었다.

발타자르나 마리의 고난 속에서 순교자와의 유사성을 찾아볼 수는 있지만, 이 영화는 모순적이게도 신 혹은 종교와는 점차 멀어져가는 세계와 인간을 보여준다. 그래서 종교나 사제의 가르침마저 위선적인 것이 되고, 세속적인 것들이 악을 발생하게 만드는 비관적 세계에 대한 영화로 보인다. 이러한 절망적인 시선은 이후 <아마도 악마가>, <돈> 등 브레송의 후기작품에서 전반적인 분위기를 지배하게 된다. (김고운 : 관객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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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영화의 황금기:1930-1960’ 기간 중에는 프랑스 영화의 고전기 작품들을 좀 더 깊이 있게 알 수 있는 두 차례의 영화사강좌가 마련되었다. 그 첫 번째 강좌로 지난 10월 30일 <무셰트> 상영 후에는 상명대 프랑스어문학과 정의진 교수가 강사로 나서 ‘브레송 영화와 프랑스 문학’에 대하여 들려주었다. 그 현장을 여기에 전한다.


정의진(상명대학교 프랑스어문학과 교수): 오늘은 문학과 영화의 관계라는 관점에서 브레송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드리겠다. 브레송 영화를 보고 처음부터 감동 받았다는 사람은 별로 없다. 나를 절망시킨 감독이 둘 있었는데, 타르코프스키와 브레송이었다. <노스텔지아>와 <당나귀 발타자르>를 보고 많이 졸기도 했다. 지금은 둘 다 매우 좋아하고 존경한다.
영화사적으로 보자면 브레송은 조금 미묘한 위치에 있다. 1901년에 태어나 1999년에 죽었다. 굉장히 오래 살았는데 이 분이 98세를 살았다는 게 큰 위로를 줄 때가 있다. 영화적 가능성의 한계까지 가며 주제에 있어서도 매우 강한 윤리의식을 보여줌에도 불구하고 오래 사셨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브레송의 캐리어는 다소 특이한데, 최초의 장편영화인 <죄악의 천사들>이 1943년에 나왔다. 데뷔한 해가 42살이 된다. 브레송 영화의 전성기는 50대에 시작된다. 사실 브레송 미학이 완성된 시기는 <어느 시골 사제의 일기>와 <사형수 탈출하다>가 나온 무렵이라고 볼 수 있다.

문학과 영화라는 관점에서 브레송이 특이한 점을 누벨바그 감독들의 평가를 빗대서도 알 수 있다. 누벨바그 감독들이 처음에 평론가로 활동하며 프랑스 영화를 비판할 때 주된 이유가 프랑스 영화가 지나치게 문학적이라는 거였다. 문학작품을 원작으로 하여 문학적 내러티브에 너무 많이 기댄다는 것과 지나친 품격을 지향한다는 거다. 문학 작품의 선택 기준도 주로 문학사의 고전들을 선택하곤 했다. 발자크나 위고 등. 누벨바그 감독들은 차라리 미국의 B급 영화들이 보다 영화적이며 이미지의 감각적인 특수성이라는 측면에서 프랑스 영화보다 낫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벨바그 감독들은 브레송을 '거장들의 거장'이라 부르며 존경했다. 브레송은 프랑스 문예영화의 시기를 종결하면서 누벨바그가 도래하는 전환점 역할을 했다고도 볼 수 있다. 또 다른 관점에서 보면 브레송의 전성기는 누벨바그의 전성기와 대략 일치한다는 점에서 브레송을 영화사의 어떤 경향으로도 편입시킬 수 없는 특이성을 생각할 수 있다. 한국에도 브레송의 저서인 『시네마토그래프에 대한 노트』라는 책이 번역되어 있는데, 이 책이 세계영화사에 직간접적으로 남긴 족적은 어마어마하다. 가령 배우들의 무표정한 연기라는 측면에서, 핀란드의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영화에서도 브레송의 흔적을 볼 수 있다.
브레송은 시네마가 아니라 '시네마토그래프'라는 이름을 고집했다. 브레송에 의하면 일반적으로 시네마는 영화적이 아니라 문학적인 것이다. 반면 시네마토그래프는 뤼미에르 형제가 영화를 발견했을 때와 같은 생생함과 신선함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다. ‘예컨대 나뭇잎이 흔들리는 것을 어떻게 생생하게 볼 수 있을까’라는 것이다. 그 선명한 명암과 미세한 떨림 같은 것. 즉 카메라의 눈을 활용해 육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담아내는 거다. ‘보이지 않는 것을 어떻게 보이게 할 것인가’하는 문제. 브레송은 "시네마토그래프는 일종의 글쓰기다. 운동하는 이미지와 소리로 쓴 글이다"라고 비유한다. 글쓰기는 단순히 내용 전달이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언어를 조직할 것인가가 문제다.



브레송은 배우를 '모델'이라고 부른다. 모델이라는 개념을 채택하는 이유는 일반적인 배우의 연기를 거부하기 위해서다. 브레송은 배우들의 연기를 두고 일정하게 구성된 감정이나 정서나 내용 등을 일정한 연극적 내지는 문학적 규약에 의해 연기하는 것이라 본다. 브레송은 배우들이 연기하는 것을 금지한다. 미리 계산된 감정을 넣지 않는다는 거다. 영화를 처음 발명했을 때 나뭇잎을 봤을 때의 놀라움을 보존하려면 그 이미지에 선험적인 관점이 들어가지 않아야 한다. 그 방식 중의 하나가 이미지를 중립적으로 놔두는 거다. 음악을 많이 쓰지 않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다. 배우들의 연기는 중립적으로 통제된 채 그 상황에서 자신 안에 있는 것을 그대로 뽑아낼 것을 요구받는다. 통제된다는 것은 무감정이 아니라 계산되지 않는다는 거다. 예컨대 무셰트가 우는 장면은 미리 계산한 것이 아니라 정말 우는 것처럼 보인다. 일반적인 우는 장면과 다르다. 정말 운다는 것은 이런 뜻이다. 고통이 굉장히 일상적이라서 이를 견뎌야만 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은 오히려 그 감정들을 잘 드러내지 않는 경우가 많다. 즉 평소에 감정을 억누르고 있는데, 어느 순간 울게 된다. 무셰트의 울음은 바로 그렇게 우는 듯한 느낌이 든다.
또한 브레송 영화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효과음이다. 대사가 적은 대신, 아주 작은 소리까지 생생하게 잡혀있다. 아무 소리도 안 나는 시간은 거의 없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연기도 없고 대사도 적으니까, 남는 것은 이미지와 소리만 있게 되는 것이다. 또한 브레송에게 매우 중요한 것이 문체다. 즉 영화로 보면 스타일이다. 문체는 보편적인 것을 벗어나는 작가의 특수성이라 할 수 있다. 브레송은 자신만의 스타일을 영화 일반의 것으로 규정화 한다. 브레송에게 스타일은 테크닉이 아닌 모든 것이다. 실제로 브레송은 자신이 『시네마토그래프의 노트』에서 했던 말을 영화에서 그대로 시행한다. 아포리즘으로 아주 짧게 쓰여진 글임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자신의 영화관에서 나오는 일종의 일반 문법을 추출해 낸다. 많은 감독들이 여기에서 큰 영감을 얻고 자기 나름대로 소화해 내곤 한다. 가령 카우리스마키는 브레송적인 딱딱한 연기방식을 채택하면서도 거기에 블랙유머들을 집어넣어 변용한다.

브레송 영화에서는 모든 심리 묘사가 제거돼 있다. 감정이 갑자기 격해지는 게 아니라 영화를 따라서 차곡차곡 순차적으로 쌓이게 된다. 신기한 경험이다. 무셰트가 쳐한 상황은 매우 고통스러운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실제로 크게 슬프지 않다. 그런데 영화의 끝 즈음에 오게 되면 마음의 동요들이 일어나게 된다. 무셰트가 겪는 감정들을 같이 겪게 되는 느낌이 있다. 마음을 열고 감각을 열고 이미지와 소리를 느끼는 거다. 어떤 감각이나 감정이나 판단이 생겨나는 방식은 이러하다. 예를 들어 여러 장면들이 있는데 그 각각의 장면들이 서로 연결된다는 느낌은 주지 않는다. 모든 이미지들은 다 독자적으로 존재한다. 자연 상태 그대로, 최대한 인위가 배제된 상태로. 인물들을 봐도 그렇다. 모든 등장인물이 독자적인 자기 모습을 잃는 일이 없다. 좋은 사람이든 나쁜 사람이든, 비중이 많든 적든 간에 말이다. 누가 누구를 위해 연기하거나 종속되었다는 느낌이 전혀 없다. 몽타주의 방식이 단절되어 있기 때문이다. 내용이 드러나는 방식은 더욱 간접적이고 은밀해진다. 가령 무셰트는 악센에게 강간을 당하지만, 그 이후 그에게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건 거짓말이라고는 볼 수 없다. 이게 논리적으로는 이해가 안 되지만 영화를 감각적으로 보면 어느 정도 이해된다. 영화 전체적으로 차근차근 쌓여오던 감정이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브레송의 방식에서 다른 감독들이 배우는 점이 많을 것이다. 문학적인 서사와 인과관계가 아니라, 어떻게 이미지에 입각해서 이미지로 시작해 이미지로 종결시키는가, 소리는 어떻게 써야 하는가, 그것들을 전체적으로 어떻게 조합하는가와 같은 문제들. 그리고 어떤 장면을 어디에 넣을 것인가의 문제.

마지막으로 브레송의 기독교적 세계관에 대해 말씀드리겠다. <사형수 탈출하다>를 보면 정말 특이한 영화다. 영화 내내 화면은 어둡고 계속 감시 카메라가 돈다. 새카만 곳에서 죄수들이 몰래 이동하는 것이 장시간 보여진다. 그리고 교도소 내부를 감시하는 조명이 있다. 어두운 장면이 10분 이상 지속되다 보니까, 나중에는 감시하는 조명등이 비춰질 때 감각적으로는 해방감을 준다. 빛 때문에 어떤 시원함 같은 느낌이 든다. 사실 그 빛이 비춰지면 죄수들은 사형을 당하는 건데, 이상하게도 그 빛이 구원처럼 느껴지는 역설적인 상황이다. <무셰트>의 경우도 그런 역설이 있다. 무셰트는 세 번째 굴렀을 때 물에 풍덩 빠진다. 그 물소리의 여파가 남고 바로 찬양하는 음악이 나온다. 이것은 사실 죽음이지만 동시에 역설적으로 구원이기도 하다. 브레송에게서 구원의 계기 같은 것들은 철저하게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사물과 이미지 안에 내재한다. 예컨대 극단적으로는 감시소의 조명처럼 말이다.
정리하자면, 베르나노스의 소설과 브레송 간에는 큰 차이가 있는데, 원작의 내용과 주제를 그대로 다 끌고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철저하게 브레송의 방식으로 변형되어 있다. 문예영화의 전통 하에 있으면서도 그 이후의 누벨바그 세대로의 전환점에 있는 미묘한 브레송의 위치를 이런 점에서 볼 수 있다. 문학과 영화라는 관계를 연구할 때, 원작과의 유비관계를 보는 것이 허무해져버리는 영화들이 바로 브레송의 영화인 것 같다. 영화가 문학을 차용하는 방식에 있어서, 철저하게 영화적으로 차용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브레송을 통해 볼 수 있다.

정리: 박영석(관객에디터) 사진: 이호규(자원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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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시골 사제의 일기>에 이어 베르나노스의 소설 <무셰트의 새로운 이야기>를 영화로 옮기면서 브레송은 시네마에 대한 고유한 해찰에 이른다. <무셰트>는 종래의 영화들에서 거의 강박화되어 있던 어떤 종류의 목적성도 찾아낼 수 없는 영화이다. 이 영화에서 중시되는 것은 사건이나 스토리 전개가 아니라 작중인물의 내면의식이다. 스토리를 통해 내면의 목소리가 발현되는 것이 아니라 인물의 의식에 의해서 스토리와 관계없는 새로운 이야기가 창출되는 것이다.

불행한 고아도, 그렇다고 사랑스러운 요정도 아닌 소녀 무셰트는 속내를 파악하기 어려운 인물이다. 시름시름 앓는 어머니와 주정뱅이 아버지의 학대로 존재를 부정하는 그녀는 결손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며 되는 대로 사는 것처럼 보인다. 삶의 의욕을 놓아버린 그녀에게 찾아온 충일한 순간(축제에서 한 남자와의 짧은 교감)마저 아버지에 의해 좌초당한다. 무셰트가 세계에 저항하는 유일한 방식은 침묵이다. 그녀의 반사회성은 곳곳에서 표출된다. 합창 시간에 노래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교우들 앞에서 멸시당한 무셰트는 비탈에 숨어 아이들에게 흙을 던지고, 진흙 묻힌 신발로 회당을 더럽혀 신을 능멸한다. 올가미에 걸린 산짐승처럼 사냥꾼에게 능욕당한 그녀는 어머니가 죽자 완전히 버려진다.


<무셰트>에서 브레송의 미니멀한 스타일은 절정에 달한다. 감각적으로 황량하고 신랄한 이미지의 잔혹함이 시종 시선을 압도한다. 단순하고 절제된 카메라워크는 심리 진술 이상을 겨냥하고 있다. 브레송의 전매특허처럼 알려진 파편화된 신체의 이미지는 <무셰트>에서 매우 엄격한 방식으로 구현된다. 스크린을 둥둥 떠다니는 머리 없고 손 잘린 이미지들은 파쇄된 영혼의 시각적 구현이라 할만하다. 면도칼처럼 날카로운 프레이밍에 의해 절단된 몸의 분절은 삶을 위한 투쟁, 갈가리 찢긴 세계와 자아의 분리, 운명에의 굴복을 묘사하고 있다.

<무셰트>는 우리들 누구라도 삶의 비의를 느끼는 무셰트와 진배없는 영혼임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럴듯한 의미맥락을 꾸며내는 것은 영화의 이해에 별 도움을 주지 못한다. 브레송의 작의를 완전히 드러내기에 어떤 설명도 미진함이 남기 때문이다. 고통스럽게 삶을 옥죄어 오는 악마들에게 무심한 표정으로 대응하던 소녀의 자살은 그래서 끝끝내 응답을 거절하는 미해결의 인상을 남긴다. 브레송의 혁신성은 바로 여기, 끈질기게 다가가려는 우리를 따돌리고 어떤 감정과 심리묘사도 제거한 이미지의 냉혹함을 이끌어내는 방식에 있다.

글/ 장병원(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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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아트시네마 '프랑스 영화의 황금기:1930-1960' 기획전 10월 12일부터 한달 간 개최 

()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대표 최정운 www.cinematheque.seoul.kr, 이하 한시협)가 10 12일부터  11 13일까지 약 한달 여간 주한프랑스문화원의 후원으로 고전기 프랑스 영화들을 모아 상영하는 프랑스 영화의 황금기:1930-1960’ 기획전을 개최한다. 한시협은 매년 가을이 한창 익어가는 10월 경에 프랑스 영화들만 모아 상영하는 특별전을 열어 왔는데, 올해는 그 동안 간헐적으로 소개되고 했던 프랑스 영화의 고전기 작품들, 특히 1930년대에서 1960년대 이전까지의 작품들을 집중적으로 소개하는 특별전을 연다는 계획이다.

이번에 한시협에서 집중 조명하게 된 1930년대에서 누벨바그 직전의 시기까지의 프랑스 영화를 흔히 ‘프랑스 영화의 황금기’라 말하는데, 이 시기는 마르셀 카르네, 줄리앙 뒤비비에, 장 르누아르 등의 시적 리얼리즘의 영화들, 점령기하의 프랑스 영화, 그리고 자크 베케르, 자크 타티, 로베르 브레송 등의 전후 프랑스 영화들이 나왔던 시기다. 하지만 이 시기의 영화들은 누벨바그 이후 현대 프랑스 영화들에 비해 한국에서 그 동안 집중적으로 소개될 기회가 거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고전기 프랑스 영화에 대한 활발한 논의도 적은 편이었다. 그런 까닭에 이번 기획전은 프랑스 영화를 역사적인 맥락으로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이번 기획전에서는 프랑스 영화의 황금기라 말하는 프랑스 영화 고전기에 만들어진 프랑스 영화들, 장 르누아르, 장 비고, 마르셀 카르네, 줄리앙 뒤비비에, 장 그레미용, 사샤 기트리 등의 작품을 포함 총 21편을 영화를 상영한다. 특히 장 르누아르나 마르셀 카르네, 줄리앙 뒤비비에 같은 감독들의 영화는 한국의 영화 팬들에게도 큰 인기를 끌었고, 여전히 프랑스 영화에 대한 확고한 인상을 형성하기도 했던 작품들이다. 시네마테크 서울아트시네마의 김성욱 프로그램 디렉터는 이번 특별전은 프랑스 영화의 미학적 성취가 무엇인가를 이해하는데 좋은 기회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프랑스 영화의 한국적 수용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이 기획전 기간 동안에는 프랑스 영화의 고전기 작품들을 좀 더 깊이 있게 생각해보고 이야기할 수 있는 두 차례의 강연도 마련되어 있다. 이번 기획전의 주요 작가 중 한 명인 마르셀 카르네의 영화를 중심으로 시적 리얼리즘에 대하여 알아보는 강연과 로베르 브레송의 영화를 통해 프랑스 문학을 조명해보는 강연이 준비되어 있어 관객들에게는 소중한 시간이 될 것으로 보인다. 누벨바그 이전 세대의 프랑스 고전기 영화들을 통해 프랑스 영화사를 조명해볼 수 있는 프랑스 영화의 황금기:1930-1960’ 기획전에 대한 보다 상세한 정보는 시네마테크 서울아트시네마 홈페이지(www.cinemathrque.seoul.kr)를 참고하면 되며, 맥스무비, 예스24 등 지정 예매처에서 인터넷 예매도 가능하다. (문의 02-741-9782)

 

★ 부대행사: 영화사 강좌

프랑스 영화의 황금기: 1930-1960’ 기간 중에는 프랑스 영화의 고전기 작품들을 좀 더 깊이 있게 알 수 있는 영화사강좌가 마련된다.

 

10 30() 15:30 <무셰트> 상영 후

브레송의 영화와 프랑스 문학│정의진 (상명대학교 프랑스어문학과 교수)

 

11 6() 15:30 <북호텔> 상영 후

마르셀 카르네와 시적 리얼리즘│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 영화평론가)

 

* 영화사 강좌는 ‘프랑스 영화의 황금기:1930-1960’ 기간 동안 상영되는 작품을 본 관객들에게 참여 우선권이 있으며, 자리가 남을 경우 선착순으로 참여 가능.

 

■ 상영작 목록 (21)

익사에서 구조된 부뒤 Boudu Sauve' des Eaux / Boudu Saved from Drowning (연출: 장 르누아르)

1932 | 89min | 프랑스 | B&W | 35mm | 전체 관람가

 

품행제로 Zero de conduite / Zero for Conduct (연출: 장 비고)

1933 | 44min | 프랑스 | B&W | 35mm | 15세 관람가

 

토니 Toni (연출: 장 르누아르)

1934 | 100min | 프랑스 | B&W | 35mm | 15세 관람가

연출 : 장 르누아르 Jean Renoir

 

라탈랑트 L'atalante / L'Atalante (연출: 장 비고)

1934 | 88min | 프랑스 | B&W | 35mm | 15세 관람가

 

꿈을 꾸다 Faisons un reve / Let's Us Do a Dream (연출: 사샤 기트리)

1936 | 80min | 프랑스 | B&W | 35mm | 15세 관람가

 

망향 Pepe le Moko (연출: 줄리앙 뒤비비에)

1937 | 97min | 프랑스 | B&W | 35mm | 12세 관람가

 

이상한 드라마 Drole de drame / Bizarre, Bizarre (연출 : 마르셀 카르네)

1937 | 95min | 프랑스 | B&W | 35mm | 15세 관람가

 

북호텔 Hotel du Nord (연출: 마르셀 카르네)

1938 | 100min | 프랑스 | B&W | 35mm | 15세 관람가

 

인간야수 La Bete Humaine / The Human Beast (연출 : 장 르누아르)

1938 | 104min | 프랑스 | B&W | 35mm | 15세 관람가

 

이상한 빅토르 씨 L'Etrange Monsieur Victor (연출 : 장 그레미용)

1938 | 100min | 프랑스/독일 | B&W | 35mm | 15세 관람가

 

여름의 빛 Lumiere d'Ete (연출: 장 그레미용)

1943 | 113min | 프랑스 | B&W | 35mm | 15세 관람가

 

볼로뉴 숲의 여인들 Les dames du Bois de Boulogne / The Ladies of the Bois de Boulogne (연출: 로베르 브레송)

1945 | 86min | 프랑스 | B&W | 35mm | 15세 관람가

 

인생유전 Les enfants du paradis / Children of Paradise (연출: 마르셀 카르네)

1945 | 182min | 프랑스 | B&W | 35mm | 전체 관람가

 

잃어버린 천국 Paradis perdu / Four Flights to Love (연출 : 아벨 강스)

1940 | 100min | 프랑스 | B&W | 35mm | 15세 관람가

 

바다의 침묵 Le Silence de la mer / The Silence of the Sea (연출: 장 피에르 멜빌)

1947 | 88min | 프랑스 | B&W | 35mm | 15세 관람가

 

오르페브르의 부두 Quai des Orfevres / Quay of the Goldsmiths (연출: 앙리 조르주 클루조)

1947 | 105min | 프랑스 | B&W | 35mm | 15세 관람가

 

절름발이 악마 Le diable boiteux / The Lame Devil (연출: 사샤 기트리)

1948 | 138min | 프랑스 | B&W | 35mm | 15세 관람가

 

축제일 Jour de fête / The Big Day (연출: 자크 타티)

1949 | 86min | 프랑스 | Color | 35mm | 전체 관람가

 

쾌락 Le Plaisir / House of Pleasure (연출: 막스 오퓔스)

1952 | 95min | 프랑스 | B&W | 35mm | 15세 관람가

 

프렌치 캉캉 French CanCan / Only the French Can (연출: 장 르누아르)

1954 | 115min | 프랑스 | Color | 35mm | 15세 관람가

 

무셰트 Mouchette (연출: 로베르 브레송)

1967 | 78min | 프랑스 | B&W| 35mm | 12세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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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송의 영화에서 주인공들은 모두 죄인이다. 그들은 자의건 타의건 간에 매우 운명적으로 혹은 우연적으로 죄인이 된다. 그러나 브레송의 마지막 작품인 <돈>에서 희생과 그에 따른 구원의 메타포는 더 이상 의미를 갖지 않는다. 브레송의 엄격한 얀세니즘은 신의 이름 아래 살아가는 인간의 자유의지와 예정된 운명이 일으키는 끊임없는 모순을 집요하게 추적하고 있다. 그러나 후기 영화로 갈수록 그는 촘촘한 사회의 계약 관계와 그 사이의 그물망으로 인해 물질화되어 버린 세계에서 인간과 신을 소통시키는 단 하나의 끈인 구원과 은총의 부재에 대해 침묵을 지키면서 다분히 묵시록적인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 인간을 구원하는 신은 망설이고 있으며 인간은 혼자의 힘으로 갖가지 종류의 물신에 도전하고 저항해야만 한다. 인간이 성취할 수 있는 것은 이제 금욕적인 정신 상태를 통해 신에게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모순들과 싸워가는 동안 신의 존재를 발견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금욕주의는 점점 확장되어 마침내 한 인간을 철저히 파괴하기에 이른다.

이 영화에서 무엇보다 끔찍한 것은 이본이 처음 감옥에 가기까지의 과정에서 그 자신의 의지나 욕망은 완전히 배제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철저하게 다른 사람의 욕망의 희생자이자 마치 그들의 죄를 대신 속죄하는 듯한 일종의 속죄양의 위치에 서게 된다. 실제로 그는 아무런 죄도 짓지 않은 채 죄인의 몸이 되어 감옥에 갇힌다. 아이는 죽고 아내는 떠나버린 채 감옥에서 출소한 그는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서 살인을 저지르고 진정한(?) 죄인이 된다. 이러한 모든 사건은 한 소년이 만든 위조지폐에서 비롯되지만 정작 그 소년들은 부모들이 소유한 돈의 힘 덕택에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는다. 결국 모든 상황을 좌우하는 것은 바로 돈의 힘이며 돈은 이 영화에서 마치 신과 같은 위치에 있는 듯 보인다.


브레송이 그려내는 얀세니즘적 세계에서 죄는 실제 죄를 짓는 행위보다는 거꾸로 결과적인 처벌에서부터 비롯된다. 늙은 여인은 운명적으로 이미 죄인이며 그녀 앞에 놓인 모든 고통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인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내와 아이를 잃어버린 후 완전히 변해버린 이본의 모습은 마치 사드(sade)적인 영웅과도 같다. 사드적인 의미에서 영웅은 이미 정해진 운명을 그대로 따르기보다는 신보다 앞질러 스스로 자신의 비극적인 운명을 앞당겨 실행한다. 이는 신에 대해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저항이자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주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이본은 부조리한 신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고, 그 신에 대항해 스스로 죄를 짓고 경찰에 자수함으로써 신의 뜻을 앞질러 이행한다. 이는 신의 부재를 믿는 것이 아니라 신에게 정면 도전하는 것이며, 그럼으로써 역설적이게도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다. 브레송은 이본의 선택에 어떤 가치 부여도 하지 않는다. 이본은 반드시 사형당할 것이지만 또한 브레송은 그의 죽음을 보여주지 않는다. <돈>에서 브레송은 더 이상 <잔다르크의 재판>(1962)과 <무셰트>(1967)에서와 같은 성스러운 죽음을 통한 구원의 문제를 다루지 않는다. <돈>에서 브레송은 진실로 인간 세계의 깊숙한 내면으로 침투하여, 가장 고통스러운 방식으로 신을 긍정한다. 이 영화에서 인간을 배반하는 물신의 이름, 그것은 바로 ‘돈’이다. 그것은 브레송의 가장 참혹한 결론이기도 하다.

글/최은영(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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