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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전/100편의 시네마오디세이2-친밀한 삶

[Review] 세상에 대한 절망적인 시선 - 브레송의 <당나귀 발타자르>



<잔 다르크의 재판>이 극도의 미니멀리즘 형식을 표현했다면, 이후 발표한 <당나귀 발타자르>(1966)는 브레송의 영화중에서 비교적 복잡한 내러티브 구조를 가진다. 이 영화에서 당나귀는 일곱 차례에 걸쳐 잔혹한 주인에게서 또 다른 주인의 손으로 넘겨지며 온갖 고난과 악을 경험한다. 동시에 당나귀의 유일한 친구로 묘사되는 소녀 마리 역시 많은 남성들의 손을 거치며 육체적 고난과 모욕을 겪는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백치』에서 영감을 받은 이 영화는 당나귀와 마리라는 소녀의 이야기를 병치시키며 진행된다.

<당나귀 발타자르>는 브레송의 필모그래피에서 중간 지점에 위치하는 동시에 그의 영화적 세계관이 변화하는 기점에 놓인 작품이다. 이전까지 브레송의 영화는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기독교적 격언에 부합하는 은총이 존재하던 세계였다. 물론 이 시기의 세계관에도 즐거움이나 믿음은 포함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시기의 인간은 적어도 신에 의해서 결정된 자신의 운명을 능동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존재로 표현됐다. 이 세계관은 <죄악의 천사들>에서부터 <잔 다르크의 재판>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그려지지만, 특히 <사형수 탈출하다>에 가장 잘 부합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영화에서 탈옥을 준비하던 퐁텐느는 예기치 못한 새로운 감방동료를 만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임으로써 감옥에서 탈출할 수 있는 은총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당나귀 발타자르>에서부터 신의 은총은 점차 모호해진다. 뿐만 아니라 세속적인 것의 악한 모습이 묘사되면서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으로 죽음 혹은 자살만이 제시되기에 이른다.



당나귀 발타자르와 마리에게는 오로지 육체적인 고통과 모욕만이 허락된 것처럼 보인다. 당나귀는 타락한 주인들의 손에 이끌려 화상을 입거나 자갈밭을 오르다가 밀수과정에서 총에 맞아 죽는다. 마리는 제라르의 유혹에 굴복하고 매춘에 몸을 내맡기게 되며 많은 이들의 폭력에 의해 벌거벗겨져 모욕당하게 된다. 그러나 수많은 고난에도 불구하고, 이 두 명의 주인공에게는 은총이나 선택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단지 그들에게는 예정된 고난을 묵묵하게 수행하는 길만이 제시될 뿐이다. 결국 이들은 죽음을 운명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인다.

여기에서 마리의 자살이나 당나귀의 죽음은 브레송의 전작인 <잔 다르크의 재판>처럼 스스로 죽음을 선택함으로써 자유를 얻는 것과 다른 의미를 지닌다. 오히려 이 영화에서의 죽음은 세속적으로 이용당하는 희생양의 이미지로 표상된다. 한편 세속적인 가치를 공유하지 못하는 인물들이 겪어야 하는 수난도 드러나기 시작한다. 가령 마리의 아버지는 그와 관계를 맺고 있는 이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고독(도덕적 결백함)을 겪는다. 결국 스스로를 고립시키려는 아버지의 삶 역시 파멸의 길로 치닫게 된다.

이로써 신의 은총이 사라진 빈자리는 세속적인 물질들과 돈으로 대체된다. 계속해서 등장하는 라디오 음악소리, 자동차, 여러 가지 도구들 그리고 죽기 직전에 당나귀가 지고 있던 밀수품, 매춘을 하는 마리와 아버지의 법정재판 등이 그것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끊임없이 거짓된 종교와 교회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대표적인 악으로 그려지는 제라르는 끊임없는 범죄를 저지르지만 교회의 성가대에서 천연덕스럽게 성가를 찬송한다. 마리의 어머니는 쇠약해진 남편을 데려가지 말아달라고 간곡히 기도하고, 사제는 그 기도에 응답이라도 하는 듯 그녀를 부르지만,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건 남편의 죽음뿐이었다.

발타자르나 마리의 고난 속에서 순교자와의 유사성을 찾아볼 수는 있지만, 이 영화는 모순적이게도 신 혹은 종교와는 점차 멀어져가는 세계와 인간을 보여준다. 그래서 종교나 사제의 가르침마저 위선적인 것이 되고, 세속적인 것들이 악을 발생하게 만드는 비관적 세계에 대한 영화로 보인다. 이러한 절망적인 시선은 이후 <아마도 악마가>, <돈> 등 브레송의 후기작품에서 전반적인 분위기를 지배하게 된다. (김고운 : 관객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