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토크

“멜로물이 지닌 가장 숭고한 아름다움만을 그대로 수학적으로 만든 영화 같다”

- 김태용 감독이 말하는 마스무라 야스조의 ‘세이사쿠의 아내’

 

지난 1월 26일, 시네마테크 서울아트시네마에서 김태용 감독이 추천한 <세이사쿠의 아내> 상영 후 시네토크가 열렸다. 김태용 감독은 필름으로 영화를 다시 보니 감회가 새롭다며, 영화를 어떻게 이해하는가 보다는 영화가 자신에게 무엇을 주는가를 생각해보는 것이 관객으로서의 재미라고 말했다. 이 영화가 준 강렬함에 탄력을 받은 듯 영화와 사랑, 삶의 태도에 대한 풍부한 이야기가 오고 간 시네토크 현장의 일부를 옮긴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 김태용 감독이 친구들 영화제 때 처음으로 추천한 영화가 <우묵배미의 사랑>이다. 지난번 친구들 영화제에서는 나루세 미키오의 <부운>, 이번에는 <세이사쿠의 아내>를 추천하고, <만추>도 만들었는데, 무언가 연관성이 있는 듯하다. 이 영화에서는 여성에 대한 정념이 강렬하게 표현되었다. 영화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신지.

김태용(영화감독): 특별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기보다는 이 영화를 오랜만에 보고 싶었다. 영웅 이야기를 보고 싶었나 보다. 나이가 들면서 영웅 신화가 다 깨져가고, 멜로적인 감수성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도 여전히 마스무라 야스조 영화에 나오는 인물들은 나에게 ‘영웅’들이다. 멜로영화 안에서는 두 세계가 부딪친다. 사실은 살면서 약간 비겁하게 부딪칠 때가 많은데, 영웅들의 신화를 보다보면 얼마나 용기 있게 두 세계가 정면 돌파 하는가에 대해서 느끼지 않나. 그런데 사실 사랑은 두 세계가 맞부딪치는 그 용기로만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이 두 세계를 하나처럼 만들어지게 하는 다른 외부의 부딪침이 있어야 한다. 사랑이라는 속성 자체가 두 사람 자체도 부딪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다른 외부의 힘 때문에 하나처럼 되는 느낌이 있어야 ‘우리’가 유지된다고 본다. 사랑은 상대와 정면으로 부딪치지 않아도 유지가 안 되고, 다른 세계의 공격이 없어도 유지가 안 되는 것 같다. 나는 <세이사쿠의 아내>를 보면 아리스토텔레스 시학의 비극처럼, 멜로드라마가 가지고 있는 가장 숭고한 아름다움을 액기스로 뽑아서 이 영화에서 그대로 수학적으로 만든 게 아닐까 싶다. 그만큼 얼마나 자기를 감정에 내던지고 우리 둘이 만들어낸 세계와 다른 세계가 맞부딪칠 때도 얼마나 용기 있게 싸우고 있는가에 대한 영화다. 그런 생각에서 이 아름다운 멜로영화를 다시 보고 싶었다.

 

김성욱: 이 영화에는 노출신이 많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몸의 물리적인 특성이랄까, 정신적이거나 감정적인 것뿐만 아니라 몸이 갖고 있는 물리성의 느낌이 굉장히 많이 느껴졌다. 인물에 대한 것과 사랑에 대한 감정을 물성으로 표현해내는 영화의 방식들이 와 닿았다.

김태용: 어떤 영화를 볼 때 첫 컷이 어떻게 시작하는지에 대해서 민감하게 보는 편인데, 이 영화는 얼굴 클로즈업으로 시작한다. 이 여배우는 일단은 위태로워 보이는데, 그 위태로움이 약함이 아니라 어떤 공격성을 가지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자기를 내던질 줄 아는 느낌도 있었다. 처음에 이 영화를 봤을 땐 여배우가 매력적이라고 느껴지진 않았다. 구조적으로 영화에 접근했기 때문에 인물이 와 닿지는 않았는데, 다시 봤을 때 여배우의 힘이 많이 느껴졌던 것 같다. 이 영화가 에로틱하다고 하는데, 마스무라 야스조의 다른 영화들, <문신>이라던가 <붉은 천사> 등을 보면 훨씬 더 노출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나도 이 영화가 가장 야하게 느껴진다. 왜 그럴까? (웃음)

 

 

김성욱: 이 영화에서 사람의 눈을 찌르는 행위가 갖는 사랑의 정념의 표현과 전쟁에서 죽은 자에 대한 칭송, 이 두 가지를 극단적으로 대비시켰다는 생각이 든다. 눈을 찌른 것은 (사람을) 죽인 것도 아니고 표현 자체가 사랑의 행위에서 나온 결과인데, 전쟁이라는 것은 의미 없이 사람들을 죽여 버리고 그에 대해서 칭찬을 한다. 오늘 다시 보니 전쟁에서 돌아오는 장면과 환영하는 의식을 치르는 장면들이 굉장히 길게 느껴지더라. 전체적으로 보면 이런 장면들과 남편의 눈을 찌르는 행위가 연결되고 대비되면서 (여배우의) 고립된 느낌이 많이 부각되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든다.

김태용: 오늘 영화를 보면서 유난히 재미있게 봤던 지점들이 마을 사람들이 대화하는 것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마치 무성영화 변사처럼 계속 설명을 해준다. 그 지점이 '눈'과도 연결되어 있지 않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남의 시선을 신경 쓰지 마라, 남이 우리를 어떻게 보는지에 대해서 신경 쓰지 마라 등의 대사에서 ‘시선’이라는 표현으로 타자라는 다른 존재에 대해서 의식하고 있다. 드라마 내적으로 본다면, 이 남자가 명예를 잃은 뒤에 여자를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여기에 굉장히 감정적인 비약이 있다. 이 감정적인 비약을 이야기적으로 어떻게 풀어갈까 궁금해지는데, 영화 안에서는 ‘눈’이라고 하는 매개 자체가 이 남자를 비약적으로 확 발전시키는 계기를 주었던 게 아닌가 싶다. 그래서 세상을 인식하는 방식이 눈과 관계 되어 있던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눈 먼 짐승>이 촉각적인 사랑과 정념, 욕망의 본질에 대해 접근하고 있다면, 이 영화는 욕망의 본질에 접근하기 보다는 욕망을 둘러싼 편견과의 싸움에 대한 영화이기 때문에 오히려 욕망을 직접적으로 본다면 에로틱하지 않은데, 욕망을 가지고 있는 그 사람의 정서와 부딪칠 때 에로틱한 느낌이 더 드는 것 같다. 여배우가 더 많이 노출하고, 성적학대를 당해도 에로틱한 느낌이 없었는데 이 영화에서는 여자의 정서와 의지가 맞닿아서, 더 에로틱한 느낌이 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관객1: 영화 속에서 세이사쿠는 전적인 피해자이다. 부인은 세이사쿠에 대한 사랑이라기 보다는 다시 혼자되고 싶지 않다는 열망 때문에 일을 저질렀는데, 거기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반응은 세이사쿠가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매도하고 백안시한다. 그런 소름끼치는 집단성에 대한 감독님의 생각이 궁금하다.

김태용: 말씀하신 대로 (집단의) 잔혹함이라고 하는 게 영화의 기본 베이스인데, 세이사쿠라는 남자가 가지고 있는 공동체에 대한 열망과 의지와 이성적인 결정에 대해 여자는 조롱을 하고 있다. 어떤 공동체에 위협을 느끼는 불편한 순간들이 있을 때 개인에 대해 무자비한 폭력들이 생기는데, 이 영화는 정확하게 그 폭력이 좋다, 나쁘다를 이야기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것은 (하나의) 세상이다. 개인적으로 전쟁의 참혹함에 대해서 다루는 영화는 재미있지는 않은 것 같다. 그것을 세상으로 보고 난 후에 개인이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계속 던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정확히 그 폭력의 무자비함, 무지몽매한 것으로 보이는 세상 앞에서 외롭게 서 있는 두 개인에 대한 사랑 이야기로 만들었기 때문에 그 폭력에 대해서 훨씬 윤리적으로 접근한 게 아닐까 생각한다.

 

관객2: 영화를 보는 도중 헤이스케(오카네의 사촌)가 마음에 걸렸다. 지금 생각해보면 로맨스 중간에 껴 있는 제 3자의 역할, 즉 관객의 눈이 되어주는 캐릭터 같기도 하다. 이 감독의 다른 영화에 관객의 눈과 일치하는 변두리의 인물이 더 나타나는지 아니면 그 인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김태용: 굉장히 기능적인 인물이다. 그의 기능에 대해서 내가 받았던 느낌은 사회적인 약자나 사랑을 지켜봐주는 친구 같은 존재일 수도 있지만, 약속과 관계되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공동체나 국가와의 이념과는 상관없이 개인과 개인이 맺는 약속에 대해서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에 대한. 영화 내에서 밀도 높은 약속들이 진행되고 있다. 이런 식으로 우리가 한 국가 혹은 어떤 가치에 이르려는 개인의 약속에 대해서는 조롱하지만, 각각의 개인들이 해왔던 약속에 대해서는 지켜야하는 주인공들 같은 느낌이다. 어떤 가치와 개인 간 약속과의 대립 혹은 차이. 어떤 인간이 더 솔직한가, 더 용감한가, 어떤 것이 더 재미있는가. 이런 의문을 던져주게 했던 기능적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관객3: 작년에 <부운>을 추천하신 것도 그렇고 이번에도 그렇고, 계속 사랑의 형태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는 영화들을 추천하셨다. 감독님도 사랑을 하는 캐릭터에 대해서 고민을 많이 하실 텐데, 이와 같은 영화들을 보면서 개인적인 영감을 많이 얻으시는지.

김태용: 내가 관객으로서 영화를 좋아하는 건 어떤 장르영화든, 어떤 멜로영화를 통해서든 어릴 때 영화를 보고 나오면 달라진 나를 느끼는 게 좋았다. 왜소한 나에서 변화하는 느낌. 최초의 영화는 <킹콩>이었다. 홍콩 영화나 어떤 멜로 영화도 그렇고, <랜드 앤 프리덤> 같은 영화를 보고 나서는 "그래, 세상을 위해서 무언가를 해야 해"라는 감정이 들기도 했다. 나를 움직이게 하는, 몸을 움직이게 하는 영화들을 개인적으로 관객으로서 좋아했다. 지금은 공교롭게도 멜로 영화들이 삶에 용기나 삶에 대한 태도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하게 해준다.

 

관객4: 이 영화가 멜로라고 하기에는 두 남녀 간의 감정이 비약적으로 넘어간 부분이 있고, 기대했던 감정적인 수위보다 묘사가 덜 된 것 같다. 또, 두 세계의 충돌에 대해서 아름답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어떤 아름다운 충돌의 경험이 있으신지. 예를 들면 다른 직업이라던가, 다른 나라라던가. (웃음)

김태용: 멜로의 영역을 나와 다른 사람을 만나서 나와 다른 사람을 둘러싼 또다른 사람과 우리는 얼마나 닮아있는가 우리 둘은 다른 사람들과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가에 집중하는 게 멜로영화라고 크게 개념을 정한다면 이 영화만큼 그걸 정면 돌파하고 있는 영화는 없다. 그래서 가장 강한 멜로 영화이다. 멜로적인 로맨스라는 개념으로 영화를 보면 아닐 수 있다. 두 세계의 충돌의 경험은 많이 가지고 있다. (웃음)

 

정리: 지유진(시네마테크 관객에디터) | 사진: 김윤슬(시네마테크 자원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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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10일, 김태용 감독이 선택한 나루세 미키오의 <부운>을 관람하기 위해 많은 관객들이 서울아트시네마를 찾았다. 상영 직후 진행된 시네토크에는 많은 여성관객들이 참여해 김태용 감독의 인기를 실감하게 했다. 물론,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도 영화의 비극성과 슬픔에 대해 함께 생각해보는 진지한 자리이기도 했다. 사랑의 대서사를 생각할 때마다 이 영화가 떠올랐다는 김태용 감독과의 대화 일부를 옮긴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 작품선택을 하면서 여러 편의 작품이 오갔다. 에드워드 양의 <고령가 살인 사건>도 있었고, 나루세 미키오의 <부운>도 처음부터 염두에 두었다. <부운>은 김태용 감독과 잘 어울리는 선택인 것 같다. 오늘 보면서 예전에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에서 <우묵배미의 사랑>을 김태용 감독이 선택했던 것이 떠올랐다. 물론, 작년에 개봉했던 김태용 감독님의 <만추>라는 작품도 떠오르기도 했다. 사랑을 찾아 떠나려는 유랑의 느낌, 공간을 떠도는 그런 이야기이기도 하다. 내러티브는 굉장히 심플하다. 두 남녀의 만남, 이별, 재회의 문제를 다룬다. 예전 상영했을 때, 여성관객들 중 일부가 ‘왜 저렇게 찌질한 남자를 쫓아다니는 거지’라고 분노를 하기도 했는데.

김태용(영화감독): 이 영화를 다시 보고 싶다고 했더니,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도 영화에 나오는 남자를 대부분 너무 싫어했다. 지금 우리가 보면서 좋아할 만한 인간형은 아닌 것 같다.(웃음) 말씀을 듣다 보니까 <우묵배미의 사랑>, <만추>가 맥이 연결되는 부분이 있긴 있는 것 같다. 나는 이 영화가 일종의 사랑의 역사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관계의 역사를 다루는 영화를 좋아한다. <만추> 작업을 할 때는 어떤 시점, 찰나의 순간에 집중을 했지만 기회가 되면 이런 식의 사랑의 대서사를 다루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마다 생각난 영화가 <부운>이다.


김성욱:
이 영화는 전체적으로 보면 내향적인 남녀가 자꾸 바깥으로 나가려는 과정을 그린다. 두 가지 점에서 그런데, 하나는 내면에서 바깥으로 나가려는 시도이다. 이 둘에게 필요한 것은 연애의 공간이다. 그래서 가정의 공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많이 부각되지 않고 도리어 여관 같은 떠도는 일시적인 공간이 주를 이룬다. 다른 하나는 일본의 밖으로 나가는 것이다. 첫 시작도 인도차이나라는 공간이었고, 영화의 마지막은 일본의 남단 끝이다. 이런 식으로 바깥으로 나가려는 인물들의 시도를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만추>의 경우에도 여자가 점차 조금씩 감정을 밖으로 드러내는 진전되는 과정의 영화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김태용: 인물들이 가지고 있는 슬픔이나 비극성의 정체는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다. 그 극단에 서 있는 작품이 이 영화다. 프레임 안에 있는 인물들을 염려하기도 하고, 잘 살기 바라기도 하고, 비극이나 슬픔을 향해 달려갈 줄 알면서도 그런 비극성에 관심이 많았다. 이게 그런 것의 정점에 있는 작품인 것 같다. 멜로드라마가 가지고 있는 일종의 영웅들, 자기 사랑을 확실히 하고 능력도 있고 설득시킬만한 힘이나 여유도 있고 꺾이지 않는 멜로드라마 영웅들의 느낌이 있는데, 이 영화의 영웅이 아닌 사람들은 스크린 안에서 우리를 너무 불안하게 만드는 게 있다. 그런데 스크린 밖에서도 계속해서 우리를 쫒아다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감정을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이 그 감정에 대해서 끊임없이 괴로워하면서도 비극을 향해 끝임 없이 달려가는 모습을 아주 정점으로 보여주는 게 이 영화인 것 같다.


김성욱:
이들이 어떻게 될 것인가만이 아니라 어떻게 해서 이들이 연인이 됐을까도 궁금한 부분이다. 세 개의 플래시백이 나온 것 같은데, 이들의 사랑의 순간을 보여준다. 두 가지가 <만추>를 떠오르게 했는데, 남녀의 사랑이 어떤 식으로 형성되는가 하는 문제를 확실하게 보여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둘째는 계절적인 기후, 공간의 변화가 영화 전체에서 대단히 중요하게 작용한다는 것이다. <만추>에서도 공간과 기후를 담아내고 싶었다는 말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김태용: <만추>를 찍을 때도 공간의 핵심은 날씨라고 생각했고, <부운>을 보다 보니까 날씨가 정말 중요한 것 같다. 우리를 무기력하게 만드는, 우리보다 큰 무언가의 느낌이 영화 안에 날씨나 공간으로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었었던 것 같다. 우리가 벗어날 수 없는 조건으로서의 공간에 대한 관심이 있었다. 그 공간을 핵심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은 기후라고 생각했다. 여기서도 보면 그런 느낌이 많다. 인도차이나는 햇빛 좋을 때는 지상낙원이지만, 비가 와서 한번 우기가 지나가면 거기에서 어떻게 살아갈까하는 생각도 들게 한다. 그래서 풍요로움과 고통스러움을 같이 지배하는 것도 날씨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김성욱:
여러 인상적인 장면이 많은데, 사소한 장면이 기억난다. 함께 걸어가다가 갑자기 무좀이 있다는 남자주인공을 여자주인공이 쳐다보다가 ‘우리 부부같이 보인다’는 말을 슬쩍 던지는 장면이다. 두 남녀가 이런 식으로 걸어가는 장면이 굉장히 많다. 어떤 장면을 인상 깊게 보았나?

김태용: 새로운 여자가 등장할 때, 여자의 바스트샷이 항상 들어가는데 그게 묘한 느낌을 들게 한다. 심지어 마지막에도 섬의 하녀를 그렇게 보이게 만들어서 우리를 불안하게 만든다.(웃음) 두 사람이 계속해서 걷는 게 나도 기억에 많이 남는다. 어떻게 찍었을까 궁금할 정도의 트랙킹 샷도 많이 나오는데, 지금의 스테디캠 정도의 수준을 갖고 있다. 영화가 묵묵히 앞뒤로 따라가면서 걷는 것을 찍는데, 둘이 걷는 것을 멀리서 지켜보는 것도 아니고 따라가는 느낌의 샷들이 뭔가를 의미하고 있는 것 같다.


김성욱:
처음에 인도차이나에 있을 때, 주인공 남녀가 대화하는 순간에 하녀의 샷이 하나 들어가 있다. 순간적으로 굉장히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내러티브로는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지 않지만, 원작에는 남자가 하녀를 임신시킨 게 있다. 그런데 그걸 알고 나서도 이게 내러티브적인 설명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구도 안의 안정적인 느낌이 파괴되거나 인물의 내향성이 시선을 경유해서만 이 화면에 무언가의 감정이나 효과를 전달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다. 둘이 어떻게 사랑하게 되었는가의 설명은 굉장히 영화적이다. 최종적으로 이 남자가 여자에게 다가서는 것 또한 설명되기 어려운 것 같다.

김태용: 원작 소설은 안 봐서 모르겠지만, 영화는 끊임없이 여자를 따라가게 만든다. 공간을 표현하는 방식도 그렇고 여자의 등장방식도 그렇다. 그래서 이 여자를 중심으로 우리는 영화를 본다. 우리가 이 남자를 그나마 보는 건 여자가 그 남자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여자가 마지막에는 사라지고 남자만 남게 된다. 초반부터 여자가 남자를 찾아가는 여정을 계속 보여주어서 끝도 그렇게 맺어야 할 것 같은데, 이 감독이 영화의 엔딩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에 대해 뼈저리게 고민하고 만든 것 같다.



관객1: 슬프고 비참하지만 또한 굉장히 따뜻한 느낌이 들었다. 감독님은 이 <부운>이라는 영화의 어떤 점에 끌리셨는가?

김태용: 인물들이 좀 안쓰러웠다. 그래서 계속해서 생각났던 게 컸다. 우리는 어떤 영화에서 나오는 인물들이 하는 선택을 옹호하고 응원할 때가 많다. 그런데 어떤 영화는 내가 옹호하고 싶지 않은 감정, 실패, 실수를 할 때가 많다. 그런데 후자의 영화가 더 많이 떠오르는 것 같다. 올바르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나약하게 선택하고 실패하는, 우리가 옹호하고 응원하지 않는 관계에 대해서 이만큼 적나라하게 표현한 영화가 있었나 싶다.

김성욱: 현실적으로 이 영화의 이야기나 인물들의 선택에 대해서는 말하기가 어려운데, 이끌림은 분명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딘가로 멀리가고 싶다는 단순한 표현들 같은 것들 말이다. 실제로 전쟁 때문에 인도차이나라는 곳으로 간 건데, 거기서 사랑의 순간을 맛보게 되는 역설이 있다. 마지막에도 저 멀리 일본의 남단으로 가게 되는데, 마치 죽으러 가는 것 같은 느낌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안착이라는 느낌이 있다. 이 영화는 그런 점에소 꽤나 폐쇄적이고, 밀실적이다. 하지만 연인들에게는 그런 공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이 영화는 그런 연인들의 공간을 찾아나가는, 이끌려가는 영화인데 문득 그런 와중에 여자의 선택에 동의하냐는 질문을 받으면 도덕적인 질문을 받은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관객2
: 마지막에 삽입된 ‘꽃은 빨리 지고, 괴로움은 끝도 없도다’라는 자막이 인상적이다. 제목인 ‘부운’은 뜬구름 또는 덧없음에 대한 것인데, 맨 마지막 자막은 사족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덧없음을 잡아내려는 일본미학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김태용: 일본 미학을 잘 모르지만 마지막 ‘꽃은 빨리 지고 괴로움은 끝도 없도다’ 문장은 영화에 약간 반하는 지점이 있다. 영화의 톤은 무상하고 쓸쓸한 것을 깔고 있지만 캐릭터들이 계속 보여줬던 그 방식은 그렇게 덧없지는 않았던 느낌이다. 덧없음보다는 슬픔 혹은 무력함에 가까웠었던 것 같다. 그런데 그 마지막 문장은 이 영화를 만들고 문장을 넣었다기보다는, 원래부터 그 내용인데 나루세 미키오 감독이 이 캐릭터들에 대한 애정이 과해져서 반하게 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리고 그게 이 감독의 특징이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무좀 장면이 실제 소설에 있든 있지 않든 간에 인물들이 꼼지락 거리면서 서로를 무언가를 나누게 하는 애정, 그리고 비를 맞으면서 돌아오는 과정, 사과를 깎아주는 과정, 이 때 남자의 눈빛이 자상함으로 많이 바뀌어져 있다. 배우와 연출자가 끊임없이 이야기 하면서 캐릭터가 만들어지는데, 그러다 보니 끝에 예정되어 있던 표제어와 다르게 캐릭터가 바뀐 게 아닐까 싶다.


김성욱:
이 영화의 라스트에서 문득 <만추>의 엔딩을 떠올려봤다. 앞에 있었던 두 개의 플래시백은 여자에 속한 것 같은데 마지막 플래시백은 남자에게 속한 것 같아서 과거의 기억을 둘이 이제 공유한다는 느낌이다. 그것이 주는 무상함이 있지만 죽음의 순간에 와서야 비로소 가까스로 사랑에 도달했다는 느낌이 든다. 이제 마칠 시간이다. 최근에 단편영화 촬영을 끝내고 편집 작업 중이라고 알고 있는데, 앞으로는 어떤 계획이 있는지?

김태용: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는 안정감보다 영화에서 표현하려고 하는 정서적인 감정을 자신의 균형감을 잃을 만큼 끌려가는 감독 같아서 개인적으로 더 호감이 가고, 궁금한 영화인 것 같다. 개인적으로 올해 안에는 작업하고 있는 시나리오를 완성해서, 가을에는 영화를 찍고 싶다. 판소리 영화인데 많이 지루하지는 않을 것이다. (웃음)


정리: 김고운(관객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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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루세 미키오 감독의 대표작 <부운>은 일본에서든 서구에서든 가장 사랑받는 영화이자 대표작이라 할 만하다. 이 작품 역시 나루세 감독이 즐겨 영화화했던 하야시 후미코의 소설을 원작으로, 나루세 미키오의 ‘여신’ 다카미네 히데코가 주연을 맡았다. 그러나 <부운>은 여러모로 감독의 다른 영화들과 다른 면모를 보인다. 단적으로, 주인공 유키코는 나루세 감독의 다른 여주인공들과 달리 주체적이지도, 자립적이며 생활력이 강하지도 않다. 그녀는 자신을 버리고 피하며 가는 곳마다 여자들과 정분이 나는 남자 도미오카에게 한없이 매달리고 그의 사랑을 갈구한다. 심지어 그녀 눈앞에서 다른 여자와 눈이 맞아도 그녀는 번번이 그를 따라나선다. 그런가 하면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미군과 연애(!)를 하거나, 자신을 겁탈했던 사촌오빠를 찾아가 기꺼이 그가 꾸린 사이비종교단의 일원이 되기도 한다. 이런 식으로 생계를 유지해 나가는 유키코의 삶에는, 직업이 뭐든 생존을 위해 분투하는 사람 특유의 숭고함이나 진취성이 전혀 없다. 허무와 무의미, 그리고 무기력만 가득할 뿐이다.


그렇다면 도미오카는 어떤가? 유키코를 뻔뻔스럽게 대하면서도 번번이 그녀에게 돈을 빌리기 위해 찾아온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나루세 미키오의 못난 남자들’과 별다르지 않다. (나루세 미키오의 못난 남자들은 대체로 여자들을 착취하며 그녀들의 노동에 기대 살아가면서 그녀들에게 습관적으로 폭력을 휘두른다.) 그러나 한사코 유키코와의 관계를 거부하는 도미오카야말로 실은 필사적으로 도망치다가도 번번이 유키코에게 돌아오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이들이 처음 만난 곳이 대동아전쟁 중 인도네시아에서 농림성 ‘공무원’이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이 둘의 관계를 좀더 다른 눈으로 해석할 수 있다. 예컨대 유키코의 집착이 실은 패망 전 제국주의가 정점에 달했던 일본의 소위 ‘좋았던 시절’에 대한 향수와 집착을 버리지 못하는 불특정 다수 일본인들의 막연한 정서를 은유한다면, 그녀와 거리를 유지하고자 애쓰는 도미오카는 ‘개전국’의 공무원으로서 책임감을 느끼며 전범으로서의 과거와 단절하려는 지식인의 나약한 몸부림이라 볼 수는 없는가.





대동아전쟁 중 인도네시아에서 처음 만나 전쟁이 끝나고도 20여년을 지리멸렬하게 이어가던 두 사람의 관계는 야쿠시마라는 섬마을에서 유키코의 죽음을 계기로 비로소 끝이 난다. (이곳은 하야시 후미코가 실제로 3년간 머물며 <부운>의 집필을 완성한 곳이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오지인 이곳은 두 사람의 마지막 여정지가 되지만, 이곳으로 향하는 긴 여정에서야 도미오카는 비로소 그녀를 받아들인다. 그러나 병색이 완연한 유키코는 도미오카와 꿈꾸던 새로운 삶을 살아보지도 못한 채 그의 품에서 죽음을 맞고 만다. 결국 이들의 운명은 하늘 위를 떠돌며 또렷한 물질적 형상도 가질 수 없었던, 풀은커녕 뜬구름밖에 되지 못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김숙현 | 프로그램 코디네이터)


1.14(토) 14:00
2.10(금) 18:30 상영 후 김태용 감독의 시네토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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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루세 미키오의 영화 세계

나루세 미키오는 영화란 언제나 개봉 뒤 몇 주가 지나면 사라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의 영화들이 우리의 머릿속에 새겨놓은 깊은 인상은 나루세의 그 이야기가 전적으로 옳지 않았음을 입증한다. 다만 그의 영화가 꽤 오랫동안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아 정당한 평가를 받지는 못했다는 사실은 존재한다. 일례로 그는 그와 비교 대상이 되는 오즈 야스지로에게 거의 항상 밀려 있는 존재였다. 그는 오즈보다 먼저 쇼치쿠 영화사에 들어갔음에도 그보다 훨씬 늦게 감독의 자리에 올랐고(1920년에 쇼치쿠에 입사한 나루세는 그로부터 거의 10년이 지난 뒤에야 감독이 되었던 데 반해 오즈는 1926년에 같은 영화사에 들어가 다음해에 첫 영화를 만들었다), 쇼치쿠의 가마타 스튜디오 소장 기도 시로가 자기 영화사엔 두 명의 오즈가 필요 없다고 이야기했듯이 일찍부터 ‘또 하나의 오즈’ 같은 존재로 여겨지기도 했으며, 세계무대 입성에서도 (그 역시 비교적 뒤늦게 국제적 주목을 받은) 오즈에게 뒤졌다.

위기와 혼돈의 홈드라마
그래도 다행인 것은, 나루세의 영화들이 사라져버리기는커녕 우리의 시야에 들어올 기회를 점차 더 갖게 됨으로써 앞에서 열거한 사항들 가운데 두 번째 것에 대한 오해가 벗겨져가고 그래서 온전한 그의 자리가 마련되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영화 전문가인 도널드 리치가 이미 나루세란 존재를 두고 “오즈의 대안”이라고 평가했듯이, 비록 나루세의 세계에 오즈의 그것과 공유하는 (듯한) 영역이 있다고 하더라도, 오즈의 것과는 그 시선과 미학에서 구별되는 독자적인 대륙이라고 봐야 한다. 나루세는 오즈의 주변에 놓이는 데 그치고 마는 또 다른 오즈가 아니라, 그만의 세계를 구축한, 고전기 일본영화의 또 다른 거장인 것이다.

나루세에 대해 여러 평자들이 이미 붙여놓은 호칭 가운데에는 물질주의자(materialist)라는 것이 있다. 그에 걸맞게도 나루세의 영화 속에서 우리는 돈을 세거나 건네는 손과 돈을 갚으라고 하거나 빌려 달라고 하는 대사를 자주 보고 들을 수 있다(세 명의 중년 여주인공 가운데 하나가 사채업자로 나오는 <만국>(1954)은 이걸 특히 잘 보여주는 영화이다). 나루세의 세계에서 사람들은 돈의 막중한 하중을 빠져나갈 수가 없다. 이 지점에서부터 나루세의 ‘홈드라마’는 오즈의 그것과 갈린다. 오즈는 대체로 나루세의 영화 속 그것보다 경제적으로 안정되어 있고, 서로간의 예절과 조화도 좀 더 잘 유지될 수 있는 가족을 자기 앞에 정중하게 초대해놓고는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 궁극적으로 자연의 질서 속으로 융합되는 과정을 조용히 지켜본다. 반면에 나루세가 냉정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가족은 위기 상황 혹은 혼돈이란 표현에 더 가까운 공동체이다. 나루세의 가족은 <여자가 계단을 오를 때>(1960)에서처럼 한 사람이 ‘착취’됨으로써 지탱되는 무자비한 것이거나 <번개>(1952)에서처럼 갑작스럽게 생긴 보험금이 갈등을 불러오는 취약한 것이 되곤 한다. 차가운 바깥 세계와 다를 바 없는 그런 곳에서 서로에 대한 배려와 공경이 근본적 미덕이 될 리는 만무하다.

고통과 희생의 삶을 포기하지 않는 여인들

나루세가 영화 속에서 보여주는 세계는 공간으로 말하자면 ‘조금만 움직이더라도 벽과 맞부딪칠 정도로’ 협소한 세계이고(좁은 실내를 주요 공간으로 삼는 그의 영화는 바깥으로 나간다 할지라도 역시 주로 좁다란 뒷골목만을 보여줄 뿐이다), 색깔로 비유하자면 뿌연 회색에 가까운 세계이며, 맛으로 치자면 씁쓰름한 맛을 안겨주는 세계이다. 막스 오퓔스, 미조구치 겐지, 잉마르 베리만, 칼 드레이어 등과 함께 영화사의 출중한 ‘여인들의 영화감독’ 대열에 낄 그는 그 세계 안에다가 그의 여주인공을 내던져놓는다. 한데 다시 한 번 오즈를 불러오자면, <만춘>(1949) 같은 영화 속에서 항상 친절한 미소를 잃지 않던 하라 세쓰코와는 그 세계가 그리 잘 어울리지 않는다. 만일 그녀가 나루세의 세계로 들어온다면 <산의 소리>(1954)에서 보듯 이제 더한 고통과 수모를 견뎌낼 준비를 갖춰야 할 것이다. 고집스러운 표정의 다카미네 히데코로 대표되는 나루세의 여주인공들은, 때로는 영화를 보는 우리조차도 쉽게 공감을 하지 못할 정도로 완고한 성격과 강한 의지를 가져야만 한다. 그래야 고통과 배신과 실망으로 가득 찬 나루세의 황폐한 세계를 어떤 식으로든 통과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말할 때 우리는 고통과 희생으로서의 삶을 우아하게 살았던, 영화 속의 또 다른 눈에 띄는 여인들, 바로 미조구치의 여인들을 자연스레 떠올리게 된다. 나루세의 여인들은 분명 미조구치의 여인들과 닮은 데가 있긴 했지만 둘은 알고 보면 다른 영토를 점하는 존재들임이 드러난다. 요컨대, <오하루의 일생>(1952)의 여주인공은 거의 낭만적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의 희생을 겪으며 결국에는 초월을 거쳐 미학적인 세계로 진입한다. 하지만 미조구치의 여인보다 어떤 면에서든 현세적이라 부를 수 있는 나루세의 여인에게 그 같은 ‘초월’이란 존재론적 사치에 해당할 뿐이다. 그녀는 무엇보다도 생존을 우선시하는 현실적 존재이며, <밥>(1951)의 서두에서 자신의 감정적 공명을 찾았던 작가 하야시 후미코를 인용해 “무한히 광활한 우주 속에 놓인 인간이 꾸려가는 애절한 영위(營爲)가 나는 참을 수 없이 좋다”고 했던 나루세는 바로 그런 존재에게서 결국에는 인간적인 기품을 발견해내고야 만다. 이를테면, <여자가 계단을 오를 때>의 마지막에서 게이코는 자신을 둘러싼 일들에서 계속 실망할 뿐이지만 그날도 자기가 그렇게도 싫어하는 일인 계단을 올라 웃는 얼굴로 손님들을 맞는다. 거기에서 나루세는 앞에 놓인 날들의 불투명함을 알고 있으면서도 삶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이 얼마나 감동적인 일인지 보여준다.

감정의 리듬을 따라 흐르는 짧은 숏들

나루세는 자신의 이 주인공들이 내딛는 삶의 행보를 따라가면서 흘러가듯 진행되는 영화를 만들었다. 다시 말해 그건 우리의 삶 자체와 유사하게 멈추지 않는 현재의 연속을 보여주는 영화였다. 그런데 미조구치나 오즈의 경우와 달리 미학적인 엄정함이나 압도감을 드러내 보이지 않으면서 단지 간소하면서 수수하게 짜인 숏들을 막힘없이 이어놓기만 한 이런 식의 영화는 많은 이들에게 눈에 확 들지 않는 영화, 혹은 그것만의 어떤 비범함이나 특별함을 찾을 수 없는 영화로 여겨지기 십상이었다. 나루세 밑에서 조감독으로 참여했던 구로사와 아키라가 지적하듯 얼핏 조용하고 평범해 보이는 짧은 숏들의 흐름이 실은 “격렬한 조류가 조용한 수면 밑에 가려진 깊은 강”과도 같다는 것을 알아차리기 전까지는 말이다. 구로사와의 이 이야기를 가져와서 말하자면, 나루세의 영화는 잔잔히 흘러가는 영화적 세계 그 아래에 어떤 저류의 활동을 내포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저류의 다른 이름은 바로, 나루세 자신도, 그리고 영화평론가 야마네 사다오도 썼던 ‘감정의 리듬’이다.

이에 대한 훌륭한 예를 우리는 나루세의 마지막 영화가 된 <흐트러진 구름>(1967)의 대사가 거의 없이 진행되는 마지막 10분여의 시퀀스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서로 사랑해서는 안 되는 두 남녀가 함께 보내는 짧은 여정 안에서 그 정서적 공기는 두려움과 초조감이 섞인 기대감에서 결코 지워지지 않고 떠오르는 과거에 의해 생겨나는 일종의 열패감으로, 그리고 결국에는 서로 사랑할 수 없다는 운명적 자책의 심경으로 이동한다. 그 흐름을 나루세는 두 사람 사이에서 행해지는 시선의 만남과 회피, 몸짓, 그들 앞에 펼쳐지는 사건의 단편적 광경들을 통해 천의무봉의 솜씨로 그려낸다. 여기서 우리는 나루세의 영화에는 고저의 움직임이 없다는 (기도 시로식의) 비판이 근거가 없는 것임을 알게 된다. 한편으로 이 시선과 몸짓 연출의 대가는 단 하나의 몸짓만으로도 우리에게 많은 걸 보고 느끼게 해준다. <만국>은 젊었을 적에 게이샤였다가 지금은 사채업을 하는 중년 여인 긴이 열차 역에서 가방을 뒤지며 차표를 찾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바로 이 순간적인 몸짓 하나로 나루세는 이전까지 그토록 매정해 보이기만 했던 긴에게 인간의 숨결을 불어넣는가 하면 우리에게 삶의 지속됨의 한 증표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해서 언어적 표현을 넘어서는 삶과 인생의 미스터리가 존재함을 깨닫게 해준다. 그래서 그 단순한 장면은 어떤 영화의 어떤 장면과도 비교할 수 없는 미묘한 영화적 서스펜스와 묵직한 감동을 안겨준다. 아마도 이런 것이야말로 하스미 시게히코가 나루세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고 말한 ‘과묵한 웅변’의 한 실례가 아닌가 싶다.

언어적 표현을 넘어선 삶의 미스터리
나루세 영화가 보여주는 이 같은 미묘한 ‘풍요로움’의 예들은, 그가 죽기 전에 품고 있었던 프로젝트를 더욱 궁금하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말년에 그는 병 때문에 비록 현실화하지는 못했지만 오로지 흰 커튼을 배경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인간 움직임의 뉘앙스, 그것의 풍성함에 집중한 영화를 만들 계획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정말 그것이 영화로 만들어졌다면 나루세는 과연 어느 지점까지 나아갈 수 있었을까? 이처럼 실제로 남겨놓은 세계만 해도 더욱 탐사할 것으로 가득한데도 불구하고 그 너머까지 공상에 이르게 하는 것도 역시 거장만이 우리에게 행사할 수 있는 힘일까?

글/ 홍성남(영화평론가) 기사제공/씨네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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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루세 미키오 회고전, 7월15일부터 24일까지 서울아트시네마에서


나루세 미키오(1905~69) 감독과 작업했던 사람들은 그가 구상하는 화면에 대해 짐작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그의 영화 15편에 출연한 여배우 다카미네 히데코는 한번도 연기 지도를 받은 적이 없어서 잘하고 있는지 아닌지조차 알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 촬영현장에서는 이런 혼란이 있었을지 모르지만 완성된 영화들은 물 흐르듯 자연스러워서 이음매가 전혀 표시나지 않는다. 야마네 사다오의 말처럼 자신의 기교조차 지워버릴 기교를 지니고 있는 나루세의 영화는 지극히 사실적이고 잔잔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태도의 문제일 뿐, 그의 멜로드라마는 어떤 작품보다도 격정적이며 우리의 가슴을 미어지게 만든다. 특히 나약함과 강인함, 정숙함과 정념을 동시에 지닌 아이러니한 그의 여성 주인공들은 오로지 나루세만의 인장이다. 동시대에 활동한 오즈 야스지로가 아버지와 딸로 대표되는 남녀 주인공에게 에너지를 분배했다면 나루세는 그가 사랑한 문제적 여성 인물들에 집중한다.

1930년 <찬바라 부부>를 시작으로 1960년대까지 총89편이 기록된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본령은 멜로드라마다. 이번 회고전에는 총 12편의 멜로드라마가 상영되는데 <아내여 장미처럼>(1935)을 제외하고 모두 50, 60년대 대표작으로 구성되었다. 이번 상영작은 크게 세 부류로 구분된다. 우선 가족 멜로드라마 성격의 <아내여 장미처럼> <엄마> <산의 소리> 등이 있고, 두 번째는 화류계에 종사하는 여성주인공의 애환을 그린 <흐르다> <여자가 계단을 오를 때> <방랑기>가 있으며, 마지막은 남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그린 <부운> <흐트러진 구름>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몰락해가는 게이샤 집의 풍경을 담담하게 그려낸 <흐르다>에는 나루세 영화의 히로인이 총출동한다. <흐르다>와 긴자의 바를 배경으로 한 <여자가 계단을 오를 때>의 주인공은 성격이 비슷한 여성들이다. 화류계 여성이지만 자존심을 지키고 싶어 하는 이들은 그런 성격 때문에 경제적으로 압박을 받고 있다. 두 영화에 모두 등장하는 주판과 가계부, 전표가 클로즈업된 숏은 이들의 상태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뭇 남성들의 추앙을 받지만 정작 내 남자는 없는 이들이 사랑에 빠지면 돌아오는 것은 몰락과 환멸밖에 없다. 원칙과 자존심을 지키려고 노력하지만 이들이 처한 환경은 근원적으로 거기에 배치된다. 모순을 껴안고 타협하지 않는 나루세의 여자들은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을 진다. 바가 있는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밟는 발걸음이 무거워도 이들은 자신이 걸어야 할 길을 간다. 상대적으로 남자들은 이기적이고 비겁하다. 옛정에 기대 공짜로 놀아보려 하거나 떠나기 직전에야 사랑을 고백할 용기를 내는 남자들이지만 나루세는 그들까지도 측은하게 바라본다. 여자들은 남자를 비난하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을 단련시킬 다짐을 한다.


<아내여 장미처럼>은 딸의 시선으로 두집 살림을 하는 아버지를 바라본다. 딸은 아버지를 되찾기 위해 집을 나서지만 아버지가 이룬 또 다른 가족은 그녀의 마음을 흔들리게 한다. 해외에서 더욱 호평받은 <엄마>에서 딸은 홀로 아이를 키우는 엄마를 연민을 갖고 바라본다. <번개>와 <오누이>는 가족 구성원간의 갈등을 그리고 있으며, <부운>과 <방랑기>는 하야시 후미코 소설을 원작으로 한 작품들로 다카미네 히데코의 열연이 돋보인다. 나루세 영화 중 가장 드라마틱한 <부운>은 유부남과 처녀의 비극적 사랑을, <방랑기>는 사랑을 따라 화류계를 떠난 여성의 파란만장한 인생을 담고 있다. 스기무라 하루코의 유일한 주연작 <만국>은 게이샤를 은퇴한 여주인공의 삶을 보여주는데 <흐르다> <여자가 계단을 오를 때>와 일맥상통하는 비애감이 존재한다. 하라 세스코가 주연인 <산의 소리>는 외도를 하는 남편을 묵인하는 젊은 아내와 그런 며느리를 바라보는 시아버지의 섬세한 감정 교류가 돋보이는 독특한 영화다. <흐트러지다> <흐트러진 구름>은 미망인이 주인공인 영화인데 유작 <흐트러진 구름>(1967)은 남편을 죽인 장본인을 사랑한다는 내용이 더글러스 서크의 <마음의 등불>(1954)을 떠올리게 한다. 나루세 미키오 회고전은 7월15일부터 24일까지 서울아트시네마에서 개최된다.

글/ 이현경 (영화평론가)

* 이 글은 영화전문 주간지 씨네21 2011. 7. 13일자에 게재된 것을 발췌해 옮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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