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루세 미키오의 영화 세계

나루세 미키오는 영화란 언제나 개봉 뒤 몇 주가 지나면 사라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의 영화들이 우리의 머릿속에 새겨놓은 깊은 인상은 나루세의 그 이야기가 전적으로 옳지 않았음을 입증한다. 다만 그의 영화가 꽤 오랫동안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아 정당한 평가를 받지는 못했다는 사실은 존재한다. 일례로 그는 그와 비교 대상이 되는 오즈 야스지로에게 거의 항상 밀려 있는 존재였다. 그는 오즈보다 먼저 쇼치쿠 영화사에 들어갔음에도 그보다 훨씬 늦게 감독의 자리에 올랐고(1920년에 쇼치쿠에 입사한 나루세는 그로부터 거의 10년이 지난 뒤에야 감독이 되었던 데 반해 오즈는 1926년에 같은 영화사에 들어가 다음해에 첫 영화를 만들었다), 쇼치쿠의 가마타 스튜디오 소장 기도 시로가 자기 영화사엔 두 명의 오즈가 필요 없다고 이야기했듯이 일찍부터 ‘또 하나의 오즈’ 같은 존재로 여겨지기도 했으며, 세계무대 입성에서도 (그 역시 비교적 뒤늦게 국제적 주목을 받은) 오즈에게 뒤졌다.

위기와 혼돈의 홈드라마
그래도 다행인 것은, 나루세의 영화들이 사라져버리기는커녕 우리의 시야에 들어올 기회를 점차 더 갖게 됨으로써 앞에서 열거한 사항들 가운데 두 번째 것에 대한 오해가 벗겨져가고 그래서 온전한 그의 자리가 마련되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영화 전문가인 도널드 리치가 이미 나루세란 존재를 두고 “오즈의 대안”이라고 평가했듯이, 비록 나루세의 세계에 오즈의 그것과 공유하는 (듯한) 영역이 있다고 하더라도, 오즈의 것과는 그 시선과 미학에서 구별되는 독자적인 대륙이라고 봐야 한다. 나루세는 오즈의 주변에 놓이는 데 그치고 마는 또 다른 오즈가 아니라, 그만의 세계를 구축한, 고전기 일본영화의 또 다른 거장인 것이다.

나루세에 대해 여러 평자들이 이미 붙여놓은 호칭 가운데에는 물질주의자(materialist)라는 것이 있다. 그에 걸맞게도 나루세의 영화 속에서 우리는 돈을 세거나 건네는 손과 돈을 갚으라고 하거나 빌려 달라고 하는 대사를 자주 보고 들을 수 있다(세 명의 중년 여주인공 가운데 하나가 사채업자로 나오는 <만국>(1954)은 이걸 특히 잘 보여주는 영화이다). 나루세의 세계에서 사람들은 돈의 막중한 하중을 빠져나갈 수가 없다. 이 지점에서부터 나루세의 ‘홈드라마’는 오즈의 그것과 갈린다. 오즈는 대체로 나루세의 영화 속 그것보다 경제적으로 안정되어 있고, 서로간의 예절과 조화도 좀 더 잘 유지될 수 있는 가족을 자기 앞에 정중하게 초대해놓고는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 궁극적으로 자연의 질서 속으로 융합되는 과정을 조용히 지켜본다. 반면에 나루세가 냉정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가족은 위기 상황 혹은 혼돈이란 표현에 더 가까운 공동체이다. 나루세의 가족은 <여자가 계단을 오를 때>(1960)에서처럼 한 사람이 ‘착취’됨으로써 지탱되는 무자비한 것이거나 <번개>(1952)에서처럼 갑작스럽게 생긴 보험금이 갈등을 불러오는 취약한 것이 되곤 한다. 차가운 바깥 세계와 다를 바 없는 그런 곳에서 서로에 대한 배려와 공경이 근본적 미덕이 될 리는 만무하다.

고통과 희생의 삶을 포기하지 않는 여인들

나루세가 영화 속에서 보여주는 세계는 공간으로 말하자면 ‘조금만 움직이더라도 벽과 맞부딪칠 정도로’ 협소한 세계이고(좁은 실내를 주요 공간으로 삼는 그의 영화는 바깥으로 나간다 할지라도 역시 주로 좁다란 뒷골목만을 보여줄 뿐이다), 색깔로 비유하자면 뿌연 회색에 가까운 세계이며, 맛으로 치자면 씁쓰름한 맛을 안겨주는 세계이다. 막스 오퓔스, 미조구치 겐지, 잉마르 베리만, 칼 드레이어 등과 함께 영화사의 출중한 ‘여인들의 영화감독’ 대열에 낄 그는 그 세계 안에다가 그의 여주인공을 내던져놓는다. 한데 다시 한 번 오즈를 불러오자면, <만춘>(1949) 같은 영화 속에서 항상 친절한 미소를 잃지 않던 하라 세쓰코와는 그 세계가 그리 잘 어울리지 않는다. 만일 그녀가 나루세의 세계로 들어온다면 <산의 소리>(1954)에서 보듯 이제 더한 고통과 수모를 견뎌낼 준비를 갖춰야 할 것이다. 고집스러운 표정의 다카미네 히데코로 대표되는 나루세의 여주인공들은, 때로는 영화를 보는 우리조차도 쉽게 공감을 하지 못할 정도로 완고한 성격과 강한 의지를 가져야만 한다. 그래야 고통과 배신과 실망으로 가득 찬 나루세의 황폐한 세계를 어떤 식으로든 통과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말할 때 우리는 고통과 희생으로서의 삶을 우아하게 살았던, 영화 속의 또 다른 눈에 띄는 여인들, 바로 미조구치의 여인들을 자연스레 떠올리게 된다. 나루세의 여인들은 분명 미조구치의 여인들과 닮은 데가 있긴 했지만 둘은 알고 보면 다른 영토를 점하는 존재들임이 드러난다. 요컨대, <오하루의 일생>(1952)의 여주인공은 거의 낭만적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의 희생을 겪으며 결국에는 초월을 거쳐 미학적인 세계로 진입한다. 하지만 미조구치의 여인보다 어떤 면에서든 현세적이라 부를 수 있는 나루세의 여인에게 그 같은 ‘초월’이란 존재론적 사치에 해당할 뿐이다. 그녀는 무엇보다도 생존을 우선시하는 현실적 존재이며, <밥>(1951)의 서두에서 자신의 감정적 공명을 찾았던 작가 하야시 후미코를 인용해 “무한히 광활한 우주 속에 놓인 인간이 꾸려가는 애절한 영위(營爲)가 나는 참을 수 없이 좋다”고 했던 나루세는 바로 그런 존재에게서 결국에는 인간적인 기품을 발견해내고야 만다. 이를테면, <여자가 계단을 오를 때>의 마지막에서 게이코는 자신을 둘러싼 일들에서 계속 실망할 뿐이지만 그날도 자기가 그렇게도 싫어하는 일인 계단을 올라 웃는 얼굴로 손님들을 맞는다. 거기에서 나루세는 앞에 놓인 날들의 불투명함을 알고 있으면서도 삶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이 얼마나 감동적인 일인지 보여준다.

감정의 리듬을 따라 흐르는 짧은 숏들

나루세는 자신의 이 주인공들이 내딛는 삶의 행보를 따라가면서 흘러가듯 진행되는 영화를 만들었다. 다시 말해 그건 우리의 삶 자체와 유사하게 멈추지 않는 현재의 연속을 보여주는 영화였다. 그런데 미조구치나 오즈의 경우와 달리 미학적인 엄정함이나 압도감을 드러내 보이지 않으면서 단지 간소하면서 수수하게 짜인 숏들을 막힘없이 이어놓기만 한 이런 식의 영화는 많은 이들에게 눈에 확 들지 않는 영화, 혹은 그것만의 어떤 비범함이나 특별함을 찾을 수 없는 영화로 여겨지기 십상이었다. 나루세 밑에서 조감독으로 참여했던 구로사와 아키라가 지적하듯 얼핏 조용하고 평범해 보이는 짧은 숏들의 흐름이 실은 “격렬한 조류가 조용한 수면 밑에 가려진 깊은 강”과도 같다는 것을 알아차리기 전까지는 말이다. 구로사와의 이 이야기를 가져와서 말하자면, 나루세의 영화는 잔잔히 흘러가는 영화적 세계 그 아래에 어떤 저류의 활동을 내포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저류의 다른 이름은 바로, 나루세 자신도, 그리고 영화평론가 야마네 사다오도 썼던 ‘감정의 리듬’이다.

이에 대한 훌륭한 예를 우리는 나루세의 마지막 영화가 된 <흐트러진 구름>(1967)의 대사가 거의 없이 진행되는 마지막 10분여의 시퀀스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서로 사랑해서는 안 되는 두 남녀가 함께 보내는 짧은 여정 안에서 그 정서적 공기는 두려움과 초조감이 섞인 기대감에서 결코 지워지지 않고 떠오르는 과거에 의해 생겨나는 일종의 열패감으로, 그리고 결국에는 서로 사랑할 수 없다는 운명적 자책의 심경으로 이동한다. 그 흐름을 나루세는 두 사람 사이에서 행해지는 시선의 만남과 회피, 몸짓, 그들 앞에 펼쳐지는 사건의 단편적 광경들을 통해 천의무봉의 솜씨로 그려낸다. 여기서 우리는 나루세의 영화에는 고저의 움직임이 없다는 (기도 시로식의) 비판이 근거가 없는 것임을 알게 된다. 한편으로 이 시선과 몸짓 연출의 대가는 단 하나의 몸짓만으로도 우리에게 많은 걸 보고 느끼게 해준다. <만국>은 젊었을 적에 게이샤였다가 지금은 사채업을 하는 중년 여인 긴이 열차 역에서 가방을 뒤지며 차표를 찾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바로 이 순간적인 몸짓 하나로 나루세는 이전까지 그토록 매정해 보이기만 했던 긴에게 인간의 숨결을 불어넣는가 하면 우리에게 삶의 지속됨의 한 증표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해서 언어적 표현을 넘어서는 삶과 인생의 미스터리가 존재함을 깨닫게 해준다. 그래서 그 단순한 장면은 어떤 영화의 어떤 장면과도 비교할 수 없는 미묘한 영화적 서스펜스와 묵직한 감동을 안겨준다. 아마도 이런 것이야말로 하스미 시게히코가 나루세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고 말한 ‘과묵한 웅변’의 한 실례가 아닌가 싶다.

언어적 표현을 넘어선 삶의 미스터리
나루세 영화가 보여주는 이 같은 미묘한 ‘풍요로움’의 예들은, 그가 죽기 전에 품고 있었던 프로젝트를 더욱 궁금하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말년에 그는 병 때문에 비록 현실화하지는 못했지만 오로지 흰 커튼을 배경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인간 움직임의 뉘앙스, 그것의 풍성함에 집중한 영화를 만들 계획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정말 그것이 영화로 만들어졌다면 나루세는 과연 어느 지점까지 나아갈 수 있었을까? 이처럼 실제로 남겨놓은 세계만 해도 더욱 탐사할 것으로 가득한데도 불구하고 그 너머까지 공상에 이르게 하는 것도 역시 거장만이 우리에게 행사할 수 있는 힘일까?

글/ 홍성남(영화평론가) 기사제공/씨네21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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