몬테 헬만은 뉴아메리칸 시네마의 저주받은 작가였다. 프리웨이를 질주하는 자동차와 방황하는 젊은이를 그린 <자유의 이차선>(1971)은 <이지 라이더>(1969)의 계보를 잇는 70년대 로드무비의 숨겨진 걸작이지만, 흥행부진 때문에 몬테 헬만은 할리우드 영화사로부터 방출되는 불운을 겪어야만 했다. <자유의 이차선>은 젊은이들이 자유롭게 무엇이든 실패할 수 있는 권리가 있음을 보여주지만 역설적으로 작가는 그럴 권리를 누릴 수 없었다. 그가 ‘지옥에 떨어진 남자 Hell-Man’라 불리는 것은 뼈아픈 일이다.

 

 

영화의 역사에서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다. 작가주의를 주창한 ‘카메라-만년필론’으로 유명한 알렉상드르 아스트뤽은 비평에서 시작해 영화감독이 된 첫 번째 비평가로 누벨바그(특히 고다르)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이 시기 드물게 이스트먼 컬러로 촬영한 <여자의 일생>(1958)은 그러나 누벨바그 태동기에 개봉해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했고, 오랫동안 관객들에게 보여줄 기회를 얻지 못했다.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의 미국적 재래라 불린 찰스 버넷의 혁명적인 데뷔작 <양 도살자>(1979)도 필름으로 만나기 쉽지 않았던 작품이다. 몇 년 전에야 35미리 필름으로 복원되어(한국에서는 2008년 한국영상자료원에서 개최된 ‘복원전’에서 처음 복원된 영화가 상영되었다) 관객과 만날 수 있었다. 자크 베케르의 <황금투구>는 지금은 그의 대표작이 됐지만 개봉 당시에는 시네필의 나라 프랑스에서조차 상업적으로나 비평적으로 환대받지 못했다. 영국의 린제이 앤더슨이 그의 영화를 옹호하는 편지를 ‘카이에 뒤 시네마’에 쓰는 일이 벌어졌을 정도였다.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들만큼 큰 수난을 겪었던 이는 세르게이 파라자노프이다. 타르코프스키를 두고 종종 ‘영화의 순교자’라 말하지만 파라자노프야 말로 말 그대로 순교자였다. 워낙 독특한 개성덕분에 그는 영화만큼이나 평생 고초를 겪어야만 했다. 1968년에 완성한 <석류의 빛깔>(원래 제목은 ‘사야트 노바’였다)은 영화의 역사 그 어디에도 빚지지 않는 독특한 영상과 수법으로 아르메니아인의 민족적인 아름다움을 도취적으로 표현했다는 이유로 소련의 검열을 당해야만 했다. 동시대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알렉산더 루블료프>(1966)가 상영이 금지되는 수모를 겪었지만(이 영화는 1971년에야 상영이 될 수 있었다) 파라자노프의 작품은 작품이 훼손되는 과정을 거쳐 오랫동안 제대로 공개될 기회를 얻지 못했었다. 그런 점에서 한국에서의 첫 상영은 의미가 있다. 파라자노프는 이미 그의 실질적인 데뷔작인 <잊혀진 조상들의 그림자>(1965)에서 고대적인 전통과 민족적 삶을 그렸다는 이유로 영화계의 이단자로 취급받았었다. 파라자노프는 오랜 시간동안 고초를 겪었고, 구소련의 해체가 진행되면서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작가에게 이는 너무 늦은 시기였다. 영화제작을 준비하던 1990년, 66세의 나이로 파라자노프는 세상을 떠났다.

 

<석류의 빛깔>의 첫 시작부에 나오는 문구처럼 파라자노프는 삶과 영혼에 시달린 시인이었다. 고다르는 그를 ‘이미지, 빛, 그리고 현실로 구성된 영화사원의 사제’라 말했었다. 다른 작가들에게도 이와 비슷한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친밀한 삶’이라 붙인 이번 특별전은 그런 의미에서 영화의 사원에 자리한 영화들을 소개하는 기회다. 봄날의 산보자처럼 한가로이 19편의 작품들로 장식된 영화의 사원을 거닐 수 있기를 기대한다.

 

글 김성욱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디렉터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