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야의 결투>에서 관객들의 눈을 휘어잡는 것은 은붕(왕우)의 현란한 칼부림이다. 그는 항상 혈혈단신으로 떼 지어 있는 악당 무리들과 맞선다. 다른 장철의 영화들이 그렇듯 피바다가 내내 흐르지만 은붕의 흰 옷에는 피 한 방울 튀지 않는다. 은붕이 카메라를 향해 서서히 다가오면서 악당들을 단칼에 베어버리는 오솔길 장면에서는 그 무용 같은 액션에 감탄할 수밖에 없다. 여기에 더해진 핸드헬드의 사용은 긴박감을 만들어 관객을 쥐락펴락 한다. 이는 물론 요즈음의 액션 영화만큼 세련되지는 않았지만 컬트의 반열에 오른 홍콩판 B영화를 보는 감흥에 빠지기에는 충분하다.

은붕은 압도적인 무공을 앞세워 무표정한 얼굴로 살육을 저지른다. 하지만 그 속에는 금연자(정패패)를 향한 애틋한 마음이 꿈틀거리고 있다. 산에서 요양을 취하고 있는 금연자를 속세로 불러내기 위해 그는 시신들 옆에 금연자의 비녀를 꽂고 떠난다. 금연자가 이 모든 살인을 저지른 것처럼 위장하기 위해서다. 이런 행위는 모두 금연자를 만나기 위한 은붕의 애절함에서 비롯된 것이다. 장철의 폭력 묘사는 이 같은 로맨스를 일종의 맥거핀처럼 보이게 만든다. <심야의 결투>는 치명적인 부상을 입은 은붕과 금연자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난 뒤, 은붕이 죽어가는 것으로 끝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마지막 10여 분이 더 남아 있다. 이미 피가 흐르고 내장이 쏟아지는 상태에서 은붕은 몸을 일으켜서 남은 적들을 향해 칼을 휘두른다. <심야의 결투>의 세계는 최후의 피 한 방울까지 남김없이 흘려버리는 냉혹한 세계다. 기운을 바닥까지 긁어모아 끝내 에너지를 전부 소모해버리는 은붕은 마치 처음부터 그 싸움을 위해 존재했던 것처럼 보인다. 여기에는 피와 함께 비장미가 넘쳐흐른다.

이러한 폭력 묘사는 선과 악이라는 가치가 상실된 상태에서 나온다. 은붕의 살육은 부모를 죽인 악당들에 대한 복수와 금연자를 만나는 것이 목적인 듯하다. 그러나 그는 복수를 끝내고 금연자와 마주한 이후로도 살육을 멈추지 않는다. 비록 은붕이 악인만을 골라 죽인다고 하지만, 그러한 가치판단에 따라 징벌을 내리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악인이라는 핑계로 살인을 저지르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선악의 지배적인 가치가 실종된 상태에서의 폭력은 일견 허무해 보인다. 비장한 결투가 끝나고 나면, 승리했다고 웃을 수도 없고, 졌다고 울 수도 없다. 은붕의 잔혹한 폭력의 이면에는 허무가 깔려 있다. <심야의 결투> 마지막 장면에서의 계곡은 그렇게 쓸쓸해 보인다.

by 송은경 관객에디터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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