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 도살자> 상영 후 김성욱 프로그램디렉터와의 시네토크

 

할리우드 영화를 보고 자라온 세대인 만큼 주인공인 백인들에게 익숙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흑인이 주변 인물이 아닌 주인공인 영화를 본 적이 있는가? <칼라 퍼플>이나 최근에 나온 <헬프> 빼곤 얼마 없을 것이다. 이번 특별전 '친밀한 삶'에서는 그렇게 영화 속에서 조차 소외되었던 흑인들을 포착한 미국의 독립영화 <양 도살자>를 스크린 위에 걸어놓았다. 지난 4월 5일 찰스 버넷의 <양 도살자> 상영 후 이어진 김성욱 프로그램디렉터와의 시네토크 현장을 옮긴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디렉터, 영화평론가): 이번 특별전 제목을 ‘친밀한 삶’이라 붙인 이유와 관련된 작품이 방금 보신 영화 <양 도살자>다. 처음 봤을 땐 흑인의 문제를 다룬 영화여서 강렬한 이야기이지 않을까라는 선입견이 있었는데, 한편으로는 유머러스하기도 했다. 통상적으로 사회적 현실을 비추는 방식과 다르다. 워낙 영화가 갖고 있는 정서적 측면이 뛰어나기 때문에 짧지만 효과가 컸던 작품으로 기억하고 있다.

 

흑인 영화로 분류되는 영화들은 그동안 많이 소개되진 않았었다. 작품은 77년도에 제작되어 79년도에 공개되었고, 81년도에 베를린 영화상을 받으면서 알려졌다. UCLA 필름 아카이브에서 제작, 보존하였다. 찰스 버넷 감독은 자신이 성장했던 LA 빈민가 와츠에서 매 주말마다 영화를 촬영했는데, 1년 동안 아마추어 배우를 기용하여 만불 이하를 들여 제작했다. 이야기 전개가 헐겁고 느슨하며, 에피소드적인 연결을 보여주고 있다. 일자리를 찾으려는 흑인 가장과 노는 아이들의 두 세계가 영화의 주된 이야기이다.  이후에는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뉴욕 타임즈 평론가는 당시 이 영화를 아마추어적인 지루한 영화라고 평가했었다. 미 의회에서 국가적 유산으로 남길 영화 50편 중 하나로 선정해서 이 영화를 보존했지만, 사실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결정적으로는 블루스 곡들의 저작권 문제 때문에 공개될 수가 없었고, 대신 16mm 필름으로 대학가에서 간헐적으로 상영했었다고 한다. 저작권료로 15만불이 필요해서 스티븐 소더버그가 7만 5천불을 지불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고 한다. 앞서 보여드린 마일스톤즈라는 영화사에서 배급했다. 2007년도에 UCLA 필름 아카이브에서 이 영화를 35mm로 복원해 지금 우리가 이렇게 영화를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영화의 배경을 이루고 있는 공간들을 살펴보면, 실제로 찰스 버넷 감독이 LA 근교의 빈민가 와츠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대학도 근처인 UCLA에 다녔다. 1965년 흑인 빈민가 폭동 사건이 여기서 발생했는데, 백인 경찰이 흑인을 과잉 단속한 것에서 시작해 폭독으로 확장되었다. 엿새 동안 폭동이 벌어졌고 약 2천여명의 부상자가 발생하고 4천여명이 구속되었다고 한다. 이 사건으로 60~70년대 흑인 문제가 전면적으로 부상하였다. 흑인, 아프리카 아메리칸들을 어떻게 영화 이미지 안에 담아낼지에 관한 문제도 함께 등장하였다. 찰스 버넷은 1934년생으로 폭동이 있은 후 10년이 지난 시기에 영화를 만들었다. 즉,  감독은 77년의 현실을 드러내면서 동시에 10년 전의 과거 시위 흔적들이 어떤 방식으로 일상에 남아 있는지를 영화로 포착하려고 시도했다고 볼 수 있다. 볼 수 없는 역사를 온전한 방식으로 영화를 통해 표현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찰스 버넷은 일상적인 빈민가 사람들의 삶의 모습과 환경들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보이지는 않지만 이미지와 시각성, 음악과 말, 블루스 가사를 더해서 그 역사를 표현했다.


찰스 버넷은 UCLA를 졸업한 후 새로운 흑인 영화 만들어내는 그룹인 LA 스쿨에 들어가 영화를 시작하였다. LA 주변 지구에서 영화를 만드는 한계성은 여러 가지 영향을 주었다. 첫 번째로 흑인 인권운동이 있었고, 반식민담론들과 브라질, 쿠바 등의 제3세계 영화가 당시 LA 스쿨에 깊은 영향을 주었었다. 

 

 

이 영화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를 담는 네오리얼리즘적인 미학으로 많이 불리지만, 내가 보기엔 중후기적인 네오리얼리즘에 가깝다고 본다. 환경에 놓여있는 사람들의 정신적 상태를 담아내기 때문이다. 영화 수법은 동일하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모던한 안토니오니의 영화세계에 더 가깝다. 영화의 첫 시작은 느닷없다. 가정 내부의 공간에서 꼬마아이가 아버지에게 꾸지람 받은 뒤 엄마에게 따귀 맞는 걸로 당돌하게 시작한다, 시공간은 모르지만 가족 내부의 긴장이 느껴진다. 여기서부터 근본적으로 영화를 둘로 가르는 선이 발생하는데, 그 하나는 어른들의 삶이다. 주로 집안 내부에서 어른들이 이야기하는 장면들로 구성되어 있다. 다른 하나는 아이들이 중심인 거리의 삶이다. 아이들은 거리에서 방치되어 각자 방식대로 논다. 그들은 행동적으로 제스처로 표현되어 있다. 반면, 어른들은 말로써 내면을 표현하는데, 그들이 있는 내부의 공간은 대부분  정적인 느낌이다. 반면, 아이들이 노는 거리의 외부는 동적인 움직임과 행동들에 의해 표현되고 있다. 영화 라스트에는 어느 정도 어른과 아이가 조우하는 느낌이다.

 

남자애가 도끼 빗을 만지작거리다가 동네에서 TV를 남자 둘이 훔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재미있게 묘사되어 있다. 비극적인 사회의 단면이지만 한편으로는 우스꽝스러운 느낌을 준다. 영화적인 주요 특징 두 가지를 본다면 멀리서 찍혀진 롱 쇼트가 많다. 플롯과 드라마틱한 순간보단 공간 안에서 인물들의 환경을 잡아내는데 유용하다. 다른 하나는 내부적 공간을 보여줄 때 정적이면서 오랫동안 지속되는 롱 테이크이다. 같은 시간 내에 어떤 일들이 발생하는지 연속적으로 보여준다. 이는 관찰적인 방식으로 보게끔 하는데 효과적이다. 공간 안에 놓여있는 사람들과 환경이 맺고 있는 관계들을 표현해나가면서 사람들을 공간의 증인처럼 등장시키고 있다. 다시 말해, 관객으로 하여금 상황과 공간들을 비판적이거나 관조적으로 바라보고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게 하는 효과를 준다.


영화 초반에 등장하는 개 가면을 쓴 아이의 의미는 잘 모르겠지만 양과 인간이 결합된 은유적인 느낌을 준다. 아이 둘이 조형적으로 비슷하면서도 모방하는 것 같다. 무의미해보이면서도 둘이 조우하고 있는 사태이다. 이렇듯 영화가 갖고 있는 힘은 일상적인 순간들을 담아내는 데서 나온다. 흑인 폭동 이후 그러한 사건이 현재에 어떤 방식으로 영향을 줬는가? 그 문제를 플롯, 관습적인 방법 등 보편적 방식으로 표현하지 않았다. 대신 일상적인 삶의 순간들을 부드럽고 온화하게 포착하였고, 단독적인 순간들을 에피소드처럼 담아낸 것이 영화의 주요 전략이다.

 

작품은 전체적으로 대비를 이루는 장면이 많다. 옆에서 어머니가 음식을 준비하면 아이는 소꿉놀이를 하고 있다. 아이와 아빠가 자연스럽게 모여 있는 경우가 거의 없고 분리되어있다. 일상에서 볼 수 있는 친근한 디테일들을 미니멀하게 담아내었다. 영화 안에서 의미를 창조해내는 것은 또 다른 장면들과 연결되는 구조이다. 영화가 사회적인 문제를 다룬다고 얘기되어지는데 실제로는 궁극적인 사회 문제가 없다. 사회에 저항하는 인물이 없고, 이들이 겪는 근본적인 빈곤, 미국 사회 내에서 흑인이 처한 문제가 강력하게 제기 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적 현실을 비추고 있다는 말이 틀리진 않지만 무엇이냐고 구체적으로 되짚었을 때 애매하다. 인물들이 놓인 환경 안에서 경험하는 바를 전달해주는 것, 드라마틱한 전달보다 영화적인 경험을 통해서 관객들이 그 부분에 도달할 수 있도록 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일반적 의미의 현실을 보여주기 위해 특정한 화면과 배치하는 구성, 조형성, 영화적 경험의 장치들을 이용해 그들의 삶의 경험을 느끼게 만들고 있다.

 

 

일반적으로 영화에서 현실을 드러내는 방식은 두 가지다. 첫째로는 즉각적으로 느끼고 영화적으로 들어가게 감정을 고조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영화적 경험의 과정에 중심을 두는 두 번째 방법을 택한다. 윤리적인 태도라고도 볼 수 있는데, 하나의 사회적 경험을 치룬 흑인들에게 10년 후 상황은 트라우마가 남아 있는 것이다. 정서적인 문제에 우리가 직접적으로 공감하기가 어려운데, 주변의 경험적 느낌들과 정서적 상황들을 관객들에게 영화적 형식을 통해 전달할 때 오히려 현실에 더 가깝다. 예로 블루스의 정서적 느낌, 하나의 화면과 또 다른 화면과의 병치, 인물과 환경과의 관계, 미니멀한 내러티브의 일상적 디테일들, 영화의 형식이 제공하는 관계성 안에서 관객이 젖게 만든다. 또한, 시각적 표현 양식이 사건 묘사보다 강조되어있는 느낌이다. 자전거 바퀴를 여자 일진들(!)에게 뺏기고 도망가는 장면은 동네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광경이다. 심플한 에피소드를 담아내는 형식적 장치인 롱쇼트는 멀리서 관조하듯 포착해나간다. 순간에 빚어지는 느낌을 관객들에게 전달한다. 어른들의 행동을 아이는 구경하고, 성인들의 세계와 아이들의 세계로 구분된다. 그 세계 안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아이들이다. 아이들은 말하거나 표현하진 않아도 시각적으로는 증인 같은 위치에 있다. 그들의 시선 안에서 보이는 세계들을 중계하고 있다.


영화에서는 3개의 세계가 있는데, 성인들이 있는 가정 공간과 놀이와 연결된 거리 아이들의 세계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아이들은 놀고 있다. 마지막 하나는 양 도살장의 공간이다. 세 번째 공간이 영화의 제목과 연결되면서 윤리적인 특징을 갖고 있다. 양 도살과 지구에서 흑인들이 처해진 삶의 조건들이 연결된다. 양이 갖고 있는 순수한 느낌과 아이들을 연결하고, 도살장 풍경들을 가지고 있다.

 

영화에서 두 장면 정도가 특별한 순간을 이뤄낸다. 전반부에 스탠이라는 중심 인물이 친구와 대화 하다가 잔을 자기 볼에다 비비는 씬이다. 장면 구성에서 보자면 두 남자를 보여주고 주인공과 반응하는 사람, 지켜보는 사람으로 넘어가면서 관계망들로 표현되어 있다. 남자가 과거의 아내와 느꼈던 감정적 관계가 지나가버렸고 그 상태는 다시 느낄 수 없다는 것을 나타낸다. 다시 말해 불안전함을 일상적 차원에서 호소하면서 주변적인 상황과 관계 안에서는 결코 해소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이처럼 영화 속에 놓여진 사람들이 주변적 상황에서 느끼는 정서와 감각이 관객에게 어떻게 전달되는가, 영화가 정확하게 보여줄 순 없지만 어떻게 전달해나가는지 집중하는 게 영화의 중요한 포인트이다. 후반부에 보면, 카메라는 고정되어있고 어두운 거실에서 춤을 추고 있는 남녀 주인공이 낭만적으로 비춰진다. 몸을 맞닿고 있는 것은 잔에 볼을 부비는 순간의 느낌을 현실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은 느낌이다. 결국은 두 사람이 그런 관계를 이루지 못하여 남자는 떠나고 여자는 창문에 기대어서 뒤돌아보는 장면으로 끝난다. 이 관계가 지닌 비통함과 감정적 손실을 영화가 완벽하게 전달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이 잃어버렸다고 느껴지는 감정을 시각적인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영화 라스트는 영화 제목과 어우러져 있는데, 원거리 숏과 망원 렌즈로 숏의 합으로 연속적이 아니라 분절되어서 표현되고 있다. 현실성의 단면들을 쫓기 보다는, 다른 방식의 촬영을 따라서 한 순간을 포착해나간다. 영화의 정서성, 느낌, 공간이 드라마틱하게 구성되어진 것은 아니나 형식성이 만들어내는 정서적 효과들을 통하여 인물들의 정서적 상태에 근접하려는 시도들이 돋보인다. 중요한 대사 진행 대신 일상적 제스처들로 구성되어있다. 사건의 측면에서 보면 크지 않지만, 구성형식으로 보면 두 명의 아이가 빠지고 아이가 들어오는 걸 엄마가 지켜보는 식의 관계의 망으로 구현되어 있다. 두 부부가 앉아서 다정하게 몸을 만지는 걸 딸이 지켜보는 장면에서도 관계를 지켜보는 시선을 통해서 가족 내 관계들을 재구성한다. 


가족 공동체의 회복, 빈곤한 사람들의 희망 소유 여부 가능성보다는 가족 내부에서 갖고 있는 충돌, 어른들이 갖는 고독과 분리, 아이들의 시선, 남자 중심적인 인물들을 반복되어지는 형태로 관계성 망 안에서 포착하고 있다. 독립적 형태로 새롭게 관계 맺는 느낌으로, 드라마 차원에서 보면 희망은 없으나 형식적 측면에서는 새로운 관계성이 채워지고 있다. 한 여자가 새로 태어날 아기를 손으로 보이지 않는 제스처로 보여주고 있는 장면에서도 마찬가지다. 애가 태어난다는 건 보여줄 수 없지만. 보이지 않는 미래의 상태를 가시화한 것이다. 양을 도살하고 있는 장면과 병치될 때, 희망이나 미래가 열려있지만 한편으로는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절차 안에 포섭되어있는 느낌을 준다. 비극적이고 희망없음과 온화한 느낌들을 동시에 전달해주고 있다.

 

정리하자면 영화가 성취하는 건 일상의 영역을 인물의 정서나 감각의 상태를 통하여 전달하려는 것이다. 일상적인 영역 안에서 보여지는 제스처나 에피소드 안에 단지 즉각적으로 포착하기 보단 그 안에 내재되어지는 과거, 진행될 미래적 상태, 가시화되지 않는 공동체의 과거나 역사들을 가시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를 위해 사용된 영화적 기법들은 영화적 조형성이라는 생각이 든다. 현재 안에서 정확히 환기될 수 없는 과거의 흔적들이 이들 삶 안에서 어떻게 느껴지고 표현되고 있는가. 영화의 강력함은 우리가 눈앞에서 보는 생생함에도 있지만 아직 볼 수 없는 것들에도 있다. 배경 음악인 블루스는 이들의 오랜 과거를 환기시킨다. 현재적 상태에서 강력하게 말해지진 않지만, 그 부분들을 영화라고 하는 장치들을 통해서 경험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하는 측면들이 영화의 흥미로운 지점들이다. 찰스 버넷이라는 감독이 만든 데뷔작이고, 이 영화가 시도하는 특징들이 지금보다도 더 흥미로운 부분들이 있다. 생생한 느낌들이 많다. 한편으로는 사회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는 형식들이 아직도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미국 사회 내의 소수자, 흑인들을 담아내는 그들을 이미지로서 표현해나가는 고민을 영화 안에서 살펴볼 수 있다. 70년대 이래로 흑인들의 표상, 여성들의 표상, 제3세계를 관습적인 영역 안에서 표현할 기회가 없었다. 그들 스스로가 자신의 이미지를 공적으로 표현할 수 없는 상태기 때문이다. <양 도살자>는 그런 것들을 표현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그런 측면에서 영화를 관람할 수 있을 것 같다. 영화가 보여 지는 정서적 느낌과 인물들이 놓인 상황 안에서 느껴지는 감각이 온전하게 체험되었다면, 영화가 시도하는 바가 성공하지 않았나 싶다. 아마추어적이고 아무런 일도 없으니까 지루하게 보이는 영화다. 하지만, 당시의 혹평에도 불구하고 신선한 느낌을 주는 영화 중 한 편으로 남아있다.

 

정리: 윤서연(관객에디터) | 사진: 최미연(자원활동가)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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