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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전/로버트 알트만 특별전

할리우드의 이단아가 바라 본 할리우드

지난 12월 2일 금요일 저녁 <플레이어> 상영 후 로버트 알트만의 영화에 애정을 바치는 영화평론가 김영진 교수의 강연이 이어졌다. 그 현장을 여기에 전한다.


김영진(영화평론가, 명지대 교수): <플레이어>(1992)는 할리우드에 대한 로버트 알트만의 복수극이라고 할 수 있다. 할리우드 사람들이 이렇게 비열하게 나온 영화가 또 있을까. <선셋대로>같은 영화처럼 ‘인사이드 할리우드’ 유형에 속한 영화들이 있지만, 이렇게까지 할리우드 내부 사람들을 비열하게 그린 영화는 그 전에도, 그 이후에도 없었을 거란 생각이 든다. 이 영화를 찍을 당시 알트만은 80년대 내내 할리우드 주류 바깥으로 추방된 채, 소규모 자본의 영화만 찍고 있었고, 거의 잊혀져가던 이름이었다. 마치 지금의 데이비드 린치 같았다. 그의 영화세계는 이미 빛을 발하고 있지만, 할리우드의 입장에서 보면 다시는 프로젝트를 맡겨서는 안 될 감독으로 찍혀있는 그런 상태였다. 할리우드의 내부 시스템이 변하기 시작했던 건 60년대 말부터이다. 메이저 스튜디오의 1세대들의 시대가 가고, 60년대 말부터 할리우드가 다국적 기업의 자회사 쯤으로 되고나서부터, 60년대 말부터 70년대 후반까지, 뉴 할리우드 시네마가 막 기승을 부릴 때, 젊은 감독들에게 완전히 권력을 내줬던 시기, 그래서 코폴라, 스콜세지, 드팔마 같은 사람들이 할리우드의 주류 감독이 되었던 아주 좋았던 시대가 80년 무렵에는 장렬히 끝난다. 이후 스필버그와 루카스가 주도하는 블록버스터의 시대가 열리고, 할리우드의 고급인력들은 아이비리그의 MBA를 가진 사람들이 차지하게 되는데, 오늘날 한국영화도 그렇게 되고 있는 셈이다. 이제 데이터에 의존해서 영화를 만드는 시대가 된 것이다. 영화 제작에 MBA 경영기법을 도입하면서 시나리오를 가지고 무작위로 모니터를 한다. 데이터로 만들어서 편집할 때도 모니터하고, <플레이어>의 마지막에도 나오지만, 그렇게 해서 영화의 엔딩도 바꾼다. 할리우드에서는 지금도 개봉하기 전에 시사회를 해서 엔딩을 바꾸는 일이 비일비재하다고 한다. 그런데 그렇게 한다고 영화가 좋아지느냐 하면 그건 아니다. 여하튼 그런 시대의 서막이 열린 게 80년대고 90년대는 이 영화에서도 나오지만 계속 할리우드의 자본이 갈아타면서 금융자본이 완전히 주도권을 쥐게 된다. 그러면서 할리우드가 이제는 완전히 돈을 물 쓰듯 하는데, 상당 부분은 필요 없이 물 쓰듯 하는 하게 된다. <플레이어>는 그런 과정 속에서 굉장히 물화되어가는 무의식들을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다.
70년대만 해도 관객들, 특히 대학생들이 굉장히 크리티컬했다. 미국영화의 해피엔딩의 시대가 가고 언허피엔딩의 시대가 와서 70년대의 대부분의 영화의 엔딩은 언해피엔딩이었다. 그런 영화들이 흥행을 했던 시대였고, 그때 알트만도 스타감독이 되었다. 알트만은 사실 뉴 아메리칸 시네마의 다른 세대와는 차이가 있다. 이미 50년대부터 텔레비전 작업을 계속 하면서 간간히 영화를 찍었던 감독인데, 굉장히 과시적이고 야심이 많았던 사람인 것 같다. 알트만은 굉장히 인습 파괴적이고 풍자적인 반전영화 <매쉬>를 만들어서 스타감독이 된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70년대의 알트만은 <매쉬>의 흥행으로 버텼던 셈이다. 그 영화가 기록적인 성공을 거뒀기 때문에 이후에도 계속 영화를 찍을 수 있었다. 알트만은 거의 모든 장르의 영화를 찍었는데, 이 사람이 찍으면 그 장르는 망가진다. 이를테면 <맥케이브와 밀러부인>에선 존 포드 이후로 이어져 왔던 웨스턴의 신화적 기운이 아주 속화된 채로 해체되어 버린다. 그러다가 크게 흥행적으로도 바쳐준 영화가 <내쉬빌>이다. 아주 이상적인 열망들이 있는 예술가를 보여주면서 서서히 다른 기운에 잠식 되어가는 쇼비즈니스의 이면을 보여주는 영화다. <대부>와 더불어서 70년대 대표적인 미국영화로 인식된다. 그 이후로는 다시 잘 안 풀리다가, <플레이어>로 다시 재기하는데, 그 이후의 과정도 그렇고, 알트만의 작업은 태작과 성공작을 계속 오가면서 그리 순탄치 만은 않았던 것 같다.
로버트 알트만은 스타일이 앞으로 튀어나올 때 영화가 망가지는 경향이 있는데, 이 균형을 잘 맞추고 있는 영화가 바로 <숏컷>이다. 이 영화는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걸작이지만, 그 뒤로 계속 굴곡이 있었다. 깐느영화제에 <캔사스 시티>를 출품했었는데,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진다. 미국에서는 알트만을 가리켜서 ‘유럽인이 되고 싶은 미국인’이라고 비웃고, 프랑스에서는 ‘할리우드의 레지스탕스’라고 존경해주었다. 알트만은 부침이 심한 그런 경력 속에서도 끝까지 반골기질을 갖고 있었다. 그의 냉소주의는 미국 영화감독 중에 이런 사람이 또 있었을까 싶을 정도다. 굉장히 차가운 온도로 끝까지 밀어붙인다.
<플레이어>는 꽤 흥행한 영화인데 알트만의 중에 가장 전통적인 플롯의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스타일면에서 특기할만한 건 사운드 오버랩이다. 화면에서 카메라가 곧잘 헤집고 다니는데, 스타일을 과시하기 위한 것이었기보다 예산 때문에 그렇게 했을 가능성이 크다. 짧은 시간 안에 촬영을 하기 위해 시도 했던 카메라 무브먼트가 스타일에 있어서도 굉장히 잘 들어맞았다. 사운드들, 대사들이 바톤 터치하듯 진행되면서 디졸브와 오버랩이 많이 된다. <매쉬>같은 영화에서 사운드도 딥포커스가 가능하구나 싶을 정도로 정말 창의적으로 했던 것에 비하면 <플레이어>에서는 그리 과하게는 안했다. 알트만은 사운드에 뛰어난 감을 가지고 있는데, 이 영화에서는 줌을 통해 공간을 신축성 있게 좁혔다 넓히면서 드라마를 움직여가는 가운데, 소리를 아주 민감하게 잘 조절하고 있다.
알트만에 대해서 대체로 호의적인 평을 썼으며, 지속적인 후원자였던 사람 중에 한 명이 폴린 카엘이라는 평론가이다. 지금은 미국도 마케팅이 세지면서 사실 평론이 개입할 틈이 없어지고 평론이 거의 사멸해 가고 있지만, 70년대까지만 해도 비평이 힘이 있었기 때문에 폴린 카엘이 지지한다고 하면, 영화가 흥행하고 그랬었다. 그녀는 알트만에 대해 지속적으로 호의적이었다. 반면 로빈 우드 같은 평론가는 알트만에 대해서 비판적이었다. 그의 저서 『베트남에서 레이건까지』를 보면 초반부에 알트만 영화에 대한 비평이 있는데 ‘젠체하는 속물’ 이라는 과격한 표현을 쓰고 있다. 미국평론가들이 속물이라는 거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드 팔마는 히치콕을 베낀다고 해서 독창성이 없다고 평생 비판을 받았고, 미국 내에서 호의적인 평을 받은 적이 없었던 데 반해, 알트만에 대해선 미국평론가들이 굉장히 높게 평가한다. 안토니오니 같은 유럽 영화의 영향을 받아서 예술 영화를 추구하니까. 루빈 우드가 보기에는 장르를 가지고 폼을 잡고 있으니 안 맞는다는 거라고 하면서, 혁신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이비혁신에 불과하다고 비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트만의 모든 영화들이 70년대의 미국영화와 사회에 만연해 있던 어떤 재앙·파국의 느낌, 한 사회가 총체적으로 무너지고 있다는 느낌을 잘 재현하는 감독이라는 평가 내리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알트만의 영화 중에 <숏컷>이나 <내쉬빌>을 좋아한다. 알트만은 영화감독으로서 여하튼 계속 영화를 찍었다는 것, 이게 굉장히 중요한 것 같다. 그래서 그의 실패작도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실패작을 찍으면서도 계속 작품 활동을 할 수 있다는 점, 태작과 실패작과 가끔씩 걸작을 찍으면서, 그러면서도 시종일관 반골정신, 냉소주의, 시니컬한 태도로 팔십 평생을 일관하면서, 형식·주제·태도를 관통하는 영화들을 계속 찍었다는 점이 대단하다. 점점 이런 사람을 보기가 힘든 시대를 살고 있는 게 아닐까. 요즘의 상황은 점점 더 힘들어지고 있다. 자본의 매커니즘이 더욱 세져서, 아예 초저예산으로 가거나 하지 않으면 이런 식으로 영화를 만들기가 어렵다. 영화 감독은 물론 재능도 중요하지만, 뚝심·베짱이 진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알트만은 그런 면에서 보면 해볼 거 다해본 사람이고, 그런 게 진짜 영화감독이 아니겠냐는 생각이 든다. <플레이어> 베짱있는 반골 감독의 아주 흥미로운 소품이다. 영화가 그리 정교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속도감으로 밀어붙인다. 플롯의 허점이 많지만 그냥 넘어가게 되는 것이다. 속도감으로 밀고나가면서 결국 플롯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 할리우드 피플들에 대한 얘기, 영화사 책임자의 방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 가에 대한 얘기에 대한 재미를 느끼게 된다. 알트만의 후기 영화의 징검다리를 역할을 하는 영화이면서, 할리우드 시스템에 대한 통렬한 고백이다.



관객1: 마지막 작품 <프레니 홈 컴패니언>은 알트만의 이전 작품들에 비해 굉장히 따뜻한 영화이다. 원래 성향에 비해 다른 느낌이었는데, 이 영화에 대한 얘기를 들려주실 수 있는지.
김영진: 말씀하신대로 의외로 따뜻한 알트만의 영화이다. 존 휴스턴의 유작 <죽은 자들>을 보면,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이 원작이어서 그런 것도 있지만, 죽음이 임박해서 남기는 작업이라는 어떤 느낌들이 있다. <프레니 홈 컴패니언>을 만들 때, 알트만은 계속 몸이 안 좋았었다. 영화를 보면 왠지 따뜻하게 안녕 하는 느낌이 있다.

관객2: 혹시 이런 내용을 충무로를 배경으로 만든다면 어떤 감독이 할 수 있을까.
김영진: 제가 보기엔 없을 거 같은데..(웃음) <플레이어> 보다 훨씬 부드러운데, 60년대에 김수용 감독의 <어느 여배우의 고백>이라는 영화가 있다. 한국영화의 비하인드 스토리 같은 이야기에 정형적인 신파스토리가 덧붙여있다. 당시 한국영화의 환경에 대한 부분들이 재밌다. <플레이어>는 할리우드 입장에서는 독립영화 정도의 제작규모이고, 메이저 자본으로는 찍기 힘든 영화다. 우리나라는 완전히 양극화이다 보니 이런 조건에 있는 감독이 일단 없다.

정리: 장지혜 관객 에디터 사진: 조유성 자원 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