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르 드니 회고전 상영작 리뷰]


몸의 리듬이 전부라 말하고 싶은 - <좋은 직업>(1999)



클레르 드니의 <좋은 직업>은 진행되는 내내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육체의 선율에 경도되게 하는 영화다. 하지만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그런 말조차 궁색하게 느끼도록 해버린다. 적어도 이 영화를 말하는 데 있어서만큼은 드니 라방이 “이것이 삶의 리듬”이라는 가사의 노래에 맞춰 무지막지한 막춤을 추는 모습에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언어를 동원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이 순간을 언어화하기 위해 이제까지의 영화를 어떤 식으로 설명해야 하는가 고민하게 되는 동시에, 그런 언어화를 경유해 설명되어서는 결코 안 되는 순간이 아닌가란 고민도 하게 된다. 어느 쪽으로 기울어 생각을 이어나가든 그에 앞서 말하고 싶은 건 그것이 맞닥뜨리는 순간 무심코 이 영화에서는 몸의 리듬이 전부라 말하고 싶은 충동을 일으키는 엔딩이라는 점이다.



마지막 장면에 담긴 몸의 리듬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이 영화의 서사와 배경을 들여다보는 것이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원작인 허먼 멜빌의 『수병 빌리 버드』의 영향이나 프랑스와 프랑스 식민지 아프리카 사이의 역사, 중심 인물들의 관계 구도와 진행이 이 영화에서 어떤 식으로 나타나고 있는지 파악해 나가며 보는 방법이다. 그랬을 때 이 영화가 어떻게 자연과 문명, 신화와 역사, 은유적 허구와 직접적 기록, 무심한 세계와 인간적 행위 사이를 넘나들며 모호하면서도 섬세한 방식으로 보는 이의 감각을 자극하는지 더 잘 이해할 수 있으리라 짐작한다. 실로 마지막 장면을 접하기 직전까지는 그런 교양 지식을 결여한 자신의 감상 태도를 다소 탓하며 보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드니 라방의 춤이 시작됨과 동시에 우리는 스스로에게 그러한 지적 활동 의무에 대한 면죄부를 주려고 하면서 그저 멍하게 스크린을 바라보게 될 뿐이다.



마지막 장면에 담긴 몸의 리듬을 더 잘 느끼기 위해서는 자신의 무지함에 대한 인정이 차라리 도움이 되는지도 모른다. 이 춤의 정체에 대해 말하자면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제까지 이 영화에 있어 왔던 다른 춤들과의 차이점들을 말할 수는 있을 것 같다. 군무가 아니라 독무다. 구호나 호령에 맞춘 각 잡힌 춤이 아니라 음악에 따라 마구잡이로 흘러가는 막춤이다. 훈련된 육체의 절제미를 지닌 춤이 아니라 무언가에서 풀려난 육체의 폭발력을 지닌 춤이다. 그런데 이 마구잡이의 독무를 통해 폭발력을 발휘하고 있는 이 육체를 놓고 불가피하게 추방된 육체라 해야 할지 비로소 해방된 육체라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상도 야심도 목표도 없이 흡사 패잔병처럼 자기만의 방에서 살아는 부대장 포르시티에의 세계, 아름다움도 선의도 영웅의 존재도 불가능해진 세계에서 다수에게 그것의 가능성을 탐하게 하는 신참병 상탕의 세계, 그 사이에서 자신에게 남아있는 진실된 세계는 전자뿐이며 후자는 허위의 세계일 뿐이라 믿는 듯한 드니 라방은 후자의 세계를 끝장내 버리면서 전자의 세계로부터도 영원히 쫓겨나길 택했기 때문이다. 그 뒤에 자리하는 그의 춤은 그래서인지 추방당한 자의 비죽거림 같기도 하고 해방된 자의 발광 같기도 하다.


이 위험하고도 눈부신 엔딩이 가능했던 것은 드니 라방이란 배우의 덕이 큰 것 같다. 부드러움과 사나움, 자기통제와 방탕함, 아름다움과 추함이 언제 어느 쪽으로 쏠릴지 알 수 없이 대단히 불균형한 상태로 응집돼 있다는 느낌을 주는 육체, 그 육체가 우리로 하여금 우리에게 주어진 언어와 역사와 세계로부터 벗어나 있는 어떤 삶의 리듬을 무방비하게 감각하게 한다.

이후경 영화평론가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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