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영작 리뷰]


관객의 무력한 위치 - <백인의 것>(2009)



많은 경우, 클레르 드니의 영화는 그리 친절하지 않다. 특히 드니의 이야기 전달 방식은 표준적이고 양식화된 스토리텔링 형식을 크게 벗어난다. 그녀는 이야기의 인과 관계를 생략하고 인물이나 사건에 대한 주요 정보를 누락시키기도 한다. 때로는 시간을 뒤섞은 다음 그에 대한 지표도 제시하지 않는다. 심지어 꿈이나 상상 장면을 현실인 것처럼 그리기도 한다. 당연히 관객은 혼란을 느낄 수 밖에 없다. 이야기를 명확하게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백인의 것> 역시 마찬가지다. 이 영화는 비교적 간단한 사건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감독은 인물들에 대한 정보나 인물들간의 관계, 그리고 주요 사건에 대한 인과 관계를 생략한다. 이를테면 관객은 마리아가 생명이 위험한 상황 속에서도 왜 그렇게 농장에 집착하는지 알 수 없으며, 아들 마누엘이 왜 갑자기 비정상적 행동을 보이는지에 대해서도 알 수 없다. 마리아와 반군 지도자 복서와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다(둘은 왜 이렇게 에로틱하게 그려진걸까). 결국 관객은 제한적인 정보를 통해 이런저런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즉 영화 속 이야기에 대한 뚜렷한 상을 파악할 수 있는 가능성 자체가 애초에 차단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연출 방식은 ‘할리우드 스타일’의 양식화된 인과 관계에 대한 거부일 수도 있고, 관객들을 영화의 의미 생성 과정에 능동적으로 참여시키려는 의도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이런 맥락으로도 쉽게 이해하기 힘든 이미지가 하나 있다. 바로 영화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검게 탄 시체다. 이야기의 흐름상 이 시체가 누구인지는 매우 중요한 정보이다. 하지만 감독은 이 시체를 불태워버림으로써 이를 특정 인물로 인지할 수 있게 만드는 지표(인종, 성별 등)를 지워버린다. 앞뒤 상황으로 비춰보아 마리아의 아들 마누엘이 아닐까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이는 마리아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 먼 거리에서 불탄 시체의 신원을 구분하기는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시체는 결과적으로 <백인의 것>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지금까지 어떻게든 이성을 유지하려 했던 마리아는 이 시체를 본 뒤 이성의 끈을 놓아버리고 한 인물을 잔인하게 살해한다. 그리고 이 행위를 통해 쉽게 잊기 힘든 강렬한 정서적 파장을 만들며 이야기를 끝낸다. 단적으로 말해 이 시체는 영화의 의미 체계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 충격 효과는 의미 체계 안에서 안정적인 자리를 찾지 못한다. 이 사건을 촉발시킨 시신의 이미지가 실은 텅 빈 구멍과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만약 이 시신이 마누엘의 것이 아니라면? 또는 마누엘이 무사히 살아있다면?). 그렇기 때문에 <백인의 것>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이상하고 부조리한 영화로 남는다. 하지만 클레르 드니는 이 문제에 대해 답이나 실마리를 제시할 생각이 없다. 이는 소위 ‘열린 결말’과도 다르다. 열린 결말이라면 관객이 영화 안에서 발생 가능한 이야기들을 상상할 수 있지만 이 영화의 경우에 관객은 그냥 무지無知의 자리에 서 있어야 한다. 앎 앞에서 무력함을 느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삶의 불가해한 근본적 속성을 영화 안에 구현하려 한 클레르 드니의 연출적 전략이 아닐까 짐작해본다. 하지만 그로 인해 영화 <백인의 것>은 디제시스적 세계 내에서 발생 가능한 어떤 의미를 추구하려는 시도를 스스로 포기하고 만다. 이는 공들여 어떤 세계를 만든 뒤 그 안에 있는 의미를 알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고, 또는 다른 사람들이 의미를 좇을 수 없게 통로를  막아 버리는 것이다. 시니컬하게까지 느껴지는 연출자의 이러한 태도는 이 영화 앞에서 선뜻 마음을 여는 걸 주저하게 만든다. 그렇게 관객인 나는 <백인의 것> 앞에서 무력하게 길을 잃을 수 밖에 없다.


김보년 프로그램팀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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