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페데리코 펠리니의 <8과 1/2>


1962년 5월 9일, 페데리코 펠리니는 드디어 새 영화의 촬영을 시작했다. 각본가 엔니오 플라야노가 생각해낸 <아름다운 혼란>이란 제목 대신 펠리니가 택한 건 <8과 1/2>이었다. 여기서 왜 <8과 1/2>이냐고 묻는 건, <카비리아의 밤> 이전의 펠리니가 네오리얼리즘영화의 작가인지, <달콤한 인생> 이후의 펠리니가 진정한 모더니스트인지 질문하는 것만큼 중요하다. 그때까지 펠리니는 6편의 장편영화를 연출했고, <다양한 불빛>을 공동으로 찍었으며, <도시의 사랑>과 <보카치오 ‘70> 중의 두 에피소드에 참여했다. 그러므로 <8과 1/2>은 막 출발한 영화의 작품번호에 해당한다. 불가피한 표제예술인 영화에 작품번호를 제목으로 부여함으로써, 펠리니는 새 영화가 ‘자기 반영’의 산물임을 명확하게 밝힌다. 자기 영화의 뿌리를 배신한 끝에 길을 잃어버렸다는 비판을 듣던 당시, 펠리니가 자신을 향해 카메라를 돌린 이유는 무엇일까? 유럽영화에서 1959년은 할리우드영화의 1939년에 해당한다. 1939년 한 해에 <역마차>, <스미스 씨 워싱턴에 가다>, <오즈의 마법사>, <천사만이 날개를 가졌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쏟아내며 정점에 올랐던 할리우드는 20년이 지난 1959년에 이르러 작가의 깃발을 유럽에 넘겨주게 된다. 1959년과 1960년에 걸쳐 <400번의 구타>, <네 멋대로 해라>, <소매치기>, <히로시마 내 사랑>, <정사>, <마법사>, <오르페의 유언>, <로코와 그의 형제들>, <태양은 가득히> 등이 영화의 역사를 새로 쓸 동안, 펠리니는 로마의 상류사회를 해부한 <달콤한 인생>을 만들었다. 그리고 1960년 칸영화제에서 <달콤한 인생>이 황금종려상을 받는 순간, 펠리니는 유럽영화 르네상스의 최대 공헌자로 등극한다. 이상한 일은 그 뒤에 일어났다. 국제적인 영광을 거두었음은 물론 스캔들의 중심에 섰던 <달콤한 인생>은 역설적으로, 창조력의 고갈을 한 번도 맛보지 않았던 펠리니에게 위기를 안긴다. 10년 동안 쉬지 않고 영화를 만들어 왔던 감독은 창작자로서 절정의 시기인 마흔에 이르렀는데, 하필 그 시간에 ‘한 인간에게 주어진 창조의 영감은 10년 정도만 지속하는 게 아닐까?’ 하는 의문을 품는다(어느 날 저녁, 카드점을 본 펠리니에게 카드는 ‘지옥 깊은 곳의 어떤 구멍에 빠진 당신은 도망갈 수 없을 정도로 나무뿌리와 사슬에 꽁꽁 휘감겨 있다’라고 일러줬다). 창작의 출구가 막힌 작가를 주인공으로 설정해 가까스로 이야기를 구상하던 펠리니는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밤>을 접한 다음 더욱 혼란에 빠진다. 마르첼로 마스트로얀니가 작가로 분한 탓이었다. 마스트로얀니에게 다시 작가를 연기해달라고 부탁할 수는 없지 않은가. 어떻게 할지 몰라 고뇌를 거듭하던 펠리니는 주인공의 얼굴에서 자신의 그것을 발견하면서 돌파구를 찾는다. 위기에 처한 인물은 펠리니의 모습에 다름 아니었고, 그렇다면 그 인물은 필히 영화감독이 되어야만 했다. 얼터 에고인 마스트로얀니의 몸속으로 들어간 자신을 상상해낸 펠리니는 곧바로 플라야노에게 달려가 영화의 아이디어를 통째로 들려준다. <8과 1/2>은 그렇게 시작됐다. ‘자기 반영’이 모더니즘 예술의 한 잣대라면, 1963년은 모던 시네마가 한 획을 그은 해다. 펠리니가 <8과 1/2>을 발표한 그해 말 장 뤽 고다르는 <경멸>을 내놓는다. 텅 빈 치네치타 스튜디오를 찾은 프랑스인 각본가에게 제작자의 비서는 ‘이탈리아 영화의 곤경’을 이야기하고, 미국인 제작자는 ‘영화의 종말’을 외치며, 고용된 감독 프리츠 랑은 힘없는 위치를 감내한다. 마침내 제작자와 각본가의 아내는 피 흘리며 죽고, 각본가는 현장을 떠나지만, 감독 랑은 자리에 남아 영화를 지킨다. <8과 1/2>은 <경멸>의 선언에 대한 앞선 대답처럼 보인다. <8과 1/2>은 시작한 영화를 반드시 끝내야 했던 어떤 감독의 이야기다. 그런데 정작 펠리니 자신은 극중 감독처럼 영화를 어떻게 끝맺을지 모르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영화가 죽었다’라고 말할 마음이 없었다. 기록으로 남아있는 자료와 사진을 굳이 보지 않더라도, 펠리니가 영화에 대해 얼마나 확신을 지니고 있었는지는 만들어진 영화를 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8과 1/2>의 주인공 귀도 안셀미는 43살의 영화감독이다. <8과 1/2>을 본 사람은 영화가 혼란스러워서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하기 일쑤인데, 사실 혼란에 빠진 건 귀도의 머릿속이다(오히려 영화는 정신없는 인물의 세계를 일목요연하게 드러내고 있다). 펠리니의 영화를 다룬 책을 여러 차례 저술한 툴리오 케지치(그는 2009년에 마지막 저서 ⌜페데리코 펠리니의 영화⌟를 완성한 후 세상을 떠났다)는, 칼 구스타프 융의 제자인 에른스트 베른하르트에게 펠리니가 받은 정신분석이 <8과 1/2>에 끼친 영향의 중요성을 종종 역설하곤 했다. 비토리오 데 시카의 조언에 따라 베른하르트를 소개받은 펠리니는 치료 과정에서 내면의 삶에 대한 확고한 관점을 얻었고, 생각과 감정과 꿈의 흐름이 영화의 주제로 이끌리는 과정을 경험한 결과가 <8과 1/2>에 반영됐다는 것이다. 감독으로서 펠리니가 떠올렸던 최고의 악몽은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은 채 억지로 영화 현장에 도착하는 것이며, 그럴 때 그 감독은 현장에서 도망치고 싶은 욕망에 끊임없이 시달리게 된다. <8과 1/2>은 그러한 상황에 처한 감독의 악몽으로 시작한다. 꽉 막힌 도로에서 차에 앉아 있는 주인공은 숨이 막혀 허덕이지만, 주변의 사람들은 그의 긴박한 상황에 관심이 없다는 듯 바라볼 뿐이다. 힘을 다해 겨우 차 밖으로 빠져나온 그는 죽음으로부터 부활해 하늘로 비상하는 자유를 누린다. 그러나 해변으로 뒤따라온 제작진이 귀도의 발목으로 이어진 끈을 잡아당기자, 그는 바닥으로 추락하고 만다. 꾀병을 부려 2주간의 간병휴가를 얻은 감독의 입장을 단적으로 묘사한 도입부의 악몽 시퀀스는, 이후 꿈과 현실과 환상이 뒤섞여 전개될 <8과 1/2>을 대표하고 있다. ‘영화 제작’, ‘여성과의 관계’라는 두 영역으로 나뉜 현실은 귀도에게 주로 위기로 작용한다. 자비로운 웃음과 닦달하는 눈길을 동시에 지닌 제작자는 귀도가 어서 영화를 만들기를 바라고, 에이전트와 배우들은 역을 얻고자 시시때때로 귀도를 괴롭히고, 평론가와 기자들은 귀도가 만들어온 영화가 감상적이고 시대정신이 모자란다고 비판하는데, 밤늦도록 의상과 미술 작업에 여념이 없는 제작 스태프들은 준비가 전혀 안 된 귀도의 마음을 쓰라리게 한다. 다른 한 편에선 여성들이 등장해 귀도의 빈곤한 정신과 서투른 연애질에 어지러움을 더한다. 한없이 가벼운 성격의 정부는 철없는 행동을 일삼고, 그녀에 대한 질투와 남편에 대한 실망에 사로잡힌 아내가 귀도를 공격하는 가운데, 새로 나타난 매력적인 여자들은 그의 눈과 욕망을 사로잡는다. 현실의 위기에 빠질 때마다 귀도는 기억을 되살리고 환상을 갈망하는 행동으로 대처한다. 과거의 기억은 때때로 죽음과 억압과 죄의식의 상처를 동반하지만, 농장에서의 포도주 목욕 장면과 거대한 몸집의 창녀 사라기나가 나오는 해변 장면에서 보듯 대체로 따뜻하고 순수한 시공간으로 귀도를 이동시킨다. 귀도가 보다 적극적으로 도피하는 곳은 환상의 땅으로서, 과거 기억 속의 농장과 대구를 이루는 하렘의 판타지는 <8과 1/2>에서 가장 인상적이고 역동적인 장면을 연출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여자들이 모두 출동해 집인 동시에 하렘인 공간으로 돌아온 귀도를 환대하며, 목욕을 마친 귀도가 어린아이라도 되는 양 흰 천으로 감싼다. 그러다 갑자기 벌어진 여자들의 반란을 채찍 하나로 다스리는 귀도의 모습은, 안팎의 상황을 정말로 능수능란하게 통제하고 싶은 내면의 열망을 대변한다. 그러나 과거의 기억과 환타지를 드나들면서도 현실의 귀도는 결코 마음의 평화를 얻지 못한다. 구원과 해답을 찾아 꿈의 여인 클라우디아와 추기경의 환영에 수차례 매달려보지만, 결과는 마찬가지다. 기자회견장에서 귀도는 끝내 자살극의 주인공으로 화한다.


귀도를 미치도록 괴롭히는 것의 정체는 무엇일까? 현실? 환상? 기억? 답은 영화일 것이다. 귀도라는 인물의 현실과 환상과 기억을 복잡하게 직조해 펠리니가 완성하는 것은 한 편의 영화다. ‘세상에 명백한 건 없다. 그래서 혼돈스러운 현실을 인식하기 위해 의심해야 한다. 혼란스러울수록 창작의 의미가 되살아난다.’라는 펠리니의 말은 <8과 1/2>에서 몸과 생명을 얻는다. 세월이 흐르면서 <8과 1/2>의 영향 아래 있는 무수한 작품이 비슷한 인물과 이야기를 꾸며봤으나, 그 중 어떤 작품도 펠리니의 마법을 재현하진 못했다. 그 이유는 귀도가 마지막으로 고백한 진실이 너무나 거대해 흉내 내는 것조차 힘들기 때문이다. <8과 1/2>을 진실에 관한 이야기로 끝맺고 싶었을 펠리니는, 영화의 클라이맥스에 도달하기 전까지의 귀도를 정직하지 못한 인물로 그린다. 영화제작에 몰두하고 욕망에 충실한 것처럼 보이는 귀도는 상대방은 물론, 자신에게도 솔직하지 않다. 상대방의 요청과 주문에 딴청을 피우거나, 자리를 떠나거나, 무시하는 방식이 몸에 밴 그는 진실하지 않다는 추궁을 당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영위하는 기만의 삶을 직시하지 못하는 그는 ‘정직하다는 게 대체 무슨 뜻이야!’라며 대항할 따름이다. 파티장에서 그가 피노키오의 코를 달고 있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귀도는 무의식중에 거짓된 자아를 털어놓는 게다. 나쁜 상황들을 초래한 게 전부 귀도란 걸 알게 하기 위해 영화는 진실에 관한 질문을 계속 던진다. 파티장의 미국인은 ‘진실한 영화’를 창조할 수 있느냐고 묻고, 몸이 아픈 정부는 ‘왜 나랑 만나는지 진실을 말해줘.’라고 애원하고, 부인은 ‘진실을 말하는 것처럼 거짓을 말한다.’며 화를 내고, 귀도 스스로도 ‘정직한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라’고 읊조린다. 그리고 <8과 1/2>은 진실과 대면하는 순간으로 귀도를 인도한다. 자신에게로 눈을 돌린 귀도는 자기가 거짓말쟁이이며 할 말이 하나도 없는 무능하고 어리석은 감독이라는 부끄러운 사실을 인정하고, 되고 싶은 ‘나’가 아닌 존재하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인다. 순수를 상징하는 흰옷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씩 돌아오는 클라이맥스에서, 진실과 열정과 영감이 살아난 곳에서 영화는 새롭게 시작한다. 죽은 자들이 귀환하고, 귀도를 괴롭히던 사람들이 웃음 지으며 다가오고, 귀도의 마음에서도 앙금이 가신다. 앞서 증기탕으로 하강하는 인물들이 단테의 지옥편을 재연한 것과 반대로, 모든 출연자들이 천상에서 지상으로 내려와 손에 손을 잡고 원을 그리며 춤을 춘다. 영화의 마지막 이미지들은, 사람을 사랑하고 받아들이는 것에 행복이 존재한다고, 인생은 축제라고, 인생을 함께 살자고 말한다. 한 다큐멘터리에서 펠리니는 후배감독들에게 ‘자신을 솔직하게 말하는 영화를 만들라.’고 충고했다. 극중 텔레파시 쇼에 나오는 비밀의 언어 ‘아사 니시 마사(ASA NISI MASA)'는 ’영혼(ANIMA)'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영화를 만들면서 결코 영혼을 팔지 않은 감독의 상징이기도 하다. 진실한 자세로 영화를 만드는 감독의 이야기이기에 <8과 1/2>은 이토록 감동적이다. 몇 년 전, 나는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어머니와 함께 <8 1/2>을 보았다. 의자 위로 짧은 다리를 흔들거리는 와중에도 어머니는 스크린에서 눈을 떼지 않고 영화를 감상했다. 영화가 끝난 뒤, 어머니는 행복하다고 했다. 그녀가 난해한 영화를 어떻게 이해하고 좋아하는지, 그 때는 신기하기만 했다. 지금은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8과 1/2>이 펠리니 식 아방가르드인지, 혹은 귀도가 말한 대로 치유될 수 없는 몽상가의 기록인지, 아니면 바로크 식 고전영화인지 증명하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진실하지 않으면 진정한 예술을 꽃피울 수 없음을 깨닫는 것이다. 50년에 가까운 시간이 흐른 지금, <8과 1/2>의 가치를 조금이라도 깎아내리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글: 이용철_영화칼럼니스트)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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