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6. 21. 20:23ㆍ회고전/페데리코 펠리니 회고전
[영화사강좌1] 한창호 영화평론가가 들려주는 펠리니의 미술세계
페데리코 펠리니 회고전이 한창인 지난 16일 저녁 8시 서울아트시네마에서 펠리니의 작품세계를 보다 폭넓게 들여다 볼 수 있는 기회로 마련한 ‘펠리니의 달콤한 영화읽기’란 영화사강좌가 시작되었다. 총 5회로 구성된 이 프로그램의 첫 강연자는 이탈리아 영화와 미술에 조예가 깊은 한창호 영화평론가. <사티리콘>을 중심으로 그가 들려준 펠리니의 미술에 관한 강연 일부를 여기에 옮겨본다.
한창호(영화평론가) : 오늘 강의는 크게 두 가지로 이야기를 좁혔습니다. 하나는 <사티리콘>이라는 작품 자체가 영화사에서 익숙한 작품이 아니라 먼저 <사티리콘>에 대해 잠깐 설명을 드리고, 그 다음에 미술에 관해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특히 오늘 저와 같이 보신 <사티리콘>을 중심으로 이야기 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사티리콘>이라는 작품은 얼마 전 우리나라에도 원작이 번역되어 나왔습니다. 영화에서 나타나듯이 에피소드들이 연결되어 있지만 파편화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하나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독립적인 성격을 가집니다. 각 에피소드들을 연결할 수 있는 토대는 엔코르피오라는 인물인데, 엔코르피오가 애인인 지토네를 자기 곁에 두기 위해서 벌이는 모험과 투쟁이 이어집니다. <사티리콘>은 로마시대의 정통적인 문학은 아닙니다. 그 당시에는 비극이 문학으로 대접받았는데, 이 작품은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사티리콘, 즉 satire-풍자에 관련된 코미디이기 때문에 교육받은 사람들에게 대접받는 문학은 아니었습니다. <사티리콘>은 로마시대 하층민들의 일상과 그들의 자유분방한 성생활을 적나라하게 알 수 있는, 에로스에 관련된 이야기들이 굉장히 많이 등장하는 작품입니다. 어떻게 보면 펠리니의 주제와도 맞는 작품이었습니다.
만약 이번 회고전에서 단 하나의 작품을 봐야한다면 <8과 2분의 1>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8과 2분의 1>에서도 볼만한 프로덕션 디자인이 굉장히 많습니다. 구체적인 예를 들면, 펠리니가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장면, 어린 펠리니가 목욕하기 싫어서 도망을 다니는 장면이 있습니다. 어린이들과 침대에서 뛰어 놀던, 이성이 들어오기 전 굉장히 행복했던 혹은 행복했을 것이라고 상상하는 유아기를 다루는 그 시퀀스입니다. 그리고 어른이 된 후의 장면에서는 공원에서 아들의 애인을 보고 곤란한 나머지 판타지로 들어가는 시퀀스입니다. 판타지는 아랍계의 할렘인데, 모든 여자가 전 세계에 존재하는 유일한 남자인 자신를 위해 봉사하는 그 공간의 디자인은 여성들이 주로 등장하기 때문인지 부엌과 목욕탕 등이 중심공간으로 나옵니다. 그런데 부엌이라는 공간, 여성들의 일상을 보여주는 부엌과 식당은 미술에서는 17세기 바로크 시절의 네덜란드 장르화의 고정된 공간입니다. 베르메르의 그림을 떠올리면 기억이 날 겁니다. 그 공간에서 머리에 흰 수건을 두른 여자들이 일하고 있는 것이 17세기 네덜란드의 바로크 장르화의 표준적인 모습입니다. 이러한 스탠다드한 표면이 <8과 2분의 1>의 디자인에 인상적으로 나와 있습니다.
하나 더 덧붙이자면, 피에르 게라르디가 마지막으로 참여한 <영혼의 줄리에타>에서의 여성 패션을 들 수 있습니다. 이탈리아 감독들 중에서 패션에 관해서는 영화사를 통틀어서 루키아노 비스콘티가 최고입니다. <영혼의 줄리에타>에서 펠리니의 세련된 패션 감각이 드러나지만 비스콘티와는 차이를 보입니다. 다른 점은 비스콘티는 대단히 프루스트적이라는 것입니다. 재현할 때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현실보다 더 이상화해서 재현하기 때문에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 다시 말해 죽은 대상에 대한 애도를 하는 것이 비스콘티 영화의 특징입니다. 그래서 영화를 보고 난 후에 의상만 봐도 눈물이 나는 그런 부분이 있습니다. 펠리니 영화에도 대단히 세련된 의상이 등장하지만 그 의상으로 풀어내는 이야기는 사티리콘, 그러니까 풍자입니다. 옷을 가지고도 웃깁니다. 이 점이 역시 탁월한 광대였던 펠리니의 큰 특징입니다. 오늘 같이 봤던 1969년작 <사티리콘>을 만들 때 펠리니는 다니노 도나티라는 마에스트로를 만납니다. 지옥과 같지만 숭고미가 있는 공간으로 자신 영화의 미술 프로덕션 컨셉을 잡아갈 때, 펠리니는 바로 <사타리콘>을 출발점으로 뒀습니다.
간단히 정리하겠습니다. 왜 펠리니는 정신없을 정도로 미술사를 끌어와서 작품을 만들었을까요? 이전의 작품에서도 조금씩 그런 경향을 보였지만 특히 <8과 1/2>부터 펠리니는 전통적인 영화 만들기와 완전히 결별합니다. 그래서 <8과 1/2>부터는 스토리, 내러티브를 풀어놓습니다. 인과관계에 따른 논리적인 소위 할리우드식 웰메이드가 영화의 한계를 만든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펠리니는 영화의 한계를 한정짓는 것을 거부하고, 영화라는 매체는 스토리만 만드는 것이 아니고 또 다른 한계를 멀리 확장시켜준다고 생각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8과 1/2>을 만들면서 펠리니는 스토리를 풀어놨습니다. <사티리콘>은 1960년대의 반영성을 드러내는 작품인데 미술은 그 자체로 독립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쉽게 설명을 하자면, 음악은 많은 경우에 스토리를 관객들에게 제대로 전달하기 위해서 내러티브를 보완하는 장치로 쓰였습니다. 다시 말해 음악 자체가 내러티브와 동일했는데, <사티리콘>에서 펠리니는 미술을 내러티브를 보완하기 위한 수직적인 상하관계의 보완장치로서가 아니라 미술 그 자체를 독립적으로 은유적으로 썼습니다. 그래서 할리우드적인 영화 만들기 즉 히치콕이나 존 포드와 같이 수학적으로 앞뒤가 딱 맞는 그런 영화들에 굉장히 갑갑증을 느꼈고, 그렇게 만들어서 영화의 표현이나 한계를 축소시키는 것에 반대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미술을 은유적으로 제시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종합시키는 것은 관객의 몫입니다. 그래서 60년대 이후의 모더니즘 영화들에 펠리니가 영향을 끼쳤다고 보여집니다. 펠리니는 광대의 이미지를 갖고 있지만 영화 형식 자체의 본질적인 부분에 대해서 고민하는 사람이었고, 중요한 아티스트라고 생각합니다. (정리: 최인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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