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울의 클래식 영화사 강좌 [1]

지난 12월 30일 한겨울의 클래식 상영작 중 <자브리스키 포인트> 상영 후에 첫 번째 영화사 강좌로서 김성욱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의 강연이 열렸다.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사막’이란 제목으로 안토니오니의 영화 세계 전반을 살펴보았던 그 시간을 여기에 담아본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 <자브리스키 포인트>는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영화 가운데 가장 떨어지는 작품으로 이야기 되며 동시에 별로 많이 논의되지 않는 작품 중 하나다. 미국 사회나 당시의 분위기로 보면 <이지 라이더>처럼 특정한 사회적 격변 이후의 젊은이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만든 영화다. 일단 이 영화가 개봉했을 당시의 상황을 조금 말씀 드리자면, 카를로 폰티라는 이탈리아의 큰 제작자가 안토니오니를 미국으로 끌어들이려는 여러 가지 시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미국으로 간다는 건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에 먼저 영국으로 건너가서 MGM과 만든 영화가 <욕망>이다. <욕망>은 이상할 정도로 흥행에 큰 성공을 거두게 되고, 그 덕분에 미국으로 건너간 안토니오니는 MGM과 세 편 정도의 영화를 계약하게 되는데, 그 첫 번째 작품이 <자브리스키 포인트>이다. 안토니오니라는 감독이 유럽에서 굉장히 모던한 영화를 찍어왔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MGM은 그를 굉장히 신뢰했던 것 같다. 미국의 도시가 거대한 광고판들로 뒤덮여있고, 사막을 영화의 중심적인 무대로 한다는 정도의 간단한 이야기만 듣고도 30만 불을 투자하기로 했다고 한다. 최종적인 이 영화의 제작비는 700만 달러 정도였는데, 흥행 수익은 80만 달러 가량이었다고 하니 엄청난 흥행 실패를 겪은 것이다. 또한 당시 미국의 평자들도 이 영화를 굉장히 좋지 않게 평가했고, 안토니오니에 대한 책들에서도 이 영화에 대한 설명은 가장 적은 편이다.


<자브리스키 포인트>는 굉장히 변형적인 영화인 것 같다. 영화의 스타일이나 이야기의 중심점들이 계속 변형 중에 있다. 크게 몇 가지 국면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첫 번째는 영화의 초반에 등장하는 대학생들의 토론 부분이다. 다큐멘터리적인 스타일로 촬영되었으며 당시 실제 블랙팬더의 일원이었던 흑인 액티비스트가 출연하기도 했다. 사실 이 토론의 중심적인 내용이 무엇인지는 굉장히 불확실하다. 일단 블랙팬더를 중심으로 해서, 비폭력적 투쟁에서 폭력적 투쟁으로 전환하려는 시도의 과정이 있다. 또 하나는 흑인과 백인간의 갈등적인 요소이다. 당시 하나의 조직적이고 집단적인 힘을 이야기하던 블랙팬더와 리버럴한 백인 학생들의 개인주의적인 요소의 충돌이 드러나고 있다. 결국 이 초반부 장면에서의 정치성에 대한 논란은 집단성과 개인성의 충돌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 장면들에서는 각각의 사람을 개별화하기보다는 뭉뚱그려서, 포커스가 나간 상태로 촬영했다. 그리고 그 토론의 과정 안에서 리버럴한 개인, 혹은 굉장히 실존적이고 시니컬하게 느껴지는 마크라는 주인공이 개별화되어 등장하고 있다. 그와 동시에 다리아라는 한 명의 여자가 또 다른 주인공으로 등장하며, 이 두 사람이 개별적으로 사막으로 향하는 운동선들이 두 번째 국면을 이루고 있다. 여기서 안토니오니가 굉장히 강박적으로 몰두했던 것은 도시를 보여주는 장면들이었다. 토론회장을 나온 마크가 친구와 트럭을 타고 돌아다니는 장면에서 강조되는 것은 도시의 곳곳에 붙어있는 광고판들이다. 거대한 광고판들이 도시를 지배하고 있는데, 이는 영화의 라스트와도 굉장히 어울리는 점이 있는 것 같다. 고다르가 60년대에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의 이미지에 몰두했던 것처럼 안토니오니 역시 그런 부분에 대한 몰두성이 굉장히 강했는데, 특히나 미국사회를 지배하는 강한 특징으로서 도시의 광고판들을 주목했던 것 같다. 그런 면에서 도시에서 떠난다는 것은 거대한 광고의 기호로부터 탈출하는 하나의 모험이기도 한 것 같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인물들이 움직여가는 동기나 목적성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마크가 비행기를 훔쳐 사막으로 향할 때 드러나는 상황 정도만이 이 인물의 움직임, 여행을 추동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사실 이것은 폭력과 직접적인 관련성이 있다. 마크와 친구가 총포상에서 총기를 구매하는 장면과 연결되는 미국적인 폭력성의 문제다. 미국이라는 사회에 온존하는 폭력성과, 그런 사회에 대항하기 위한 폭력의 불가피성이라는 두 가지 문제가 인물에게 혼란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그것이 총을 구매할 때, 혹은 대학 내에서 소요가 일어나는 과정에서 경찰과 충돌해나갈 때 발생하는 문제이다. 마크는 분명 총을 쏘지 않았지만 총에 의해서 희생당하는 학생과 경찰이 동시에 발생하게 되고, 거기에서부터 이 인물의 여정이 시작되게 된다. 그런 면에서 이는 도시 안에 온존하는 폭력으로부터 벗어나는 모험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이 영화에는 누구나 기억할 수밖에 없는 인상적인 장면이 두 개 있다. 첫 번째는 사막에서 두 남녀가 정사를 벌이는 장면이다. 사막이라는 공간을 굉장히 에로틱하게 표현하고 있다. 동시에 이 장면은 남녀의 신체와, 사막의 모래와 먼지 같은 것들이 모두 뒤엉켜가면서 두 인물이 섞여가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영화의 초반에서 토론중인 학생들을 개별적으로 구분하지 않고 뭉뚱그려서 보여주는 것과 비슷하기도 하지만, 차이도 있다. 초반 토론 장면에서는 학생들이 구체적이고 정치적인 논의를 위해 집단화를 이루어가는 과정에서 뭉뚱그려져 간다. 그러나 정사 장면에서는, 서로가 개별화되어 있지만 사막이라는 공간 안에서 먼지나 모래 같은 것들에 의해 섞여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동시에 증식되면서 여러 사람들의 정사로 표현되고 있다. 개체성을 넘어서는 또 다른 의미에서의 집단성 같은 느낌이 있다. 또한 이 장면은 다리아의 판타지로 구성되어있다는 점에서 라스트의 폭파장면과도 부분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또 다른 한편으론 사막이라는 공간을 죽음과 연결해서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통상적으로 이 장면을 에로스와 타나토스, 사랑과 죽음이 뒤엉킨 느낌으로 이야기한다. 이런 면에서는 영화의 초반부에 마크가 ‘기꺼이 죽을 용의가 있다’고 말하는 것과 정사 장면이 연결되는 부분이 있다. 그러나 안토니오니라는 작가의 표상적 특징들을 고려할 때는 표면적인 뒤엉킴이라는 부분에 중점을 두어야 할 것 같다. 또 하나의 잊지 못할 장면은 영화의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는 거대한 폭파 장면이다. 이 장면은 여러 가지 뉘앙스를 갖고 있는 것 같다. 첫 번째로는 역시 문화적인 기호들을 파괴하는 행위라고 볼 수 있다. 두 번째로, 이 장면은 사실 현실적이지는 않다. 어떻게 해서 그 모든 것들이 갑자기 파괴되는지, 도화선이 어디에 있는지에 대한 의문을 갖게 된다.

추측할 수 있는 하나의 단서는 있다. 다리아가 황급히 저택을 빠져나오기 직전, 가정부로 보이는 네이티브 아메리칸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게 된다. 정확한 설명점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장면은 문명화된 세계의 질서를 사막에 투입하려는, 곧 인공적인 휴양지를 사막에 건설하려는 과정에서 거기에 내재된 네이티브 아메리칸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를 통해 암시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폭력에 대한 파괴적인 수단으로서의 다리아의 상상으로 폭발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세 번째로, 이를 단순한 파괴행위라고 말하기에는 조금 복잡한 연결점들이 있다. 이 장면은 십 수대의 카메라로 동시에 촬영되었고, 고속으로 촬영되어서 굉장히 느리게 진행되고 있다. 때문에 파편들이 공중에 둥둥 떠서 돌아다니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굉장히 무중력적인 사건이다. 달리 말하자면 시공간이 불분명한 가운데 상품사회의 모든 문화적 기호들이 파괴되는 것이다. 시간도 공간도 무화되는 그 지대를 무엇으로 말할 수 있을까. 이렇듯 이 영화의 라스트는 어떤 것으로든 환원될 수 없는 공간을 구축하고 있는데, 영화는 거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는 듯한 다리아의 얼굴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 결국 그것은 대단히 상상적인 세계 안에서의 파열, 폭력, 파괴라고 볼 수 있다. 그 후에 자동차를 타고 가는 다리아의 마지막 여정이 보이고, 사막지대의 일몰을 비추는 것으로 영화가 끝나고 있다. 산업화되고 문명화된 기호들의 파괴와 동시에, 마지막에 보이는 다리아의 미소와, 움직임과, 자연을 통해 파괴의 지점 안에서 무언가 새롭게 시작하는 창조의 흔적들이 보이는 것 같다. 영화의 시작부분에 등장했던 정치적인 것과 도시의 자본주의적인 질서들, 사회적인 영역들이 모두 한 데 뭉뚱그려져서 포화되고 융합되고 산산이 쪼개져나가면서 그 가운데 새로운 결합의 시도들을 만들어나가는 흔적을 이 라스트의 폭발점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또한 다리아의 정치성의 흔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이 영화는 불확실성을 굉장히 많이 갖고 있다. 내러티브의 불확실성도 있고, 인물들의 내적이고 심리적인 동기도 불확실하며, 스타일적인 변형들도 있다. 도시장면에서 과도하게 노출되는 광고판들도 고다르 같은 작가들의 영화에서 드러나는 상품기호에 대한 비판적인, 크리틱한 부분과 비교해보자면 좀 과장된 것 같은 느낌도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런 불확실성은 안토니오니가 보이는 기본적인 특징인 것 같다. 롤랑 바르트가 안토니오니에 대해 이야기 할 때 가장 중요하게 지적했던 것은 안토니오니가 ‘의혹이 많은 작가’라는 점이었다. 안토니오니는 심층적으로 어떤 진실에 도달하려는 것이 아니라 표층적인 외양을 보고 있고, 그 외양은 시시각각 모습을 달리하며 변화해나간다. 때문에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세계가 언제나 의혹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표면적인 세계의 변화와 변동, 변형에 관심을 기울이며 의혹을 갖는다는 것은, 바르트식의 표현을 빌자면 ‘그가 정치가가 아닌 예술가이기 때문’이다. 바르트는 안토니오니에게 보낸 서신에서 “정치인들이 언제나 무언가가 진실이라고 이야기할 때, 진실을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보는 다른 관점을 탐구하며, 오히려 뭔가가 진실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의 위험성을 끊임없이 환기시키는 것이 예술가의 책무이다. 안토니오니는 그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말했다. 이 영화는 분명히 정치적이고 사회적이거나 문명 비판적인 요소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런 비판의 영역 안에서 정확히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 것이냐, 하는 부분에서는 조금 실망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그 점 때문에 주류 비평가들도 이 영화를 많이 비판했고, 당시에 정치적인 색채를 지녔던 사람들도 영화에 굉장히 불만족을 느꼈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 보자면 안토니오니가 갖고 있는 진실과 현실에 대한 시선, 당대의 상황에 예술가로서 참여하는 자신의 위치를 오히려 분명하게 잡았던 영화가 <자브리스키 포인트>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정리: 박예하)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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