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오 바바는 낯선 이름이다. 1914년에 태어나 1979년 사망하기까지 25편의 영화를 남긴 바바는 ‘이탈리아 공포영화의 대부’였다. 그는 다리오 아르젠토와 아들인 람베르토 바바를 통해 지알로(범죄잔혹극)를 탄생시켰고, 1980년대 시작된 슬래셔공포영화의 기반을 다졌다. 하지만 그는 싸구려 제작비로 특이한 B급영화를 양산한 로저 코먼 류의 컬트 감독은 아니다. 그는 고딕호러의 전통 속에서 현대 공포영화의 전통을 새롭게 사유한 장르의 거장이었다. 6월 21일부터 열리는 ‘마리오 바바 특별전’을 기념해 ‘이탈리아의 알프레드 히치콕’ 마리오 바바의 삶과 영화를 돌아본다.

사실 바바는 장르를 가리지 않는 고용 감독이었다. 1960년부터 사망 1년 전인 1979년까지, 바바는 고딕호러(<채찍과 시체>)로부터 팝아트 액션영화(<디아볼릭>), 스파게티 웨스턴(<알라모 요새로 가는 길>)으로부터 섹시코미디(<닥터 골드풋과 섹시한 여자들>), 고대사극(<지구 중심의 헤라클라스>)으로부터 하드고어스릴러(<블러드 베이>)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장르영화들을 만들어냈다. 어떤 장르를 다루건 간에 바바의 영화들은 한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건 바로 속임수로 가득한 인간 본성에 대한 화려하고 파괴적인 탐구라는 특징이다. 그같은 탐구를 통해 마리오 바바는 다리오 아르젠토 같은 후배들이 완성해낸 이탈리아 범죄잔혹극 ‘지알로’를 낳았고, 현대 공포영화를 새롭게 창조하고 발전시켰다. 그러나 바바는 자신의 업적에 대한 아무런 감사도 받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어쩌면 그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그는 스스로를 “싸고 빨리 만드는 것 외에는 아무런 재능도 없는 사람”이라고 표현하곤 했고, “나는 모든 커리어를 통틀어 엄청나게 개똥 같은 영화들만 만들었다”며 입버릇처럼 스스로를 낮추곤 했다. 하지만 마리오 바바가 현대 장르영화에 남긴 유산은 개똥 같은 것들이 아니다.

촬영감독 아버지의 조수로 영화계 입문

바바의 데뷔작 <사탄의 가면>(1960)에 출연해 영화 역사상 첫 ‘호러퀸’의 지위에 오른 바버라 스틸에 따르면, 마리오 바바는 매우 비밀스럽고 사생활을 잘 드러내지 않는 남자였다. 이 비밀스런 남자가 이탈리아의 산 레모에서 태어난 것은 독일이 1차대전을 선언한 바로 다음날인 1914년 7월21일이었다. 그의 아버지인 유제니오 바바는 이미 당대의 유명한 촬영감독이었고, 빛과 음영을 이용한 특수효과에서는 이름난 대가였다. 마리오 바바는 태어나면서부터 꿈의 공장에서 살아갈 운명이었던 것이다. 그는 아버지의 조수로 일하면서 이탈리아 영화계에 발을 들였고, 유명 이탈리아 촬영감독들의 조수를 거쳐 1939년에는 촬영감독의 자리에 올랐다.

1956년에 바바는 친구 리카르도 프레다가 연출하는 <뱀피리>의 촬영감독으로 고용된다. 그러나 감독은 제작자와의 불화로 촬영장을 박차고 뛰쳐나갔고, 바바가 메가폰을 손에 쥐고 12일로 계획된 촬영을 이틀 만에 마쳐버렸다. 이탈리아의 첫 번째 유성공포영화는 사실 마리오 바바의 데뷔작이나 다름없었던 셈이다. 그 뒤로도 바바는 “감독들이 낮잠을 즐기는 동안” 메가폰을 대신 쥐는 일이 많아졌고, 리카르도 프레다가 또다시 이틀 만에 촬영장을 박차고 나간 영화 <칼티키: 불멸의 몬스터>(1957)를 대신 완성하기도 했다. 제작자로서는 기특하고도 미안한 마음이 생겼을 터이다. 바바는 “제작비를 많이 허비하지 않는 한도에서 영화를 연출해보라”는 제작자의 권유를 냉큼 받아 46살의 나이로 감독 데뷔를 한다.

46살에 <블랙 선데이>로 감독 데뷔

마리오 바바는 고골의 <비이>(Vij)를 원작으로, 결국 원작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갖게 된 영화 <사탄의 가면>을 만든다. 독일 표현주의와 영국 해머영화사의 유산이 절묘하게 결합된 이 작품은 곧 대성공을 거두었고, 성공은 이탈리아 내에서만 머무르지 않았다. 저예산영화의 대부였던 미국 제작사 AIP(American International Pictures) 사람들은 싼값에 사들일 만한 공포영화를 찾아 로마에 당도했고, 이탈리아 제작사의 권유로 <사탄의 가면>을 보았다. 영화가 시작되자 못이 촘촘히 박힌 금속제 가면이 여인의 얼굴에 씌워졌고, 건장한 기사가 가면을 해머로 내리찍었다. 여자의 얼굴은 수많은 못으로 궤뚫렸다. 가면 밖으로 피가 펑펑 솟아나기 시작했다. 그 순간 AIP의 대표는 자신들이 “진짜 걸작을 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10만달러에 팔린 <사탄의 가면>은 잔혹한 장면을 덜어낸 재편집본으로 상영되어 북미 관객을 열광시킨다.

이후 바바는 이탈리아 잔혹범죄물 ‘지알로’의 시작으로 평가받는 <너무 많은 것을 안 여자>(1962)를 만들었고, <블랙 사바스>(1963), <피와 검은 레이스>(1964) 등의 걸작을 탄생시키며 감독으로서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한다. 하지만 바바는 미국에서 활동하라는 AIP의 청을 거절했다. 그를 숭앙하는 수많은 현대 감독 중 한명인 조 단테(<그렘린>)의 말처럼 “유럽 감독들이 미국에서 만든 작품들을 보면, 미국에 오지 말았어야 할 듯한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마리오가 왔더라면, 어떤 식의 영화가 나왔던 간에 매우 흥미진진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미국과는 달리 제작과정에서 시나리오를 장면에 맞게 뜯어고칠 수 있는 이탈리아 영화현장의 유연성은, 이미지에 대한 통제를 중요시했던 바바에게는 꼭 필요한 요소였다. 미국행을 거부한 바바는 또 다른 걸작 고딕공포영화 <킬, 베이비… 킬!>(1966)을 완성한다. 루키노 비스콘티는 이 작품의 이탈리아 시사회 도중 일어나서 열광적으로 박수를 쳐댔고, 페데리코 펠리니는 마리오 바바의 열정적인 팬임을 자처하고 나섰다.

이탈리아 범죄잔혹극 ‘지알로’를 낳고

AIP의 회유를 물리친 것에서도 보이듯이, 마리오 바바는 자신이 완벽하게 통제할 수 없는 거대 예산의 영화를 연출하는 것을 극도로 꺼렸다. 하지만 거물 제작자 디노 드 로렌티스의 부탁으로 그는 인기 코믹스를 원작으로 한 현란하고 캠피한 액션히어로물 <디아볼릭>(1968)을 제작하게 된다. 영화는 곧 유럽 전역에서 엄청난 흥행수익을 기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바는 여전히 바바였다. 그는 300만달러의 제작비를 제작자로부터 얻어내고도 그의 장기인 특수효과를 이용해서 세트와 액션장면 촬영비용을 현격하게 절감, 겨우 40만달러에 영화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디노 드 로렌티스의 간곡한 부탁에도 불구하고 <디아볼릭>의 후속편을 만들지 않기로 결심한다. 종종 말하곤 했던 “즉흥연주로서의 영화 만들기”의 재미를 자본에 의해 속박당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1966년은 바바의 경력을 전기와 후기로 구분짓는 중요한 시기다. 이때부터 시작된 바바의 후기 경력은 그가 새로운 장르를 거의 발견하다시피 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안 여자>를 통해 지알로 소설의 기운을 영화로 끌어들인 그는 <8월의 달을 위한 다섯 인형들>(1970)과 <신혼여행지의 학살>(1970) 같은 작품으로 지알로 장르의 토대를 마련했고, <블러드 베이>(1971)로는 슬래셔 장르의 시작을 알렸다. 하지만 거듭되는 흥행 실패와 아버지의 죽음으로 60대의 바바는 지쳐 있었다. 그는 아들 람베르토 바바가 쓴 각본으로 <쇼크>(1977)를 만들었고, 이는 마리오 바바 최후의 단독 연출작이 된다. 이 영화의 대부분은 람베르토 바바가 직접 연출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자신의 유산을 아들에게 물려주기 위한 예순살 거장의 마지막 교습이었던 것이다. 마리오 바바는 제자 다리오 아르젠토의 <인페르노>(1980)에 특수효과 디자이너로 참여한 직후인 1980년 4월25일, 65살의 나이로 바닥에 쓰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다. 심장마비였다. 아이러니하게도 바바의 심장이 멈춘 지 딱 4일 뒤에 앨프리드 히치콕이 사망했다. 마리오 바바는 생전에 이탈리아의 앨프리드 히치콕이라고 불렸고, 바바의 진가를 알고 있었던 소수의 지인들은 히치콕을 ‘영국의 마리오 바바’라고 불렀다. 두 감독은 영국과 이탈리아처럼 다른 존재였지만, 동시에 현대 공포/스릴러 장르의 양지와 음지를 대변하는 도플갱어였다. 그리고 동시에 세상을 떠났다.

현대 공포영화를 새롭게 창조하다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와 로베르토 로셀리니가 ‘현대영화’를 창조했다면, 마리오 바바가 ‘현대 공포영화’를 창조했다고 말하는 것도 크게 무례한 일은 아닐 것이다. 바바는 이야기를 통해 관객에게 말을 걸었던 이전의 장르영화들로부터 자유를 획득한 남자였다. 이를테면, 마리오 바바는 기술적인 공정을 통해 감정적인 효과를 창출하는 촬영감독의 입장에서 영화를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바바의 영화들은 이야기보다는 빛과 어둠을 절묘하게 화면 속에 이용함으로써 모든 장르적인 효과를 만들어낸다. 바바의 대표작인 <블랙 사바스>가 대표적이다. 이 작품은 3개의 중편으로 구성되어있다. 케빈 윌리엄슨이 <스크림>을 만들기 위해 참조했음이 분명한 <전화>는 자신을 염탐하는 전화 속 목소리 때문에 공포를 느끼는 여자의 이야기고, 보리스 칼로프 주연의 <부르둘락>은 서로에 대한 애정으로 인해 파멸로 치닫는 흡혈귀 가족에 대한 고딕호러이며, 가장 무시무시한 <물방울>은 심장마비로 사망한 노파의 반지를 훔친 간호사가 죽은 노인의 방문을 받는다는 이야기다. 한정된 공간에서 진행되는 <전화>와 <물방울>은 실내의 빛을 뒤흔드는 번개와 낙숫물 떨어지는 소리만으로 관객의 심장을 쥐락펴락한다. 이야기가 벌어지는 장소는 극히 한정되어있으나 바바는 기술적 효과들만으로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마리오 바바는 지알로의 대부였지만 후배들과는 달랐다. 그는 면도날을 든 검은 장갑의 은밀한 손길이 아니라 피해자의 방에서 깜빡거리는 등잔을 더욱 두려운 것으로 이해하는 남자였다. 이는 바바가 글쟁이 출신이 아니라 기술자인 촬영감독 출신이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는 25편의 연출작 중 여덟 작품에서 직접 카메라를 잡았고, 직접 카메라를 잡지 않을 경우에도 모든 화면의 디자인을 스스로 통제했다.

빛과 어둠이 빚어낸 거대한 환상

이같은 바바의 기술적 영화 만들기는 이야기 자체를 해치지 않는다. 바바의 후예인 다리오 아르젠토의 영화들은 거친 영화적 화법 때문에 이야기의 얼개가 종종 손상당한다. 그래서 이탈리아 장르영화에서는 플롯이 미장센을 위해 봉사하는 수준에 그친다고 불평하는 것도 온당한 일이다. 하지만 마리오 바바는 고전적인 고딕문학의 전통으로부터 이야기의 숨결을 끌어온 고전적인 예술가이기도 했다. 그의 영화들은 <리사의 악마>(1973)에서처럼 도시의 모퉁이를 도는 순간 빠져들고 마는 현실과 환상의 모호한 경계들을 담고 있으며, 이를 표현하기 위해 바바가 사용한 것은 야시시한 테크니컬러로 범벅된 조명과 미술, 줌이 드라마틱한 속도로 인물에 다가가고 빠지는 자극적인 카메라워크였다. 마리오 바바의 영화적 화법은 이야기의 차원을 확장시키는 데 쓰이는 충실한 도구였고, 그 결과는 하나의 백일몽에 가깝다. 팀 버튼의 말처럼 마리오 바바는 “영화를 의식세계를 넘나드는 하나의 꿈처럼 만들어내는” 악몽의 예술가로서 자신을 창조한 것이다.

바바의 영향력은 이탈리아 지알로 영화계로 직접 전승되었다. 그의 조감독 출신인 다리오 아르젠토는 <신혼 여행지의 학살>로부터 영향을 받은 <딥 레드>(1975)를 내놓으며 지알로를 하나의 국제적 장르를 확립시켰고, 미켈레 소아비와 아들인 람베르토 바바 같은 젊은 세대를 통해 지알로 영화는 슬래셔 장르와 결합되어 발전했다. 하지만 바바의 영향력은 이탈리아 반도 속에서만 머무르지 않았다. 그의 영화들은 현대 공포영화의 발전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1980년대 슬래셔영화의 유행을 선도한 숀 커닝엄의 <13일의 금요일>(1980)은 바바의 <블러드 베이>를 리메이크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리들리 스콧의 <에이리언>(1979) 역시 바바의 <흡혈귀 행성>(1965)에서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 정설로 통한다. 마리오 바바의 영화 같은 공포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말해온 마틴 스코시즈는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1988)에 <킬, 베이비… 킬!>에 등장하는 소녀 유령을 등장시켰고, 팀 버튼은 바바의 초기 고딕호러영화들의 총체적인 오마주라고 할 수 있는 <슬리피 할로우>(1999)를 만들었다. 특히 주인공의 엄마가 속에 못이 촘촘히 박힌 철가면에 갇혀 죽는 장면은 <사탄의 가면>의 첫 장면을 직설적으로 인용한 사례다. 마리오 바바가 지금처럼 서구 영화계의 적극적인 재평가를 받게 된 데에는 말 많은 타란티노의 덕도 크다. 심심찮게 마리오 바바를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감독 중 한명으로 거론해온 그는 <사탄의 가면>을 직접 리메이크하겠다고 공공연히 말하고 다녔다.


마리오 바바의 검은마술은 계속된다

“영화는 마술사들의 작업실이다. 그것들은 당신이 스스로 이야기를 구축할 수 있도록 허한다. 최소한 나에게 영화란 그런 의미다. 무(無)로부터 환상과 효과를 창조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영화가 줄 수 있는 최고의 희열이다.” 마리오 바바라는 마술사는 아무것도 없는 어두운 그늘을 가장 두려운 존재로 만들 수 있는 재주를 지니고 있었다. 그건 이를테면, 흑마술에 좀더 가까운 재능이었을 것이다. 흑마술은 결코 양지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법이다. 바바도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결코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가 되지는 못할 것이라 말한 적이 있다. “나는 성공적인 커리어 따위는 관심없다. 계속 영화를 만들고 싶을 뿐이다. 나는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가 될 수 없다. 다급한 상황에서 새로운 장면을 창조하는 즉흥 연주를 좋아하고, 영화를 만들면서 문제를 풀어나가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니 당신이 훌륭한 감독이라면 절대 나처럼 작업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자유로운 즉흥 연주. 그것이 바로 마리오 바바라는 너무나도 이탈리아적인 흑마술사의 비법이었다. 마리오 바바의 영화들은 충만한 지중해의 빛과 그늘을 우리의 나약한 두려움 위에 뿌려대며 은밀한 공포를 들추어낸다. 그리고 그것은 거대한 환상으로서의 ‘순수한 영화’에 가장 가까운 희열을 전해준다. 마리오 바바는 여전히 발견을 기다리고 있는 고전영화의 마지막 신대륙이다.

글 / 김도훈(씨네21 취재기자)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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