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의 의의(意義)는 그것에 내재된 의미들의 무덤 위에 피어난다. 의의를 얻을 때라야 비로소 작품은 잊혀 지지 않고 시간의 흐름 속에 살아남아 보존 된다. 즉 디테일들이 무시되고 몇 개의 특징만이 간명하게 정리될 때 우리는 그 정리된 문장을 기억하고 인용한다. 장 뤽 고다르의 <미치광이 피에로 Pierrot le fou>(1965)의 모든 장면들은 이 의의에 맞서는 의미들의 투쟁 같다. 영화는 미이라로써 살아남길 거부한다. 장면들 간에 도무지 개연성이 없다. 한 가지 맥락으로 정리될 수도 없다. 내레이션을 통해 작품 스스로 고백하듯 '사랑, 액션, 범죄 영화'의 범주에 놓인 '복잡한 영화'이지만 그렇기에 결국 어떤 영화도 아니며 동시에, 어떤 영화로도 불릴 수 있다.


의의를 거부한 대신 영화가 더욱 선명히 보여주는 것은 의미를 발생시키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들이다. 이를테면 “영화언어의 새로운 알파벳”같은 것. 영화는 스페인의 화가 벨라스케스에 대한 책을 낭독하며 시작한다. 화가는 말년에 더 이상 구체적인 사물을 그리지 않고 공기와 빛, 시간과 색, 형태와 색조를 포착해 '고요한 교향곡의 보이지 않는 중심'을 그려냈다는 이야기다. 여기서 ‘구체적인 사물’은 이미 우리 머릿속에 존재하는 고정관념으로써 굳어진 형태의 사물이다. 이를 지워버리고 새로운 눈으로 다시 보는 것. 구상에서 벗어나 추상의 세계로 들어감으로써, 명확히 감각할 수 없으나 분명 현실에 존재하는 어떤 본질을 더 정확히 묘사해내려는 시도. 이 영화는 이와 같은 실재의 도상화, 더 나아가 기호화를 형식적으로 시도하는 동시에 그것의 불가능성에 대한 사유를 내러티브상에서 적극적으로 사용한다. 예를 들어 페르디낭(장 폴 벨몽도)에게 환멸감을 줘서 결국 그가 마리안느(안나 카리나)와 달아나게 만드는 공간인 파리는 사람들이 상품들과 광고문구로 대화하는 단색의 세계, 실체는 없고 자본의 기호들만 부유하는 세계이다.


사실 영화의 표면적인 줄거리는 전형적인 할리우드 청춘 범죄영화다. 알제리에서 온 정체불명 무리의 추적과 비밀스런 여인, 의문의 거금이 관련 된 도피 그리고 배신. 허나 이는 플롯에 불과할 뿐 스크린에서 재현되는 작품 자체는 전혀 딴판이다. 영화는 때로 뮤지컬이며, 가장 느와르적인 사건들은 모두 환한 대낮에 벌어진다. 무엇보다도 페르디낭과 마리안느 사이의 긴장감은 범죄물의 그것이 아니라 ‘생각으로 말하는 남자’와 ‘느낌으로 말하는 여자’간의 소통의 결핍에서 온다. 이를테면 마리안느가 “다 지겨워. 난 살고 싶어”라고 외칠 때, 페르디낭은 “누군가의 삶이 아닌 그냥 삶 전체”가 담긴 소설쓰기를 시도한다. 즉 여자에게 삶은 ‘살다’라는 동사이고 남자에게 ‘삶’이란 명사다. 살아있음을 느끼면 그만인 여자의 삶은 늘 현재 변화 중이어야 하고, 노트에 적혀야만 하는 남자의 삶은 언어로써 과거에 고정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누벨바그의 이론가라 불리는 고다르는 1970년의 한 인터뷰에서 “과학자와 에세이스트는 같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이론가와 시인 역시 등치가 성립될 수 있지 않을까. <미치광이 피에로>는 이론가가 쓴 시다. 작품의 형식적 실험은 내용 및 아름다움과 분리되어 있지 않다. 그 증거로 이 영화의 배우들은 마네킹이 아니며 주어진 공간과 역할 속에서 제 몫의 존재감을 쏟아낸다. 현실적 상황의 영향 하에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또한 기존 영화언어의 고정된 의미로부터 자꾸 탈주한다는 점에서, 시청각적으로 아름답다는 점에서 시적이다. 의의를 부여받고 설명되기를 거부한 시는, 그 대신 질문들로 남는다. 답 없는 질문은 늘 현재진행형이므로 영화는 과거에 편입되지 않고 여전히 살아있다. 한층 채도 높은 지중해의 빛 아래, 빨강, 파랑, 노랑, 하양 기본색들이 선명히 생생하다. (백희원 시네마테크 서울아트시네마 관객에디터)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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