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1. 28. 13:38ㆍ2011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Review
[리뷰] 로우 예의 <수쥬>
강, 그리고 소년과 소녀의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하면 떠오르는 몇 편의 영화들이 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영화는 레오 까락스의 영화들이다. <소년, 소녀를 만나다>(1984)와 <퐁네프의 연인들>(1991)에서 강은 연인들의 내밀한 사랑의 역사를 관통하는 또 하나의 주인공과도 같다. 로우 예의 두 번째 장편 <수쥬>는 레오 까락스의 연인들처럼 세상으로부터 동떨어진 외로운 소년, 소녀, 그리고 강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누구와도 소통하지 못하는 황폐한 삶에서 섬광과도 같은 사랑이 솟아오를 때, 이들은 이 유일무이한 감정에 속절없이 사로잡힌다. <수쥬>는 현재에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갔다 다시 현재로 돌아오는 내러티브 구조를 지니고 있지만, 결코 영화 속에서 얼굴을 드러내지 않으며 비디오를 찍는 내레이터의 존재로 인해 시종일관 과거 시제의 느낌을 자아낸다. 이는 영화 속 사랑 이야기를 신화화하는 동시에, 내레이터의 구술로 이루어지는 일종의 메타 픽션으로 읽혀지기도 한다. 동반자살로 끝을 맺는 두 남녀의 비극은 화자에 의해 의도적으로 다양한 방식의 각색을 거듭한다. 따라서 영화 속에 펼쳐지는 이야기는 어쩌면 화자의 단순한 상상의 소산일수도 있고, 부분적으로 실제와 상상이 뒤섞여있을 수도 있다.
이야기가 추상화될수록, 영화 속의 모든 이미지들은 점점 누군가의 기억 속의 이미지로 변모해간다. 한 여인에 대한 주인공의 죄의식과 사랑이 만들어내는 가짜 이미지에 관한 이야기는 또 한 편의 영화를 연상시킨다. 닮은꼴의 두 여성을 한 여성으로 착각하고 이에 사로잡히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중심에 놓고 본다면, 일찍이 많은 평자들이 지적했듯이 <수쥬>는 느슨하게 히치콕의 <현기증>을 참조하고 있다. 샌프란시스코의 안개 낀 구불구불한 거리는 <수쥬>의 주인공 마다르와 무단이 오토바이를 타고 달려가는 상하이 뒷골목의 미로와 닮았다. 다만 <현기증>의 스카티가 의도하지 않은 은밀한 범죄의 이용 도구였다면, <수쥬>의 마다르는 무단을 둘러싼 범죄에 좀 더 적극적으로 가담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어떤 생명체도 살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오염된 강 언저리에 살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시작하는 이 영화는 디지털 카메라 특유의 사적인 심상을 극대화한다. 번쩍거리는 자본주의의 금광으로부터 밀려난 사람들에 대한 연민과 동질감은 이 영화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정서다. 인어는 고사하고 작은 물고기 한 마리도 살아남지 못할, 자본의 찌꺼기들이 밀려드는 회색 강에서 그들은 사랑하고, 그리워하고, 절망하고, 이별하며, 종국에는 사라진다. 왕가위의 초기작들을 연상시키는 푸른색과 노란색을 기조로 하는 <수쥬>의 이미지는 몽환적이다. 처음에는 다큐멘터리처럼 시작된 이 영화는 점점 판타지에 가까운 방식으로 주조된다. 그러나 로우 예 감독은 격정적 사랑의 감정적 수위를 높이는 대신 채 피어나지도 못한 사랑이 파괴되어가는 순간을 마치 오래된 기억처럼 덤덤하게 다룬다. 이러한 감독의 시선은 결국 수많은 아름다운 장면들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에 대한 가장 강렬한 기억을 영화의 첫 장면으로 되돌리게 만든다. 좁고 지저분한 강어귀에서 자신의 일생을 보내는 수많은 사람들의 평범하고 무표정한 얼굴들 속에 감독은 은밀한 감정적 역사들을 읽어낸다. 특별한 한 사람만의 이야기가 아닌, 모두에게 다가왔다 사라져가는 격정의 순간들은 거대한 강물처럼 흘러가고 있다. 가장 어두운 곳에서, 가장 비루한 얼굴로 말이다. (최은영_영화평론가)
시네토크
1월 28일 수요일 저녁 7시 <수쥬> 상영 후: 김태용 감독과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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