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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아트시네마 소식

예술영화관은 어떻게 살아가는가? 김성욱 프로그램디렉터의 일본 간사이 지역 예술영화관 탐방기

예술영화관은 어떻게 살아가는가?

- 일본 간사이 지역 예술영화관 탐방기

지난해 3월, 간사이 지역(오사카, 교토, 고베, 나라 등)의 예술영화관들을 시네마테크의 지역 관계자들과 함께 방문했다. 현재의 상황들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일본 예술영화관의 위기에 대해 자주 들어왔던 터다. 80년대에 시작해 90년대에 정점을 찍었던 도쿄 시부야 지역의 미니시어터들이 폐관 사태에 몰린 것은 이미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2008년, 시네 라 세트Cine La Sept의 폐관 이후, 최근까지 30여 개의 미니시어터들이 문을 닫았다. 2010년 시네콰논이 재정 위기로 문을 닫은 것은 상징적 사건이었다. 그리고 올해 1월 1일로 도쿄 시부야의 미니시어터 시네마 라이즈가 폐관했다. 1986년에 개관한 곳으로 폐관의 가장 큰 요인은 시부야 지역의 재건축에 따라 주변 환경이 변했고, 시네마 콤플렉스(멀티플렉스)의 대두에 의해 영화관을 둘러싼 환경 변화, 디지털 환경 변화로 인해 재정적 압박이 증가한 상황 등을 요인으로 꼽고 있다. ‘미니시어터의 역할이 끝났다’라던가 ‘더 이상 극장을 끌고 갈 자신이 없다’는 말들이 전부터 나왔었다고 한다. 지난해, 도쿄가 아닌 간사이 지역을 돌아봤던 것은 이런 폐관의 여파가 특별히 지역 영화관들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직접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한국이 그러하듯 지역은 대도시보다 더 복잡한 문제들을 떠안기 마련이다. 아울러 한국의 (지역)예술영화관들이 지금 위태로운 상황이기 때문이다. 서울에서도 마찬가지로 지난해 시네코드 선재가 문을 닫았고, 올해 초엔 강릉이나 부산의 예술영화관들도 위태롭다는 소식이 들린다. 지난해 『씨네21』에 썼던 짤막한 탐방기를 대폭 수정해 다시 소개한다. (김성욱)


예술영화관, 시민의 힘으로 만들다


“영화관을 만드는 사람들은 열정은 있지만 돈이 없다. 그래서 각지에서 시민출자를 해서 영화관을 만들었다.”

오사카의 시네누보(シネ・ヌーヴォ) 대표 카게야마 사토시(景山理)는 영화관을 함께 만든다는 일종의 로망이 사람들을 불러 모을 수 있었다고 말한다. “처음에는 영화신문을 만들었다. 우리가 보고 싶은 영화에 대해 말하기 위해 매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80년대 말부터 도쿄에 미니시어터가 생기기 시작해 예술영화 상영 붐이 일었고, 오사카에는 그런 미니시어터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영화신문을 통해 영화관이 필요하다고 주장했고, 독자들에게 호소해 1계좌에 십만 엔을 모집해 결과적으로 4천만 엔을 모금할 수 있었다.” 시민출자 방식은 지역 예술영화관을 만드는 주된 전략으로 1982년에 설립된 나고야 시네마테크가 그 전례다. 이어 삿포로 시네마 키노, 다카사키의 시네마테크가 이런 방식으로 설립됐다. 최근에는 DCP 장비 구입을 위해 시민출자를 하는 경우도 있다. “니카타에 시네윈도우라는 미니시어터가 DCP 설비를 도입하기 위해 1,000만 엔을 시민 출자로 모금했다. 약 3년 전쯤의 일이다. 히로시마의 시네마 오노미치가 7, 8년 전에 시민 출자로 개관한 영화관인데, 2년 전에 다시 출자를 모집해서 증자를 하기도 했다. 그 외에도 현재 일본 전국에서 디지털 설비를 도입하기 위해 시민출자를 모집하는 사례가 4, 5건 있다”고 말한다.


카케야마 사토시는 70년대 학생 시절부터 자주상영회를 해왔다고 한다. 주로 비상업적인 영화들, 다큐멘터리를 중심으로 상영회를 조직했다. 70년대는 사실 일본영화의 불황기였다. 그래서 영화일을 하고 싶었지만 그럴 기회가 없었고, 영화를 만들기보다는 영화를 보여주자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당시 자주상영을 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 조건이 필요했다. 첫째, 상영할 영화 작품들이 있어야만 한다. 둘째, 영화 작품을 상영할 장소다. 셋째는, 영화를 선정하는 작업이다. 그때는 지금처럼 인터넷을 통해 홍보를 할 수 없던 시절이라 일일이 전단지를 만들어서 뿌려야만 했고, 그래서 전단지를 만들기 위해 인쇄업을 했다고 한다. 지금도 시네누보의 전단지는 그가 직접 디자인해서 만들고 있다. 여전히 그의 세대는(나의 세대 또한 그렇지만), 전파보다는 종이, 아날로그의 느낌이 영화에 와 닿는 것이 있다. 물론, 이런 장소를 유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시네누보는 여전히 적자라고 한다. 극장을 운영하는 방안 중의 하나가 일하는 스태프를 줄이는 일. 현재 시네누보는(그리고 대부분의 극장들이) 세 명 정도의 정규직 인원을 유지하고 있다. 아울러 여러 단체들의 상영 의뢰를 받아 아르바이트를 한다. 상영회 중의 하나가 오사카 아시안 영화제다. 하지만 이제는 영화제도 도리어 극장이 부담을 주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얻은 교훈이 다른 곳에 에너지를 뺏기는 것이 아니라 극장의 관객을 늘리는 일에 기본을 두고, 극장의 상영 프로그램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 시네누보는 35mm, 16mm, DCP 영사가 가능하다. 상영관은 둘로 나누어 1층의 메인 상영관에서는 아트 계열 영화의 개봉, 로드쇼, 특집상영을 한다. 2층은 ‘시네누보 엑스’로 디지털 상영관이다. 시네누보 엑스는 2006년 8월에 새로 마련한 곳으로 30석의 극장에서 주로 학생영화나 독립영화를 틀고 있다.



시네누보

사회파 다큐멘터리 상영으로 유명한 오사카의 제7예술극장(第7芸術劇場) 또한 시민출자로 설립된 영화관이다. 제7예술극장은 90년대 말에 시네콰논이 운영하던 극장이었지만, 경영난으로 시네콰논이 철수한 이후에 시민출자로 한 계좌당 5만 엔, 총 3백만 엔을 모아 2002년에 개관했다. 주로 간사이 지역의 영화 관계자들에게 출자를 부탁했는데, “한 구좌당 5만 엔의 주식인데, 형편 되는 대로 출자를 해주었다. 출자를 요청하는 방법은 공식적인 광고가 아니라 개인적인 인맥을 통해 시도했다”고 지배인 마츠무라 아츠시(松村厚)는 말한다. 시민출자는 그러나 영화관 개관을 위한 하나의 방식일 뿐이다. 출자는 수익을 위한 모델은 아니다. 일 년에 한 번 주주총회를 하지만 주주들에게 건넬 만한 배당금은 없다. 그만큼의 수익을 올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출자한 사람들도 배당금을 기대한 것이 아니라 기부를 하는 마음으로 했기에 경영보다는 이 공간이 계속 유지되기를 바랄 뿐이라고 한다.

마츠무라 아츠시는 원래 오사카 출생으로, 대학 영화연구동호회 활동을 하다 졸업 후 10년간 도쿄에서 직장 생활을 거쳐 다시 오사카에 돌아왔다. 그리고 1992년부터 제7예술극장에 입사해 부 지배인을 거쳐 2002년에 새로 오픈한 후로 현재까지 지배인을 맡고 있다. 그는 1990년대가 오사카 지역 예술영화관의 전성기였다고 한다. 시네콰논이 제작하고 배급한 최양일 감독의 <달은 어디에 떠 있는가>와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가 흥행 성적이 좋았다. 지금 이 극장의 관객은 대략 연간 4만 명 정도라 한다. 스태프는 풀타임이 다섯 명이지만 극장주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시급제로, 일본 사회의 경제 수준으로 말하자면 극장 종사자들은 저소득 노동자에 가깝다.

왜 예술영화관이 지금 위기인가?


한때 성황을 누렸던 미니시어터들이 폐관에 처한 것은 어떤 이유 때문일까? 관계자들은 이구동성 디지털로의 전환과 시네마 콤플렉스(멀티플렉스)의 등장, 젊은 세대의 이탈 현상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디지털 영화를 상영하려면 디지털로 대응한 상영 설비를 갖춰야 하는데, 그런 비용을 소규모 영화관들이 조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시네누보의 카게야마 사토시는 “지금 일본의 대다수 미니시어터들이 여전히 35mm 영사기를 갖고 있다. 대략 20개 이상의 영화관이 35mm와 디지털 상영을 같이하고 있다. 디지털 프로젝터를 구비하지 못한 극장들은 폐업에 몰리게 됐고, 살아남은 곳은 설비를 갖춘 곳”이라 말한다. 다행히 시네누보는 나라 시에서 5년 전에 천만 엔의 보조금을 받아 디지털 설비를 구축할 수 있었다. 당시 나라에서 지원한 곳이 5, 6곳이었는데 이는 영화 진흥이라기보다는 지역 활성화 명목이었다고 한다. “나라에서 지원을 받은 건, 우리 같은 경우에는 상점가 진흥을 위한 지역 활성화 명목이었다. 나라 측에 DCP 설비를 도입하면 지역 활성화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고, 그게 설득이 돼서 받았다. 하지만 대부분의 극장들은 그렇게 하기 쉽지 않았다. 우리는 잘 설득한 셈이다. 당신들도 받을 수 있는 것이면 뭐든 받아야 한다. 그게 살아남는 방법이다.” 아울러 디지털 시네마와 관련한 가상현상비(VPF)의 문제 또한 폐관의 이유가 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VPF 때문에 작은 배급회사가 도산하기도 한다. VPF 채용 시에 학생 작품의 상영에 어려운 점이 있다. 이 시스템은 할리우드가 멀티플렉스를 위해 만든 것으로, 이에 반대하는 운동을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시네마 콤플렉스의 등장과 더불어 젊은이들의 이탈 현상도 심각한 문제다. 예술영화관의 주관객들은 대부분 40대 이상으로, 이들은 미니시어터의 붐과 함께 관객이 되었지만 지금 젊은이들은 영화를 보기 위해 좀처럼 바깥으로 나오지 않는다. 자기 세계에만 빠져 있는 젊은이들이 타인과, 세계와 만날 기회를 극장에서 찾지 않는 것이다. 미니시어터의 위기는 멀티플렉스를 통한 배급 전략에서도 나온다. 10년 전과 비교할 때 일본의 개봉 영화 편수는 두 배 이상으로 증가했지만, 관객 동원 수는 약 1억 5천만 명으로 증가하지 않았다. 한 편의 영화에 대한 관객 수가 줄고 있고, 대부분의 관객은 전체 스크린 중 85%를 차지하는 시네마 콤플렉스에 집중되어 있다. 하나의 극장에서 한 편의 영화를 상영하는 미니시어터의 흥행 성공 전략이 디지털 전환으로 이제 불가능한 일이 됐다. 제7예술극장의 마츠무라 아츠시는 “예술영화관 또한 돈을 벌어야 하기에 관객 수를 늘려야 한다. 젊은 세대들은 그러나 미니시어터의 존재를 잘 모른다. 그들에게는 시네마 콤플렉스가 극장의 전부다. 일 년에 서너 번 영화를 보는 젊은 세대 관객을 예술영화관에서 개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교토 시네마

교토시네마(京都シネマ)의 지배인 요코치 유키코(横地由起子)는 예술영화관이 아주 없어지지는 않겠지만 영화를 상영하는 것만으로는 극장을 유지하는 것이 이제 어려울 것이라 전망한다. “좋은 영화를 상영하는 것만으로 영화관이 예전처럼 시대의 공기, 가치관을 만드는 공간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극장은 영화관을 만드는 사람들이 만드는 것만이 아니라, 그곳으로 눈길을 향하는 사람들이 만든다. 관객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어떤 사람들이 영화관에 오고 싶어 하는지, 뭔가 영화 이외의 세계를 접하려는 것인지를 파고 들어가야 한다. 이것만이 교토시네마를 살아남게 해줄 길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2004년 12월에 오픈한 교토시네마는 원래 1988년에 개관한 미니시어터 교토 아사이 시네마가 전신이었다. 예술 계열의 영화 상영을 했던 곳으로, 2003년에 폐관하면서 이 극장을 운영하기 위해 여러 사람들에게 호소해 주식출자 방식으로 새로 시작하게 됐다. 예술 계열 영화를 상영하는 미니시어터로는 드물게 교토시네마는 지금 3개관을 운영하고 있다. 개관할 당시의 구상으로 상업적 흥행을 위해 두 개관이 필요했고, 다른 한 개관은 교토에 있는 학생들의 영상 작품을 상영하는 관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예전 필름 시절에는 필름 프린트 수가 한정되어 있었기에 도쿄 중심에서 시작해 지방으로 퍼지는 순차상영이 있었지만 지금은 디지털의 변화로 인해 프린트의 제약이 없어지면서 도쿄와의 동시 상영도 진행 가능하게 되었다고 한다.

교토의 관객은 예술에 대한 관심도가 높다. 대학이 많아서란다. 교토는 이른바 학생의 거리다. 학생들이 사회에 대한 관심이 많으니 관객들도 많다고 한다. 한해 18만 명 이상의 관객이 극장을 찾고 있다. 연간 상영의 50%는 유럽 영화. 나머지 25%는 일본 영화, 나머지 25%가 미국 영화와 아시아 영화들이다. 아직까지 깨지지 않는 기록을 낸 영화는 <카모메 식당>으로, 16주 동안 상영했다고 한다. 현재 수익의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입장료이고, 이어 상영 작품의 팜플렛 판매 수입, 세 번째가 회원제 회비다. 놀랍게도 회원이 8천 명이다. 특별회원(개관 시 모집한 프리미엄 회원), 일반회원, 시니어 회원들이 있다. 일반회원은 입회비가 4천 엔으로 영화 한 편당 천 엔(한화 만 원 정도)에 볼 수 있다. 교토시네마가 최근 가장 고민하는 건 영화관으로 계속 존속할 수 있는 다른 대안들을 찾는 것이다. 이제는 시대가 바뀌어 극장이 영화를 상영하고 관객이 영화 보러 오는 것만으로는 극장이 지속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사람들과 이 장소를 만들어 갈지를 고민하는 것이다. 영화 이외의 장소와 가능성을 추구하는 것. 교토시네마는 그리하여 갤러리를 마련하고, 교토 예술 계열의 대학생들과 연계해 새로운 활동을 구상 중에 있다.

고전영화의 리터러시 교육이 필요하다


구로사와 기요시의 <지옥의 경비원 地獄の警備員>(1992)의 각본을 쓰기도 했고, 이제는 영화자료관 플래닛 플러스 원PLANET PLUS ONE을 운영하는 토미오카 쿠니히코(富岡邦彦) 또한 세대와 관객층의 갭을 해결하는 것을 과제로 제시한다. 그는 독립영화를 보는 관객과 고전 예술영화를 보는 관객들이 분리되어 있는 현실에서 이들을 통합한다는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한다. 오사카의 플래닛 플러스 원을 방문했을 때 그가 운영하는 작은 극장에서는 “영웅본색: 60-70년대의 남자 배우들 특별전”이 열리고 있었다. 그의 사무실 벽에는 로버트 알드리치의 <북극의 제왕>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이런 영화를 보러 온 관객들은 나이가 있는 분들이 대부분이다.” 그는 지금의 젊은 친구들이 오래된 영화를 보러 오지 않는 것을 근심한다. “관객층의 극단적인 분리가 있다. 고전영화를 보는 나이 든 관객은 영화의 가치가 있는 작품을 찾지만, 젊은 사람들은 조그만 세계에서 자기 세계에 만족하며 그런 영화를 만든다. 많은 영화를 봐서 안목이 성장한 영화들을 만들게 해야 한다.” 1970년대 학생 시절 때부터 전설적인 자료수집가인 고베영화자료관의 야스이 씨와 함께 자주상영을 해온 그가 요즘 역점을 두는 사업은 CO2(Cineast Organization Osaka)라는 프로젝트다. 오사카영화제를 통해 약 60만 엔의 제작비를 지원해 아시아 전역의 젊은 감독들을 육성하는 기획이다. 그는 가와세 나오미처럼 도쿄를 떠나 지역을 거점으로 세계를 향해 발신하는 영화를 찍는 최근의 추세를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지역에 근거한 네트워크의 시도가 이제 가능하다는 것. 문제는 시네마테크가 지역에 없다는 것, 그리고 이로 인해 영화를 읽는 관객의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고 있다는 진단이다. “세대의 갭과 양극화가 진행되고 있다. 인디영화를 보는 관객과 고전영화를 보는 관객의 교차를 시도해야 한다. 젊은이들은 고전영화를 안 보는 이유 중의 하나는 고전영화를 읽는 능력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고전영화를 상영하는 시네마테크가 지역에 절실한 이유다.



플래닛플러스원


일본은 영화관에 대한 국가 지원이 없는 편이다. 이에 대해 요코치 유키코는 “이와 같은 지원의 부재로 제작과 상영 간의 연계가 끊어지게 되어 서로에게 매우 불리한 결과가 나타났다. 디지털 시네마라는 새로운 영화 포맷이 등장했을 때, 이에 대한 대책이 영화관만의 문제로 남게 되어 최근 들어 미니시어터들이 폐관하게 된 결정적 이유가 되기도 했다”고 말한다. 고베영화자료관(神戸映画資料館)의 야스이 요시오(安井喜雄) 씨 또한 필름 컬렉션을 아카이빙하는 과정에서 문화청으로부터 최근 지원을 받고 있다. 최대 규모의 필름 컬렉션을 보유한 고베영화자료관은 전설적인 컬렉터인 야스이 씨가 운영하는 민간 아카이브다. 필름이 4천 편, 잡지 서적류가 4천 편, 포스터가 1만 장 정도다. 이곳은 예술영화관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질문, 즉 귀중한 영화자료를 어떻게 보존할 것인가, 라는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 고베영화자료관은 한신 대지진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은 고베의 거리, 그중에서도 상흔이 가장 크게 남았던 나가타 지구의 새로운 마을 만들기의 일환으로 설립하게 됐다. 야스이 씨는 대학에 다닐 때부터 영화연구회를 조직해 상영회를 시도했고, 그 과정에서 영화와 관련된 이들과의 인연으로 그들이 갖고 있던 필름을 물려받거나 컬렉션을 하게 됐다. 그리고 이게 점점 커져 지금의 아카이브가 됐다. 일본에는 우리의 영상자료원에 해당되는 도쿄필름센터가 있는데, 이와 비교하자면 야스이 씨는 영화에 그 어떤 위계도 두지 않고 뭐든지 수집한다. 이런 태도는 마치 초기의 앙리 랑글루아의 수집 태도를 연상케 한다. 물론, 양적으로 보자면 전시 기록영화와 문화영화들이 많은 편이라고 한다. 현재 고베영화자료관은 운영의 어려움 때문에 주말 영화 상영이나 갤러리 위탁 운영비, 시사회 등으로 경비 마련을 시도하고 있다 .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일본에는 한국의 영등위와 비슷한 ‘영륜’이라는 등급기관이 있지만 영화 상영 시에 법적인 강제성은 없다는 것이다. 카게야마 사토시는 “영륜은 법적 강제성이 없다. 시네 콤플렉스의 경우 영륜 심의가 필요하지만, 미니시어터는 따로 그럴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영륜을 거치지 않고 작품을 상영하는 경우가 많다. 국가가 지원하지 않는 상황에서 영화 상영에 국가의 허락을 받을 필요가 없다. 국가가 간섭할 권리가 없다”는 마츠무라 아츠시의 말이나, “주류 영화의 경우에는 형식적으로 영륜의 심사를 받는다. 하지만 제재는 없다. 일본의 영륜은 공적기관이 아니라, 영화업계에서 만든 기관이기에 강제성이 없다”는 토미오카 씨의 주장에는 힘이 실려 있다.

젊은 세대의 관객을 늘리고 싶다


예정에는 없었지만 마지막으로 꼭 방문하고 싶은 곳이 하나 있었다. 고베 산노미아역 근처의 모토마치 영화관이다. 지배인인 하야시 씨는 이 극장을 지극히 보통의 영화 팬들이 자신들의 손으로 만든 영화관이라 소개한다. 사실, 이 극장의 홈페이지에 걸린 호소문의 글귀 때문에 이 극장을 꼭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던 터였다. 이 호소문의 첫 구절은 켄 로치의 <빵과 장미>에 나오는 ‘인간의 삶에는 빵뿐 아니라 장미가 필요하다’라는 말로 시작한다. 고베의 길거리나 상가에 있던 영화관들이 차례로 자취를 감추는 것을 아쉬워하며 채플린이 처음 일본을 방문하기도 했던 유서 깊은 고베에 영화예술의 존속과 계승, 지역 활성화를 목표로 미니 시어터를 세웠다고 말한다. 특별히 마음을 끌었던 호소문의 뒷부분의 문장들은 이런 식이었다. 모토마치 영화관은 지극히 보통의 영화 팬들이 자신들의 손으로 만든 영화관으로, 영화관 경영의 경험도 없는 아마추어 집단이 그럭저럭 문을 열 수 있었던 것은 영화관 설립 취지에 찬동해준 여러분들의 후원 덕분이다. 하지만 비영리단체가 운영한다고 해도 이 영화관 운영에는 많은 경비가 들어가고, 어떻게든 조달을 해야 하니, 모토마치 영화관의 안정적 운영을 위해 여러분에게 찬조와 기부 및 응원 등의 협력을 부탁드린다, 는 내용이었다.



모토마치영화관


그녀는 고베에 영화관이 세워진다는 소식에 직장을 그만두고 극장에서 일을 하게 됐다고 한다. “원래는 영사기사였다. 극장의 준비 단계 때는 다른 직장을 다니고 있었다. 그런데 아사히 신문의 지역 뉴스에 이런 극장이 준비 단계에 있다는 기사를 보고는 영화관이 세워진 곳에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관을 만드는 일에 첫 단계부터 관여할 수 있다는 점에 신이 나 연락을 했다. 예전에 영사기사였다고 말하니까 당장 와서 일해 달라고 했다. 아무런 보상도 없는데 그 길로 회사를 그만두고 일을 하게 됐다.” 2010년 8월에 개관한 이 극장에서 정직원은 3명으로, 기타 20여 명의 자원봉사자들의 도움으로 운영되고 있다. 운영의 어려움에 대해 묻자 “저임금을 받고는 있지만 입에 풀칠을 하면 되지 않나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장래의 보장은 생각하지 않고 있다. 동원 관객 수가 느리지만 향상 일로에 있다. 가능한 한, 향상 추세가 계속되기를 바라고 있다. 일하는 사람들이 영화 바보라고 할 만큼 영화가 좋아서 영화만 생각하고, 자기 취미도 없고 개인 생활도 별로 없다”라고 말한다. 그녀는 한국의 경우 젊은이들이 예술영화관이나 영화제를 많이 찾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며, 이를 굉장히 부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젊은 세대를 늘리고 싶다. 일본의 모든 미니시어터의 최대 과제가 그것이다.”

지난해 8월, 이 극장은 개관 5주년 행사를 마쳤다. 그녀와 헤어지며 이런 말을 서로 나눴던 것을 기억한다. “서로 열심히 해서 함께 살아남자.”

김성욱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