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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전/엘리아 카잔 특별전

엘리아 카잔의 아메리카

지난 8일 오후 7시 시네마테크 전용관 서울아트시네마에서는 엘리아 카잔의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상영 후, ‘엘리아 카잔의 아메리카’란 제목으로 서울아트시네마 김성욱 프로그래머의 강연이 있었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뿐만 아니라 엘리아 카잔의 영화적 세계에 대해 전반적인 설명을 들을 수 있었던 강연의 일부를 옮긴다.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 엘리아 카잔과 관련해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미국이라는 거대한 세계다. 1930년대에서 50년대를 거치며 카잔이 영화를 만들기 위해 표현했던 ‘아메리카’라는 사회는 개인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이 겹치는 곳이었다.

엘리아 카잔은 2003년 9월 28일 사망했다. 1976년에 <라스트 타이쿤>을 만들고 감독에서 은퇴한 셈이었는데 그래서 그는 오랫동안 잊혀져 있었다. 하지만 1990년대에 「어 라이프」라는 자서전을 출간하면서 다시 세인의 관심을 끌었다. 카잔이 다시 주목을 얻게 된 것은 세기말인 1999년에 그가 아카데미 수상식에서 평생공헌상을 받게 되면서이다. 20세기를 마감하며 아카데미에서 정치적 밀고자였던 카잔에게 공헌상을 수상하는 것은 1950년대의 미국이 어떤 것인가를 떠오르게 하는 사건이었다. 카잔이 공헌상을 수상하는 시기에 그의 수상에 대해 논쟁이 엄청 짙게 벌어졌다. 1999년의 소동이 보여준 것은 카잔의 생애와 작품을 둘러싼 미국이란 사회, 특히 1950년대 미국이란 사회다. 이는 ‘아메리카’가 무엇이었는가를 되돌아보게 만드는 사건이었다.

「어 라이프」라는 자서전에서 보면 영화계에서 은퇴한 카잔은 매일 아침 면도용 거울을 쳐다보며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계속했었다고 한다. 카잔은 터키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이주자였다. 1909년에 콘스탄티노플에서 태어났고 터키 악정을 피해 건너왔다. 사실 이번 특별전에서 <아메리카, 아메리카>를 상영하고 싶었는데, 이 영화는 카잔의 가족 삶을 반추하게 만드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터키에서 미국으로 오는 이주민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로 그의 어린 시절과 그가 가졌던 정체성의 혼란을 되돌아보게 하는 작품이다. 카잔의 경우는 부친이 양탄자사업을 했기 때문에 유복하게 성장했고, 경제적인 어려움이 없었지만 이주민, 인종 계층적 부분에서 어려움을 겪었다고 토로한다. 카잔이 연극을 하게 된 것도 미국이라는 사회에서 살기 위해 불가피한 행위였다고 말하고 있다. 미국 사회에 합류하고 다른 사람들과 친구가 되고 싶어 했고 존경을 받고 싶었기에 그는 공산당원이 되었다고도 했다. 

엘리아 카잔의 영화적 특징을 몇 가지 점에서 말하고 싶다. 카잔의 영화는 특정한 미국적 경험을 다룬다. 이는 특정한 미국적 역사와 관련되는데, 가령 1920년대와 <에덴의 동쪽>, 대공황기와 <초원의 빛>, <대하를 삼킨 여인> 등을 살펴볼 수 있다. 카잔은 개인적 인성의 복잡함에 관심이 있었다. 그는 또한 미국이란 사회의 어두움을 적극적으로 표현한 감독이다. 카잔의 영화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장면의 내용을 풍부하게 하는 인물들의 움직임, 그들의 파워게임이다. 그의 영화에서 남자 주인공들인 브랜도, 제임스 딘, 워렌 비티는 섹슈얼하면서도 상처받기 쉬운 인물들이다. 또한 간과할 수 없는 점은 카잔이 미국의 비즈니스 세계를 탐구한 흔치 않은 감독 중의 한 명이었다는 점이다. 그는 자본주의, 물질주의 문화, 아메리칸 드림의 부패, 그것이 악몽과 환영으로 돌변한 세계를 그렸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는 논란적인 소재를 다루고 있는데, 영화는 블랑쉬에 초점을 두면서 그녀의 무능함, 현실세계에 적응하지 못하는 면을 표현한다. 그녀는 어두운 과거를 피하려 한다. 이 영화는 '벨 레브', 즉 아름다운 꿈의 상실을 보여주는데, 이러한 꿈의 현실화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특히 흥미로운 것은 수치와 영광의 결합으로서의 몸의 발견이다. 이 영화의 첫 장면은 그런 점을 보여준다. 블랑쉬가 말론 브란도의 육체를 지각하고, 경련을 느끼며 두려움과 매혹을 느끼는 순간이 잘 표현되어 있다 그의 육체는 그녀의 정신을 비웃지만 동시에 정신을 매혹시킨다. 그렇게 카잔의 영화에서 몸, 배우의 몸들이 집요하게 일을 한다. (정리: 강민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