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프레드 히치콕의 필모그래피 안에서 <현기증>(1958)은 가장 미스터리하며, 시각적으로 풍요로운 작품 중 하나로 간주되어왔다. 히치콕의 작가적 완숙미가 정점에 달했던 시기를 대표하는 이 영화는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오가는 스토리, 인간의 강박증에 대한 심리학적 탐구로 히치콕 영화에 빈발하는 '거짓 정체성'을 다룬 여러 이야기들 중 최고작으로 꼽힌다. 토마 나르스자크와 피에르 브알로(앙리 조르주 클루조의 <디아볼리끄>의 원작자이다)의 소설 <죽은 자들 사이에서>를 원안으로 한 <현기증>은 무려 네 사람의 시나리오 작가의 손을 거쳐 개작되었다. 히치콕은 여기서 시각적 진술의 명료함과 위력을 통해 역동적인 영화 정보의 흐름을 만들어낼 뿐 아니라 지극히 단순한 장면에서조차 정보전달 이상의 의미를 추구하는 작가적 완벽함을 보여준다.


<현기증>의 플롯은 고소공포증에 시달리는 경찰관 존 퍼거슨(‘스코티’라는 애칭으로 불린다, 제임스 스튜어트)의 병리적 여정을 따른다. 직업적으로 큰 결격사유가 될 수도 있는 병증으로 동료 경찰을 잃은 스코티는 경찰 일을 그만두고 사설탐정으로 소일하는데, 대학 친구 개빈 엘스터로부터 부인 마들렌(킴 노박)의 뒷조사를 의뢰받는다. 스코티는 아름다운 금발의 여인 마들렌의 뒤를 밟으며 점차 그녀의 매력에 빠져들지만 마들렌은 교회 종탑 꼭대기에서 갑작스레 추락사하고 만다. 자괴와 절망으로 자책에 빠진 스코티는 어느 날 마들렌을 꼭 닮은 여인 주디 바튼(킴 노박)을 만나고, 마들렌에 대한 감정을 투사하여 주디에게 집착하기 시작한다.

<현기증>은 압도적인 시각적 상징과 히치콕 스타일의 원숙미를 예증한다. 영화예술에 특정적인 거의 모든 요소들이 이 영화를 잊기 힘든 걸작으로 만든다. 스코티의 내면은 어두운 벨벳과 같은 색으로 디자인되는데, 일관성 있는 색채의 사용은 스코티가 마들렌에 대해 내밀하게 품게 되는 감정에 대한 전조로 기능하면서 마들렌을 좇는 미행 시퀀스들에서 그의 내면 정경을 시각적으로 기술한다. 그래픽 디자이너 솔 바스가 디자인한 기하학적 타이틀 시퀀스에서부터 주문을 걸 듯 관객의 의식을 지배하는 녹색의 사용도 눈에 띈다. 무엇보다 <현기증>을 영화사의 걸작으로 추대한 것은 시종일관 꿈과 같은 분위기를 만들어내면서 강력한 몰입을 유도한 창의적인 연출이다. 스코티가 시달리는 아득한 고소공포증을 형상화한 줌 인-트랙 아웃 만큼이나 <현기증>의 창조적 스타일은 느리게 움직이는 이동 촬영 장면들로 완성되고 있다. 이를테면 스코티가 마들렌을 처음 만나게 되는 레스토랑 신에서, 카메라는 느리게 팬 하여 레스토랑의 거의 모든 사람들을 훑는다. 이 장면에서부터 카메라는 레스토랑의 여기저기를 느리게 이동하면서 종내에는 마들렌의 등에 가닿는다. 스타일의 효과에 대한 상식을 따른다면, 카메라의 이동은 캐릭터의 관심사에 의해 동기화되며 그 속도는 빠르게 움직이는 것이 보통이다. 또한 대개 주 인물의 관심이 쏠려 있는 대상의 얼굴에 카메라의 초점을 맞추는데 반해 히치콕은 이러한 형식의 준거를 완연히 거스른다.


무엇보다 미려한 카메라 움직임은 삶과 죽음 사이의 미로를 헤매고 있는 듯한 미스터리한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다. 흡사 터널 또는 미로에 대한 페티시라고 칭할 수 있을 만큼 이러한 움직임의 형상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를테면 이런 장면들이 퍼뜩 떠오른다. 교회에서 마들렌의 뒤를 밟을 때 스코티의 현기증을 유발하는 미로의 형상, 샌프란시스코 시내를 미끄러지듯 이동하는 자동차 미행, 미스터리한 분위기에 휩싸인 마들렌의 뒤를 밟아 미술관으로 들어가는 터널의 이미지 따위. 이미지의 심상은 <현기증>에서 다분히 상징적인 차원을 갖는다. 앞서 말한 숲 장면에서 마들렌은 스코티에게 “계속 터널 속을 걷고 있는 꿈을 꾼다”고 말하기까지 한다. 이 상식 밖의 기교가 야기하는 스타일적 효과는 관객들이 스코티의 심리 상태에 젖어들게 만들고 마들렌을 향한 그의 동경에 연루되도록 한다.

<현기증>은 히치콕의 걸작들이 걸어왔던 길처럼, 무수히 많은 평자들에 의해 다채로운 방식으로 해석되었다. 심리학과 정신분석학, 리얼리즘과 상징주의의 혼융, 페미니즘, 신화 분석의 틀을 빌어 이 영화를 읽어내려는 다양한 시도들이 있었다. 그 중 흥미진진한 해석은 신화와의 연관성이다. 존재할 수 없는 대상에 대한 집착을 다룬 영화의 내용은 즉각적으로 피그말리온과 갈라테의 신화를 떠올리게 한다. 피그말리온은 자신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여인의 이미지를 ‘갈라테’의 조각으로 완성한다. 그는 갈라테와 진짜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 이를 동정한 신 아프로디테는 피그말리온을 위해 조각에 생명을 불어 넣는다. <현기증>에서 피그말리온과 갈라테의 신화는 스코티와 주디에 의해 재현된다. 스코티는 주디를 자신의 갈라테로 변형하는데, 마들렌이 입었던 회색 드레스와 신발을 착용하고 머리 모양과 색깔을 변형하면서 그녀에게 집착한다. ‘이상화된 이미지에 대한 재현’이라는 점에서 스코티의 강박은 영화의 욕망과 상통하는 지점이 있다. 이미지에 홀리는 영화적 인간을 다룬 이토록 매혹적인 영화를 나는 본 적이 없다.

글/
장병원(영화평론가)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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