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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시네바캉스 서울/Review

자크 투르뇌르의 '캣피플'


젊고 아름다운 디자이너 이리나는 출생의 비밀에 사로잡혀 있다. 세르비아의 작은 마을 출신인 그녀는 사탄을 숭배하던 마을 사람들이 마녀로, 혹은 표범 형상으로 바뀌었던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마을 전설에 따르면, 그런 피가 섞여있는 사람은 사랑에 빠지면 안 된다. 육체적 접촉이 이뤄지는 그 순간 표범으로 바뀌어 상대방을 죽일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리나는 올리버와 사랑에 빠지고, 곧 질투와 의심과 자기 파멸의 격류에 휘말린다.

1942년작 <캣피플>은 프로듀서 발 류튼이 처음으로 제작한 작품이다. 발 류튼은 그 전에 신문기자와 펄프소설작가로 생계를 꾸려갔으며, 거물 제작자 데이빗 O. 셀즈닉에게 발탁되어 영화사 스토리 에디터로 영화계에 입문했다. 그는 당시 파산 일보 직전이었던 영화사 RKO로부터 ‘14만 달러 이하의 예산으로 공포 영화를 찍으라’라는 조건 하에 프로듀서 일을 맡게 됐다. ‘표범 인간’이라는 막연한 주제를 건네받은 발 류튼은 각본가 드윗 보딘과 함께 밤새 시나리오를 써내려갔고, 당시 풋내기 연출자였던 자크 투르뇌르와 팀을 이루었다. 극저예산이다 보니 시각 효과에 돈을 거의 쓸 수가 없었다. 심지어 실내 장면은 그 직전에 촬영됐던 오슨 웰스의 <위대한 앰버슨가> 세트를 재활용해야 했다.

그러나 발 류튼과 자크 투르뇌르는 이 현실적인 빈곤을 극복하는 놀라운 법칙을 <캣피플>을 통해 발명했다. 발 류튼이 회상했듯, “영화 맨 처음부터 공포영화 법칙은 아예 내던져 버렸다.” 영화를 통틀어 표범이 인간을 직접적으로 공격하거나 물어뜯는 피범벅의 장면은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캣피플>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은 올리버의 동료 앨리스가 밤길을 걷다가 이리나에게 쫓기는 장면과 역시 앨리스가 수영장에서 표범의 위협을 느끼는 장면이다. 두 장면 모두, 효과적인 사운드와 촬영 기법만으로 공포의 분위기를 극대화한다. 앨리스의 뒤를 쫓는 이리나의 하이힐이 또각거리는 소리가 어느덧 사라지고, 앨리스가 뒤를 돌아보자 가로등과 돌 벽과 수풀의 그림자만 일렁거린다. 그러다가 갑자기 앨리스 앞쪽에서 요란한 쇳소리를 내며 버스가 멈춰 선다. 공포의 암시가 예상치 않은 반전으로 끝나며 앨리스와 관객 모두 ‘내가 느낀 감정이 과연 온당한 근거가 있는 것이었나’라는 의혹과 주저 속에 남겨두게 된다. 수영장 장면에서는 빛과 그림자를 교차시키는 것만으로 뛰어난 공포의 환영을 재창조한다. 표범의 으르렁거리는 소리만 희미하게 들린 채, 천장에 되비친 수영장 물의 일렁임 사이로 언뜻언뜻 기이한 생명체의 윤곽선이 드러났다 휙 사라진다.

기대 심리를 한껏 고조시키고, 공포의 원인을 등장시키는 시간을 지연시킨 다음 결국 그 정체를 분명하게 보여주지 않은 채 신경을 한껏 자극시키는 방법으로 암시만 하는 것이다. 이 같은 기법은 이후 발 류튼과 자크 투르뇌르의 협업작 <나는 좀비와 함께 걸었다>(1943) <레오파드 맨>(1943) 등에서 더욱 정교하게 발전된다. 공포영화라기보다는 악몽의 시 같은, 어두운 도심 한복판에서 느닷없이 맞닥뜨리는 의혹을 모호하게 제시함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자신이 무언가를 보았다고 ‘오인’하게 만드는 탁월한 공포 효과가 여기서부터 시작됐다.

덧붙이자면 <캣피플>은 공포영화의 컬트적인 숭배자들을 불러 모았던 여배우 엘리자베스 러셀의 데뷔작이기도 하다. 러셀은 극 중 이리나의 결혼식 피로연장에서 이리나에게 “나의 자매여”라는 말을 건네는 수수께끼 같은 존재로 등장한다.

글/김용언(씨네21 취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