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에세이

스펙터클과 탐구 - '시네마테크 사태'의 두 가지 측면


역사가 그러하듯 영화의 역사에도 나쁜 반복이 있기 마련이다. 42년전의 파리로 되돌아가보자. 1968년 2월,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의 설립자인 앙리 랑글루아와 그의 동료 마리 엡스텡, 로테 아이스너, 메리 미어슨이 일방적으로 해임되는 일이 발생한다. 당시 드골 정부의 관료들이 랑글루아의 비리를 문제삼아 이들을 몰아낸 것. 시네마테크는 비영리 독립단체이지만 정부 지원금을 받고 있었다. 우리 식의 영진위인 CNC가 문제였다. 이들은 시네마테크의 운영진을 바꾸고 싶어했다. 고다르, 트뤼포, 샤브롤 등의 ‘시네마테크의 자식들’이 반대성명을 내고 시위에 참여했다. 트뤼포는 ‘시네마테크에 가지 맙시다. 랑글루아가 돌아오지 않는 한 시네마테크를 상상의 것으로 남겨둡시다’고 주장했다. 나중에 샤브롤은 이 사태가 영화계를 어슬렁거리던 일부 영화인들과 관료들이 시네마테크를 접수하려는 기획이었다고 말한다. 그들은 ‘왜 나는 안되냐’며 나섰던 것이다.

랑글루아와 시네마테크의 운영진들을 교체한 이 사태는 두 단계로 진행됐다. 첫 단계로 랑글루아의 비리를 들춰내기 위해 대대적인 감사가 진행됐다. 이 과정에서 영수증 처리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빌미를 잡아냈다. 이어, 미리 준비된 이가 시네마테크의 일을 수행하도록 임명됐다. 피에르 바르뱅이란 자가 그였다. 그는 랑글루아가 쫓겨나기도 전에 공공연하게 자신이 시네마테크를 운영하게 될 거라고 떠들고 다녔다. 트뤼포는 바르뱅을 겨냥해 ‘예전에는 얼간이나 무분별한 자들이 알제리나 뉴칼레도니아로 추방되었는데, 이제는 바르뱅 같은 자들이 파리에 달라붙어 영화제의 막을 내리거나, 스타에게 꽃다발을 건네주는 일에 집착하며 뽐내고 완강히 버티고 사람을 괴롭히고 거만해져간다’고 꼬집었다. 

42년전, 파리의 겨울을 뒤흔든 이 사태는 누벨바그의 역사만큼이나 중요한 사건으로 남았다. 영화인들이 반발했고 즉각적인 시위가 벌어졌다. 성명서가 낭독됐고 저널에 항의의 글이 실렸다. 고다르식으로 말하자면 '시네마테크 사태'는 스펙터클한 사건이자 탐구이기도 했다. 이 사태는 그런 점으로 영화의 본성과 닮았다. 최근 시네마테크의 공모제와 관련한 문제에도 이 두가지가 있다. 관객들, 영화인들의 열띤 발언과 행동은 스펙터클을 구성한다. 아울러 특별한 탐구와 질문이 제기된다. 

최근에 나는 ‘시네마테크 사태’와 관련해 두 통의 편지를 받았다. 그 하나는 지극히 예언적인 것으로, 지난해 12월 30일에 정성일 평론가가 보내온 편지였다. 이 편지에서 그는 ‘우정을 나눌 장소는 위기에 빠졌고, 아직 대안은 없다. 아마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나는 예술과 정치의 수상쩍은 구별을 항상 의심한다. 물론 시네마테크 친구들의 희생적인 노력 덕분에 우리는 그동안 아무 걱정 없이 영화를 보았다. 여기서 방점은 불행히도 ‘그 동안’이다. 하지만 이제 그 희생의 노력만으로 충분하지 않게 되었을 때 당신은 무엇을 할 것인가? 당신의 투쟁전선은 고작 해야 방안의 홈 씨어터인가? 보고 싶은 영화를 위한 당신의 저항은 불법다운로드인가? 우리가 믿는 정의를 옹호하기 위해서 해야 하는 행동을 결정해야 할 시간. (중략) 당신은 영화를 본다는 것 말고는 아무 이해관계도 없는 장소를 방어하기 위해서 (어떤 형식이건) 희생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가. 이것은 다시 입장의 문제이다. 그리고 입장의 효과(와 결과)를 생각해야 한다. (중략) 누가 결정을 내리는가? 결정의 내용을 아무리 따져보아야 거기에는 대답이 없다. 핵심은 결정을 바꾸는 것이다. 혹은 결정을 내리는 자리를 바꾸는 것 이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적고 있다.

다른 하나는 올해 2월 23일자로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의 대표인 코스타 가브라스가 서울아트시네마로 보내온 편지다. 이 서한에서 코스타 가브라스는 ‘서울아트시네마는 수년간 모범적인 방식으로 영화예술에 가치를 부여하고 진흥하기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이는 영화예술을 보다 더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운영진이 주도한 것으로 특별히 서울만이 아니라 한국에서 지금의 시네필들에게 중요한 장소가 되었습니다. (중략) 완전한 독립 없이는, 전용관을 갖지 않고서는, 장기적인 공적 지원 없이는 한국의 시네마테크는 영화 예술을 보존하고 복원하고, 진흥할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시네마테크 프랑세즈는 서울아트시네마와 최대한 연대하겠다고 밝혔다.

다시 42년전의 파리로 되돌아가보자. 1968년 4월 22일. 세 달을 끌어온 ‘시네마테크 사태’가 시네마테크 회원 수백명이 운집한 가운데 최종적인 해결을 알리게 된다. 국가가 내부 사항에 개입하는 일 없이 시네마테크가 민간단체로서 조직 운영될 것이라는 게 결정사항이었다. 랑글루아는 물론 다시 복귀했다. (김성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