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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저항하는 우리, 지켜야 할 시네마테크

해머의 <저항하는 파라다이스>로 본 시네마테크

이번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가 시작되기 전에 “레즈비언 시네마의 거장 바바라 해머 회고전”이 열렸었다. 그 전에 있었던 장 콕도와 장 주네 특별전을 접한 나는 콕도와 주네의 영화에 큰 감명을 받았던지라 레즈비언의 세계는 또 어떻게 그려질지 내심 궁금했다. 시간을 맞추고 맞춰 <저항하는 파라다이스>, <아웃 인 남아프리카>, <질산염 키스> 세 편의 영화를 보았다. 그 중 <저항하는 파라다이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한다. 독특한 형식과 구성 때문에도 인상적이었지만, 이 영화가 담고 있는 주인공들의 삶과 고민들이, 그 전에 접했던 다른 어떤 영화들보다 나에게 피부에 와 닿는 듯 가깝게 느껴졌고 생각하게 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삶에 대해, 또 나의 삶에 대해. 그리고 지금의 시네마테크 사태까지. 현재 서울아트시네마의 상황은 그 때 떠올랐던 많은 생각들과 자연스럽게 겹쳐진다.

<저항하는 파라다이스>는 내가 궁금했던 레즈비언의 세계가 그려져 있는 영화는 아니었다. 이 영화는 바바라 해머의 1999년 작품이다. 원래 바바라 해머는 이 영화를 통해 빛과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했었다. 이 영화의 배경이 되는 프랑스 남부지방에 위치한 카시스라는 섬은 많은 화가들이 그들의 작품활동을 위해 거쳐 가고 머물렀던 곳이다. 바바라 해머는 카시스 섬의 어떤 면이 이 많은 화가들을 머물도록 했는지 궁금해졌고, 그들의 발자취를 따르면서 그들의 작품 속에 담겨 있는 빛과 아름다움을 연구해 보고자 했던 것이다. 해머는 화가인 피에르 보나르와 앙리 마티스를 이 영화의 주된 인물로 설정하고 이들의 삶을 따라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에 코소보 전쟁이 발발했고, 이 전쟁 때문에 바바라 해머는 더 이상 그녀의 작업을 진전시킬 수 없었다. 왜냐하면 ‘가까운 곳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데, 과연 이 상황에서 예술가로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고민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해머는 영화의 방향을 살짝 바꾸게 된다. 코소보 전쟁 현장으로 달려가는 대신, 화가들의 삶 속에서, 또 카시스 섬 안에서 전쟁의 흔적들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해머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카시스 섬에 거주하면서 독일에 반항해 싸웠던 무명의 세 여인을 만나게 된다. 마리-앙주 알리베르 로드리게즈라는 그 당시 구청직원과 독일에서 파리로 도망 온 정치 망명자 리사 리코트, 그리고 저항군들의 기밀사항을 전달하는 역할을 했던 앙리 마티스의 아내가 그들이다. 마리-앙주 알리베르 로드리게즈와 리사 리코트는 이 영화를 촬영할 당시 카시스 섬에 생존해있던 인물들이었기 때문에 직접 인터뷰한 내용이 영화 속에 삽입되어 있다. 이렇게 해서 실제 살아있는 저항군들의 인터뷰, 이미 고인이 된 두 화가의 서신 내용과 작품들, 2차 세계 대전 당시 세 명의 여자 저항군들이 각각 활동했던 상황을 재현한 장면들, 그리고 세 명의 여자 저항군들 중 한 명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었던 발터 벤야민의 텍스트들로 이 영화는 가득 채워지게 된다. 빛과 아름다움에 대한 연구는 전쟁 중에 저항했던 인물들에 대한 연구로 옮겨지게 되었고, 영화 가운데 예술가와 저항군을 나란히 병치시키면서 전쟁의 시기에 예술 혹은 예술인의 역할은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해머의 고민을 담아내고 있다.

이 영화는 발터 벤야민의 다음과 같은 문구로 시작된다. “There is no document of civilization which is not at the same time a document of barbarism(야만적인 기록이 아닌(없는) 문명사회의 기록은 없다).” 결국 모든 문명사회의 기록 속에는 야만적인 기록들이 함께 존재한다는 것이다. 문명이 발달한 사회일수록 야만적인 행위들 역시 발달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 야만적인 행위들은 찬란한 문명 뒤에 교묘하게 가려진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야만적인 행위들에 의해 짓밟힌 희생자들이 반드시 존재하며, 이러한 희생 위에서만 문명이라는 것이 세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세워진 문명은 역사 가운데 찬란하게 살아남는 반면, 희생은 역사 속에서 사라지고 잊혀진다는 것이다. 해머는 알려지지 않은 역사, 알려지지 않은 소수자, 그리고 역사 속에서 서서히 사라지는 것들에 관심을 가지고 있고, 그것들을 알리고 기억하게 하기 위해 영화작업을 하는 작가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그런 관심과 열정이 이 영화 안에서도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이 문구가 사라지면 환한 햇살 아래 반짝이는 벚꽃 나무를 카메라가 주시한다. 카메라는 나무 아래에서 위쪽으로 화사하게 활짝 피어오른 벚꽃나무의 벚꽃을 푸른 하늘과 함께 담아낸다. 그러면서 카메라는 계속 원을 그리며 움직인다. 그 움직임으로 벚꽃들은 연한 분홍빛의 선을 그리면 원형으로 끊임없이 빠르게 움직인다. 그리고 이런 화면과 함께 2차 세계 대전 당시 저항군들이 불렀을법한 노래가 흐른다. 정확한 음정과 아름다운 음색이 아닌 거칠고 투박한 음정과 음색의 활동가가. 이 장면을 볼 당시는 그냥 화면이 참 아름답다는 생각만 했었는데,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해머는 이 장면을 통해 아름다움과 저항을 나누어서 따로 보지 않고 함께 두고 보고 싶었던 것 같다. 예술과 전쟁을 어떻게 조합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의 한 표현이었다고나 할까.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서 내가 이 영화를 보고 느낀 것을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내가 가장 강렬한 느낌을 받은 것은 바로 해머가 카시스 섬에서 만난 세 명의 여자 저항군들로부터 온 것이다. 정치망명가였던 리사 리코트는 약간 예외라 하더라도, 마리-앙주와 마티스의 부인은 평화롭게 카시스 섬에서 빛과 아름다움을 즐기던 평범한 여성들이었다. 마리-앙주는 구청직원으로서, 마티스의 부인은 한 화가의 평범한 아내이자 아이들의 엄마로서 평범한 삶을 살고 있었던 이들이다. 그랬던 그들이 어떻게 저항군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일까.

2차 세계 대전 당시 카시스 섬에는 많은 유태인들과 외국인들이 전쟁을 피해, 독일군을 피해 피난해 와서 머무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곳도 더 이상 안전한 곳이 되지 못했고, 피난 온 많은 유태인과 외국인들은 독일군들에 의해 체포되거나 죽임을 당했다. 이런 상황에서 마리-앙주는 구청직원으로 일하면서 유태인들을 위해 가짜 신분증을 만들어 주었고, 리사 리코트는 이들이 다른 인접국으로 망명할 수 있도록 직접 돕는 역할을 했으며, 마티스의 부인은 지역적으로 떨어져 있는 저항군들에게 몰래 정보를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마티스의 부인은 독일군에게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당하기도 했고, 끝까지 비밀을 지키기 위해 가지고 있던 전달문서를 씹어 삼키기까지 했다. 어느 누구도 인정해 주지 않고 기억해 주지 않고 기념해 주지 않을 일을 위해 내 자신의 목숨을 내놓을 수 있을까 싶다. 것도 전쟁의 상황에 말이다. 질서도 기준도 없는 혼돈의 상황 속에서 얼마든지 모르는 척 눈감고 편한 길을 갈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들은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얼굴도 모르는 이들을 위해 하루하루를 살아갔다. 언제 죽음이 내 눈앞에 떨어질지 모르는 상황 속에서 정말 말 그대로 하루하루를 긴장 속에 살아간 것이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서. 그것도 잘 알지 못하는 ‘남’을 위해서. 전쟁을 한 번도 경험해 보지 않은 나로서는 사실 전쟁의 극한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그 극한 속에서 느껴지는 죽음의 그림자가 얼마나 두렵고 숨 막히는 것일지 이해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다른 어떤 영화들보다도 이 영화를 보면서 전쟁이 주는 긴박감과 두려움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이들이 나와 같은 지극히 평범한 인물들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인터뷰 장면을 통해, 또 그 때의 상황을 재현한 장면들을 통해 그들이 느꼈던 두려움과 그 상황의 긴박함이 그대로 전달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들이 두려움 가운데서도 저항할 수 있었던 힘은 어디에 있었을까? 마리-앙주는 인터뷰 가운데 이런 말을 한다. “무언가를 해야만 했어요. 이유 없이 내 옆에서 사람들이 죽어갔어요. 이유가 있다면 단지 유태인이라는 거였어요. 그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어요.” 그녀의 고백에서 볼 수 있듯이 그녀에게 어떤 굳은 신념이나 논리가 있었던 것이 아니다. 단지 같은 인간으로서 누군가가 죽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단지 인종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려야만 했던 것이다. 이념의 문제가 아닌 너무나 인간적인 이유에서 그녀는 저항군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이다. 그녀는 저항군이 되기 위해 의지적으로 노력을 하고 행동을 한 것이 아니다. 느껴지는 대로 행동을 하다 보니 어느새 저항군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아니 되어 있었다기보다는 시간이 흐르면서 다른 사람들이 그녀를 그렇게 부르게 된 것이다.

마티스의 아내에 대한 기억을 회상하며 기술하는 중에 마티스의 손자는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한다. “흔히 사람들은 저항군에 가담한다고 하는데, 그건 잘못된 말입니다. 가담한 것이 아니라 흡입된 거죠.” 어떤 의도나 목적을 가지고 저항군이 된 것이 아니라 그 때의 상황이 그들로 하여금 그렇게 행동하게 만들었고,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그 상황 가운데로 빠져들어 간 것이다. 옳고 그름을 따질 어떤 사상적 기반도 시간적 여유도 없었던 이들이었다. 그들의 곁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 당장 무언가를 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이들의 삶이 나에게 더욱 가깝게 다가왔던 이유는 여기에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어떤 사상이나 이념에 따라 행동하게 된 이들이 아니라 일상의 삶 가운데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가장 근본적인 인간에 대한 의무감, 인간에 대한 사랑 때문에 죽음을 무릎 쓰고 행동하게 된 이들의 삶이 나와 그리 다르지 않다고 느껴진 것 같다. 다시 말하면 모든 인간은 기본적으로 그 마음 가운데 인간에 대한 의무감과 사랑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단지 그것을 의식하고 행동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나의 모습을 들여다본다. 정작 나의 삶을 돌아보았을 때 난 얼마나 그런 의무감들에 무감각하게 살아왔던가. 가장 근본적인 인간에 대한 의무감, 인간에 대한 사랑이 나의 삶과는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가. 지금도 이러한데 죽음이 언제 내 삶 속에 들어올지 모르는 긴박한 상황 속에서 난 과연 이들과 같이 행동할 수 있었을까 반추해보게 된다.

그런데 잘못된 시대의 흐름에 반대하여 저항하며 많은 이들의 생명을 살린 이 저항군들의 이야기는 역사 가운데서 서서히 사라지며, 더 이상 사람들 사이에서 이야기되지 않는다. 많은 이들의 망명을 돕고, 특히나 발터 벤야민의 망명을 도왔던 리사는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한다. “역사 속에서 이 모든 것이 사라지고 있어요. 그리고 그것에 대해 더 이상 말하지 않아요. 그렇지만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특히나 지금 독일의 젊은이들은 알아야 해요. 역사 속에서 그들의 조상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행동했는지를요.” 리사는 전쟁 중에도 그곳에 있었으며, 전쟁이 끝난 지금도 그곳에 있다. 그녀의 이 말은 그녀가 그 모든 것을 직접 체험하고 난 후 지금의 모습을 바라보며 던지는 말이었다. 추상적이지도 허구적이지도 꾸밈이 있지도 않은, 너무 명확하고 강렬하며 단순한 말이었다. 그렇지만 그 단순한 말은 묵직한 무게감을 준다. 왜냐하면 그녀의 직접적인 체험 속에서 걸러져 나온 말들이기 때문이다. 또 다시 나의 삶을 들여다본다. 난 역사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나. 알려고는 했던가. 역사 속에서 어떤 것이 사실이고 진실인지 분별해보려는 노력을 했었나. 지금 이들이 분명히 알고 있는 이 사실들은 시간이 지나고 시대가 바뀌면서 왜곡되거나 사라질 것이다. 우리가 노력하지 않는다면. 후대의 젊은이들이 인식하지 못하고 노력하지 못한다면 이들의 삶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단지 이렇게 사라져가는 것들이 이들의 삶에만 국한될까.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것들이 우리 곁을 떠나고 사라지고 있다. 그리고 사라지려 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꼭 필요하고 소중한 것이라면 어떤 희생을 감수하고라도 지켜져야만 한다. 사라지지 않도록 저항해야 한다. 어떤 신념이나 논리, 사상이 있어서가 아니라, 아니 그런 것들이 없더라도 저항할 수는 있다. 우리가 지키고자 하는 것이 정말 옳은 것이라면. 그것이 인간에 대한 의무감이고 인간에 대한 사랑과 관계된 것이라면. 지금 우리가 노력하지 않는다면, 제대로 보지 못하고 제대로 분별하지 못한다면, 그리고 제대로 저항하지 않는다면, 역사 속에서 소중한 것들은 서서히 사라져서 더 이상 아무에게도 회자되지 않는 것들이 되어버릴 것이다. 해머가 카시스 섬에서 만난 저항군들처럼, 우리가 어떤 사상이나 신념이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인간으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것을 방해받는 상황이라면 이 상황을 변화시키기 위해 우리는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 긴박하고 절박한 마음으로.


우리가 지키고자 하는 이 공간, 시네마테크 전용관 서울아트시네마는 물론 지금 당장 우리를 위해 필요한 곳이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저항하려고 하는 것일 수도 있다. 약간은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이유로 혹은 마음으로. 하지만 이 공간은 단지 현재 우리만의 문제는 아니다. 과거 8년 동안의 행적들 가운데 이 공간은 영화를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와 사랑과 평안함, 소통함, 인간에 대한 시각과 세계에 대한 시각을 제공해 주었다. 그리고 이 공간은 앞으로 우리 다음 세대들에게 그 과거의 행적들과 함께 지금 우리의 행적들은 전달해 주며, 지금 우리가 접할 수 있는 많은 것들보다 훨씬 폭넓은 것들을 제공하게 될 것이다. 이 공간은 지금 우리만의 문제가 결코 아니다. 과거의 문제이자 미래의 문제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더더욱 쉽게 이 공간을 포기할 수 없으며, 포기해서도 안 된다. 이 공간이 역사 속에서 더 이상 회자되지 못하고 사라지도록 내버려둔다면, 과거와 미래는 소통하지 못하고 우리에게서 끊어지게 되는 것이며, 그만큼 다음 세대는 그들이 오롯이 받아야 할 100%의 과거 중 많은 부분을 잃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8년 동안 묵묵히 이곳을 지켜왔던 많은 이들의 희생이 역사 속에서 사라지는 것이다. 개혁은 중요하다. 하지만 과거와 단절된 개혁은 의미가 없다. (방현주 관객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