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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시네마테크 사태’로 본 ‘시네필의 역할’에 관한 소고

들어가는 말: 2010년 겨울, 시네마테크를 기억하며


시네마테크 서울아트시네마에 대한 영화진흥위원회의 공모사태로부터 네 달, 계약종료에 따른 지원금 지급이 끊긴지 53일이 흘렀다. 주지하다시피 공모와 재 공모 강행에도 불구하고 응모 단체는 없었다. 애초부터 시작하지 말았어야 할 일이었다. 할 수도 없고 해서는 안 되는 일에 집착한 결과, 영진위는 명분도 위신도 다 잃고 말았다. 그렇다고 문제가 해결된 건 아니다. 영진위는 분풀이라도 할 요량으로 심통을 부리고 있다. 즉 공모제 무산 이후 어떤 후속조치도 내놓지 않고 있을 뿐 아니라, 서울아트시네마에 대한 지원도 중단한 것이다. 이 상황은 언제까지 계속 될 것인가.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나는 ‘시네마테크 공모제 사태’를 겪으면서 몇 가지 흥미로운 현상을 보았고 희망을 발견했다. 그것은 관객이 시네마테크의 주인이라는 존재증명에 다름 아니었다. 시네필의 힘으로 여론을 이끌어내고 사회적 합의를 도출시킬 수 있으며 그릇된 행정에 일침을 가할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여기서 서울아트시네마의 관객이 지난 4개월 동안 보여준 행동은, 적어도 이전의 행동양식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내가 주목하는 것은 이점이다. 이를테면 공모제 사태 이전의 관객이 ‘시네필이란 무엇인가’라는 것에만 몰두했다면, 이후에는 ‘시네필이란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혹은 ‘시네필은 무엇으로 어떻게 세상과 맞설 수 있는가’를 고민했고 이를 행동으로 옮겼다는 데서 차이가 발견된다. 이 땅의 시네필이 1950년대 유럽의 그들과 비교해 부족하지 않음을 확인시켜줬다고 말한다면 과장된 비약일까. 지금부터 지난 4개월여 동안 시네마테크 사태와 맞서온 시네필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이것은 지난 사건들에 대한 복기일 수 있고 환기일 수도 있으며, 다가올 또 다른 공세를 방어하는 무기가 될 수 도 있으리라는 생각이다.

1. 시네필(cinephile)이란 무엇인가.

나는 오래전부터 이 땅에서 시네필이라는 호칭에 대해 회의를 품어왔다. 시네필이란 무엇일까? 의심할 바 없이, 영화애호가는 영화를 보는 데 그치지만, 시네필은 끊임없이 영화를 이야기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저널리즘이 포기하고 안전판 위에 정지시켜버린 논의의 가능성을 끝까지 밀어붙여 영화를 재인식해야 한다. 그런데, 시네필이라는 단어가 이 땅에서 만들어진 개념이 아닌, 1950년대 유럽에서 발로한 영화운동의 지류로부터 탄생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우리의 영화광들에게 시네필이라는 칭호를 붙이는 게 적절한 일인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 시네필이 단순히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닌, 영화를 통해 소통과 연결과 변화까지 만들어내는 동력의 집합이라는 점에서 이 땅의 영화광은 왠지 시네필과는 거리가 있어보였다.

시네마테크 사태 초기, 정확히 말해서 2009년 2월 처음으로 시네마테크 공모제가 대두되었을 때, 그리고 2010년, 같은 일의 반복이 예견되었을 때까지도 시네마테크의 관객의 특별한 움직임은 없었다. 이 땅의 시네필에 대해 의문이 생긴 것도 이런 까닭이다. 대체 무엇 하는 사람들인가. 시네필은, 무슨 시네필? 시네마테크야 어찌되던 내가 볼 영화에 대한 걱정만 하는 게 시네필이란 말인가.

서울아트시네마를 찾을 때마다(황급히 달려와 영화를 보고 연기처럼 사라지는, 아주 오랜 시간동안 어디서 많이 본 사람인데 그는 누구일까? 라는), 의문을 품곤 했다. 분명 마주앉아 족보를 따져보면 알만 한 사람일 것 같은 그(들). 적지 않은 사람이 시네마테크를 거쳐 갔고 지금도 시네필이라 자칭하며 그곳을 서성이는 데, 왜 그들의 목소리는 시네마테크 사태에 보태지지 못하는 것일까. 항상 답답한 마음이었다. 혹시라도 필름으로 영화를 볼 수만 있다면 그곳이 특정한 장소가 아니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적어도 영진위의 공모가 발표된 2010년 1월 중순까지, 내 눈에 비친 서울아트시네마 관객의 모습은 딱 여기까지였다. 그러다 보니 나의 의심은 더욱 견고해졌다. 그것은 한국의 시네필은 시네마테크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시네마테크에서 영화를 보고 그 고색창연한 필모그래피를 켜켜이 쌓아가는 자신의 모습에 취해있는 건 아닐까 하는 의문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토록 유순하고 평온한ㅡ내일 당장 시네마테크가 없어진다고 해도 나는 오늘 영화를 보겠다는ㅡ태도를 유지할 수 있단 말인가. 당시 서울아트시네마 온라인카페에서는, 영화에 대한 이야기, 상영작과 기대작, 감독과의 대화 등에 대한 호기심과 애정공세가 전부일 정도로, 시네마테크 사태에 관한 글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1950년대 유럽의 시네필은 어땠을까? ‘시네필의 초상’이라 불리는 프랑수아 트뤼포의 경우를 잠시 살펴본다. 



2. ‘시네필의 초상’ 프랑수아 트뤼포 Francois Truffaut

프랑수아 트뤼포는, 한마디로 ‘살기 위해 영화를 만들고 병의 회복을 위해 영화를 찍었으며, 목숨을 걸고 영화를 사랑한 남자’라고 말하면 틀림없을 것이다(카트린느 드뉘브와의 이별의 아픔을 잊기 위해 <두 영국여인과 대륙>을 찍었고 쉴 틈도 없이 <아메리카의 밤>을 촬영하면서 재클린 비셋과 염문에 빠진 후 이 영화로 고다르와 완전히 결별하게 된다).

청소년기의 트뤼포는 하루 3편의 영화와 일주일에 3권의 책을 읽기로 결심한다. 그는 열세 살에 샤샤 기트리의 <사기꾼의 이야기> 숏과 대사를 완전히 외워버리는데, 그보다 몇 년 앞서 시네클럽에 가입해 활동을 하던 중이었다. 르누아르의 <게임의 규칙>을 12번이나 관람한 열네 살의 트뤼포는, 훗날 자신이 공식적으로 게재한 최초의 영화비평의 소재를 이 영화에서 얻는다(열여덟 살에 발표된 트뤼포의 평론 데뷔작 역시 <게임의 규칙>에 관한 글로, ‘라탱 구역’ 시네클럽 회보에 쓰여 졌고 이를 주선한 사람은, 에릭 로메르였다. 당시 라탱 구역 시네클럽에는 클로드 샤브롤과 자크 리베트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열여섯 살이던 1948년 10월 트뤼포는 ‘세르클 시네마’(영화중독자 서클)클럽을 개설하고는 영화상영회를 열기 시작하는데, 일요일 아침 1회를 4,000프랑에 대관하는 조건으로 ‘클뤼니 팔라스’극장과 계약한 후, 필름수급은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의 협조를 받게 된다. 개막작으로 부뉴엘의 <안달루시아의 개>와 르네 클레르의 <막간> 장 콕토의 <시인의 피>가 정해졌으나, <시인의 피>는 끝내 상영하지 못했다. 트뤼포의 상영회에 관한 재미있는 일화 하나를 소개하면, 그가 야심차게 기획한 프레드 니블로 감독의 1925년 작 <벤허>의 상영회는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는데, 이유인 즉 당일 같은 시간에 ‘노동과 문화’라는 영화클럽에서도 <벤허>를 상영하고 토론을 갖는 행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노동과 문화를 이끌던 인물은 다름 아닌! 앙드레 바쟁이었다. 그리고 트뤼포와 누벨바그의 시작을 세상에 알린 일대 사건, 즉 <카이에 뒤 시네마>에 기고한 ‘경멸의 시대: 프랑스 영화의 어떤 경향에 관한 소고’가 1년에 가까운 수정을 거쳐, ‘프랑스 영화의 어떤 경향’의 제목으로 최종 발표된 것은 그의 나이 스무 살 때의 일이었다. 이렇게 트뤼포는 1950년대 중반까지, 하루 1편의 영화를 보았고, 이틀에 한 편의 글 기고하는 평론가의 생활을 하게 된다. 영화를 제외한 그의 가장 가까운 친구는 각성제와 담배와 커피였음은 두 말 할 나위도 없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트뤼포를 비롯한 당시 카이에 뒤 시네마의 작가정책은 그들이 주장한 시네필로서의 행동양식과도 일치한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시네필’이라 불릴 만하려면, 첫째 자발적 애정을 품을 대상(감독 혹은 작품)을 스스로 결정한 후 지속적으로 지지해야 하고, 둘째 그 대상에서 비롯되는 하나의 작품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좇으려는 욕구를 실천해야 한다는 것. 트뤼포가 평생에 걸쳐 지지했던 감독으로는 막스 오퓔스와 로베르토 로셀리니, 샤샤 기트리와 오손 웰즈를 꼽을 수 있다. 트뤼포는 자신이 가장 좋아했던 감독 샤샤 기트리의 촬영장을 방문하지 못한 것을 두고두고 후회한 것으로 알려진다. 이렇게 볼 때 1950년대 유럽의 시네필과 한국의 시네필 사이에는 물리적 거리만큼이나 큰 간격이 존재한다. 다시 말해 트뤼포 시대의 영화광은 극장에만 머물지 않았다는 것이다. 끊임없이 세상과 맞섰고 자신을 세상에 내놓아 단련시키면서 운동을 이어갔다. 서울아트시네마를 오가는 속칭 시네필이라 불리는 관객을 보면서 답답증이 가중된 것도 이런 까닭이다. 시네필은 그저 영화만 보면 그만인가? 시네마테크가 영화를 상영하는 공간에 불과하다는 말인가.

3. 시네필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이제 와서 60년 전의 트뤼포와 오늘날 한국의 시네필에 대한 단순비교를 통해 그 명칭의 용법을 왈가왈부할 마음은 없다. 하지만 ‘시네필이 무엇인가’에서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까지를 고민할 때, 시네마테크에 대한 무한 애정의 밀도 또한 높아질 것이란 생각이다. 요컨대 시네필은 단순히 영화를 남보다 많이 보고 많이 아는 수준에 머무는 사람이 아니다. 시네필은 영화를 통한 확대재생산에 참여하여 마침내 어떤 담론과 운동을 만들어내는 사람이어야 한다. 쉽게 말해 자신만의 영화박물관을 짓는 것이 아닌, 영화로 발언하고 그 발언이 영화와 영화를 둘러싼 환경까지를 돌아보는 과정 속에서 오늘에 이를 수 있도록 부단히 움직이는 자들고 집단이다. 예컨대 고다르와 트뤼포, 혹은 로메르와 가렐의 필모그래피를 줄줄 꿰는 데 그치지 않고, 그들의 영화가 어떤 방식으로 비평적 언어와 조우했고 당대 유럽사회와 영화사에 영향을 미쳤으며, 마침내 역사를 만들어왔는지를 영화계보학적으로 논쟁할 준비가 돼있어야 한다. 그것은 영화를 보고 끊임없이 이야기하며, 글로 남기거나 토론과 학습을 통해 체득되어질 터이다. 그래서 시네필의 첫 째 화두는 ‘연결’과 ‘소통’이다. 남이 볼 새라 남이 먼저 알아챌 새라 고이접어 숨겨놓는 ‘밀봉’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럼에도 앞서 말한 대로 2010년 1월 중순까지의 시네마테크 관객은 ‘과도한 자의식’에 사로잡힌 영화애호가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4. ‘시네마테크는 관객이 공모한다!’ 시네필의 행동의 성과와 의미

2010년 1월 말, 영화진흥위원회가 기어이 공모제를 강행하자 서울아트시네마에는 위기감이 고조되었다. 관객의 힘으로 시네마테크를 지켜내자는 움직임이 일었고, 1월 29일 밤 관객대표의 후원동참호소 발언을 시작으로, ‘시네마테크는 관객이 공모한다’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건, 후원금 모금 캠페인이 시작된다.

이러한 관객운동 혹은 시네필 행동이 갖는 의미는, 2009년 초 관객회원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던 서명운동보다 진일보 한 것일 뿐 아니라, 단순 관람객이라는 수동적 위치에서 벗어나 관객과 시네필이 시네마테크의 주인임을 천명하는 능동적이면서 적극적인 공세였다는 데 있다. 두 말 할 나위 없이 시네마테크는 ‘영화의 집’이다. 우리가 집에 들어가는 것은 단지 밥을 먹고 잠을 자기 위함이 아니듯이, 우리가 시네마테크를 찾는 것 또한 영화만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다. 이제껏 서울아트시네마의 관객이 단지, 고전영화를 스크린으로 보는 행위의 지속성에 의미를 두었다면, 2010년에 이르러는 ‘영화의 집, 공간으로써의 시네마테크’를 지키려는 노력이 병행된다. 너무나 당연했던 것들이 연기처럼 사라지는 시대임을 비로소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시네필의 움직임은 외부의 관심과 시각 변화를 불러오게 된다.

엄밀히 말해서 관객모금운동이 벌어지기 전까지 언론의 관심은 독립영화전용관과 영상미디어센터 사업자 선정과정에서의 의혹과 부당성에 집중되어 있었다.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 기간이었다고는 하나, 상영작과 감독과의 대화 등, 기획프로그램에 관한 호기심 곁들인 기사로 구색을 맞추는데 불과했다. 프레시안을 제외하고는 시네마테크 공모제의 부당성과 모순을 깊이 있게 지속적으로 다루는 매체가 드물었으니, 이 땅의 언론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물론 이슈가 되기 힘들었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소위 제목장사조차 하기 힘든 사안이라고 여겼을 터이다. 그런데, 관객모금 운동이 시작되면서 언론의 태도가 조금씩 변하고 있음이 감지되었다. 시네마테크협의회 측이 아니라 최종수혜자인 관객이 일어섰다는 건, 언론 입장에서 볼 때 기삿감이 되고도 남음이 있었을 테니까. 쉬운 예로, 분유회사와 산모 사이의 분쟁 혹은 여성단체 사이의 분쟁은 식상하게 받아들여질 테지만, 만약 영아들이 분유 거부 운동을 벌인다면 언론은 앞 다투어 기사를 써댈 게 분명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관객을 주축으로 한 모금운동이 벌어짐으로써, 즉 시네필이 능동적으로 움직임일 때 비로소 언론의 관심이 쏠리기 시작했다는 점은 시사적이라 하겠다. 이 점은 앞으로도 시네마테크에의 홍보와 이슈파이팅에 참고자료로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앞서 시네필은 영화로 소통하고 사회 문화적으로 다양한 담론을 생산하는 사람이면서, 그러한 운동을 통해 영화의 역사(혹은 거시적 의미로 국가의 역사)와 함께 하는 자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시네필이 움직이기 시작한 시점으로부터, 시네마테크 사태는 전환점을 맞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훗날 2010년의 시네마테크를 기억할 때, 그 겨울의 한국사회와 정치와 문화를 이야기할 때, 시네마테크의 친구들과 관객이 있었음을 회자하게 될 것인 즉, 시네필의 역할은 이처럼 중요하다.

맺는 말: 시네필의 역할과 기대

시네마테크 서울아트시네마는 53일 동안 공적지원을 받지 못했다. 두 달을 지원금 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버티는 중이다. 관객의 힘으로, 시네필의 운동으로, 시네마테크의 가치를 이해하고 인정하는 영화인과 시민사회의 도움으로 말이다. 영진위는 상시 상영공간에 대한 지원금을 두 달 동안이나 묶어둠으로써, 영진위 사업에 비판적인 세력에 대해 길들이기를 작정한 것으로 보인다. 이참에 본보기를 보여주겠다는 의도인지는 몰라도, 그렇다고 땅에 떨어진 자존심이 회복될 리 만무하다. 이에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버텨온 서울아트시네마가 대견하고 고맙다. 심지어 성서 속 예수도 공생애에 들어가기 전 40일을 금식했고, 노아 시대의 대홍수도 40일간 비가 내렸으며, 모세가 십계명을 받기 위해 금식한 기간도 40일이었다. 고난과 시련을 통해 새로운 세계로의 발돋움을 위한 성서의 상징적 시간이 40일인데 비해, 서울아트시네마는 무려 50여일을 더 버텨내고 있는 중이다. 농담으로 듣지 마시라. 얼마나 당당하고 믿음직한 일인가. 공모제 수용에 따른 안정된 지원금수입이라는 달콤한 유혹을 뿌리치고 힘든 길을 자처한 시네마테크에, 우리가 아니면 누가 힘을 보탠다는 말인가. 여전히 시네필로서 당신이 할 일은 많다.

2010년 2월, 시네마테크의 관객들은 힘든 시간을 보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모금운동에 앞장섰고 유독 극심했던 그 겨울의 추위와 세인의 무관심을 이겨내어, 시네마테크의 관객이 고전영화만 보는 ‘이상한 사람들’이 아님을 알렸다. 그로인해 방송매체와 세상은 이 문제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직은 갈 길이 멀다. 상대는 변할 마음이 없고 우리도 타협할 의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 아무리 영진위가 공권력을 내세워 예산과 행정을 빌미삼아 시네마테크를 좌지우지 하려 한들 겁낼 것이 없다. 우리는 시네필의 힘을 보여주었고 관객들 스스로 그 힘의 위력을 실감했기 때문이다. 모름지기 “나무들이 자루가 되어주지 않는 한 쇠는 결코 나무를 해칠 수 없는 법” 이다. 관객이 흔들리지 않고 서울아트시네마에 무한신뢰를 보내는 한, 영진위의 공모제는 언제나 공염불에 그치고 말 것이다. 영화를 산업과 첨단기술의 범주 안에서 교환가치로써의 효용성에 집착하는 집단이 영화정책을 좌지우지하는 한, 언제나 위태로운 ‘사냥꾼의 밤’을 맞이하겠지만, 그것들을 극복하는 매순간마다 더해지는 견고함과 무언의 신뢰를 바탕으로 이겨낼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일찍이 고대 아테네의 현명한 집정관 페리클레스는 “이처럼 세상의 모든 영광은 지나간다”고 말한 바 있다. 화무십일홍이요 권불십년이다. 정권도 영진위도 시대의 패러다임도 이데올로기도, 그 어떤 것도 역사의 도도한 흐름을 이길 수는 없는 법이다. 반면 우리들의 시네마테크는 세월을 벗 삼고 시간을 친구삼아 영화의 역사를 만들어 왔고, 그 기운을 간직한 공간이다. 시네마테크가 세상의 그 어떤 영광보다 오래갈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가 자루가 되어주지 않는다면, 시네필의 힘이 합쳐진다면 말이다. 지금이야말로 시네필의 적극적 참여와 역할이 요구되는 때이다. (백건영 영화평론가, 영화비평웹진 네오이마주 편집장)

* 이 글은 지난 4월 22일 저녁,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린 시네마테크 사태를 다시 생각해보자는 의미에서 연 포럼에서 시네필의 역할에 대해 영화비평웹진 네오이마주 백건영 편집장이 발제한 원고의 전문을 실은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