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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시네바캉스 서울/Review

로베르 브레송의 '돈'


브레송의 영화에서 주인공들은 모두 죄인이다. 그들은 자의건 타의건 간에 매우 운명적으로 혹은 우연적으로 죄인이 된다. 그러나 브레송의 마지막 작품인 <돈>에서 희생과 그에 따른 구원의 메타포는 더 이상 의미를 갖지 않는다. 브레송의 엄격한 얀세니즘은 신의 이름 아래 살아가는 인간의 자유의지와 예정된 운명이 일으키는 끊임없는 모순을 집요하게 추적하고 있다. 그러나 후기 영화로 갈수록 그는 촘촘한 사회의 계약 관계와 그 사이의 그물망으로 인해 물질화되어 버린 세계에서 인간과 신을 소통시키는 단 하나의 끈인 구원과 은총의 부재에 대해 침묵을 지키면서 다분히 묵시록적인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 인간을 구원하는 신은 망설이고 있으며 인간은 혼자의 힘으로 갖가지 종류의 물신에 도전하고 저항해야만 한다. 인간이 성취할 수 있는 것은 이제 금욕적인 정신 상태를 통해 신에게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모순들과 싸워가는 동안 신의 존재를 발견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금욕주의는 점점 확장되어 마침내 한 인간을 철저히 파괴하기에 이른다.

이 영화에서 무엇보다 끔찍한 것은 이본이 처음 감옥에 가기까지의 과정에서 그 자신의 의지나 욕망은 완전히 배제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철저하게 다른 사람의 욕망의 희생자이자 마치 그들의 죄를 대신 속죄하는 듯한 일종의 속죄양의 위치에 서게 된다. 실제로 그는 아무런 죄도 짓지 않은 채 죄인의 몸이 되어 감옥에 갇힌다. 아이는 죽고 아내는 떠나버린 채 감옥에서 출소한 그는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서 살인을 저지르고 진정한(?) 죄인이 된다. 이러한 모든 사건은 한 소년이 만든 위조지폐에서 비롯되지만 정작 그 소년들은 부모들이 소유한 돈의 힘 덕택에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는다. 결국 모든 상황을 좌우하는 것은 바로 돈의 힘이며 돈은 이 영화에서 마치 신과 같은 위치에 있는 듯 보인다.


브레송이 그려내는 얀세니즘적 세계에서 죄는 실제 죄를 짓는 행위보다는 거꾸로 결과적인 처벌에서부터 비롯된다. 늙은 여인은 운명적으로 이미 죄인이며 그녀 앞에 놓인 모든 고통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인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내와 아이를 잃어버린 후 완전히 변해버린 이본의 모습은 마치 사드(sade)적인 영웅과도 같다. 사드적인 의미에서 영웅은 이미 정해진 운명을 그대로 따르기보다는 신보다 앞질러 스스로 자신의 비극적인 운명을 앞당겨 실행한다. 이는 신에 대해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저항이자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주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이본은 부조리한 신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고, 그 신에 대항해 스스로 죄를 짓고 경찰에 자수함으로써 신의 뜻을 앞질러 이행한다. 이는 신의 부재를 믿는 것이 아니라 신에게 정면 도전하는 것이며, 그럼으로써 역설적이게도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다. 브레송은 이본의 선택에 어떤 가치 부여도 하지 않는다. 이본은 반드시 사형당할 것이지만 또한 브레송은 그의 죽음을 보여주지 않는다. <돈>에서 브레송은 더 이상 <잔다르크의 재판>(1962)과 <무셰트>(1967)에서와 같은 성스러운 죽음을 통한 구원의 문제를 다루지 않는다. <돈>에서 브레송은 진실로 인간 세계의 깊숙한 내면으로 침투하여, 가장 고통스러운 방식으로 신을 긍정한다. 이 영화에서 인간을 배반하는 물신의 이름, 그것은 바로 ‘돈’이다. 그것은 브레송의 가장 참혹한 결론이기도 하다.

글/최은영(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