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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전/프랑수아 트뤼포 전작 회고전

[리뷰] 프랑수아 트뤼포의 <야성의 아이>

 

 

숲 속에서 한 소년이 발견된다. 10세 전후로 보이는 이 소년은 인간 사회가 아닌 야생에서 살아온 ‘야생의 아이’였다. 후에 빅토르로 명명된 이 소년은 학자들의 연구대상이 되었고 대중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빅토르는 정신병원에서 농아학교로 그리고 이타르 박사의 개인 집으로 보내진다. 장 이타르 박사는 1798년, 소년의 지적장애가 선천적인 것이 아닌 인간사회와의 단절과 고립에 근거했다고 주장하며 빅토르의 교육을 전담하게 된다.

 

실화에 근거한 이 이야기는 트뤼포에 의해 영화화되었다. 주인공인 빅토르를 비롯한 배역들의 캐스팅이 마무리되었고 또 한명의 주인공인 이타르 박사의 역할이 남았는데, 이는 트뤼포가 직접 연기했다. 이 영화의 흑백 화면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소재의 구현에 성실성을 제공하고, 시퀀스를 아우르는 고전적인 기법인 아이리스의 열림과 닫힘은 주제에 대한 ‘특권적인 순간’에 집중력을 부여한다. 빅토르가 교육을 받을 때마다 배치된 화면 중앙의 숲을 향한 거대한 창은 심도를 깊게 만들어 인간과 자연의 경계에 위치한 빅토르를 효과적으로 제시한다. 이타르를 직접 연기한 트뤼포는 이 모두를 안정감 있게 아우르며 자신의 메시지를 차분하게 전달한다.

 

내용과 형식에서 한 편의 다큐를 보는 인상을 받지만 어느 극영화 못지않게 몰입이 가능하다. 그 이유는 비단 차분한 톤을 기반으로 잘 짜인 신속한 장면 구성 및 전환 때문만은 아닌 영화의 본질적 화두 때문이다. 야생과 문명, 자연과 인간에 대한 질문은 고루하며 답이 없을 수도 있다. 우리는 영화를 보며 빅토르가 어떤 이유로 야생에 버려졌는지에 대한 궁금증과 연민을 동시에 갖는다. 이는 야생의 소년을 당연히 구조되어야 할, 교육을 통해 교정되어야 할 존재로 당연시하기 때문이다. 전제는 인간은 동물과 다르며 인간은 인간다워야 한다는 것일 것이다. 그런데 이타르 박사의 집에 머물며 안전하고 안락한 삶을 누리게 된 빅토르는 늘 자신의 고향과도 같은 숲 속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점차 교육을 통해 인간다운 인간이 되어 가지만 자연의 유혹은 뿌리치기가 힘들며, 결국 집을 나와 자연으로 돌아간다.

 

인류는 지성이라 포장된 우월한 지능을 통해 자연에서 떨어져 나올 수 있었고, 문명을 발달시키고 자연을 대상화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육체가 편할수록 물질이 풍요로울수록 정신은 빈곤해지고 정서는 안정을 갈구한다. 다시 자연을 찾게 되지만 이미 자연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 것이 인간의 운명인 것인데, 결국 인간은 일종의 대안으로 자연의 흔적을 다른 인간을 통해서 찾으려고 한다. 즉, 인간은 타자와의 교감을 통해 자연에 대한 막연한 갈증을 조금이라도 해소하는 것이다. 빅토르에게 이타르 박사와 게렝부인은 타자였다. 이타르는 자연을 갈구하는 빅토르를 이해하면서도 자신의 지성을 통해 빅토르를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방향으로 고집스럽게 인도한다. 트뤼포 자신의 평생에 걸친 영화작업에 대한 신념을 이타르에 투사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김준완: 관객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