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남자의 장례식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그는 자전적 소설인 ‘여자들을 사랑한 남자’의 저자이자 유체역학 연구 기술자인 베르트랑 모랑(샤를 드네)이다. 모란의 장례식에는 그의 저작에 걸맞게 여자들의 행렬이 꼬리를 문다. 어떻게 보면 해괴하기까지 한 이 촌극의 본질은 그러나 모랑이라는 한 남자의 순수함 자체다. 모랑의 인생은 죽기 전부터 죽은 순간 그리고 죽음 이후의 순간까지 매순간 진지하고 철저하게 여자를 향한다.


세탁소에서 오로지 다리만 보고 반해버린 여자를 쫓으면서 모란의 여정은 시작된다. 그러나 영화의 서사는 무척 단조로운데 여자를 너무 좋아하던 남자가 많은 여자들을 만나다가 자신의 이야기를 책으로 쓰고 새로운 여자에게 한눈을 팔다가 사고를 당하고 병원에서 눈을 뜨자마자 본 간호사에게 다가가려다 침대에서 떨어져 죽는 것이 전부다. 여자를 바라보고 여자에게 접근하고 여자를 취하고 다시 새로운 여자를 찾는 과정이 끝까지 반복된다. 세탁소의 미지의 여성, 백화점에서 본 베이비시터, 렌터카 여직원, 끝까지 목소리만 등장하는 모닝콜 회사의 여직원, 웨이트리스, 영화관의 농아 안내원, 부티크의 중년여성, 유부녀에 자신의 책을 출간하는 출판사의 여성편집자까지 마치 숨을 쉬고 밥을 먹는 것처럼 그는 쉼 없이 여자를 관찰하고 만나고 취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랑의 모습은 오히려 전형적인 호색한의 모습에서 비껴나 있는데, 아마도 그의 모습이 시종 열정적이면서도 진지하고 불안하기까지 하기 때문일 것이다. 

 

모랑은 여자를 탐할 때 나름의 엄격한 규율이 있다. 백인백색이겠지만 특정한 순간 특정한 공간에서 자신의 주의를 끌어야함이 첫째다. 물론 모랑에게 특히 거부할 수 없게 다가오는 일종의 페티시는 나풀거리는 치마와 하이 힐 그리고 스타킹으로 휘감긴 여성의 발목 라인이다. 둘째는 동침 이후의 만남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지속하지 않는 것인데, 이는 계속 새로운 여자를 찾아야 하는 입장에서는 당연한 이유가 된다.

 

모랑은 왜 이렇게 지속적으로 끌리는 여자를 찾고 버리고 찾는 과정을 반복해야만 할까. 잘 알려진 트뤼포의 모성애에 대한 결핍은 극중 모랑이 자신의 어머니를 묘사하는 장면에서 잘 드러난다. 집에서는 상반신을 드러내고 다녔으며 거리에서 마주쳐도 모르는 척 하는 어머니의 모습은 트뤼포 그리고 모랑의 채울 수 없는 갈증의 근원이 된다. 즉 모랑은 성숙한 남자로서 이성을 찾는 것이 아니라 아직 미성숙한 아들로서 모성의 흔적을 쫓는 것이다. 결국 그는 결코 존재할 수 없는 대상을 쫓을 운명을 지녔고 그의 사명은 죽을 때까지 해결될 수 없는 것이 된다.

 

우리와 모랑은 다른 부류인가? 트뤼포의 대답은 단연 ‘아니다’이다. 안정되고 화목한 가정은 모든 결핍과 욕망을 아름답게 덮어주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 타협의 산물이다. 우리는 대부분 적당한 타협을 반복하며 평생을 보낸다. 적당한 선에서의 연애, 결혼 등등. 그러나 누구나 진정으로 바라는 이성에 대한 욕망이 있었고 그 대상은 자주 바뀔 수도 있었을 것이다. 다만 모랑처럼 행동으로 옮길 만큼 절박하지 못했을 뿐이다.(김준완| 관객에디터)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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