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회고전/프랑수아 트뤼포 전작 회고전

[리뷰] 프랑수아 트뤼포의 '아델 H 이야기'

미친 사랑 이야기

 

90년대 한국에서 가장 인기가 높았던 외국 여배우를 꼽을 때 이자벨 아자니를 빼놓을 수 없다. <카미유 클로델>에서 <중독된 사랑>, <여왕 마고>를 거쳐 <디아볼릭>까지 이자벨 아자니의 주연작은 대부분 국내에서 개봉했다. 샤론 스톤과 함께 당시 ‘불혹의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아름다움을 자랑했다는 점으로도 명망이 높았는데, 특히 이자벨 아자니는 지금의 유행어 중 하나인 ‘미친 미모’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유형의 여배우였다. 미치도록 예쁘지만 제 광기에 정신을 갉아 먹힌, 정말로 미쳐버린 캐릭터들을 스펙터클한 연기로 선보이는 게 이자벨 아자니의 장기였다. 그녀의 이러한 이력의 시작점으로 꼽을 수 있는 영화가 바로, 그녀가 스무 살적 주연을 맡았던 <아델 H 이야기>다. 그리하여 혹자는 <아델 H 이야기>의 감독 프랑수아 트뤼포를 두고 “이자벨 아자니의 예술적 아버지”라 평하기도 한다.

<아델 H 이야기>는 위대한 프랑스의 대문호이자 정치가였던 빅토르 위고의 실존했던 둘째 딸 아델의 이야기를 다룬다. 귀양살이 중이던 영국 건지 섬에서 영국장교 핀슨과 사랑에 빠진 아델은 핀슨의 부대가 캐나다의 할리팩스로 이동하자 그의 뒤를 좇아 캐니다로 넘어간다. 그곳에서 각종 소동과 스캔들을 일으켰던 그녀는 몇 년 뒤 바베이도스 섬에서 정신이 이상해진 걸인의 모습으로 구출돼 가족에게 돌아왔다. 이후 40년의 여생을 요양원에서 보냈는데, 할리팩스에서 지내는 동안 엄청난 양의 암호로 쓴 일기를 남겼다고 한다.

영화는 캐나다 땅에 내린 아델이 샌더슨 부부의 하숙집에 거처를 정하면서 시작한다. 위대한 문호의 딸이라는 신분을 숨긴 채 ‘아델 룰리’라는 가명을 썼던 그녀는 핀슨의 주변을 맴돌며 그에게 열렬한 구애를 펼친다. 그러나 이미 사랑이 식은 핀슨이 이에 응하지 않자 그녀의 구애는 곧 맹목적인 스토킹으로 변한다. “다른 여자가 있어도 괜찮으니 결혼만 해달라”고 매달리던 그녀는 변장을 한 채 핀슨의 뒤를 밟으며 그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고, 부모에게 “핀슨과 결혼했다”는 거짓말을 하여 건지 섬 지역신문에 자신과 핀슨의 결혼 기사를 싣게 하는가 하면, 심지어 핀슨의 새 약혼녀의 집을 찾아가 핀슨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거짓말을 하기에 이른다. 그런가 하면 “당신은 아름다우니 세상의 모든 여자를 소유할 자격이 있다”며 성노동 여성을 ‘선물’로 보내기까지 한다. 보답 받지 못한 사랑에 자신의 모든 걸 걸고 질주했던 아델의 광기는 곧 그녀의 눈과 정신을 차례로 파괴한다. 영화의 맨 마지막 그 유명한 장면, 즉 아델이 그토록 사랑하던 핀슨을 알아보지도 못한 채 지나치는 장면은 그녀의 맹목적 사랑이 대상과의 관계를 전제하기보다 ‘사랑’이라는 자신의 감정 그 자체에 매몰된 나르시즘적 광기임을 드러내는 순간이다.

아버지의 명성과 어릴 적 익사해 죽은 언니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던 아델은 캐나다로 넘어가기 직전 “구대륙에서 신대륙으로 넘어가 나의 사랑을 찾고야 말겠다”는 말을 일기에 썼다고 한다. 그러나 자유와 독립을 찾아 시작한 긴 여정은 자유와 독립은커녕 오히려 소유욕과 맹목 앞에서 빛을 잃고 추락했다. 파도치는 바닷가에서 이 구절을 읊는 아델-이자벨 아자니의 결연한 표정에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건 복잡미묘한 착잡함뿐이다.

 

(김숙현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코디네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