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 얼굴의 여배우는 아니다. 키는 멀대 같이 크고, 넓은 미간이 빚는 표정은 기이하며, 허스키한 목소리는 여성적인 것과 거리가 멀다. 그러나 그녀의 눈은 어떤 여배우의 그것보다 오묘하다. 그녀의 신비한 눈동자가 무얼 말하는지 알아차리기란 힘들기에, 소수의 감독만이 그녀로부터 진짜 이야기를 끌어낼 수 있었다. 그 리스트에는 자크 리베트, 라울 루이즈, 아르노 데스플레셍, 올리비에 아사야스 같은 작가들의 이름이 자리한다. 그런데 그녀를 익숙하게 대하는 시네필조차 모르는 게 하나 있으니, 그녀가 언젠가부터 밴드를 이끌고 노래를 부른다는 사실이다. <아무것도 바꾸지 마라>(2009)는 잔느 발리바르와 그녀의 밴드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다큐멘터리다. 뮤지션을 다룬 다큐멘터리가 흔하디흔하다고 생각한다면 연출을 맡은 사람이 페드로 코스타라는 데 주목할 일이다. 마틴 스콜세지에서 짐 자무시에 이르는 어지간한 현대 감독들은 음악 다큐멘터리 한 편쯤 연출한 바 있다. 거기에 또 한 편의 영화를 더하고 싶진 않았던 코스타는 장 뤽 고다르의 <원 플러스 원>(1968)으로부터 영감을 얻는다. 흔히 그룹 ‘롤링 스톤즈’에 관한 기록영화로 알려진 <원 플러스 원>은 평범한 음악 다큐멘터리와 궤를 달리하는 작품이다. 롤링 스톤즈가 스튜디오 안에서 ‘악마를 위한 동정’을 녹음하는 과정과 ‘68년 전후의 정치적 기운을 묘사한 장면이 <원 플러스 원>을 반씩 나눠 가진다. (화끈한 음악을 기대한 팬들이 롤링 스톤즈의 다큐멘터리 중에서 이 영화를 가장 지겨운 것으로 꼽는 건 당연하다) 코스타는 <원 플러스 원>의 찬란한 색감과 카메라의 좌우 트래킹을 버리는 대신 고다르의 ’변증법적‘ 태도를 취하기로 한다.



<아무것도 바꾸지 마라>에는 공연(처럼 보이는) 장면이 네 차례 나온다. 이 장면은 영화 가운데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며, 나머지 부분은 발리바르와 밴드(주로 보이는 사람은 밴드의 리더이자 기타리스트인 로돌프 뷔르제다)가 리허설에 힘을 쏟는 광경을 포착한다. 무대 위 공연이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면, 리허설은 대개 보여주지 않는 걸 전제로 하는 행동이다. 공연과 리허설 사이에서 후자에 무게를 더함으로써 코스타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충돌시키고, 음악에 있어 보는 것과 듣는 것의 의미를 묻는다. (무대 뒤에서 시시콜콜한 사생활을 드러내는 보통의 뮤지션과 반대로) 발리바르는 음악과 철두철미하게 대화하는데, 그녀의 자세 또한 변증법적이다. 그녀와 밴드의 리허설은 ‘파괴와 창조’의 과정을 거치면서 진행된다. 무대에서 그러하듯 단숨에 술술 노래를 뽑아내는 법이라곤 없다. 하나의 음을 무수히 반복하거나 짧은 소절에 집요하게 매달리는 그들은 음을 해체하는 과정에 지겹도록 도전한 후에야 하나의 음악이 창조될 것임을 암시한다. (<원 플러스 원>이 그러하듯 결코 완성된 형태의 노래를 부르진 않는다. 다만 미래의 완성을 예감할 뿐이다) 그리고 카메라는 그들의 맞은편에서 움직이지 않은 채 대결을 벌인다. 콘트라스트가 강조된 흑백영상과 몽롱한 분위기는 코스타의 데뷔작 <피>(1989)를 기억하게 하며, 발리바르의 모호한 눈빛은 <피>에서 꿈꾸는 듯 거닐던 아이들의 그것과 닮았다. 그래서일까, <아무것도 바꾸지 마라> 속에서 발리바르는 배우나 뮤지션이 아닌 하나의 인물로 화한다. 엄격하게 통제된 암부와 그 영역을 희미하게 침범한 빛이 조화를 이룬 세계에서, 노래하고 말하고 웃는 그녀는 때때로 흡혈귀나 괴물처럼, 혹은 비극의 여주인공처럼 보인다. 코스타는 다큐멘터리에 우아한 격정을 심어놓아 이제껏 보지 못한 영화를 만들었다. <아무것도 바꾸지 마라>는 한 편의 고딕 드라마다.

글/ 이용철(영화평론가)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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