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영작 리뷰

집시의 역사, 음악으로 듣다
- 토니 갓리프의 '라쵸 드롬'

 

길 위의 한 소년이 타악기 리듬에 멜로디를 붙여 노래를 부르고 있다. 소년의 가족은 가축들을 이끌고 사막과 다를 바 없는 황무지를 지나 어딘가에 도착한다. 그들은 그곳에서 밤을 보내는 동안, 주민들은 첫날밤을 맞게 될 신혼부부를 위해 노래로 밤을 지새운다. 날이 밝으면 한 무리의 사람들이 다시 이동을 시작하고, 몇몇 소년들이 길을 가다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노랫소리에 홀려 발걸음을 멈춘다. 그리고 노래가 멈추면 다시 이동, 노래가 들리면 다시 쉬어감, 다시 이동, 다시 쉬어감의 반복. 여정은 그렇게 계속된다.
‘라쵸 드롬’이란, ‘좋은 길’을 뜻하는 로마니어다. 현재는 그 모태가 거의 사라져 남아있지 않은 로마니어는, 우리가 흔히 집시라 부르는 로마니인들의 고유 언어다. 로마니인들은 천여 년 전 인도의 북서부 지방에서 출발해 전 세계로 흩어져 유목민처럼 살아가고 있으며, 유럽으로 가장 많이 흘러들어왔다. 토니 갓리프 감독의 몸속에도 그런 로마니인의 피가 흐르고 있다. 알제리인 아버지와 로마니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파리로 이주해 연극에 뛰어들었다가 만족하지 못하고 결국, 운명처럼 로마니인에 관한 3부작을 만들기에 이르렀다. <라쵸 드롬>은 그중 <레스 프린스>와 <가쵸 딜로> 사이에 놓인 2번째 작품이다. 언뜻 다큐멘터리로 오인하기 쉬우나 실은 섬세한 연출을 거친 이 영화는, 천 년에 걸쳐 로마니인들이 걸어온 길을 그들의 음악을 들으며 따라 걷는다. 각기 다른 시대와 지역에 도착하면 그들의 음악도 그에 맞춰 조금씩 다른 옷을 입는다. 인도 라자스탄-이집트-터키-루마니아-헝가리-슬로바키아-프랑스-스페인 안달루시아에 걸친 그 길은 실크로드 버금갈 만한 집시들의 노랫길이다.
집시에 관한 이 음악적 인류학의 신비로운 흥취는 천년의 세월과 수천 킬로미터에 달하는 거리를 음악으로 이어내는 방식에 있다. 거기에는 음악에 대한 매혹이 있다. 영화는 음악이 들려오는 곳을 향해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을 옮기는 소년들을 뒤따르고, 그 순간에 힘입어 이야기도 한 시대와 지역의 로마니인들로부터 다른 시대와 지역의 로마니인들에게로 넘어간다. 각기 다른 시간과 장소를 사는 로마니인들의 때로는 쾌활하고 때로는 구슬픈 멜로디와 춤사위는 어떤 시련에도 멈추지 않는다. 그렇게 그들은 아우슈비츠가 남긴 흉터와 프랑코 독재 정권의 어두웠던 시절까지 통과한다. 어쩌면 주소 없이 살아온 그들의 유일한 주소는 음악에 새겨져 있는 지도 모른다. 그 주소의 변경을 따라 흘러가는 영화는 플롯이 있어야 할 자리에 음악을 놓는다. 신과 신 사이, 시퀀스와 시퀀스 사이의 도약은 음악이 있기에 가능하다. 그러니 로마니인들로 하여금 오랜 세월 동안 떠돌이 삶을 버틸 수 있게 해준 힘도 음악에 있고, 이 영화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도 음악에 있는 셈이다. 시공을 뛰어넘는 음악의 힘은 그렇게 영화에까지 전염되어 있다. 그것이, 이 영화가 스토리텔링도 아니고, 비주얼텔링도 아니고, 사운드텔링으로 집시의 역사를 전하고 있는 것처럼 여겨지는 까닭이다.

 

이후경 / 씨네21 기자

Posted by seoul art cinema Hu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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